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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인생은 아름다워...
아침에 개와 함께 호숫가로 산책하는 것이 어제와는 또 다르게, 그러면서도 조금 자리가 잡혀가는 느낌이었다.
'격'도 이제는 조금은 익숙해진 듯 앞장도 서고, 이리저리 뛰돌다가 기로가 부르면 쏜살같이 뛰어와 기로의 다리 사이에 몸을 비벼대기도 했다.
기로가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게 개의 주인에 대한 확인 작업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 하루 이틀 사이에도 개는 그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직은 쌀쌀한 아침 기온이었지만, 산책하는 기분은 오늘도 마찬가지로 상쾌했다.
마을의 주민이라 봐야 두 손가락에 꼽을 정도지만, 그리고 시골사람들이라 이 시간엔 이미 일어나들 있겠지만, 기로가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걸 바라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각자 하루 일과를 준비하느라 나갈 준비를 하노라면, 이런 것까지 신경 쓸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런 생각으로 기로는 아침 산책을 호젓이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이!"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려 보니,
산장 집 언덕에서 박 만석이 손을 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허기야 저 부지런한 양반이, 모를 리가 없겠지......' 하는 생각으로 바뀌면서,
"예, 안녕하세요?" 기로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곧 산책에서 돌아왔다.
그런데 둘이서 그렇게 간단하게 인사만 한 것에도 이유는 있었다.
사실, 오늘 기로는 박 만석과 전주 법원에 가게 될지도 모를 일이 기다리고는 있었던 것이다.
그 집 아이의 이름을 지었으니, 호적에 올려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직은 전주에 나가는 시간 약속을 하지 않은 상태라 이번에는 기로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
"산장 아저씨, 어떻게 할 겁니까?" 하고 물으니,
"나, 시방 라면 먹고 있는디... 쪼까 있다가 우리 집 사람 들어오믄, 내가 연락 헐 팅게, 기둘려 봐." 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 아침부터 웬 라면을 드십니까?" 하고 물으니,
내용인 즉,
애들 교육문제로 김 순임이 격일로 전주와 여기를 오가는 바람에, 하루 걸러 하루는 그렇게, 산장 집에서 박 만석이 혼자 자고 또 아침에는 스스로 뭔가를 마련해서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대부분이 라면이라면서, 본인은 라면을 좋아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김 순임이 9시 반 차로 돌아오면, 그 뒤에나 나가자는 것이었다.
얼추 시간이 돼가는 듯해서 어찌 됐든 외출준비를 하고 나가려는데, 키큰 아저씨 집 쪽에서 반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기로는,
"어서 오세요. 근데.. 반장님, 내가 지금 전주에 나가 봐야 하는데... 개를 그냥 놓아둬도 괜찮을까요?" 하고 물어 보니,
"아무 이상 없을 걸요?" 했다.
"아니, 개가 이상이 있는 게 아니고... 누가 개를 데려가지나 않을까 해서 그러거든요?" 하자,
"주인 있는 개를 누가 쉽게 만지지 못하는 것이니, 괜찮을 걸요..." 하고, 별 일 아니라는 듯 대답을 했다.
"어쨌든 내가 지금 나가는 길이라서 그러니, 나중에 봅시다." 그렇게 간단하게 반장에게 인사를 하고, 산장 집으로 갔다.
그런데,
기로야 당연히 오늘 전주의 법원에 가는 걸로 알고 갔던 것인데,
"장씨! 근디 말여..." 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박 만석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이번이 박 만석이 '장 기로'를 '장씨'로 부르는 게 처음이었다.
'허긴, 친구 '유 범상'을 '유씨'로 부르니, 나를 '장씨'로 부르는 게 더 합당할지 모를 일이지...' 하고 있는데,
"우리 막둥이 이름 지은 거 말여..." 하기에,
뭔가 다소 심상찮음을 느꼈던 기로가,
"예..." 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그 이름이... 여자 이름 같다고, 본인도 그렇고 위로 줄줄이 있는 누이들이 싫다고 헌다는디... 어쩌믄 좋킀어?" 하는 것이었다.
물론 뜻밖이기는 했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빈’이란 이름은 여자 이름으로 들리는 게 맞을 테니까.
