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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남훈녀가 들려주는 이야기/훈훈한 현장 속으로 2013/10/18 17:35
9월 29일, 중랑구에 거주하시는 6·25참전유공자 19분을 모시고 전적지 방문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지난 6월에 국가상이유공자로서 보훈활동을 열심히 했다며 대학생인 저는 서울지방보훈청과 상훈유통으로부터 장학금을 수여받았습니다. 보람 있는 곳에 사용하고 싶어 자문을 구한 끝에 이번 ‘6․25 참전용사 전방 방문행사’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남양주시 EBC 헌병전우회의 지원과 제5사단·28사단 두 현병대장의 후원으로 안전하고 원활하게 이번 행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참전유공자 몇 분은 제가 학교 동아리 봉사로 댁에 찾아뵌 적이 있는 분들로 생활이 상당히 어렵게 살아가시는 분들이십니다. 참전 당시와 전후 생활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것을 느꼈고, 더 많은 젊은 세대가 이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갖자는 의도로 전적지 방문행사 감상문을 2부로 구성해보았습니다.
제1부 - 감사의 마음으로 비전을 갖고 향하다
29일 새벽에 전국적으로 호우주의보가 내렸고 수도권에도 밤사이 100mm의 비가 왔습니다. 당일 오전까지도 전방 방문에 대하여 걱정이 매우 많았습니다. 오전 8시에, 중랑구 보훈회관에 앞에 마련된 버스가 도착하였습니다. 8시 집결이었으나, 6시 반부터 한분, 한분이 회관 앞으로 도착하셨습니다.
<주관 : EBC 경기헌병전우회와 보훈처 블로그 기자단>
철원군에 위치한 백마고지까지 가는 길은 매우 순조로웠습니다. 이날 저녁까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오전 10시경부터 비가 그치기 시작하였고, 해가 떴습니다. 초성리 검문소를 지나자 5사단 헌병대차량이 호위를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안전하게 백마고지까지 도착하였습니다.
위 사진은 백마고지 전적비입니다.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대공세에 의해 10일간이나 계속된 백마고지전투는 약 30만발의 포탄이 이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고지의 주인도 24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1만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중공군 2개 사단이 완전히 와해되었으며, 국군 제 9사단은 백마고지의 전투의 대승을 계기고 백마사단이라고 명명되었습니다. 격렬했던 전투 끝에 남은 흙먼지와 시체가 뒤섞여 악취가 산을 뒤덮을 정도였고, 포격에 의해 고지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는데 마치 백마가 옆으로 누워있는 형상이라 하여 그 이름을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 백마고지 사수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국군 제9사단의 장병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철원군 철원읍에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이 비에는 당시 전투의 격렬함과 많은 사람이 조국의 수호신으로 상회했다는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위령비와 위령탑이 있는 언덕은 생각보다 가파르고 높았습니다. 그래도 참전유공자분들께서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백마고지 위령비>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백마고지 위령비는 전투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장병들의 숭고한 정신과 위훈을 기리고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1985년 6월6일 현충일에 제 5보병사단장병과 인근주민들의 뜻을 모아 세워졌습니다. 위령비 앞에 전사자비의 명단을 읽어 내려가시는 참전유공자분들의 표정은 순간 엄숙해졌고, 이내 자신들의 전투를 회상하며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였고 이어 5사단 소속의 백마고지 담당병사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위 사진의 장소는 백마고지에서 산화한 호국영령들과 통일을 염원하기 위한 종각(상승각)입니다. 1990년 4월 29일 제 5보병사단 장병일동의 모금으로 건립한 종에는 ‘민족자존 통일번영(民族自尊 統一繁榮)’이라는 문구와 함께 이런 내용이 쓰여져 있습니다.
‘백마고지(白馬高地)에 누운 영혼(靈魂)들을 천도(薦度)하고 통일염원(統一念願)의 정성(精誠)을 모아 이 자유의 종(自由의 鐘)을 빚어 깊은 소리 울리나니 철조망 너머 북녘땅에 이르기까지 온 누리에 어두움을 깨뜨리는 자유(自由)의 쇠복소리 되게 하소서. 듣는 마음마다 번뇌를 씻어주고 참된 지혜(智慧)의 눈을 뜨게하여 민족화합(民族和合)과 평화통일(平和統一)을 이룩하게 하소서. 분단(分斷)의 철조망을 무너뜨리고 통일(統一)된 자유대한민국(自由大韓民國)을 찬미하는 맑은소리 되게 하소서’
백마고지 전적비는 가까이서 보니 아주 높았습니다. 전적비는 제 9보병사단이 당시 3,400여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끝까지 고지를 사수하는 큰 전과를 올린 충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높이 솟은 형태로 세워졌습니다. 뒤편에는 승천하는 혼령과 윗부분에는 백마의 위용이 조각되어있었습니다.
