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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고향 안동 원문보기 글쓴이: 봉화연화
풍류와 손맛을 아십니껴? 봉화 문수산 닭실 마을
닭실마을은 경상북도 봉화읍 유곡1리를 말하며 이‘닭실마을’은 안동권씨의 집성촌이다.
충재 종가 며느리가 한과 세트를 정성스럽게 포장하고 있다. 대부분 주문식으로 한정 생산·판매한다. <봉화군 제공>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 이 마을은 안동권씨 집성촌으로 조선 중종 때 명재상이던 충재 권벌(1478~1548)의 종가가 있는 곳이다. 특히 종갓집 며느리들이 맥을 이어오고 있는 한과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한과의 시작은 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재 선생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당하고 유배길에 오르지만 끝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하지만 충재 선생이 돌아가신 후 복권되고 불천지위(不遷之位)에 오르게 된다. 그후 선생의 제사를 모시면서 갖은 정성을 들여 만든 제수용품 중의 대표적인 것이 닭실 종갓집 한과다. 500년 전통의 명맥을 이어오던 한과는 1990년대 초 명문가 며느리들의 한과솜씨를 썩히기 아깝다고 생각한 주위의 권유에 시중에 판매되기 시작했다. 특히 옛날 전통제조방식 그대로를 고집하기 때문에 부드럽고 달지 않아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옛 일왕도 그 맛에 감탄했다고 한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20편은 봉화 닭실한과에 대한 이야기이다.
앞에는 문수산에서 발원한 창평천이 동에서 서로, 다른 한 줄기는 서에서 동으로 흘러 합강(合江)하면 내성천. 이 포근한 길지를 마을 서편 깎아지른 산상에서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닭이 알을 품었다는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상이 또렷하다. 봉화군 유곡리 마을이름이 ‘닭실’로 불리는 까닭이다. 고개를 들었다.
대체 제 정신인지, 쯧쯧.” 그라고 요즘 세상에 밤마실이 무신 대수니껴? 멀리 대처는 말할 것도 없이, 봉화면에만 나가도 아낙들 밤길 돌아다니는 거야 이제 예사씨더.” 가풍이었지만 막내에게만은 유독 너그러운 덕분이었다. 금방 익힐 께시더.”
적극적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집성촌의 종부라면 촌수로는 제일 아랫사람으로 마주치는 모두가 나이와 상관없이 손위가 되는 셈이니 마음고생이 만만찮을 것이라는 게 시아버지 되는 종손의 걱정이었다. 역시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인 모양이었다. 대여섯 살 많아 보이는 이들인데도 모두가 아주머니이거나 고모, 심지어는 할머니, 증조할머니도 계시니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손위 어른인 셈이었다. 돌아간다. 아무래도 촌수가 제일 위인 모양이다. 그 아주머니가 종부를 손짓으로 부르더니 제각각 일하는 곳으로 데려가며 설명해준다.
저쪽 뜨거운 방에 펼쳐서 말리고. 저기 크기가 넓은 건 입과, 손가락만한 것은 잔과라고 하는데 그게 꾸덕꾸덕해지면 뜨거운 기름에 튀기거나 지져내지. 그런 다음에는 일단 기름기가 빠지도록 한 뒤, 조청을 묻히고 고물을 고슬고슬하게 묻혀 만드는데, 치자·자하초·검은깨·껍질 벗긴 깨 같은 걸로 전래의 검정과 흰색·분홍·황색·빨강색 등을 내네. 저쪽 찌짐방에서는 보통 70대 할매들이 튀기고 지지는데, 암만캐도 그게 제일 중요하이 경험 많은 이들이 맡아하제. 불천위제사는 물론이고 명절이나 시제, 각 기제사 때마다 제물로 필요하니 새 종부도 눈여겨보고 손에 익혀야 할기다. 결혼식 같은 큰 경사 때도 꼭 사용되고.” 되도록 그리 해왔다.”