물론 기로는, 김 선생님이 좋은 이름이라고 했기 때문에 거기까지는 고려해 보지 않았지만, 처음 그 이름을 들으면서는 그 자신도 얼핏 그런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까 아침엔 산장 집엔 박 만석 혼자 있었기 때문에 인사로만 기로를 불렀던 것이고, 어젯밤 전주에 갔다 아침 차로 다시 들어왔던 김 순임이 그런 얘기를 했을 것이란 것도 머리에 다 그려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 얘기를 하면서도 박 만석은 기로에게 미안한 몸짓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박 만석의 입장에서는, 기로가(아니, 다른 사람에게 부탁까지 해서) 실컷 이름을 지어줬는데, 싫다고 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였다. 더구나 공짜로(?) 이름을 지어다 준 기로의 수고가 있음에도, 그걸 당사자인 아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한 아버지의 미안함이 온몸에서 젖어 나오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 역시 기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는데,
그렇게 말을 던져놓고 박 만석은 마치 죄를 지은 어린애 표정으로 기로의 눈치(처분)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다소 안쓰러 보이자, 기로는 스스로 얼른 결정을 지었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것, 그러면... 제가 그 분께, 다른 이름으로 하나 더 부탁을 해보지요. 기왕에 이름을 바꾸려고 했으니, 본인이나 가족이 좋아하는 제대로 된 이름을 호적에 올리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짐짓 박 만석을 안심시키며 제안까지를 했던 것이다.
기로의 빠른 대처에 금방 박 만석은 환한 얼굴로 변하더니,
"그렇게 혀 준당게, 너무 고맙고만..." 눈꼬리를 땅으로 돌리며 말하는 모습이, 아닌 게 아니라... 딴에는 꽤나 미안했고 또 고마운가 보았다.
그래서 결국 전주에 가는 걸로 알았던 외출은 없던 일로 되었다.
그런데 기로가 돌아오려고 하자, 아직은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부부가 점심을 먹고 가라고 기로를 꽉 잡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 일에 부부 둘 다 미안해했던 것일 텐데,
그래서 기로가,
"그럼, 나중에 이름을 다 진 다음... 호적에 신고까지 다 한 다음에 먹는 걸로 하겠습니다." 하자,
"아녀!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또 지금이지..." 하고 박 만석이 고개까지 흔들자,
그 옆의 김 순임도 오늘 따라 다소곳이,
"그려요... 화가 선생님! 우리 집이 식당인디, 언제라도 선생님이 오시믄 밥 한 사발 못 대접 허긌어요? 그렁게, 조금 기둘리셔요. 바로 점심 준비헐 팅게. 드시고 가셔야지, 그냥 가시믄... 우리가 섭섭혀서 안 돼요..." 하고, 부부는 그를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그래서 기로도 그러기로 했다.
그렇게 인도된 한 방으로 들어가니, 방 바닥이 따뜻했는데,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도 김 순임이 상을 차리는 사이, 기로는 생각지도 않았던 박 만석으로부터 자신이 살아온 얘기도 듣게 되었다.
바깥 날씨가 다소 을씨년스러워서 다소 느긋하게 점심상을 기다리면서 그런 얘기를 듣는 방의 분위기 역시 아늑하기만 했다.
산골의 없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주사가 심했다던(이 얘기는 본인이 하지 않았지만 친구 범상이 언젠가 해주었었다.) 아버지 밑에서 귀여움은커녕 의붓자식보다 못할 것 같은 온갖 천대와 설움을 받으면서(그래도 몇 해 전 부친이 사망할 때까지, 그 위 산장 할머니 집에 모셔놓고, 박 만석이 모신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도 친구 범상한테 들었었다.) 참으로 고생을 하면서 커나왔다면서,
그래서 흔히 남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문턱에도 밟아보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이 대목에서 기로는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는, 그를 '일자무식'이라고들 했어도, 적어도 국민학교 정도는 나온 줄 알고 있었는데), 밥도 아버지와는 제대로 겸상해서 먹지도 못하면서 자랐다는 것이었다.(그래서 버릇이 들어, 요즘에도 이 양반은 가끔은 서서 밥을 먹기도 한다. 언젠가 한 번 그 모습을 보면서, 기로도, '식당 사장님이 왜 서서 밥을 먹을까?' 하고 궁금해 했던 적이 있다.)
