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51회 대현 율곡 이이 선생제
2011.11.11.
강릉에서 개최되는 제51회 대현율곡이이선생제 10월 25일 서제, 26일 본제에 다녀왔습니다. 늦었지만 간단히 정리하여 올립니다. 작년 50회 때에는 게을러서 서제(참조☞: 제50회 대현 율곡 이이선생제 서제)만 올리고 정작 본제는 올리지 못했네요. 행사가 있는 것을 알고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참석합니다만 이번 행사는 50회에 비해서는 규모가 조금 축소된 것 같았습니다. 올해는 행사 때에 후손 석에 조용히 앉아 있어 사진은 많이 촬영하지 못했네요. 후손이 많이 참여하지 못한 것 같은데 초기 1, 2명 때에 비하면 많이 참석한 것이라 합니다.
서 제 : 2012. 10. 25(목) 18:00 본 제 : 2012. 10. 26(금) 10:00 장소 : 오죽헌 문성사 주최 : 강릉시 주관 : 대현 율곡 이이 선생제전 위원회 후원 : 강원도, 강원도 교육청, 강릉 향교, (사)율곡 연구원, 강원일보사, 강원도민일보사, 강릉신문사, KBS 강릉 방송국, 강릉 문화방송(주) GTB 강원민방, CJ 헬로비젼 영동방송, CBS 영동방송 |
오죽헌 입구
주소: 강원 강릉시 죽헌동 201, TEL: 033-640-4457
매표소
행사 때에는 매표소 운영하지 않는 듯하다.
오죽헌 맨드라미
맨드라미가 많이 모여 피어있는 것을 정말 오랜만에 본다.
율곡 이이 동상과 신사임당 동상
율곡 이이 동상과 신사임당 동상에 들러 참배를 올린다.
동상과 주변 가을 풍경이 멋들어지게 어울린다.
사임당(師任堂) 신(申)씨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난을 면한 아버지 신명화(申命和)와 어머니 용인(龍仁) 이(李)씨의 다섯 딸 가운데 사임당은 둘째 딸로 1504년 음력 10월 29일에 이곳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나 1551년 5월 1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48세이다. 덕수(德水) 이씨 원수(元秀)에게 출가하여 일곱 남매를 두었고 우리나라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이르는 율곡은 셋째 아들이다.
사임당은 우리 역사에서는 다시 찾을 수 없는 여성으로 부덕(婦德)은 만인의 사표(師表)가 되었고 천부(天賦)의 자질이 남달리 비범하여 여공(여공)은 말할 것도 없고 글씨, 그림, 학문, 예술에 이르기까지 천재가 발휘된 작품과 업적이 오늘까지 남아 전하여 뒷세상 사람의 우러름을 받고 있다.
사임당은 율곡과 같은 거벽(巨擘)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매창(梅窓)과 옥산(玉山)과 같은 자녀를 두었으니 이들은 다 어머니의 자질과 훈도(薰陶)에 연유(緣由)하여 서예나 그림에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남성은 서로 견주어지는 인물이 있으나 여성으로서는 사임당과 견줄 인물을 찾기 어려우니 사임당은 우리 민족의 만세(萬世)의 여성상이라 이를 것이다.
글쓴이: 최승순, 세운이: (사)율곡학회, 신사임당 동상건립추진위원회
만든이: 최옥영, 도운이: 강원도, 강릉시
2008년 12월 30일
오죽헌 가을 풍경
오죽헌 유래(烏竹軒 由來)
오죽헌(烏竹軒)은 1505년 형조 참판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집이었다. 최응현은 강릉 조산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북평촌으로 옮겨왔는데, 둘째 딸이 이사온(李思溫)과 혼인하자 이 집을 둘째 사위에게 물려주었다. 이사온과 최씨(최응헌의 딸) 사이에 용인 이씨만이 태어났는데, 용인 이씨는 서울 사람인 신명화(申命和)와 혼인하였다. 용인 이씨는 혼인 후 서울에서 살았으나 친정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강릉에 내려왔다가 그 길로 계속 강릉 오죽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사임당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사온이 죽자 이 집은 외동딸이었던 용인 이씨가 물려받게 되었다. 이씨는 딸 다섯을 두었는데 그 중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은 서울 사람 이원수(李元秀)와 혼인을 하였으나 홀로 남은 친정어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북평촌에 머물러 지내는 때가 많았기 때문에 율곡(栗谷) 이이(李珥)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는 다섯 딸에게 재산을 물려줄 때,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에게 외가댁 묘소를 보살피라면서 오죽헌 기와집과 주위 전답을 주었다. 권처균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기와집 주위에 까마귀와 같이 검은 대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고 했다. 오늘날 오죽헌은 율곡의 이종사촌 동생인 권처균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재산상속이 장자 우선의 원칙으로 일관되어 오던 조선 후기와는 달리, 조선전기만 하더라도 균분상속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모든 자녀가 재산을 고루 분배받았으며, 부부라 하더라도 상속받은 재산은 따로 관리할 수 있었다. 이렇듯 조선 초기 재산상속의 관행에 따라 최응현의 집은 그 딸을 거쳐 권처균에게 상속되었던 것이다. 그 후 오죽헌은 권처균의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어 오다가 강릉시가 인수하면서부터 강릉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오죽헌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대청과 방으로만 이루어진 조선 초기의 별당 건물로,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심포양식(柱心包樣式)에서 익공양식(翼工樣式)으로 변해가는 건축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물로 평가받아 1963년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1536년 이곳 몽룡실(夢龍室)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났다.
