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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 - 고기삼거리에서 매요리까지 >
참여자 : 송재혁(芝山), 오진탁(星巖), 정재민(巨谷), 김세봉
구간 : 고기리(전북 남원시 주천면)-수정봉-여원재-고남산-통안재-매요리(남원시 운봉읍)
산행 시간 : 8시간 30분(중식 및 휴식시간 포함)
산행 거리 : 18.2km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눈
-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간사 -
아침을 먹고 있는데 핸드폰 벨이 요란하게 울려댄다. 종신이라는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른 시간에 종신이가 전화를 걸 리 없어 순간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종신이 목소리는 한껏 갈아 앉아 있었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빈소며 발인일 등을 알아놓고 일단 전화를 끊었다. 얼마 후 다시 형수에게 전화가 왔다. 빈소가 있는 순천에 같이 가자고 하고 시간 일정 관계는 다시 연락하기로 하였다.
출근하면서 내일 가게 될 백두대간 산행은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35년 전 고1 때 같은 반(7반)에서 공부한 이래 줄곧 연락을 하며 가장 친밀하게 지낸 친구 중 하나이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되어 같이 백두대간 산행을 하는 친구들 모두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사정이 여차여차해서 이번에는 같이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였다. 친구들이 하나 같이 모두 양해를 했고, 거곡은 그러면 다음 주로 연기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본다. 나를 배려한 고마운 말이다. 물론 연기하면 나야 좋겠지만 나 하나 때문에 다른 친구들이 일정에 차질을 빚는 것 같아 정중히 사양하여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한 달 내내 추호도 의심치 않던 내일의 백두대간 산행 꿈은 그렇게 접었다. 이제 형수와 연락하여 순천에 내려가는 일만 생각하며 이번 산행에 대한 기대와 미련은 버렸던 것이다. 이제 구태여 내일 아침 출발하기 위해 꾸려야 할 배낭도 챙길 필요성이 없어졌다. 아내 역시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일러둔 터라 나의 내일 산행은 이미 무산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가끔 예상을 빗나가게 하는 데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얼마 후 다시 거곡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그로 인해 상황은 180도 달라지고 있었다. 우리가 산행할 곳이 마침 남원 운봉 쪽으로 내려가야 하는 코스였다. 거곡의 말은 내일 아침 가자던 일정을 바꾸어 하루 앞당겨 오늘 저녁에 내려가 문상을 하고 거기에서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세 친구 간에 의견 조율이 모두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그렇게 까지 배려해주는 데야 더 이상 거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전혀 의외의 제안에 잠시 멍하기도 하였지만 곧 그 친구들에 대하여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되면서 쾌히 응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옷차림은 양복을 입고 내려가 현지에서 갈아입기로 하였다. 다행히 같이 문상을 가기로 한 형수도 거곡의 차에 동승하면 아무 문제가 없게 되었던 셈이다.
급전직하로 일정이 다시 변경됨으로 인해 갑자기 마음이 분주해졌다. 원래 오늘 저녁 일찍 귀가해서 배낭을 꾸려놓고 내일 아침 여유 있게 출발하려던 것이 당초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급작스러운 일로 돌연 포기하여 아예 배낭을 꾸릴 일도 없어졌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다시 이렇듯 배낭을 부리나케 싸서 가야하도록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참으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것이 이런 경우를 두고 이르는 말인 듯싶었다.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귀가하여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고 배낭을 꾸리는 데 벌써 친구들이 오겠다고 전화를 해댄다. 당초 약속보다 조금 빨라지다 보니 더더욱 급하게 생겼다. 한편으로 배낭을 꾸리면서 형수에게도 연락을 취해가며 대충 준비를 마쳤다. 친구들이 거곡의 애마(승용차)에 합승해 후암동 종점까지 왔으니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성암은 고등학교 졸업 후 처음으로 후암동 일대를 온 것 같다고 감회스러워 한다.
형수는 3호선 동대역에서 만나 동승하였다.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천안논산 고속도를 거치고 전주를 지나 순천까지 가는 데는 여러 시간이 걸렸지만 아주머니들 못지않은 수다에 지루한지 몰랐다. 먼 여정에는 역시 말이 큰 도움이 된다. 올해 들어 첫눈을 대하며 우리는 어둠을 가르며 힘차게 밤길을 달려갔다.