그럴만큼 자신의 아버지는 근동에서 유명한 난봉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주눅이 든 채로, 가진 것 없고 배움도 없어(정말 한글도 모른다는데, 그렇지만 기로는 이미 박 만석이 남들처럼 배움이 없다고는 해도 사람 자체가 우둔한 게 아니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아니, 어떤 면에선 배운 사람들보다도 더 경우가 밝고, 생각이 깊고 또 무슨 일을 하던지 배운 사람 뺨을 칠 정도로 머리도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누누이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죽으나 사나(박 만석의 표현이었다.) 일밖에 없었는데... 타고난 부지런함에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의지에, 죽도록 일을 해서 장가갈 나이가 되어, 누군가 소개시켜줘 활달하고 밝은 성격의 김 순임을 만나(나이 차가 8세라고 했다.), 연을 맺어 결혼 한 뒤, 부부가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것 역시 박 만석의 표현이었다.) 열심히 일을 해서 이 정도의 재산으로 일궈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복하게 사는 건 좋았는데, 내리 딸만 넷을 두어... 어떻게든 아들을 원하다가 결국 막둥이를 아들로 본 것인데, 귀한 아들이었기에... 이름은 천박하게(오래 살라고. 이것은 옛날부터 그런 것으로 전해 내려오는 거라.) 지으려고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은 게, 당시엔 물론 잘 모르기도 했지만... 애가 커가면서 영 싫어하기도 하는 데다 앞으로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삐뚤어나갈 것 같아, 얼른 이름을 바꿔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최근엔 이름이 이상하거나 안 좋을 경우엔 법적으로도 호적을 바꿔준다는 정부 시책이 있어서, 이 기회에 이름을 바꿔주려고 하던 참에... 기로가 마침 이 마을로 이사왔다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얘기를 듣고 보니, 기로는,
'시기적으로도... 이 양반하고는 어쩐지 묘한 인연인 것 같네......' 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얘기까지를 다 듣고 나니, 기로는, 마치 오랜 친구나 되는 것처럼 산장 아저씨 박 만석과 어떤 친근감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물론 그동안 몇 년을 두고 또 수 차례 만나면서 기로 나름대로는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상대방인 박 만석이 자꾸만 도망쳤기 때문에... 짜증스럽던 기로도 포기할 무렵(?), 박 만석 쪽에서 최근의 제스처를 취해 왔던 것이라, 그건 이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받아들여지기까지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이 친구 범상으로부터 전해 듣기로도, 이 '산장 아저씨' 박 만석은, 재주가 많으면서 가정적이고 자상한 가장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본인이 직접 한 말을 듣고 보니,
모든 게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기로는,
'우리(범상과 자신)보다 10년도 위인 분이, (자기 막둥이 동생 뻘인)나 같은 사람에게 마치 인생 고백이라도 하신 모양인데, 글쎄, 내가 뭐길래... 이 양반이 나에게 자신의 내세우기 싫었을 얘기까지를 다 고백해 오니... 아, 그만큼 이 양반이 나를 신뢰한다는 뜻이 분명한데... 내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그나저나, 이미 그런 내막까지를 다 알게 된 마당에, 내가 이 양반을 위해... 뭔가 해 드릴 게 있을까?' 하는 생각도 절로 들면서,
"아, 그렇게 살아오셨군요......" 하면서 기로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근디.. 배는 언제 탈 거여?" 하고, 갑자기 주제를 확 바꿔 묻는 박 만석이었다.
