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이야기 / 이성복
수주일 전 아내와 동네 뒷산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내려오는 길에,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 밑둥치에 녹슨 쇠못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현수막 같은 것을 걸만큼 높은 위치도 아니었는데, 거기 왜 그렇게 많은 쇠못이 박혀 있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손으로 그 못들을 잡아 돌려도 꿈쩍도 않아, 길 옆 돌 부스러기를 집어 못과 못 사이에 넣고 이리저리 돌려보니, 그 가운데 몇 개는 빠져 나왔다. 남은 대 여섯 개의 녹슨 못은 나중에 장도리를 가져와 뽑아 줘야지 하고는, 이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그 약속이 되살아난다.
또 어느 해 가을인가는 묘사를 지내러 고향 선산에 올랐다가 녹슨 철사줄로 칭칭 동여맨 소나무 몇 그루를 보았는데, 비록 야산이기는 했지만 꽤 깊은 산중에 누가 무슨 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도 몇 가닥은 풀어주었지만, 깊이 옥죄어 나무의 살과 한 덩어리가 된 녹슨 철삿줄을 잡아 빼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상처가 오래 되면 상처 준 것과 받은 것이 서로 살 섞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니, 빽빽한 잡목림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나무의 일만은 아닌 듯 싶어 못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기야 누군가 무슨 일로 그 나무들에게 못을 박고 철사줄을 동여맸으리라. 그러나 일이 끝나고서도 못과 철사줄을 걷어낼 생각이 아예 없었으니, 어떤 기약도 없는 세월 동안 제 몸의 상한 자리를 바라보고 견디어야 하는 나무들의 심사는 어떤 것이었을까. 나에게는 심하게 비틀린 나무들의 상처 그것보다, 물끄러미 제 상처를 바라보고 견디어야 하는 나무들의 희망 없음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무들은 내가 느낀 그 고통을 애초에 느껴본 적이 없으며, 또 어쩌면 나무들의 고통을 생각하는 나의 고통이 더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이들을 야단치고 나면 자기 전에 꼭 풀어주고 재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비슷한 까닭에서였을 것이다. 녀석들이 아직 어렸을 때, 깊은 밤중에 깨어보면 몹시 혼나고 매까지 맞은 아이가 불도 안 끄고, 맨바닥에 팔을 위로 뻗힌 채 옹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아이는 많이 울다 제 서러움에 지쳐 잠들었을 테지만, 꿈속에서도 삭지 않은 괴로움과 노여움으로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잔상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 그것은 다리에 쥐가 난 상태로 헤엄을 치는 것과 같아서, 맺힌 마음을 풀어주기 전에는 아이의 잠이 편할 리 없다.)
하기야 내가 못을 빼주고 쇠줄을 벗겨준 나무는 한두 그루에 지나지 않고,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그 비슷한 처지의 나무가 어디 한두 그루 뿐이겠는가마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쉽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끝없는 바닷가에서 파도에 밀려온 불가사리들을 집어 바다로 돌려보내는 한 노인에게, 누군가 세상엔 이런 불가사리가 한둘이 아닐 것이니 무슨 소용이냐고 묻자, 노인은 '그래도 이 불가사리에게는 세상 전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처럼 별다른 생각 없이 보살펴 준 나무들 하나 하나에게 내 보살핌은 세상 전부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 몇 그루 나무들에 대한 나의 보살핌은 수없이 많은 다른 나무들에 대한 무감각과 무의식적인 해꼬지에 비해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러기에 그 보살핌이 나의 뇌리에 더욱 깊이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동네 뒷산에서 아내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운동기구는 아카시아 생목을 베어 두 나무 사이에 철삿줄로 고정시켜 놓고, 그 위에서 발을 구르게 해 놓은 것이다. 내가 뜀뛸 때마다 아카시아나무는 미친 듯이 춤추고, 나무와 나무가 부딪치는 자리는 수없이 닳아 사포로 갈아놓은 듯 깊이 패였다.
또 언젠가 '나는 생명이요 길이었으니' 어쩌구 하는 성가를 흥얼거리며 산 속 배드민턴장 근처를 지날 때, 런닝 차림의 사내 둘이 히히닥거리며 제법 굵은 나무 하나를 톱으로 베어내고 있었다. 하도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왜 멀쩡한 나무를 그러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이 놈의 아카시아 나무 때문에 옆의 소나무가 자라지 못해서 그런다고 말했다. 나는 '아, 그렇군요' 하고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내려왔지만, 그 후로도 잘린 나무의 무표정한 둥치를 지날 때마다, 그날 톱질이 덜 된 채 서서히 기울어지던 나무의 푸른 몸체를 잊을 수 없다.
그러니 고통받는 나무들에 대한 어설픈 연민으로 무얼 어쩌겠다는 건가. 오만 가지 기이한 모양으로 비틀어 분재해 놓은 나무를 보면 너무 잔인해서 토할 것만 같아도, 화분에 식물을 키우거나 병에 꽃을 꽂는 것 또한 정도 차이는 있지만 마찬가지 잔인한 일이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사람 곁에서 당하는 것이 소나 닭뿐이겠는가. 대체 사람과 함께 있는 것들은 대대로 저주받은 종족이어서, 그들이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그 저주로부터 풀려날 길 없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저주는 영원히 완성된다.
이맘때 나는 흔히 '호랑이 꼬리'라고 불리는 포항 장기곶 바닷가 보리밭 사이의 다섯 그루 소나무를 생각한다. 그 나무들이 이루는 풍경은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묘한 것이다. 눈이 없는 나무들이 단지 서로를 알고 느끼면서, 서로의 몸으로 이루어낸 그 아름다운 풍경을 나무들 자신은 결코 보지 못하리라. 어쩌면 볼 필요조차 없으리라. 머지 않아 그곳에도 개발의 붐이 일어 소나무들이 베어지고 만화의 성곽 같은 조잡하고 유치한 러브호텔들이 들어서리라.
이성복 시인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이성복 시인은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여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백일장에서 상을 타기도 했다. 경기고교에 입학하여 당시 국어교사였던 시인 김원호를 통해 글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이때 《창작과 비평》에 실린 김수영의 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1971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하여 문리대 문학회에 가입하여 황지우, 김석희, 정세용, 진형준 등과 친분을 쌓았고 1976년 복학하여 황지우 등과 교내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평가하는 말로 “철저히 카프카적이고 철저히 니체적이며 철저히 보들레르적”이었던 시인은 1984년 프랑스에 다녀온 후 사상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 그리고 논어와 주역에 심취했다. 그 결과로 1989년 「네르발 시의 역학적 이해」로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하고 1991년 프랑스 파리에 다시 갔다. 다른 삶의 방법에 대한 모색의 일환으로 시인은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와 함께 후기구조주의를 함께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테니스. 시인에게 마치 애인과도 같은 테니스는 그에게 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의 삶을 보다 즐겁게 만들었다. - 예스24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