자리를 지내셨는데, 을사사화 때 감히 바른 말씀을 하시다가 파직되어가 평안도 삭주로 유배를 가셔서 거서 돌아가셨다. 그렇지만 명종 임금님 때 신원되셨고, 선조 임금님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고 불천지위(不遷之位)에 올랐지. 그카이 보통 사람들 맹쿠로 고조부모까지 4대 봉사(封祀)로 끝나는 게 아이라 영구히 봉사하라꼬 나라에서 명하신 분이시다. 그게 을매나 영광된 일인가 카믄…….” 일가를 이뤄 영원히 귀감이 될 분들에게만 불천위의 영예가 내려진다는 것을. 또한 충재 선생 이후 이곳 닭실 후손 중에서는 수많은 충신, 효자, 문장가, 서화가가 나왔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왜적에 맞선 의병과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가도 적지 않아 찾아보기 드문 영예로운 가문이었다.
종부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새 종부로 들어온 이는 어쩐지 어렵고 고단한 그 길에 큰 자긍심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만으로 기꺼이 그 길을 걸으리라 결심했다. 물론 그러기에는 무엇보다 평생토록 자신을 지켜주고 보듬어줄 이에 대한 믿음이 가장 큰 힘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막상 집안에 들어와서 보니 자신만이 아니라 마을 대부분 여인이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고, 소박한 듯 보이나 깊은 평온과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더구나 시어머니와 아직 크게 건강을 잃지 않은 시할머니에게서 느껴지는 기품과 자긍심은 자신의 선택이 결코 그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고아 당을 만들고, 조청을 만들면서부터 여러 음식을 생각 안했겄나. 글치만 암만 그런 기 있다 캐도 단 거는 역시 귀한 음식이라서 주로 손님을 맞거나 제사를 모실 때 썼재.”
방법에 따라 만드는 거니 손님과 조상을 모시는 그 집안의 정성과 기품이 담겨있는 예물(禮物)인기라. 또 맛도 그저 달기만 한 시중 과자와는 비교할 바가 아닌 은근하고 깊은 맛이지. 건강에도 나쁘지 않고.” 생물이나 마찬가지다. 그저 한 보름 사이에 먹어야 하는 긴데 우에 내다 판단 말이고?” 주문받는 건 문제 없을 것 같은데요.”
사람이 적은데, 새종부 말 맹쿠로 유과가 널리 알려질 수 있다면 우리 문중이 지켜온 정신도 같이 알게 될 거 아이껴. 요즘같이 난잡한 세상에 일 년에 몇 사람이라도 정성 담긴 우리 닭실 유과로 맑은 정신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것도 의미가 있지 않겠니껴.” 중년의 아주머니도 새삼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에게, 집안의 손님 접대와 선물용으로 애용되고 있다. | |||
옛 마을의 현주소는 시대의 그릇 속에서 살펴지는 풍경이다. 역사가 깊을수록, 선대(先代)의 삶이 무거울수록 명분에 따른 후손의 책무가 정비례한다. 그 빛 속에서 배우고 익히면서도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픈 삶이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역사를 의지한다면,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여는 일(溫故而知新)이 되어야 하리. 그래서일까. 봉화 땅의 상징적인 마을이자 주요 문화유산을 간직한 문수산 자락 닭실 마을을 다시 찾아 살펴보는 감회는 각별하다. 닭실 마을 있게 한 주인공 충재 선생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 속에서도 오늘의 닭실 마을을 있게 한 주인공 충재 선생. 일찍이 충재의 5대조가 안동에서 옮겨와 자리 잡았지만 충재로부터 발아, 번창했기에 그가 입향조 반열에 든다. 석천지를 저술한 권응도(權應度?6대손)의 석천지서에서 마을과 충재의 인연이 살펴진다.