그러니, 기로는 한껏 산장 아저씨에 대한 어떤 연민의 정을 느껴가려던 참인데, 본인 스스로가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듯 주제를 확 바꾸는 것까지... 그건, 지난번 김 순임이 얘기했듯이,
"이 양반은, 뭔가 헐 게 있으믄... 다른 사람의 정신을 없게 하거든요?" 했던 말이 이해가 됐고,
'아닌 게 아니라, 종잡을 수가 없는 분이네, 그런데.. 어쨌거나 참 묘한 사람인 건 분명해......'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허기야 박 만석의 그런 얘기를 들으며 기로는 이따금 창밖의 호수를 바라보곤 했기 때문에(그 양반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도 미안해서), 어쩌면 박 만석의 입장에서는 기로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함께 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기로는,
"예, 이제... 제가 사는 집의 마당 고르는 일이 끝났으니, 조만간 타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저... 노 저을 줄도 모르는데......" 하자,
"그런 걱정을 왜 혀? 누구는 첨부터 알고 태어났디야?" 하고 가볍게 웃으면서 되묻는 박 만석이다 보니,
기로도 가벼운 마음이 되어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점심을 얻어먹었는데,
김 순임은 다른 손님들 상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주로 채소와 금방 무친 파와 시금치나물 등 기로의 식성을 고려해서 준비한 것 같은 큰상을 봐 와서,
기로는 배불리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고, 또,
''夢想?' 뒤에 있는 밭에 한 번 심어 보라'고 완두콩씨도 한 주먹 주기에, 그 씨앗까지 받아들고 ‘夢想?’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면서도 그는,
'그 양반이 비록 배움은 없지만, 나름대로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이 뚜렷하고 또 재주가 많아서... 뭐든 손이 가는 것은, 쓸만하게 변하고 또 효용가치까지 높아진다는 남들의 얘기 만으로도, 그 어떤 배운 사람들보다도, 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자신의 생활은 훌륭히 해낼 수 있을 사람 같다.'는 확신도 얻고 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어찌 보면... 한 인간으로서는, 충분히 '멋진 사람'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양반이, 도대체 왜 그리 냉랭하셨을까?' 하고 버릇처럼 또 한 번 푸념처럼 되씹기도 했는데,
'아, 어쨌거나 그 양반이 배를 언제 탈 거냐고 물었으니... 이제 내 결정만 남았나? 근데, 정말... 내가 배를 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
일이 있어서 산장 집에 갔다가 점심까지 얻어먹고 돌아왔다. 오전과는 달리 여전히 구름이 끼어 있었지만 기온은 다소 올라간 상태였다.
그런데 '夢想?'에 돌아오면서도 나는 은은한 매화 향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니 어찌 아니 기뻤겠는가.
내가 사는 집 주위에 이렇게 매화 향이 가득하다는 사실이, 어쩌면 꿈 같기도 했다.
그건, 산장 집에서 점심을 먹으며 두어 잔 했던 소주 덕분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 아까운 상황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아 뒷밭에 올라가 보니, 매화도 어제보다 조금 더 피어난 것 같았다.
지붕 위로 나온 매화 꽃송이들은 마치 여인의 잔잔한 꽃무늬 옷 같이 방울방울 크고 작게 변화가 느껴지면서 퍽 구성지게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일부러 한참을 그 향을 코로 들이마시며 서 있었겠는가.
아 정말, '고품격의 자연 향'이었다.
여태까지 그런 향도 모르고 살아왔던 내 자신이 우습기까지 할 정도로......
그런데,
그 기분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는데, 뒷집의 개들이 얼마나 요란하게 짖어대는지... 개 줄을 풀어 주며 날 따라 뒷밭에 오르기를 바랐던 격은, 뒷집 개들이 짖는 소리에 겁을 먹고 감히 올라올 생각조차 못하는 듯했다.
아직은 어린 티가 남은, 겁많은 개일 뿐이다.
그래도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었다.
나중에 매화가 더 피면 핀대로 사진을 찍을 것이지만, 지금도 한 두 컷 찍어두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얼른 방으로 들어가 카메라를 꺼내 들고 다시 올라가, 어제와는 다른 모습의 매화 사진 몇 컷 찍었다.
렌즈에 잡힌 한두 가지는 회화적이었다.
그저, 화면 전체적으로 보면 꽃 봉오리 사이에 겨우 몇 개의 꽃이 핀 것에 불과하지만, 그 가지 자체는 아름다웠다. 게다가 향기도 좋아... 뭔가 품격까지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것만으론 속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스케치북을 들고 올라가 직접 스케치를 하기까지 했다.
스케치를 하는 사이에도 향기는 은은하게 풍겨왔고, 때때로 벌들이 내 머리 주위를 맴돌기도 했다.
그런데 이 매화나무에 유난히 벌이 많은 이유는, 바로 뒷집에서 키우는 벌이 가까이로 날아와서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도 산장 아저씨를 통해서 들었던 것인데,
벌들의 잉잉대는 소리가 아우성처럼 들리기도 했다.
에이, 근데... 개 때문에 시꺼러워서 일기도 못 쓰겠네......
일기는 거기서 날짜 없이 중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다른 일기가 시작되었는데,
*
오후에도 산책을 나갔는데,
줄로 묶고 격을 데리고 갔다.