주변 건물로는 어제각, 문성사, 안채와 바깥채, 율곡기념관이 있는데 이 건물들은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부터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면서 정비된 것들이다. 오죽헌 정화사업 때 오죽헌 내에 있던 건물 중 오죽헌과 바깥채를 제외하고는 모두 헐렸으며, 율곡의 영정을 봉안할 사당 문성사(文成詞)와 율곡 일가가 남긴 작품을 전시할 율곡 기념관이 신축되었다. 이때 헐린 어제각(御製閣)은 1987년에 복원되었다. 원래 어제각은 율곡이 저술한 <격몽요결>과 어릴 때 쓰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한 집으로, 1788년 정조대왕의 명에 의해 지어졌다.
자료 출처: 51회 대현 율곡 이이 선생제 팸플릿
율곡기념관
문성사
서제가 열릴 문성사에서는 예행 연습이 한창이다.
오죽헌 오죽
오죽헌에는 대가 까만 오죽이 많이 자라고 있다.
어제각
관광객들이 기념 촬영을 많이 하고 있다.
어제각(御製閣)
율곡 이이의 저서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어린 시절 사용하였던 벼루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1788년 정조 임금은 율곡이 어렸을 때 쓰던 벼루와 친필로 쓴 <격명요결>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것을 궁궐로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본 다음, 벼루 뒷면에는 율곡의 위대함을 찬양한 글을 새기고, 책에는 머리글을 지어 잘 보관하라며 돌려보냈다. 당시 임금의 명을 받은 강원도 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이를 보관할 수 있는 집을 지었는데, 그것이 어제각이다.
오죽헌의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고 까치 밥 감도 주렁주렁 달렸다.
구권 오천 원권 촬영 지점
오죽헌 바닥에는 구권 오천 원권에 나오는 오죽헌 배경 사진 촬영 지점이 있다.
사진은 그곳에서 촬영한 것인데 내일 대제 행사 구조물도 보인다.
율곡 이이 선생제 서제 후
서제 관련 글은 작년 행사(참조☞: 제50회 대현 율곡 이이선생제 서제)
참조바랍니다. 서제를 마치고 음복하는 참배객들의 모습이다.
600여 년 된 배룡나무가 어둔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
율곡 이이 선생제 대제
대제 행사를 위해 행사 요원들이 준비를 하고 있다.
▣ 제 례 순 서 ▣ 1. 개식(開式) 2. 국민의례(國民儀禮) 3. 제례(祭禮) 강신례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 음복례 사신례 망료례 4. 추모사 낭독(追慕辭 朗讀) 5. 행장기 낭독(行狀記 朗讀) 6. 한시 백일장(漢詩 白日場) 시상식(施賞式) 7. 율곡(栗谷)의 노래 8. 폐식(閉式) |
현무를 준비하는 학생들
행사 참배객
올해 전체 촬영한 사진이 없어 작년 행사 사진입니다.
율곡 이이 선생제 대제를 올리는 모습
강릉시장 추모사 낭독
후손석에서 촬영 확대하여 사진이 조금 흐리네요. ㅜ.ㅜ
추모사(追慕辭)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그리고 함께 하신 내빈 여러분!
우리는 오늘, 제51회 대현율곡이이선생제를 맞아, 겨레의 스승이신 선생의 높으신 뜻과 정신을 따르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먼저, 부강한 나라, 백성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생을 바치신 선생의 영전에 삼가 머리 숙여 명복을 빕니다.
선생께서 떠나신 지 올해로 428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만, 그 선구적이고 통찰력 있는 발자취와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중한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동서로 나뉜 당쟁의 분란을 조정하고 대동법과 사창제를 장려하여 민생안정과 사회개혁에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소통과 화합의 율곡 사상은 우리 사회의 지역간, 계층간의 갈등을 치유하는데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특히, 다가올 국난을 예견하고 10만 양병을 주장하신 혜안은 우리에게 자주국방과 유비무환의 정신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선생께서는 우리 민족, 우리 후손에게 올바른 지혜와 참된 용기를 주신 위대한 선각자이자 등불이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고귀한 뜻과 정신을 이어받아 미래 강릉의 희망찬 목표를 세우고 한 걸음씩 당당히 나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그토록 염원했던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동해안권 경제자유구역 예비지정 등을 우리는 대동단결을 통해 마침내 이뤄냈습니다. 강릉 위주의 철도건설, 비철금속산업 육성, 녹색 도시 건설 등도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강릉의 50년 100년 미래를 담보할 가장 중요한 시점입니다. 대동단결을 통해 번영과 도약의 빗장을 열겠습니다.