닭실 마을 있게 한 주인공 충재 선생
수많은 집안 유물들 보물로 지정돼
사람이 살아야 건물도 사는 법. 누대로 가꾸어 오고 선대의 학문과 풍류를 자랑하는 청암정은 나그네의 휴식을 유혹한다. 아니 정자 마루에 드러누워 한 동안 세상을 잊고 싶어진다. 척촉천(擲?泉)으로 부르는 연못에 떠있는 거북바위 등에서 바라보자 소나무,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가 허공에 떠있다. 몸을 일으켜 난간에 기대니 충재의 소담한 건물과 뜰 앞의 눈부신 주황빛 원추리들. 그리고 연못으로 이어지는 돌다리가 피안의 세계로 느껴진다. 퇴계의 문인인 김극일(金克一)이 후일 이곳에 와서 읊조린 시가 새삼스럽다. 길손이 화첩을 펴는 동안 종손은 그새 청암정 마루에서 잠이 들었다. 저 먼 조상의 음덕이 다 은혜롭지만은 않았을 현실 속에서 고단한 주인의 얼굴을 읽는다. 종손을 깨우자 그는 바로 이곳의 보물인 박물관으로 가 자물쇠를 풀었다. 한 집안의 유물이 국가의 보물로 이처럼 많이 지정된 곳이 또 있으랴.
한 해 마흔아홉 번 제사 모시는 유한규 여사
이어 종목씨의 어머니 대종부(大宗婦) 유한규(柳漢奎) 여사(85)를 안채에서 뵈오니 그 모습이 고요한 달빛 같다. 하회 마을 풍산유씨로 시집온 후 겪어냈을 사연이 어디 상상이나 될 법한가. 서른다섯 분의 조상 제사와 불천위(不遷位), 설, 한식, 추석을 포함 마흔아홉 번의 제사로 한 해를 보낸다는 사실 앞에 나그네의 붓끝이 자꾸 떨려만 온다. 모시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입으신 단아한 맵시에 몹시 부끄러움을 타시는 모습 또한 평생의 몸가짐이 배인 탓이려니. 그런데 두 손을 치마 속에 꼭 파묻고 계셔서 물으니 험악한 손을 보여주기 민망하다고 하신다.
선비정신으로 되살아나야 할 닭실 마을
길손을 위해 어느새 고운 모시 한복으로 갈아입은 아낙들. 그 중 안동 법흥댁 이임형(李姙衡?74) 부녀회장, 원천 외내댁 이영자(李英子?67), 풍기댁 김성완(金成완?65)씨를 그렸다. 모두들 주변에서 깔깔거리며 닮은 모습을 주문하니 나는 구슬땀이 절로 흐른다. |
봉화 문수산 닭실 마을
옛 마을의 현주소는 시대의 그릇 속에서 살펴지는 풍경이다. 역사가 깊을수록, 선대(先代)의 삶이 무거울수록 명분에 따른 후손의 책무가 정비례한다. 그 빛 속에서 배우고 익히면서도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픈 삶이 또한 현실이다. 그러나 역사를 의지한다면,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여는 일(溫故而知新)이 되어야 하리. 그래서일까. 봉화 땅의 상징적인 마을이자 주요 문화유산을 간직한 문수산 자락 닭실 마을을 다시 찾아 살펴보는 감회는 각별하다.익히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경주의 양동, 안동의 내앞, 풍산의 하회와 함께 삼남의 4대 길지로 꼽은 닭실 마을은 유곡리(酉谷里)를 한글로 풀어서 부르는 이름이다. 사연인즉 마을 동북쪽의 문수산(文殊山)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그곳에서 서남으로 뻗어내린 백설령이 마치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이다. 또 동남의 옥적봉은 수탉이 활개 치는 모습이어서 금계포란(金鷄抱卵), 즉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둥지의 알이 바로 닭실 마을이 된다.
먼저 마을회관을 찾아 유곡 종중(酉谷 宗中) 19세 종손 권종목(權宗睦) 선생(63)께 인사드리니 그는 훤칠한 키에 골기가 뚜렷한 인상이다. 또한 종손으로서 기품과 친절이 배어난다. 그는 선친이 출간한 국역 석천지(石泉誌, 1994년)를 길손에게 건넸다.“우리 조상의 뿌리와 마을 유래, 그리고 수많은 문사들이 남긴 글을 정리한 책 임니더. 살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더.”사실인즉 닭실 마을은 충재(沖齋) 권벌(1478-1548) 선생의 삶과 유적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입향조가 된 그의 삶을 추슬러 본다.조선 중기의 문신인 그는 성균관 생원 권사빈(權士彬)과 파평윤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7세(연산군 10년) 때 대과에 급제했으나 정치적 이유로 탈락, 다시 3년 후(1507년)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헌부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당시 중종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고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참여하다가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되어 파직당했다. 이때 귀향하여 어머니의 묘소가 있던 이곳 유곡(酉谷)에 자리 잡아 둥지를 틀고 학문과 풍류의 삶을 살았다.