상갓집에 들렀을 때는 자정을 이미 조금 넘기고 있었다. 순천에 있는 성가롤로병원에 도착하니 수많은 화환들이 각자의 주인 이름표를 달고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혹 용두팔 동창회에서 보낸 조기가 있나 둘러보았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상을 마친 다음 상주와 함께 한참을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러나와 근처의 찜질방을 찾았다. 성암은 찜질방이 처음이라고 한다. 사우나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 때는 이미 새벽 3시쯤 된 것 같다. 피곤하다며 먼저 잠자리에 든 친구도 있었다.
2009년 11월 21일 토요일 맑음
6시에 기상하기로 하였지만 1시간 정도는 먼저 일어나 사우나를 하고 6시쯤에 다른 친구들을 깨웠다. 곤하게 자는 것을 생으로 깨우자니 미안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일정상 어쩔 수 없었다.
형수는 곧바로 상경을 하기로 하고 산행을 하게 될 4명은 운봉에 가서 아침 식사를 들기로 하였다. 일단 시외버스터미널을 먼저 찾았는데 형수가 구태여 아침이라도 먹여 보내야겠다며 그곳에서 아침을 먹자고 한다. 제수만 같아도 사양해보겠는데 형수님이라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드렸다. 형수가 사주는 아침을 배불리 먹고 아쉬운 작별을 고한 채 헤어져 우리는 순천 시내를 경유하여 운봉으로 향하였다. 남쪽지방이라 그런지 아직 은행나무 가로수의 잎에 푸른 기운이 많이 남아 있었다.
1시간 넘게 차를 달려 거곡이 예약해 놓은 운봉의 금성민박집에 도착하였다. 큰 배낭은 남겨 두고 작은 배낭에 필요한 것만 챙겨 넣고 비교적 가벼운 차림으로 나서기로 하였다. 거곡이 자기 발과 내발을 맞추기에 왜 그러는가 했더니 자기가 신던 등산화를 한 번 신어보라고 한다. 얼결에 신어보니 발이 편안하다. 아예 날더러 신으라고 하니 생각지 못한 귀한 선물을 받은 셈이 되었다. 또 하나의 신[履]이 신(信)을 더해주었다.
오늘의 산행 출발지인 고기삼거리까지는 민박집 아저씨의 차로 이동하였다. 지나치는 길에는 요즈음 갑자기 부각되기 시작한 지리산 둘레길 표시가 여기저기 산재한 채 고개를 디밀었다. 그러고 보니 둘레 길을 가는 것으로 보이는 일행도 간혹 눈에 띄었다. 지난 번 산행에서 종착지였던 고기삼거리는 이제 세 달 만에 출발선으로 바뀌어 우리를 맞았다. 백두대간 기를 꺼내들고 기념사진을 찍은 뒤 돌아서는 민박집 아저씨의 모습을 눈으로 떠나보낸 뒤 우리는 이번 산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대략 9시 반쯤이었다.
출발지점에서 한참을 아스팔트길을 따라내려 가자니 우리가 마치 둘레 길을 유람하는 것은 아닌지 착각될 정도였다. 10시가 조금 지나서야 우리는 노치마을이라는 곳에 다다랐다. 지반 번 우리가 거쳐 왔던 고리봉과 만복대 사이에 억새가 많아 갈재라고 했던 데서 나온 이름이 노치(蘆峙)라고 한다. 삼국시대 때는 백제와 신라의 각축전이 일어났던 곳으로 산성까지 있었다고 하니 나름대로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국내 유일의 마을’이라는 표지판이 자랑으로 여겨지는 듯했다. 한반도의 지도가 양각된 시설물에는 핏줄처럼 백두대간과 정맥 따위가 아로새겨져 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길을 물어 노치샘을 찾아 시원한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킨다. 비록 급히 먹는 물에 사례라도 들릴세라 버들잎을 띄어주는 아낙네는 없었지만 어찌 지나는 나그네로서 물맛을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산 들머리에 가냘프면서도 꼿꼿함을 잃지 않는 대나무 수풀이 먼저 인사를 해온다. 언덕바지로 올라서자마자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려 네 그루나 앙버티고 있다. 몇 백 년을 그렇게 이 마을을 지켜왔을 것임에 틀림없다. 만든 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지만 당산제전(堂山祭典)이라 쓰인 제단은 묵묵히 그것을 대변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평화로운 마을을 내려다보며 저 너머 쪽 우리가 힘들게 걸었을 몇 달 전의 지리산을 눈과 마음으로 더듬어 본다.