호수 순환도로에 나가 차들이 지나다니자, 녀석은 겁을 먹고... 몸을 움츠리거나 내 다리에 지 몸을 갖다 대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만약 개줄 없이 나왔었다면, 격이 차를 보고 겁을 먹고 도망간다며 도로 한 가운데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어서... 그 모습이 그려지자 끔찍하기까지 했고, 줄로 묶어서 데려간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처음 가는 아스팔트 도로라 잔뜩 겁을 먹고 걷다가, 반장 집 뒤 산길 소로를 타면서는 녀석의 줄을 풀어주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내 몸과 가까이 붙어, 내가 가는대로 잘 따라와 주었다.
그렇게 다시 호수가로 접어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 날은 날짜를 적지 않은 채였다.
그렇게 ‘夢想?’에 돌아왔던 모양인데,
그런데 기로가 집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좀 자유롭게 해주려고 격을 풀어 놓았던 게 발단이었다.
그런 뒤 기로는 다시 스케치북을 들고 뒷밭에 올랐는데, 개는 기로가 스케치하는 곳까지 와서는 경사진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기도 했는데, 그 때 그랬던가 보았다.
나중에 개의 털에 뭐가 잔뜩 묻어 있어서 보니,
잡초의 가시가 박힌 씨앗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기로가 서서 스케치를 하던 바로 아래쪽에 그런 해 묵은 잡풀이 있었는데,
개가 거기를 다니는 사이에 가시가 온 몸의 털에 달라붙어서 생긴 현상이었던 것이다.
그 가시가 얼마나 많은지, 마치 털에 또 다른 한 겹의 털을 덮어쓴 것으로 보일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기로는,
'여긴 시골이니까......' 하고, 처음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개가 온몸을 털고 몸부림을 치며 난리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심상찮아서 기로가, 개를 불러 몇 개의 가시를 뽑아주다 보니... 그 가시 달린 씨앗은 속살 있는 곳까지 박혀서 잘 빠지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 개가 얼마나 귀찮고 따가웠을까를 생각하니, 기로 자신의 몸까지 굼실대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는... 일이 또 하나 생겨버린 꼴이었다.
그 가시들을 일일이 뽑아내려다 보니, 기로는 화도 치밀고 또 그런 시간이 아깝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가시를 뽑아주다 보니,
개는 혀로 기로의 손을 핥던데
"격! 나는 핥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하면서, 개를 이따금 나무라기도 했지만,
그 게 개의 본능이라는 것도 알게 된지라, 그것 역시 참아야만 했다.
그런데 정말, 가시는 털 속에 깊숙이 많이도 박혀 있었다.
그렇지만 개의 입장에서는 시원하겠지만, 이따금 지 털도 뽑히니... 아프지 않을 수 없었겠는데,
그래서 자꾸 몸을 움직이는데,
"그니까, 그렇게 천방지축... 날뛰니까, 그런 거 아냐?" 하고 야단을 치면, 또 그대로 누워있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동안을 가시 뽑느라 씨름을 했는지 지치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기로는,
"야, 아무래도 여기는 시골이라... 그런 잡풀들이 많은데, 앞으로 어떻게 대처한다냐?" 하고, 혼잣말을 하는지 개에게 알아들으라고 하는지,
남들이 들으면 마치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거라고 믿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의 편지다.
# 배 타기(연습)
그 사이에도 기온은 올랐고 날도 좀 풀렸는지 여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날이 푸근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화 넘어 내가 살고 있는 '夢想?'의 지붕이 보였고, 그 너머로 호수가 보이면서... 순간, 나는 배를 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던 스케치를 얼른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는, 모자까지 쓰고, 목장갑도 끼고 산장으로 갔습니다.
"산장 아저씨, 저... 지금 배타도 됩니까?" 하고 물으니,
그 양반은 두 말 없이 나를 데리고 호수로 갔습니다.