복직(1533년)된 후 명나라 사신과 의정부 우찬성(1545년)에 이르기도 했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일어난 을사사화로 다시 파직 당했다. 그리고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 객지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닭실 마을 있게 한 주인공 충재 선생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 속에서도 오늘의 닭실 마을을 있게 한 주인공 충재 선생. 일찍이 충재의 5대조가 안동에서 옮겨와 자리 잡았지만 충재로부터 발아, 번창했기에 그가 입향조 반열에 든다. 석천지를 저술한 권응도(權應度?6대손)의 석천지서에서 마을과 충재의 인연이 살펴진다.
닭실 마을 있게 한 주인공 충재 선생‘우리 집의 석천(石泉), 청암(靑岩) 두 정자는 모두 선조 충재 선생께서 장래를 위하여 마련한 장수유촉(藏修遺?)이다. 선생께서는 기묘년(1519년)의 국운이 불행한 때를 만나 조정에 있기를 즐겨하지 않고 멀리 바닷가의 외임(삼척부사)으로 있다가 내직에 있던 모든 동료가 참혹하게 섬멸됨에 연좌되어 파직을 당하자 묘당(廟堂)의 혼란을 깊이 근심하며 깊은 산 속으로 숨어 버릴 것을 결심하고 이곳에 와서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윤선도의 보길도 세연정, 정약용의 다산초당, 송시열의 화양구곡 금사담 등은 풍류와 학문을 연찬할 때임을 간파하고 물러남이 한편 인생의 축복임을 알게 한다. 즉, 충재는 닭실 마을로 하여금 언제고 소생하는 것이다.
현재 닭실 마을은 남녀를 합해 140명이지만, 본동(유곡1리)은 60명에 그친다고 함께 자리한 권영조(權寧祚?59) 이장이 말한다. 글 읽는 소리가 사라진 마을은 벼, 수박, 고추, 사과, 인삼 농사로 생업을 이어가며, 특산물로는 부녀회에서 만드는 닭실종가한과가 유명하다.과거의 역사를 살피고 현실을 그리러 온 내게 마을의 사연은 시작부터가 만만치 않다. 어떻게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지형을 제대로 파악하고 삶의 현장을 통찰할 것인가. 과거의 유산과 오늘의 삶을 조화롭게 느끼도록 담아낼 수 있을까.
석천지를 살펴본 이튿날 아침, 나의 청에 마을 안내를 위해 종손인 권종목씨가 손수 차를 몰고 왔다. 나와 주민 권석휴(權錫休), 권규(權珪), 권석관(權錫寬)씨가 동행이다. 먼저 안닭실(중마을)의 큰 재궁골에 있는 충재의 묘와 재실이 있는 추원재(追遠齋)에 이르렀다. 낡은 재실과 추모비각 위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자 5기의 산소가 드러난다. 충재를 비롯한 선대와 집안의 묘소다. 선생과의 인연에 절을 올리고 둘러보자 주변은 무성한 솔숲이다. 산소를 향해 소나무가 읍하고 있는지, 아니면 선생의 기상이 솔바람 되어 누리에 번지고 있는지….산길을 내려오는데 살았으면 명송으로 불렸을 고사한 소나무(枯死松)가 참나무와 엉켜 하늘을 찌르고 있다. 활엽수가 침엽수를 밀어낸다는 천이가 선명하다. 예전 이곳에서 단옷날 아낙들이 그네뛰기와 봄날 화전놀이(참꽃부침개)가 야단스러웠다고 일행들은 추억한다. 산을 내려와 모퉁이를 돌아서니 바로 마을의 명소인 청암정(靑岩亭)에 이르렀다.‘청암정의 근사재(近思齋)는 선생께서 거처하던 곳이며, 석천정은 선생이 거닐며 노닐던 곳이다. 정자 아래와 위쪽에는 선생의 위패를 향사하는 서원과 관구지소(冠?之所?분묘)가 있어서 모든 자손들이 선생을 우러러 공경하고 사모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의 일대 형승 및 바위며 돌 하나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선생의 막대와 신발 자취와 감상하던 남은 향기가 어려 있지 않은 것이 없다.’(국역 석천지 10쪽) 여기서 근사재는 ‘충재(沖齋)’라는 현판이 보이는 건물이요, 석천정은 마을 앞산 협곡에 돌담을 쌓아 세운 풍류 속의 정사를 이른다. 그리고 관구지소는 조금 전 다녀온 산소를 말하며, 위패를 모신 곳은 이곳 청암정 위의 산 아래 제각이다.