끝으로 가보니 휴전선이 희미하게 보였고, 아군GP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DMZ, 남방한계선과 산등성이를 중심으로 한 지형설명을 들었습니다. 이 사진은 군사보안상 북측을 촬영할 수 없었기에 북쪽을 바라보며 설명을 듣고 계신 6·25참전유공자분들을 촬영한 것입니다. 기자인 저 역시 5사단 GOP대대에서 군복무를 하였기에 주변을 보며 당시의 추억도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국가상이유공자와 함께> <5사단 GOP대대 근무를 한 전우들과>
<EBC 경기헌병전우회와 함께>
‘6·25참전유공자분들과 함께한 전방 방문행사‘는 2부에서도 이어집니다. 2부는 백마고지 전적비 아래에 있는 백마고지 기념관 관람과 열쇠전망대, 28사단 헌병대 방문의 내용으로 구성하였습니다. 2부도 많이 기대해 주세요. ^^
제2부, 감사의 마음으로 비전을 갖고 향하다.
백마고지 전적비를 관람하고 내려오는 길목 좌우에는 백마고지 전시관이 있습니다. 6·25 참전유공자분들은 경사가 급한 내리막을 내려가시는 것 조자 힘들어 보이셨지만 모든 분들이 전시관에 입장하셨습니다. 들어가서 보니 밖에서 보았던 면적에 비해 많은 전쟁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참전용사 분들은 다시 한 번 63여 년 전의 전쟁 상황을 되새기고 계셨습니다.
기념관의 전시물을 크게 3가지로 구분을 해보면 6·25전쟁, 백마고지 전투, 김종오 장군입니다. 우선 백마고지전투의 일정을 정리해 놓은 표가 눈에 띄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 19:15~ 20:15에 1차 전투를 시작으로 수차례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은 아주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10일간 무려 12차례의 공방전을 펼쳤는데, 오전에 빼앗겼다 저녁에 빼앗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치열한 전투 끝에 얻은 승리였기에,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에 큰 사기를 불어넣었습니다. 백마고지 전투 중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탄우 속을 헤치며 고지정상으로 달려가 적 기관총 진지를 파괴한 3명의 용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육탄 3용사’라 합니다. 기념관에는 이분들을 소개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1952년 10월 12일, 아군은 고지탈환을 위해 세 차례의 돌격에도 불구하고 적의 발악적 기관총 화력으로 혼전만 거듭할 때 강승우 소위, 오규봉 하사, 안영권 하사는 우국충정의 정신으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탄우 속을 헤치며 단숨에 고지정상으로 내달아 적 기관총 진지를 박살내고 장렬히 산화하였다. 전 장병은 육탄 3용사의 투혼에 사기를 진작시켜 순식간에 고지정상을 휩쓸고 마침내 백마고지 주봉에 태극기를 꽂았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친 3용사는 백마의 삼군신(三軍神)으로 추앙받아 호국의 별이 되었다.’
현재 제주시 일동2동 탐라자유회관 경내에는 강승우 소위 기념상이, 전북 김제시 금산면(금산사 입구)에는 안영권하사 전공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오규봉하사 동상은 바로 올해 6월 7일에 충남 천안시 삼용동에 건립되었습니다.
<제주시에 위치한 강승우 소위 동상과 육탄3용사의 전공비>
<안영권하사 전공기념비> <오규봉하사 동상>
전시관 반대편에는 당시 사단장을 역임한 김종오 장군의 전쟁유품과 소개가 있었습니다. 김종오 장군은 46년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임관하여 6․25전쟁 시 제6사단장과 제9사단장으로, 전쟁 후 제 15대 육군참모총장과 합동참모총장을 역임하였습니다.