'내가 노를 처음 잡아보는 것인가? 아닐 것이다...... 살아오면서 언젠가 두어 번 노를 저어 본 기억도 있다.' 하는 떨림으로 나는 기쁨보다는 오히려 바짝 긴장한 채 호수에 떠 있는 배 앞에 서있는데,
산장아저씨는 직접 배의 줄을 풀고 배를 물속으로 끌어가는 법과 배에 앉아 노를 젓는 방법 등을 자상하고 세심하게 시범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우선은 가운데로 가면 안 되고, 이렇게 물 가상으로... 그리고 멀리 가지 말고 손에 익을 때까지 팔 연습을 혀야 혀!" 하는 등의 '주의 사항'도 몇 가지 알려주더니,
"이자, 장씨가... 한 번 앉아 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조심스럽게 배에 올라 앉아, 노를 저어 보니... 생각보다는 힘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고, 아무튼 나는 노를 처음 잡아보는 사람처럼 서투르기만 한 자신을 느낄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러자,
"근디, 어쩠든... 본인 혼자서 손이 익어야 혀." 하더니, 산장 아저씨는 배를 나에게 맡기고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정말 미련 없이 산장으로 올라가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그 행동이 마치, 본인이 옆에 있으면... 내가 더 당황해서 못할 거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드라구요.
사실, 내 입장에서는... 그러기도 했거든요.
근데, 내가 당장 오늘 내일 노를 저어 큰 일을 할 것도 아니고, 앞으로... 천천히 익숙해지면서 배타기를 즐길 생각이었기 때문에, 바쁠 일은 없지 않았겠습니까?
흔히들 그러지 않던가요? 부부간에 운전하는 걸 가르쳐 주다 보면, 부부 사이라 할지라도 화가 나서 싸우기 일쑤라고......
그렇듯, 난생 처음 배를 타보는 내 몸짓이 산장아저씨에게는 어설퍼도 너무 어설플 것이 틀림없었을 텐데,
그러자면 내 입장에서는 잔뜩 주눅이 들 게 뻔하고, 그런 어색함을 피하려는 속셈일 수도 있는 행동일 거라는 느낌까지 들더라구요.
아무튼 그런 걸 감지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산장아저씨의 배려심과 그릇을(?) 느끼고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선, 내 맘에 들었고... 어쨌거나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는 사이가 분명하다는 느낌까지도 가졌구요.
그렇게 홀로 남은 나는,
배가 빙빙 돌기도 하고, 앞으로 가기도 하다가 뒤로 가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혼자서 노젓는 연습을 했답니다.
그런데 어쨌거나 물 위에 있으니, 기분이 새로워지드라구요. 게다가 오후엔 기온이 높아져서, 배를 타는 것이 싱그럽기까지 했구요.
'가능한 뭍(호숫가)과 가까이로 왔다갔다 하라'는 산장아저씨의 지침에 따라,
나는 호숫가를 걸치는 길 쪽으로 서서히 위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렇게 모퉁이를 도니 멀리 반장집이 보였구요. 그 순간,
'저기까지 가서 '정미(반장집 초등학교 3 학년 딸애)'를 불러 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쪽으로 갔는데,
배는 지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내가 애를 쓴 만큼의 효과도 있게... 어쨌든 반장 집에 도달하기는 했는데요,
나는 마치 큰일이나 해낸 사람처럼,
"정미야!" 하고 큰 소리로 몇 번을 부르니,
정미는 보이지 않고, 정미 엄마가 정미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아이가 방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곧 뛰어나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서,
"그래, 아저씨, 처음으로 노 젓기 연습을 하는 거야." 하고, 나는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얘기했는데,
어느새 정미는 바로 배 앞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데, 이상해요..."
"뭐가?"
"아저씨, 노를 저으면 뒤로 가야하는데, 아저씨는 앞으로 가요..."
"그래?"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근데... 응, 내가 노를 잘 못 저어서 그래, 그리고 지금은 땅에 가까워서 그렇게 해 본 거야." 하고 말하면서, "그리고, 지금은 너를 태워줄 수가 없구나......" 하고,
그애가 태워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는 또,
"내가 다음에 노를 잘 저을 때는, 태워줄 게." 하자,
"예." 하고, 아이는 이쁘게 대답을 하드라구요.
그러면서 나는 다시 산장쪽으로 노를 저어갔습니다.
그러면서,
''夢想?' 마당의 격이 보이나?" 하면서 보니,
축대와 지붕만 보일 뿐 그 사이에 있는 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언뜻, 지붕 뒤의 매화가 아른거리기도 했습니다.
'격, 나중엔... 너도 태우고 노를 저을 거란다......' 하면서,
나는 산장의 아래쪽으로도 저어갔습니다.
그렇게 반장 집을 갔다 온 것이 전부라지만, 그래도 어쩐지 조금씩 노 젓는 실력이 나아지는 것 같긴 했습니다. 그리고 재미도 있었구요.
