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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和會(종교간 화합을 위한 모임) 會報
푸른 들 소리 [제 13권 13호](통권 228호)(2011년 7월 1일)
흑인영가를 들으며
장 기 홍
나는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과 캐드린 배틀(Kathleen Battle)이 부르는 흑인 영가를 즐겨 듣는다. 이들은 흑인이거나 혹은 흑인 피가 섞인 가수라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실감을 자아낸다. 흑인들의 애환이 떠오르고 때로는 숙연해진다. 생명의 비극적임과 오묘함을 떠올리게 된다.
흑인들이 자기네 고향 아프리카에서 납치되어 올 때에는 노예선(奴隸船) 안에서 다수가 항해 도중 병에 걸리어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유럽이나 북미 남부에 상륙하면 노예시장에서 팔리게 된다. 순순히 길들여지는 자들은 많지 않고 억센 반항아(反抗兒)라도 결국은 매 맞아 길들여진다. 일생 노예노동을 하며 살게 마련이다.
노예의 주인들은 기독교인이어서 주인의 종교를 믿으면 호의를 얻게 된다. 또 주인의 입장에서는 종교적으로 동화시키면 부려먹기도 쉽다. 그렇게 2,3백 년을 사는 동안 흑인영가(Spirit -uals 혹은 Negro spirituals)가 생겨났다. No body knows the trouble I see, no body knows the sorrow(아무도 내 고통 모르네, 내 이 슬픔 아는 이 없네.)
한민족 특유의 한(恨)의 정서가 조선조에 들어와 판소리의 창(唱)으로 태어난 것처럼 흑인영가는 그들의 한이 어리어 생겨난 것이다. 재즈도 미국 남부의 흑인들에게서 나온 것으로 뉴올리언즈가 발상지라 한다. 아프리카 음악과 유럽 음악의 합성이다.
나는 마리안 앤더슨의 흑인영가를 오랫동안 즐겨 들었다. 요즘 와서는 캐더린 배틀의 노래를 통해서도 흑인영가를 듣고 있다. 한두 곡의 가사를 감상해 보겠는데 흑인 영가는 단순하여 어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첫 번 것(그는 온 세상을 손에 쥐었네)은 만물을 주관하고 운명을 지배하는 신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나타나 있다. 만물 만사가 신의 손안에 있다면 노예제도도 신의 뜻이란 말인가? 좋게 보면 한(恨)을 종교적으로 순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체념으로 선악을 긍정하고 있음에는 아연(啞然)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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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 (그이는 온 세상을 손에 쥐셨네)
He's got the woods and the waters in His hand, (숲과 호수와 냇물이 그의 손에 있네)
He's got the sun and the moon in His hand, (해와 달이 그의 손에 있네)
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 (온 세상을 손에 쥐었네)
He's got the birds and the bees right in His hand, (새와 꿀벌이 그의 손에 있네)
He's got the beasts of the field right in His hand, (들짐승 모두가 그의 손에 있고)
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 (온 세상이 모두 그의 손에 있네)
He's got you and me right in His hand, (당신과 내가 그의 손 안에 있고)
He's got everybody in His hand, (그는 모두를 그의 손으로 쥐었네)
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 (온 세상을 손에 쥐셨네.)
Swing Low, Swing Chariot (천천히 간다, 수레가 간다)
Comin' for to carry me home. (내 본향으로 나를 태우고 간다)
I looked over Jordan and what did I see, (바라보니 요단강, 환히 보였네)
Comin' for to carry me home, (내 고향으로 나를 태우고 간다)
A band of angels a-comin' after me, (천사들이 내 뒤를 따르며)
Comin' for to carry me home. (내 본향으로 나를 인도하네)
Oh, if you get there before I do, (아, 당신이 먼저 거기 가거든)
Comin' for to carry me home- (내 본향으로 나를 인도해 주오)
Just tell all my friends I'm a-comin' too, (내 친구들에게 나도 간다고 말해 주오)
Comin' for to carry me home. (내 본향으로 나의 수레는 간다.)
덜거덕 덜거덕 수레가 천천히 도도히 나를 싣고 고향으로 간다. 고향 아프리카를 떠나와 노예생활에 종사하던 그들은 늘 혈육의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리고는 노예의 인생살이가 다 끝난 후 차별 없는 삶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그리었을 것이다. 흑인들의 영육(靈肉)의 두 고향[천당과 아프리카]을 함께 담은 이 노래는 작가미상이라 하나 사실은 노예흑인 대중이 공동으로 다듬어낸 간결(簡潔)한 걸작이다.
이태백은 자기를 적선(謫仙) 곧 ‘귀양 온 신선’이라고 생각했다. 그이 뿐 아니라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세상살이를 귀양살이에 비했다. 함석헌 선생도 때때로 그렇게 생각했다. 나 또한 어떤 때는 그렇게 느낀다.
