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39편은 다윗의 시로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영장은
오케스트라는 말입니다. 만일 누군가 이 시편으로 작곡을 한다면 대단할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부터 우리의 육아일지 책을 쓰십니다(16절)
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하나님은 항상 나를 살피시고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신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설령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이 보신다는 생각을 해야죠. 그라나 빛 가운데 나오고 나면 죄가
재미없어지고 맙니다. 아담의 타락한 본성은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이 있습니다만
그건 빛의 부재로 인한 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서는 그게 싫어집니다.
2절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해 맑은 소녀와 같이 밝은 모습인데 우리 신앙생활의 고백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진리 안에 자유를 얻어 투명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이에 전혀 거리낌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시인합니다. 긴 시간 연단을 통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3절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나의 모든 방향성과 눕는 것도 탐색하고 계십니다. 조사하고 살피십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당신의 직관으로 꿰뚫어 보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이 부담스러우면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육신에 속한 어린 신앙입니다. 그러나 진리 안에 자유를 얻어
하나님께 거리낌이 없으면 하나님을 그대로 인정해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찬양입니다.
4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지금의 과학기술만 해도 우리가 말한 그 에너지를 추적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만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 만유 안으로 흩어지는 우리의 말을 놓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가 한 그 말로 의도, 정죄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마12:37)
5절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주께서 사로잡고 계십니다. 에워싸십니다. 안수는 손을 머리에 두신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꼼짝마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정수리를 장악하십니다.
인간들이 이와 같은 멍에를 벗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교육이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영으로 빈틈이 없이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가 이를 모르고 살 뿐
하나님은 철저하십니다. 대통령의 경호원들이 눈을 전후좌우를 두리번거림과 같습니다.
6절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너무 기이하니 하는 말은 놀랍다는 뜻입니다. 도무지 도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신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겠는데 더 이상은 너무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이 아니라 알아 가면 갈수록
도저히 다 알 수 없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부가지론(否可知論)이 됩니다.
7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는 노래입니다. 우리는 그의
영 안에 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아비가엘이 다윗을 보고 생명싸개에 싸여 있다고
말합니다(삼상25:29) 우리는 성령 하나님을 알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때부터 깨달음이 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눅10:25) 하는 율법선생과 같이 행위로 애를 쓰게 됩니다.
8절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늘은 하늘들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대한민국은 대한사람들의
나라이듯이 천국은 하늘들의 나라입니다. 시편은 그 하늘들이 된 자들의 노래입니다.
그 하늘의 반대는 음부(스올)입니다. 음부는 죽은 자들의 감옥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망과 음부가 늘 함께 나오는데 음부는 바로 사망에 의해 죽은 자들의 주머니입니다.
음부에 갇히는 건 사망에 의해서이고 사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부재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기독교는 사람의 행위를 보느라 그만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스올이라는 걸 잘 모릅니다. 이를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9절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새벽날개는 도망간다는 뜻입니다. 야반도주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다 끝
곧 남극이나 북극으로 몰래 빠져 나간다 할리라도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10절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거기에 도망을 가 있어도 너 왜 여기 있어 날 따라오라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오른 손은 의와 강하심입니다. 이 오른 손이 우리를 붙드십니다. 가출한 자식을
붙잡아 오는 부모와 같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을 갔습니다. 바로 야반도주입니다.
그 당시는 지방 신의 개념이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의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이 여기도 계시는구나
하는 걸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속의 하나님이십니다. 무한대의 우주 가운데서
그 말씀대로 소리 없이 우주를 채우시고 다스리시는 만유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솔직 담백하게 믿음의 시인과 긍정으로 담대하고 명랑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