그러다 보니, 지금 당장이라도 호수를 건널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산장 아저씨의 지침이 있었으니...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래, 아직은 성급하다. 서서히... 이렇게, 여기 생활을 즐기면서 살아보자......'
어느새 내 기분은 상당히 상승해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이 호숫가에 살게 되면서, 그 목표 중의 하나였던 '배 타기'를 실행에 옮긴 건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처음 산장아저씨가 끈을 풀었던 쇠꼬챙이에 배를 묶어 놓고는, 다시 산장에 올라갔습니다.
"저, 산장 아저씨!" 하고 내가 부르자 마침 식당 쪽에서 나오던 그 양반이,
"어뗘? 타봤어?" 하고 물었습니다.
"예, 저기... 반장 집까지 갔다 왔습니다. 재밌든데요?" 하자,
"앞으로 그렇게, 천천히 배워 봐..."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대신, 조심혀서 타야 혀!" 하고 당부를 잊지 않드라구요.
"예, 그러죠..." 하면서, "근데, 저 마당 옆에 있는 건물은 뭐죠?" 하고 물는데,
요 근래 몇 번을 그 집을 오가면서 봐도, 끝 쪽에 있는 그 가건물이 내내 궁금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러자,
"그려? 날 따라와 봐! 거기서 내가 버섯을 키우거든..."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버섯요?"
"따라와 봐."
그래서 가 보니,
거기는 참나무로 버섯을 재배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식당은 푸성귀를 비롯한 여러 가지를 자급자족하는데, 그 중의 하나인 '버섯'까지도 산장아저씨가 직접 키워서 식당 음식 재료로 사용한다는 것을 나에게 보여줬던 것입니다. 물론 이 집의 너른 산 언덕밭의 각종 푸성귀들이, 산장 아저씨의 솜씨였고 노력의 흔적이었던 것이지만요.
'그러고 보면, 참 대단한 분이다. 손길 닿는 것마다 뭐든 유용하고 가치 있게 만들어 놓으니... 돈을 못 벌겠어?' 그런 생각이 절로 들드라구요.
물론 내가 자청해서 관심을 가졌던 것이기는 하지만, 산장아저씨는 그런 걸 나에게 보여주면서는, 뭔가 우쭐하는 모습도 지어보였는데,
'아마, 이분도 인생을 즐기고 계심에 틀림없다. 남들은 '어떻게 하면 편하고 즐겁게 놀까?' 하며 빈둥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양반은 뭐든... 본인이 심사숙고해서 직접 편리하고 쓸모 있게 만들고 가꾸면서, 그걸 실생활에 유용하게 써 먹고 있으니... 이런 사람 역시 이 세상에서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는 결론까지를 나는 끄집어내고 있었답니다.
물론 친구 범상을 통해 웬만큼은 그런 내용을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나 스스로 직접 눈으로 보면서 산장 아저씨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던 거지요.
아무튼 배를 처음 탄 날, 나는, 이제 앞으로는 내가 원할 때, 굳이 산장 아저씨의 허락 받을 것 없이 얼마든지 배를 타도된다는 특명(?)까지를 받고는... 참으로 기분 좋게 '夢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매화 향이 그윽하게 나를 맞아주니, 나는 속으로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e bella!! 라 비따 에 벨- - -라)!!!'
스페인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배워왔던 '이태리'말입니다.
3 . 31
‘夢想?’에 돌아오자마자 기로는 바로 할머니댁으로 불을 때러 갔다.
그런데 방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마치 무슨 주문소리 같기도 해서 가만히 들어보니, 할머니 특유의 기도소리였다.
'그 긴긴밤에 저런 기도도 하며 지내셨겠구나......' 하면서,
살그머니 부엌에 들어가 기로는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늘은 불이 잘 붙어주지 않았다. 방에선 할머니의 기도소리가 계속되었지만, 불은 기로의 애를 먹이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붙어주어, 아궁이 깊숙히 나무를 밀어 넣고 있을 즈음에 기도소리는 멈췄다.
불을 웬만큼 땐 다음 기로가 부엌을 나와 방문을 두드리니, 아무 기척이 없었다. 몇 번을 불러도 감감무소식이어서 기로가 문을 여니, 할머니가 누워 있다가 일어나는 것이었다.
