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로비츠를 위하여>엄정화-엄정화 |
배우이면서 뮤지션인 엄정화가 말했다. “타고난 천재적인 끼는 없었으나 노력하고 즐기면서 지금 이 자리에까지 왔다”고 말이다. 이 시대를 대변하는 가장 화려하고도 세련된, 그리고 아주 모순적이게도 순박한(?) 엔터테이너 엄정화를 신작 <호로비츠를 위하여>로 만났다. |
눈동자 |
개봉을 앞둔 <호로비츠를 위하여>의 홍보 타이밍에 맞추어서 모 방송국에서 배우로서 그녀의 매력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방송이 TV에서 방영되고 있었다. 무언가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방송에 완벽하게 집중하지는 못했으나, 엄정화 사단의 멤버라고 할 수 있는 ‘절친한 언니’ 최화정이 나와서 “엄정화는 늘 배고픈 사람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한 귀로 스쳐가듯 그 말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TV 화면을 응시하며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그런 배고픈, 무언가를 갈망하는 눈동자를 엄정화의 눈동자를 통해 끊임없이 읽어왔던 까닭이다. 삶과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일에 관해 이야기할 때, 엄정화는 유독 눈을 반짝이며 사람을 응시한다.
“나는 항상 스스로에게 부족함을 느껴요. 내가 계획한 목표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느낌 때문에 때론 힘들어 하고, 도대체 그 목표가 무엇인가에 관해서 자문해 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 목표라는 것을, 이렇게나 오래 활동해왔는데도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보면, 제가 스스로에게 만족했으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혹독하게 달리지는 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그건 허전함, 내 속의 갈망 때문에 음악과 연기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끊임없이 무언가의 해답을 얻기 위해 매달리고 꿈꾸고 있는 것?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
위험한 변신(?) |
그런 갈망과 허전함이 엄정화를 자극해 끊임없는 변신을 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가요계를 호령했던 ‘디바 엄정화’가 새로운 앨범을 들고 나오면, ‘대체 이번엔 어떤 변신을 할까?’하는 호기심 한 번 정도는 누구나 품어봤을 테니 말이다. 그런 그녀의 변신에 대한 열정은 음악뿐만 아니라 연기에도 작용돼왔다.
“뭔가 항상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앨범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머리 스타일이나 의상 스타일에 많이 고심했던 것 같아요. 매번 비슷하게 똑같이 가는 건 너무 재미없잖아요. 그런 변화에 대한 고민은 연기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영화도 그간 출연했던 비슷한 역할에는 그다지 큰 흥미가 생기지 않는 편이에요.” 섹스어필하고 화려한 이미지로 점철되어 왔던 가수의 이미지에서 엄정화는 조금씩 자신의 또 다른 이미지를 엄정화식으로 변주해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연기에 세간이 처음 관심을 두기 시작한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필두로 그녀는 조금씩 변화하고 변천하는 캐릭터들로 연기의 자장을 넓혀갔다. 그 중 그러한 변화의 자장을 가장 많이 감지할 수 있었던 작품은 드라마 <아내>와 영화 <오로라 공주>였다. 기억을 잃었다가 되찾은 남편을 본부인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던 지고지순한 아내 연기를 그녀는 시치미 뚝 떼고 체화해 냈고, 잃어버린 아이 때문에 연쇄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이혼녀의 역할은 소름 끼칠 만큼 처연하게 연기해냈다. “오히려 지금껏 연기한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잔잔한 드라마여서 되레 어려웠어요. 그리고 연기의 호흡을 아역 배우와 함께 맞춰가야 한다는 부분도 어느 정도는 부담으로 자리하기도 했고요. 솔직히 처음 시나리오를 보면서 지수는 내가 아니어도 되는 캐릭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촬영을 하면서는 너무나 정이 많이 들어버렸어요. 그리고 가장 기분 좋았던 건, 제가 봤던 이 시나리오의 따뜻한 첫 느낌이 완성된 영화에도 제대로 살아났다는 점이에요.” |
항상 그랬듯 |
<호로비츠를 위하여>를 보면서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스크린 속 독특한 아우라의 엄정화는 간데없고, 일상의 어느 누군가로 치환이 가능한 평범한 지수만이 보인다는 점이다. 그간 그녀가 연기했던 대부분의 다양한 캐릭터들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늘 지울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개성을 내뿜는 엄정화가 있었는데 말이다. 엄정화는 이 작품을 통해서 캐릭터 안에 자신을 지우고 새롭게 담는 내공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그녀는 배우의 변신을 넘어 이제 연기자로서 자신을 비우는 데에도 여유를 갖게 된 듯하다. 그래서 물어봤다. 그런 당신의 자연스러운 연기적 변환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것이 있다면, 그게 뭐냐고 말이다.