귀양살이를 하라고 내보낼 때, 머리와 팔다리, 두뇌와 눈과 귀, 피부와 분비물과 식욕과 성욕 기타 모든 것을 주면서 나를 여기로 떠밀어 보내었어라. 어떤 사람은 (부품을 깜박 잊었는지) 병신인 채로도 보내졌다. 그렇지 않고 온전하게 파견된다면 그런 행운이 없는 게다.
흑인 노예가 될 수도 있었겠으나 그런 변을 피하여 성하고 다행한 심신으로 흑인영가를 감상하는 축에 나 자신은 끼어 있음을 발견한다. 흑인노예로 태어났더라도 어쩔 수 없다. 노예로 살면서 그런대로 인생을 즐기기다. 반항하다가 인두로 몸을 지져서 길들여져서 일하고 생존했던 그런 노예생활이라도 죽는 것보다는 나았을까?
멀리 가지 않더라도 가까이에 지독한 노예제도, 노예생활이 있다. 북한에 태어났더라면 거기 적응하여 노예로 살고 있을지 혹은 반항하다가 살해당했을는지 모르는 일이니 생각하면 끔찍하다. 우리는 작심하고 힘써서 거기 노예가 된 동포들을 구출해야 한다. 그냥 둘 수 없다. 최선을 다해 구출해야 한다.
위에서 나는 흑인 영가를 들으면 생명의 비극적임과 오묘함에 숙연해진다고 했는데, 이는 무슨 뜻인가? 흑인으로 태어나 만일 그때 백인 노예사냥꾼에게 붙들렸더라면 그렇게 노예로 일생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역사가 실제로 성립했고 흘러갔다. 넉넉히 미국은 그렇게 산업이 유지되어 왔다. 그래서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미국에 가면 흑인 후손들이 그만 하면 행복하게 살고 있다. 흑인영가를 부를 때 그들은 행복하게 부른다. 그런 것이 다 생명의 오묘함이다.
그러나 비극적 오묘함이다. 삶의 그 되어가는 밑바닥을 보면 ‘비극적이다’라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연극이 대개 비극이었음에 생각이 미칠 때 나는 그들이 얼마나 생의 진상(眞相)을 깊이 들여다보았는지를 느끼고 감탄하게 된다. 그런 비극적 삶을 우리는 기특하게 여기고 감수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자연이고 당연이다.
발칸반도를 맛보다 (계속)
강 병 조
3.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해를 끼고 있는 아름답고 부유한 나라이다. 아드리아해는 해변도시 아드리아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아드리아 도시는 지금은 해변이 아니고 내륙도시로 변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는 1185개의 섬을 가지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중 하나였으며 1991년에 독립하였다. 독립과 내전 등을 통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주변국들의 난민들이 유입되어 불안정한 상태였으나 지금은 우리나라와 비슷한 GNP 2만불의 부유한 나라로 내년에 EU국가에 가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크로아티아의 인구는 약 440만 명 정도이고 면적은 한반도의 1/4인 56,538 평방 km이다. 수도는 자그레브이며 약 70만 명의 인구가 여기에 살고 있다. 주요 민족은 같은 슬라브 민족이지만 크로아티아인이 89%이고 세르비아인이 5% 정도라고 한다. 주요 언어는 크로아티아어, 영어, 이태리어 그리고 독일어가 사용된다. 종교는 가톨릭이 87%이고 세르비아정교가 5% 정도이다. 주요 산업으로는 섬유, 화학, 기계, 조선, 관광 등이며 농업과 목축도 많이 하고 있다. 넥타이의 시조가 크로아티아라고 한다.
크로아티아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궁전과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이집트와 수메르 문화의 흔적들로 보이는 유적들도 남아 있어 그 고고학적 의미가 크다.
마르코폴로가 크로아티아의 하나의 섬인 코르추카섬(당시는 베네치아의 지배 받음)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그는 12세에 원나라에 가서 17년 살다가 베네치아로 귀국하였다. 제노바와 베네치아 전쟁 때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있으면서 같은 방 포로들에게 중국에서 본 것들을 과장해서 이야기 했는데, 이것을 포로들 중 한 명이 기록으로 남긴 것이 그 유명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라고 한다. 마르코 폴로는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다고 한다.
6월 6일 오전은 비엔나를 구경하고 오후에는 자그레브로 왔다. 우리들의 숙소인 Four Points By Sheraton Hotel에 도착하니 젊은 아기씨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즐겁게 웃으며 야단법석이었다. 알고 보니 여고 졸업식을 하고 파티를 이 호텔에서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성인식을 하는 것 같았다.