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등산화 끈도 질끈 동여매고 스틱도 맞춤하게 조절을 마친 다음 앞뒤로 늘어선 채 마침내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마치 뒷동산을 오르는 분위기로 시작한 산행인데 놀라운 것은 끝도 없이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있어 그야말로 우리는 하루 종일 소나무 숲과 함께 하는 행운을 누렸다. 여러 번 산행을 해보았지만 이번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솔밭을 거닌 것은 아마 난생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11시가 조금 넘어 첫 기착지로 수정봉(804.7m)에 도착하였다. 산 중턱에서 수정이 생산되던 암벽이 있어 생긴 수정봉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섬진강과 낙동강 유역의 분수계라고도 하는 데 정확히 어디쯤을 두고 이르는 말인지는 알 턱이 없다. 다만 전라도 지역과 경상도 지역을 흐르는 두 강이 연관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감동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11시 35분께 우리는 갓바라재, 곧 입망치(笠望峙)라는 곳에 이르렀다. 갓이나 바라본다는 뜻이 들어간 고개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어디에도 이에 대해 속 시원히 알려주는 기록이 없다. 시간을 가지고 더 찾아보면 혹 해답을 얻을지 모르지만. 이름을 알면서도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저 고개를 갸우뚱 할 뿐 뾰족한 방법이 따로 없다. 날씨가 화창해 주변 경관들은 비교적 잘 내려다보이는 편이었고, 엊저녁에 내린 눈들이 많지는 않지만 응달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펼쳐져 있어 그래도 시절이 겨울임을 알게 해주었다.
여원재를 약 600m가량 남긴 지점에서 일행보다 조금 앞서 가던 거곡이 점심 장소를 물색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주지사 갈림길 앞 양지바른 곳에 즉석 식당이 조촐하게 갖추어졌다. 4월 초파일이 지난 지 언제인데 아직도 연등은 길을 따라 죽 매달린 채 절 근처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12시 반부터 시작한 점심시간으로는 대략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즉석 비빔밥과 라면은 우리의 점심으로 손색이 없었다. 지산과 거곡 두 친구는 물의 양을 잘못 조절하여 좀 질척한 비빔밥을 먹게 된 점이 조금 아쉬웠다. 그야말 밥맛이었을 게다. 이래서 차고 넘침이 없는 중용은 늘 그렇게 강조될 수밖에 없나보다. 한참 동안을 쭈그려 앉다보니 몸이 오슬오슬 할 정도의 한기가 몸을 파고들었고, 우리는 다시 추위라도 털어버리듯 길을 나섰다.
지나는 길에 몇 기의 묘가 보인다. 앞서가는 친구들과 잠시 떨어져 길가의 묘비를 살펴보니 대한불교 호국선교종의 김양선(金良璇) 종정의 분묘이다. 낯선 종교이지만 종정을 지냈다면 그 종파의 최고 수장일 터이다. 고향이 그 곳 남원 출신이 인연이 되어 그 곳을 영원한 안식처로 삼은 모양이다.
출발한 지 채 10분이 못 되어 여원재[여원치(女院峙)]로 내려섰다. 남원시의 운봉읍의 장교리와 이백면의 양가리를 이어주는 고개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퇴치할 때 꿈에 나타나 도와준 노파를 위해 사당을 짓고 여원(女院)이라 했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성계는 남쪽의 왜구와 북쪽의 여진족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일약 영웅으로 부각되어 마침내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한 인물인데 그의 유명한 황산대첩 당시의 일화인 듯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고갯마루에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과 민보군이 대치했던 상황을 설명해주는 또 다른 표석이 아픈 역사를 머금고 세워져 있었다.
여원재를 넘어서서 잠시 여트막한 언덕 같은 길을 가는데 갑자기 들녘에서 정적을 깨는 총소리가 들린다. 멀리 사냥총을 든 한 사나이 모습이 보였고 일군의 꿩들이 수풀에서 푸드득 날아오른다. 거듭된 총성에 꿩 한 마리가 균형을 잃으며 땅으로 곤두박질치듯 하는 와중에 사냥개가 부지런히 뒤를 좇는다. 우리는 치사(雉死)한 현상을 멀찌감치 외면한 채 산길을 재촉하였다.