"할머니!"
"응, 불 때주러 왔어?"
"예. 근데 벌써 불은 다 땠어요."
"뭐?"
"불은 벌써 다 땠다구요."
"무신 소리여?"
"할머니 기도하실 때부터 불을 때고 있었어요."
"그려? 아이고, 고마워라."
"이제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녀, 잠깐만 기둘려 봐."
"왜요?"
"내가 뭐 줄 거 있어."
"아니, 저는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할머니."
"아녀, 기둘려 봐." 하면서, 할머니는 기로의 무릎을 손으로 때렸다. 말 안 듣고 어딜 가려고 하느냐는 몸짓이었다.
그렇게 윗방에 간 할머니는 아이스크림 하나와 무슨 쥬스 팩 하나를 들고 나왔다.
"이거, 먹어!"
"할머니 드세요."
"이거 먹어! 맨날 나만 얻어 먹응게, 미안혀서 안 돼."
"괜찮아요, 할머니."
"안 돼, 이 거 갖고 가."
그래서 기로는 아이스크림만 뜯었다.
"이것만 먹을 게요." 그러면서 마루에 앉았는데,
"내 아들이 왔다 갔나 벼?"
"예?"
"내 아들이, 이런 걸 사 놓고 갔나 벼..."
"그랬다고 그러드라구요."
"누가?"
"반장이요."
"언제?"
"어저께, 할머니 교회 가신 뒤 한 시 쯤요."
"나는, 오늘 왔다간 줄 알었는디..."
"어제 왔었어요. 오토바이타고..."
"오토바이 타고?"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가가 내가 교회 간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그 때 왔다가 간 거여..." 할머니 눈에는 서운함이 스쳤다. "내가 공일날마다 교회 가는 걸 다 알면서, 나 안 만날라고 살짝 왔다 간 거여..." 섭섭한 표정이 역력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래도, 얼굴이라도 보고 갔더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러실 거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마다하랴? 그렇지만, 난 그 아들이라는 사람이... 어머니 교회 가신 틈을 이용해 살짝 왔다 도망가듯 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걸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그래도 어머니께 아이스크림과 쥬스 등을 사다가 냉장고에 넣어 놓고 갔다는 게... 마음에 와 닿는다. 어쨌거나, 마음은 있는 거다. 어머니 홀로 계시는 게 마음에 걸리는 거다...... 그런 자식의 행동을 받아들이는 어머니 입장은, 또 어떠실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기로의 눈에 보이는 할머니의 눈가엔, 어쩐지 허망함과 서운함이 가득해 보였다.
그래서 기로가 슬그머니 일어나 나오려는데,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이렇게 죽어나가도 아무도 모르겠다고 생각허고 살았는디... 하늘에서 내려왔어, 땅에서 솟았어? 어디서 저런 사람이 나타나서, 이런 사람한테 이렇게 잘 혀? 아이고 고마워, 아이고, 하나님! 이렇게 나를 찾아준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할머니는 혼잣말처럼 아니면 기로에게 들으라는 듯 말을 했다.
"할머니, 너무 외로워 마세요. 앞으로 제가 여기 사는 동안은 저를 자주 볼 테니까요."
"근디, 1 년만 산다믄서..."
"예."
"그럼 섭섭혀서 어뜩혀... 그려, 그 때 까장이라도... 이렇게 살어..."
"예."
"고마워."
"아닙니다."
"참말로... 고마워..."
기로는 '夢想?' 돌아와 작업방에 군불을 지폈다.
그런데 이제 쏘시기로 땔 나무도 거의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기로는 아침에 산책을 하면서는, 언덕에 나뒹구는 나무토막 같은 걸 몇 개씩 주워오기도 했는데, 그것 역시... 자신이 움직이는 만큼 뭔가 그만큼은 생활에 쓸모가 있다는 것이 이 시골생활의 삶이라는 걸, 기로도 이미 터득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그 날의 일기를 끝내고 있었다.
많은 일이 벌어졌던,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아름다운 날이었던 것이다.
*
나에게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매화 얘기도 좋았고, 노젓는 연습도 좋았고, ‘산장 아저씨’ 이야기도 좋은 일이었고, 힘은 들었지만 옆집 할머니 구들장에 불을 때준 것도 좋은 일이었다.
이렇게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인생은 아름다움만 있을 것 같은' 날이다.
3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