자그레브는 13세기 오스만 투르크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성벽에 둘러싸인 그라데츠와 16세기에 요새화된 성직자 마을 카프톨, 이 두 마을이 결합해서 세워졌다. 1093년 로마 가톨릭 주교 관구가 되면서 유럽 지도상에 등장했으며, 오랫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 후 아드리아해와 발칸반도로 이어지는 도로와 철도망이 발달해 동/서유럽을 연결하는 교통요충지 구실을 했지만 1991년부터 1996년까지 종교와 인종 갈등으로 비극적인 내전을 겪기도 했다. 크로아티아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고 소박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중이다.
크로아티아의 영웅 반 젤라치크의 동상이 있는 반 젤라치크 광장을 구경하였다. 이곳은 자그레브에서 가장 번화한 곳으로 궁전과 카페들로 둘러 싸여 있고, 여름에는 민속축제가 자주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성 스테판 성당과 성 마르크 성당도 구경하였다. 성 마르크 성당은 자그레브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으로 독특한 모자이크 문양의 지붕이 인상적인데 왼쪽 문양은 크로아티아, 오른쪽 문양은 자그레브를 상징한다고 했다.
6월 8일 전쟁터였던 보스니아를 지나 아드리아해의 진주이며 세계문화유산인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로 이동하였다. 해변가이며 구시가지 바로 옆에 위치한 그랜드 빌라 아르헨티나 호텔에 투숙하였다. 저녁을 한 후 생음악을 들으며 맥주 한 잔 하면서, 아드리아해와 구시가지의 성벽과 지붕들이 보이는 밤 풍경을 호텔 발코니에서 구경하는 것도 멋진 여행의 일부였다.
이 도시는 7세기에 도시가 만들어져 Ragusa공화국이 되었으며,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유일하게 경쟁했던 해상무역 도시국가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 거리는 온통 대리석으로 덮여있어 세련된 유럽거리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였다. 코발트 빛의 아름답고 따뜻한 해변에는 부호들의 요트가 가득할 만큼 유럽 관광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매력적인 도시이다.
플라차 거리는 서쪽의 파일 게이트에서 동쪽의 플로체 게이트까지 이어지는 구시가지의 중심거리로 대리석으로 된 바닥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로 인해 매끄럽게 닳았다. 아름다운 길을 따라 상점과 노천카페가 늘어서 있고 항상 관광객으로 가득한 곳이다. 스폰자궁, 렉터궁전, 대성당, 프란체스코 수도원, 올드 항구를 둘러보았다.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높이 25m, 두께 최대 6m, 둘레 2km에 이르는 견고한 성벽이 있다. 이 성벽에 올라가면 아드리아 해안과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버스로 오면서 이미 구시가지와 성벽 전체를 산 위에서 조망하였고, 땡볕에 성벽을 걷기보다는 배를 타면서 이 도시 전체를 관망하려고 배를 탔다.
6월 9일 오후에는 달마시안의 황홀한 꽃 스플릿으로 이동하였다. 달마시안이란 진도개 비슷한 개의 이름이다. 다리가 길고 털이 짧은 귀족 개이며 스플릿 지방이 원산지라고 한다. 그리하여 스플릿 주위 지방들을 달마시안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6월 10일 오전 디오클레시안 궁전의 내부를 관람하였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시아누스가 건설한 3만 평방 m(약 1만평)에 달하는 궁전으로 아드리아해 연안 최대의 로마 유적이었다. 디오클레시아누스가 이곳에서 출생하여 로마의 황제가 되었으며, 죽기 10년 전에 후임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와 이 궁전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로마황제가 이태리에서 선출되지 않고 발칸반도에서 선출되었다는 사실에도 필자는 새삼 놀랐다. 그는 로마를 다스릴 때 독재를 많이 해서 그의 사후에는 이 궁전이 파괴되었고 동네 아이들의 축구 놀이터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하며, 일부는 성 도미니우스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지금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궁전 밖에는 그레고리우스 닌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10세기 경 크로아티아의 주교로 크로아티아인들이 자국어로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주장했던 인물이라고 했으며 그의 동상 왼쪽 엄지 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이 있다.
6월 10일 오후에는 트로기르로 이동하여, 성 로렌스 성당, 성 도미니크 수도원 그리고 카메를렝고 요새를 구경하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은 1979년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록된 국립공원, 각도에 따라 다른 색깔로 빛나는 16개의 신비한 호수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90여 개의 폭포 줄기, 호수 위 나무다리까지 마치 요정이 사는 동네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국립공원의 면적은 295평방 km, 호수는 2평방 km로서 물빛은 투명한 파란색에서부터 초록색까지 물의 깊이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 국립공원은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적 가치를 지닌 곳으로 평가 받는다고 했다.