수많은 집안 유물들 보물로 지정돼
사람이 살아야 건물도 사는 법. 누대로 가꾸어 오고 선대의 학문과 풍류를 자랑하는 청암정은 나그네의 휴식을 유혹한다. 아니 정자 마루에 드러누워 한 동안 세상을 잊고 싶어진다. 척촉천(擲?泉)으로 부르는 연못에 떠있는 거북바위 등에서 바라보자 소나무,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가 허공에 떠있다. 몸을 일으켜 난간에 기대니 충재의 소담한 건물과 뜰 앞의 눈부신 주황빛 원추리들. 그리고 연못으로 이어지는 돌다리가 피안의 세계로 느껴진다. 퇴계의 문인인 김극일(金克一)이 후일 이곳에 와서 읊조린 시가 새삼스럽다.외로운 섬에 있는 정자는 그 형세가 심히 너그러운데한 줄기 물이 못을 통하여 사면으로 둘러져 있네.연꽃은 비 소리를 띄워 서탑(書榻)을 울리고바위 머리에 구부러진 소나무의 곧은 절개는 서리를 맞아 늠름해라주렴에는 달그림자가 흔들리니 금빛 띤 뱀(蛇)이 얽혀있고지개에는 산 빛이 높았으니 푸른 기운이 잠겨있네주인은 일없이 한가한데 단지에는 술이 익었으니좋은 친구를 만류하여 흥겹게 놀아봄이 가장 좋을 듯-《석천지 98쪽》
길손이 화첩을 펴는 동안 종손은 그새 청암정 마루에서 잠이 들었다. 저 먼 조상의 음덕이 다 은혜롭지만은 않았을 현실 속에서 고단한 주인의 얼굴을 읽는다. 종손을 깨우자 그는 바로 이곳의 보물인 박물관으로 가 자물쇠를 풀었다. 한 집안의 유물이 국가의 보물로 이처럼 많이 지정된 곳이 또 있으랴.
충재가 예문관 검열 때의 한원일기(翰苑日記), 부승지와 도승지 때의 승선일기(承宣日記) 등 7책을 일괄한 충재일기(沖齋日記)가 보물 제261호다. 또 충재가 중종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아 늘 지닌 근사록(近思錄)은 고려 때(1370년) 간행한 것으로 보물 제262호다. 한편 임금에게 하사받은 15종 184책이 보물 제896호이며, 왕이 내린 교서와 재산 분배 기록인 분재기(分財記)와 호적단자, 왕세자를 책봉하는 행사기록 그림인 책례도감계병(冊禮都監?屛?숙종 14년)과 고문서 15종 274점이 보물 제901호다. 또한 충재와 퇴계, 미수 등의 서첩과 글씨 8종 14점 등은 일괄 보물 제902호로 지정되어 있다.하지만 집안의 유물이자 국가 보물을 전시한 공간은 너무도 협소하고 전시체제를 갖추지 못한 느낌이다. 안타까움을 토로하자 종손은 금년부터 박물관 이전 공사로 청암정 산 아래쪽에 넓은 부지를 확보, 박물관을 확장할 것이라고 한다.이어 솟을대문 종가에 이르자 길라잡이 종목씨 선친 권정우(權廷羽?84?유곡 종중 18세 종손) 선생이 창밖을 보시다가 길손과 마주쳤다. 거동이 불편한 몸임을 알면서도 대종손께 절을 올리고 화첩을 편 후 오늘의 인연을 수락해 주실 것을 간청했다.