<훈시 글>
<국립서울현충원 제2장군묘역 내>
사단장 김종오 장군의 훈시 글에는 10월 5일, 백마고지 전투를 앞두고 수양제의 백만 대군을 살수에 장사지낸 을지문덕 장군과 당 태종의 삼십만 대군을 섬멸한 연개소문 장군과 같이 조국을 지켜내자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얼마 전, 저는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직접 김종오 장군의 묘소를 방문했었습니다. 장군의 묘비 뒤에는 서울특별시 성동구 신당동에서 1966년 3월 30일 별세라 쓰여 있었습니다. 46세의 짧은 인생을 조국을 위해 몸 바치셨던 장군을 기리며 참배를 드렸습니다.
<전쟁 유품>
위 사진은 6․25참전 유공자이신 민OO 님 입니다. 현재 중랑지회에서 사무업무를 보고 계시고, 이번 행사를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하지만 허리통증과 차멀미로 오르막을 오를 수 없어 버스에 계셔야 했습니다. 저는 손자 같은 마음으로 기념사진을 부탁 드렸고, 참전용사분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버스에 올라 5사단의 열쇠전망대로 향했습니다. 5사단 헌병대 차량이 계속해서 버스 앞에서 길 안내를 해주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전방 사단에는 DMZ를 눈으로 볼 수 있게 전망대가 있었습니다. 사단 이름을 따서 열쇠부대인 5사단의 전망대를 열쇠전망대라 부릅니다. 이 곳에서도 안내를 해주셨던 병사의 설명을 들으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유리 밖으로 전방의 군사분계선과 GP가 보였으나 군사보안으로 촬영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일정 내내 도움을 주신 5사단 헌병대> <안내 병사의 주변 지형 소개>
<전망대 1층 전시실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글을 적고 계신 모습>
이곳에도 충현탑이 있었습니다. 1953년 3월 23일 대광리 북방고지 탈환을 위하여 미 7사단장 “아더 지 투르도”소장이 지휘한 부대장병들은 중공군 주력부대를 섬멸, 격퇴시켜 적의 전의를 상실케하고 우군의 전력을 호전시켜 성공적인 방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이들 장병들의 공적을 찬양하며 자유평화를 위해 상화한 자유우방용사와 우리국군장병의 영령 893위를 추모하기 위하여 이 탑이 건립되었습니다.
6·25참전유공자 분들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단체 기념사진을 남기고 싶어하셨습니다. 조금이라도 사진으로 담고 싶어 하시는 마음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다시 버스에 올라 초성리 검문소에 도착하니 28사단 헌병대차량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후 일정은 28사단 헌병대 방문 및 점심식사였습니다. 헌병대에 도착하니 헌병대장 및 주임원사 등 장병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28사단 헌병대대에서의 점심식사>
거동이 불편하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고 일정을 잡았기에 점심식사 시간이 1시간 가량 늦었습니다. 이를 알고 헌병대장은 식사장소로 이끌어주셨고, 주임원사가 직접 국을 따라드리며 선배에 대한 극진한 대우를 해주셨습니다. 식사 후 준비해주신 과일을 드시며 28사단 소개영상을 관람하였습니다. 한 참전유공자분은 ‘그동안 많은 전적지 방문을 했지만, 오늘 현역 장교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 많은 보람을 느낀다.’ 라고 하셨습니다.
<28사단 헌병대장과 함께 기념촬영>
기념촬영 후 버스를 타고 중랑구 보훈회관에 돌아왔습니다. 미흡한 부분도 있었고, 생각지 못한 부분에 대해 이해해 달라는 말씀을 올리는 제게 6·25참전유공자분들은 줄곧 고맙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제가 6월경 방문했던 조OO 유공자분은 가족 결혼식도 안가시고 참석하셨고, 민OO 선생님도 허리가 좋지 않으시고 차 멀미를 연신 하셨음에도 헤어지기 전에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저는 이번 행사를 통해 그 분들이 원하시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국가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전했기에 그에 대한 보답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국민들이 이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적어도 타인에게 경제적·사회적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셔서 대한민국이 건재합니다.’라는 문구가 6월 호국보훈의 달에만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연중으로 이분들에 대한 감사함을 알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8사단 헌병대방문 기념사진>
여유가 있으면 이분들에게 감사함을 표현해야지 했던 저에게 이번 행사를 실행에 옮길 수 있게 해주신 국가보훈처·상훈유통·EBC헌병전우회 및 제5, 제28사단 헌병대에게 이 기사를 빌어 깊은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첫댓글 참으로 즐겁고 뚯깊은 하루였읍니다. 감사합니다.
김유진 현병대장 진심으로 감사드림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