4. 슬로베니아
6월 11일 아름다운 아드리아해변을 끼고 크로아티아를 벗어나 슬로베니아로 갔다. 슬로베니아는 인구 200만 명 정도로 EU에 가입되어 있으며 제약산업 등으로 잘 사는 나라였다. 오전에 포스토니아 동굴로 이동하였다. 이 동굴은 길이가 20 km에 이르는 세계에서 두 번째 큰 동굴이며 신비한 카르스트 동굴로 ‘브릴리안트(Brilliant)’로 불리는 석순이 유명하며,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콘서트홀도 있을 만큼 거대한 규모이다. 19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으며, 1959년 관광용 전동기차를 설치하여 기차를 타고 동굴 내를 구경할 수 있는 슬로베니아 최고의 관광지이다.
오후에는 아름다운 호수 마을 블레드로 이동하였다. 블레드 호수는 율리안 알프스 산맥에 둘러싸인 길이 2,120m, 폭 1,380m, 최고 수심 30,6m에 달하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호수로 많은 별장과 호텔들이 둘러싸고 있다. 호숫가에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 위에 우뚝 솟아있는 요새와 같은 블레드 성이 있다. 이 성은 800여 년 동안 유고슬라브 왕가의 여름별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김일성도 한 때 여기에 와서 머물렀다고 한다. 호수 건너편에는 티토의 별장이 보였다.
티토는 어머니가 슬로베니아인이고 아버지는 세르비아인이라고 한다. 티토는 슬라브 민족주의를 부르짖으며 유고(남쪽)슬라비아(슬라브민족) 연방국을 만들어 40년 독재를 하였으나 후계체제를 갖추지 못하여 그의 사후 이 연방 6개국들은 분열되고 말았다. 티토는 루블랴나 평원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6월 11일 저녁에는 슬로베니아의 수도인 루블랴나로 이동하여 광장에서 벌어지는 연극제를 구경하였다.
5. 여행 소감
발칸반도에 서서 오스트리아, 보스니아 그리고 한반도를 비교해보며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동족 단합과 동족 분열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남을 지배하는 민족은 이념과 종교를 만들어 본 민족이다. 남에게 지배를 받는 민족은 패배의식이 강하고, 남이 만든 이념과 종교에 세뇌되어 남의 종 노릇만 하며, 같은 민족이라도 이념과 종교가 다르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다. 남을 지배하여 본 민족은 이념과 종교가 달라 서로 마찰이 생기면 새로운 이념과 종교를 만들어 낸다. 오스트리아가 <중립국가>라는 새로운 이념을 만들어 자기들끼리는 뭉쳐 독립국가를 만든 것이 좋은 예이다. 영국이 로마 가톨릭에서 벗어나 새로운 <성공회>라는 자기들의 종교를 만든 것도 좋은 예이다.
남을 지배해 보지 못하고 지배만 당해 본 민족은 <독립정신>이 없고, 독립해야겠다는 마음 가짐이 없고, 민족 주체성이 약하다. 지금 이대로도 나는 편하게 사는데 뭐 하러 고생하고 세금 내면서 꼭 통일 독립국가를 만들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안주한다.
이념과 종교는 누가 만드나? 결국 인간이 만들고 그 나라 국민의 정신이 만드는 것이 아닌가! 남을 지배해본 독일, 오스트리아,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승전국들의 분할통치 및 신탁통치를 받고 경제적으로 피폐했으나 오늘 같이 부국으로 다시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라 국민 모두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통일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정부를 믿고 한데 뭉쳐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아닌가. 정부는 물론 독재를 하지 않았고 국민을 착취하지 않았으며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에도 신경을 써서 국가 간 신뢰를 회복한 것이 중요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그 나라의 독재자도 결국 국민이 만들어 낸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일행 중 한 명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 같은 독재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런 독재자가 탄생한 것에 우리 국민의 책임은 없는가? 아이티 국가,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들 그리고 중동의 많은 나라에서 독재자가 나라를 다스리며 부정부패를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에 국민들의 책임은 없는가? 물론 가난하고 힘없는 국민들은 자기 입에 풀칠하기 바빠서 국가 전체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 모두의 정신상태, 주인의식, 이념과 종교를 넘어 하나의 독립국가를 형성해야겠다는 정신이 오스트리아와 보스니아의 차이점이었고, 또한 우리나라와의 차이점이었다는 것이 필자가 발칸반도에서 새롭게 느낀 소감이었다.
(배성병원 신경정신과 제1과장/경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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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지 시 항 : 2011년 7월 모임
1木 모임 -- 2011년 7월 7일 (목) 7 시
3木 모임 -- 2011년 7월 21일 (목) 7 시
장소: 경북대학교병원 606병동 7층 회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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