우리는 산행 중 종종 여러 분묘를 만나게 되는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무덤의 모습이 우리가 흔히 보던 그런 형태가 아니었다. 분묘 앞에 제단이 없을 경우에는 마치 제단 모양으로 흙을 쌓아올린 것이 그렇고, 봉분 앞에 둥그런 돌로 장식을 하는 것 역시 별로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게다가 묘 뒷부분에는 보통 좌우로 둔덕을 만들고 가운데 부분은 연결되어 있는 법인데 그런 것은 아예 만들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기호 지방과 다른 이 고장의 독특한 분묘 형태로 일정한 풍속을 이루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가운데도 소나무 숲은 죽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오늘 산행의 최고봉인 고남산(古南山 : 해발 846.4m)에 오르게 되었다(4시경). 그래도 정상임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나름 암릉으로 되어 있고 가파른 나무 계단이 걸쳐 있다. 고남산은 이름으로만 보면 옛날의 남산인데 실상은 그 별칭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태조봉(太祖峯), 고조봉(高祖峯), 제왕봉(帝王峯), 일광산(日光山), 적산(赤山) 등 다양한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태조봉, 고조봉, 제왕봉 등이 모두 조선 태조 이성계와 관련되어 생겼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일광산은 아침에 가장 먼저 햇빛을 받아 빛난다고 하는데서, 적산이란 명칭은 저녁이면 노을에 붉은 빛을 띤다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고남산에는 통신시설이 갖추어져 멀리서도 그곳이 고남산임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날씨가 비교적 맑아 사방이 모두 조망을 할 수 있어 그야말로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지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고남산을 정점으로 이제 내리막길에 들어서는 데 약간의 해프닝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는 매요리로 가야 했는데 그만 잠시 길을 잘못 들어 권포리(權佈里) 쪽을 향하고 있었다. 정작 권포리로 갈 사람들이 길을 물어왔을 때 우리는 득의양양한 채 다른 쪽 길을 가르쳐주었다. 아무래도 뭐가 이상해 다시 살펴본 결과, 아뿔싸 우리가 길을 잘못 든 것이었다. 바로 수정이 되었으니 망정이지 그 분들에게 바가지로 욕을 먹을 뻔했다. 맹자의 말마따나 나의 밭은 버려둔 채 남의 밭을 갈려고 한 격이었다.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대처해야겠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껄껄 웃는 것으로 흘려 보냈다.
우리는 잠시 후 제대로 된 코스를 잡아 바로 궤도를 수정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진행하는 길은 단지 우리 넷뿐이었다. 소나무 숲길은 여전하였다. 아무래도 시절이 시절인지라 겨울 해는 짧았다. 땅거미가 밀려오더니 어느 순간 헤드랜턴을 쓰지 않으면 길조차 식별하기 어려울 만큼 되었다. 해가 서산 모롱이를 넘어선 기념으로 남기고 간 황혼이 불그스름한 흔적을 남긴 지 얼마 안 되어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달의 모습이 소나무 사이로 또렷이 보였다. 산의 능선이 하늘과 경계를 이루는 실루엣 또한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두기 위해 부지런히 곁눈질을 하며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6시 무렵, 마침내 우리는 오늘의 종착지인 매요마을 회관에 도착하였다. 민박집 아저씨 대신 다른 분이 택시를 몰고 와 민박집에 도착하여 짐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달려갔다. 민박집과 식당은 같은 집 것이었다. 지산이었던가? 우리가 너무 건전하게 산행만 하는 것 아니냐고 농담을 하자, 이에 질세라 성암이 맞장구를 치고 나선다. 거곡이 약간 난색을 보였지만 대세에 밀려 결국 노래방을 가게 되었다. 평소 노래를 잘 못 부르는 탓에 악을 쓰는 것으로 음악을 대신하다 보니 목이 조금 쉰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백두대간 산행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산행과는 별도의 악(岳)아닌 악(樂)을 즐긴 다음 민박집에 들어와 피곤한 몸을 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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