한 해 마흔아홉 번 제사 모시는 유한규 여사
이어 종목씨의 어머니 대종부(大宗婦) 유한규(柳漢奎) 여사(85)를 안채에서 뵈오니 그 모습이 고요한 달빛 같다. 하회 마을 풍산유씨로 시집온 후 겪어냈을 사연이 어디 상상이나 될 법한가. 서른다섯 분의 조상 제사와 불천위(不遷位), 설, 한식, 추석을 포함 마흔아홉 번의 제사로 한 해를 보낸다는 사실 앞에 나그네의 붓끝이 자꾸 떨려만 온다. 모시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입으신 단아한 맵시에 몹시 부끄러움을 타시는 모습 또한 평생의 몸가짐이 배인 탓이려니. 그런데 두 손을 치마 속에 꼭 파묻고 계셔서 물으니 험악한 손을 보여주기 민망하다고 하신다.“할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의 평생이 담긴 소중한 손, 저는 꼭 그 손을 그려야겠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고생을 하셨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고우세요?”“고생은 무슨, 크고 좋은 집에서 호강하며 잘 살아온 덕이라우.”찜통더위와 칼끝 같은 긴장 속에서 겨우 붓을 놓고 나그네는 알 수 없는 경외에 싸여 대종부 할머니께 큰 절을 올리고 물러나왔다.
경주 양동 손씨 집안에서 시집온 며느리(종부) 손숙(孫淑?61)과 종손 희목씨 슬하의 아들 삼형제 중 맏인 용철(容轍?35)씨가 마침 한문학을 전공(현재 독립기념관 근무)해 집안의 유지를 받들어 종가로 들어와 살겠다고 한단다. 이것 역시 예천권씨 종가에서 시집온 권재정(權在汀) 손자며느리의 뜻이 결정적이었음은 물론이다.이제 일행은 마을 전경을 살피기 위해 논 건너편 산으로 올랐다. 하지만 숲이 우거져 도저히 시야를 헤아릴 수 없다. 골짜기를 오가며 헤매다가 내려오는 길에 제주도에서 본 동자석과 친연성이 느껴지는 권두인(權斗寅?충재 선생 5세손) 묘소의 석인(石人)을 만난 것이 행운이랄까.다음 길은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내성천을 거슬러 올라가니 좁은 길에 ‘청하동천(靑霞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며칠째 내린 비로 계곡이 요동을 치는데, 한 구비 돌아가자 계곡 암반 위에 축대를 쌓아 지은 석천정사(石泉精舍)가 우뚝하다. 충재의 장남 청암(靑岩) 권동보(權東輔)가 1535년에 지었다니 가문의 풍류가 여실한 증거다. 난간마루의 창을 열면 개울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가히 삼매경에 빠질 만한 경관이다. 징검돌을 건너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석천정(石泉亭)’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오죽(烏竹) 아래 돌샘이 있고, 샘물이 마당의 돌수로를 따라 담장 밖으로 흐르니 비로소 석천정사 이름에 걸맞다.점심 때가 되어 일행은 인근 마을의 묵밥집을 찾았는데, 뜨락의 패랭이와 산도라지 꽃이 길섶에 한창이다. 어김없이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오후, 마을회관 앞에서 구순이 넘으신 박성옥 할머니(92)를 뵙고 부녀회원들이 모인 한과공장을 찾아갔다.“과자 맛은 손맛 아입니껴?”닭실한과 500년 전통을 잇고 있는 22명의 부녀회원들. 한과가 제사음식의 꽃이라고 말해주는 아낙네들. 찹쌀, 조청, 식용유 등을 공동으로 마련해 일하는데 6, 7, 8월에는 잠시 쉰다고 한다. 모든 과정이 손맛인데, 예를 들어 강정은 찹쌀을 쪄서 홍두깨로 밀고 온돌에 말린 다음 기름에 튀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한과는 자연색으로 물들이는데 분홍빛은 지초를 쓴다고 했다. 한과의 인기는 전국적으로 대단해 추석 때면 물량이 달려 야단이라니 귀한 것은 언제나 대접받게 마련이다.