“살아오면서 친구들의 영향을 참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만약에 내게 그런 발전이 있다면, 그건, 항상 그랬듯, 주위에 있는 친구들의 좋은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정재형, 정원영, 김형석 오빠, 김동률, 김조한, 김현정 등, 음악 쪽 친구들은 나를 항상 음악으로 일깨워 줘요. 그들과 즐겁게 떠들고 웃고 즐기다가도 그 친구들이 무대에 올라 음악을 하는 걸 보면, ‘저게 바로 뮤지션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삶의 또 다른 차원이 내 안에 구축되는 걸 느껴요. 또, 방송 쪽 친구들이라고 할 수 있는 최화정 언니, 이소라, 정선희, 이혜영과 같은 친구들을 만나면 각자 살아온 아픈 이야기, 미래의 이야기들을 소중하게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데에 든든한 힘과 의지를 얻어가고요. 정말 따뜻하고 존경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난, 참 행복한 사람이지요.” |
슬픈 비밀 |
“누나가 없었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배우가 되겠다고 버틸 수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제가 연기하는 것을 직업으로 가질 수도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평생 그 부분을 누나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영화 <가족>과 드라마 <구미호 외전>으로 2004년 당시 막 세간에 얼굴을 알리게 된 그녀의 친동생 엄태웅이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태웅이가 처음 연기를 한다고 했을 때, 저희 엄마가 제가 연예계 활동하는 것을 우려했던 것처럼 저도 걱정이 많았어요. 그때서야 엄마가 저 때문에 어떤 걱정을 했는지가 감지되더라고요. 그래요. 가끔 제가 태웅이를 보면서 항상 안타깝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는 정말 내가 살면서 잘한 일 중의 하나는 태웅이가 연기자가 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왔다는 사실이 아닌가 싶어요. 그때 내가 그런 지원조차 하지 않고 동생을 생활 전선으로 내보냈으면, 나는 너무나 좋은 배우로서 활약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지 못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가족에 대한 책임과 사랑 때문에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냐구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고, 제가 마음이 약한 부분도 있었지요. 내가 여기서 그만두면 안 되니까. 모든 게 그냥 그렇게 가야만 했던 적이 있었어요. 저도 사람이니까 때로는 다른 활동하는 친구들처럼 몇 달 쉬고도 싶은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내가 애들처럼 놀고 쉬면, 당장 생활비가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쉰 적도 없었고, 쉬면서도 ‘뭐 할까?’ 하고 계속 불안해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서른을 넘기면서 그런 불안이 조금씩 사라지고 여유로움이 내 안에서 조금 생기더라고요. 이제는 달려도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아니라, 옆의 경치도 여유롭게 살필 줄 알면서 달리는 법을 배웠어요.” |
Self Control |
작년에서 올해로 이어지는 긴 겨울 동안 엄정화는 많이 힘들고 외로웠다. 남에게 자신의 생활을 침범받길 싫어하는 도도한 ‘고양이과 여자’이기보다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베풀어야지 힘이 솟는 ‘강아지과 여자’라고 말할 정도로 사람을 좋아하고 늘 함께하는 걸 좋아하는 그녀. 그런 엄정화가 친구들과 늘 붙어서 지내는데도 불구하고 외롭고 또 외로웠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계기 덕분일까. 요즘의 그녀 안에는 기분 좋은 설렘의 에너지가 꿈틀거린다고 한다.
“요새 갑자기 따뜻해지면서, 그러니까 일조량이 많아지면서 제가 봄을 타서 그런 걸까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기운이 나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 같아서 그냥 기분이 좋아요. 불과 얼마 전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왜 그렇게 힘들어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요. 지금 이렇게 충만하고 행복한 감정이 끝은 아니겠지만, 여기까지 내가 오려고 그렇게 그간 힘들었던 거였을까요? 글쎄요. 요새의 심정은 뭔가 항상 인생을 즐기면서, 삶 자체를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리고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 좀 더 넓고 크게 생각해 볼래요. 파올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를 읽으면서 그런 순간적인 깨달음을 느꼈어요. ‘간절히 원하면 모든 우주 모든 만물은 그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바로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삶의 긍정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항상 좋은 것만 생각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모든 것을 하면서 살아볼래요.” |
너의 마음속에 내가 있다면 |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추억 속에 기분 좋게 각인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정말이지 행복하고도 흐뭇한 일이 아닐까. 뮤지션이자 배우인 엄정화 역시 그런 욕심을 꿈꿔 본다고 했다. 후배들에게는 롤 모델이 되는 선배가 되고 싶고, 대중들에게는 그 사람의 인생에서 자연스럽게 묻혀서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간절하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어요. 업계의 후배들에게 내가 활동하지 못하는 한참 뒤에라도 기억될 수 있을까? 나는 천재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후배들에게 ‘엄정화처럼 되고 싶다’라고 평가받으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그리고 대중들에게는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왜 사람들이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에요.” |
NETIZEN Q&A |
>> 시나리오를 선택하는데 특별한 기준이 있는가? 무조건 재미있을 것. 내가 맡아야 할 캐릭터에 내가 막 동화되어서 이야기가 술술 넘어가는 시나리오를 선호한다. >> 동생 엄태웅과 한 영화에 출연할 생각은 있는가? 시나리오만 좋다면, 한 영화에 출연할 계획은 언제든지 있다. >> 차기작인 <키에누 리브스 꼬시기>(가제)에서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는가? 내가 맡은 역할은 외국계 회사의 말단 여직원으로 키아누 리브스를 닮은 회사 고위 간부(다니엘 헤니)와 알콩달콩 사랑을 엮어가는 캐릭터다. >> 자기 관리가 철저한 엔터테이너로 유명하다. 탁월한 몸매 관리법은? 운동하는 걸 워낙에 좋아한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기본으로 해서 유산소 운동, 가끔 요가도 한다. 개인적으로 여자 분들에게는 요가와 필라테스를 권한다. 시간을 가지고 여유롭게 하면, 건강도 좋아지고 몸매 라인도 아주 예뻐진다. |
글 김수연 기자 | 사진 홍장현 2006.05.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