선비정신으로 되살아나야 할 닭실 마을
길손을 위해 어느새 고운 모시 한복으로 갈아입은 아낙들. 그 중 안동 법흥댁 이임형(李姙衡?74) 부녀회장, 원천 외내댁 이영자(李英子?67), 풍기댁 김성완(金成완?65)씨를 그렸다. 모두들 주변에서 깔깔거리며 닮은 모습을 주문하니 나는 구슬땀이 절로 흐른다.결국 마을 전경을 위한 부분 묘사가 절실하게 되어 또 다시 마을로 돌아온 나흘째. 땡볕 속에 화첩을 펴들고 선생이 가정방문하듯 한 집 두 집 살펴보는데 한나절도 넘게 걸렸다. 일일이 마을 분들께 인사를 드린 다음 집의 구조를 파악했고, 골목과 담장의 동선을 기억해 두어야 했다. 때 아닌 아코디언 소리에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노인회장인 권경(權璥?75) 선생이 맨발로 지난 청춘의 멜로디를 연주하고 계신다.그리고 이게 웬일. 생면부지 객지에서 나를 알아보는 젊은 아낙은 권연혜(權延惠?42)씨로 숲과문화연구회 회원이었을 때 나의 전시와 인연이 있었음을 밝히는 게 아닌가. 찌는 한낮, 그녀가 내준 녹차 한 잔이 며칠간 마을순례의 고단함을 식혀주는 듯하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간 조원교 할머니(90)댁의 마루. 17세에 시집온 후 딸 여섯을 모두 여의고 홀로 사는 할머니. 마을에서 가장 베푸는 마음이 크시다는 할머니는 거듭 손사래로 길손의 일을 어렵게 하신다.구순의 인생을 살아온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저 겸양을 넘어선 마음 자락을 어찌 형용할 수 있으랴. 어쩌면 저 마음이 면면한 조선의 숨결인지도 모르겠다. 드러내지 않음으로 더욱 존숭받고 외경스러운 선비의 삶과 또한 무엇이 다를까. 새삼 닭실 마을의 희망은 500년 전통의 무게보다도 겸허한 선비정신이 새삼 그리워지는 현실이다.한편 마을 순례를 끝낼 때까지 종손의 배려 외에 나의 다리가 되어주고 닭실 마을의 중요성을 살펴준 분이 정민호(鄭民昊?청량산박물관 학예연구사)씨다. 그는 만부득 청암정, 석천정사 외에 삼계서원(三溪書院)을 그려 넣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하여 그를 따라 찾아본 서원은 충재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경모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현종 1년(1660년)에 사액(賜額)을 받은 곳이다. 그러나 당시의 학풍과 기상은 사라지고 빈집은 덩그마니 세월의 바람 속에서 또 다른 시절인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오늘의 닭실 마을이 내일에 전해질 추억의 무늬보단 선비정신으로, 저력으로 되살아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그 희망을 그림으로 증언하고 싶었다.
첫댓글 따라 부를려고 " 조각 구름 " 가사 ~ ㅎ
1.푸른하늘 저만치 뜬구름 하나
저 구름 가는 그곳엔 그리운 내님 있겠지
살며시 불러봐도 대답은 없고
메아리만 서러워 애태우는 맘 애태우는 맘
그님은 모를거야 아련히 멀어지는 저 구름 보면
그리움만 더해가네
2.푸른하늘 저만치 뜬구름 하나
저 구름 가는 그곳엔 그리운 내님 있겠지
소리쳐 불러봐도 대답은 없고
메아리만 허공에 맴돌다 가네 맴돌다 가네
내마음 서러워라아련히 멀어지는 저 구름 보면
그리움만 더해가네
잘보고 잘듣고 갑니다 .........
선배님 !
감사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