자랑스러운 율곡의 후예로서 도전하고 개척하고 창조하면서, 밝고 희망찬 강릉시대를 열겠습니다. 강릉을 대한민국의 중심에, 세계의 중심에 우뚝 세우겠습니다. 강릉시민의 위대한 힘으로 제일 강릉의 저력과 명성을 세계에 널리 알리겠습니다. 선생께서도 저희 앞길에 희망의 빛을 주시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다시 한번, 율곡 선생님께 한없는 존경과 추모의 정을 바치며,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2012. 10. 26.
강릉시장 최명희
강릉 교육지원청 교육장 이영자 행장기 낭독
이 사진도 멀리서 촬영하여 확대하였습니다. ㅜ.ㅜ
율곡 선생 행장기(栗谷 先生 行狀記)
오늘 정성을 모아 제향(祭享)을 받드는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은 지금부터 475년 전 조선 중종 31년 서기 1536년 음력 12월 26일 지금 이곳 오죽헌(烏竹軒) 몽룡실(夢龍室)에서 덕수(德水) 이원수(李元秀) 공과 정경부인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삼남(三男)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아명을 현룡이라 하였고 세 살 때 언어와 문자를 배웠으며, 일곱 살에는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여덟 살에는 화석정시(花石亭詩)를 지었고, 열 살에는 심오한 철학이 담긴 천자가 넘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어 고금의 세인을 경탄시킨 신동으로 알려졌습니다.
열세 살 때 이름을 이(珥)라고 개명, 자를 숙헌(淑獻)이라 하셨습니다. 열여섯 살에 어머니 신사임당께서 돌아가시자 삼 년간의 시묘를 하신 후 봉은사에 들어가 불교경전을 탐독하고 수도 일 년 만에 불교 철학을 통달하였습니다. 스무 살에 오죽헌에 돌아와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입신행도(立身行道)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스물두 살에 성주목사 곡산 조경린의 따님과 혼인하셨습니다.
선생의 과거시험 행적은 열세 살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장원(壯元)한 것을 비롯하여 아홉 번의 크고 작은 과거에서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렸습니다. 스물한 살에 한성시(漢城試)의 장원급제와 스물세 살 겨울 별시(別試)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급제하시어 그 이름을 외국까지 널리 떨쳤으며, 또한 스물아홉에 문과(文科) 전시(殿試)에 장원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시작으로 지방에서는 청주목사,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셨으며, 중앙에서는 교리, 승지, 부제학,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과 사조(四曹-호조, 형조, 병조, 이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셨고, 서른세 살(1568년 선조 1년)에는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다녀오기도 하셨습니다.
선생은 학문과 입신(立身)의 도(道)를 배움에 있어서 어머니 신사임당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가르침을 받은 바 없고, 오직 독학과 수도로서 심오한 학문의 경지에 이르셨으며, 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를 비롯하여 교육, 정치, 경제, 사회, 철학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저서를 많이 남기셨습니다.
선생의 정치사상은 우국애민을 지향하는 민본주의이며 혁신주의로써 삼대(三代) 정경정책(政經政策)인 시무육조(時務六條), 양병십만(養兵十萬), 경제사 설치를 주장하였으며, 향약(鄕約), 회집법(會集法)을 제정하여 지방자치제를 장려하였고, 사창제도(社倉制度)를 만들어 빈민 구제에 힘쓰셨습니다. 정계를 떠난 후에는 황해도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私立大學)를 세워 학도들의 나갈 바 지침인 격몽요결(擊蒙要訣)과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저술하여 후학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며, 변방을 튼튼히 하자는 육조방략(六條方略)을 최후의 글을 남기고, 서기 1584년 1월 16일 마흔아홉의 일기로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永眠) 하셨습니다.
선생은 교육지상주의를 부르짖은 교육자이며, 구국제민(救國濟民)을 위해 몸소 실천한 위대한 정치가요, 철학가요, 애국자로서 온 겨레 만대에 문묘(문묘)에 모시고 제향을 봉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선생의 구국애민의 가르침을 교훈으로 삼고자 1962년부터 제향을 봉행하게 되었으니, 오늘 그 쉰한 번째 제향을 드리는 것입니다.
2012년 10월 26일
강릉 교육지원청교육장 이영자
후손들 기념사진
행사 후 후손들만 기념 촬영 인증샷(일부는 먼저 자리를 뜸)
아내에게 부탁하였는데 잘못하여 카메라 해상도가 가장 낮은 것으로
조정 되어 촬영함. ㅜ.ㅜ
첫댓글 좋은 감상합니다
감사합니다.^^
발자취가 참 인상적입니다. 샬롬
감사합니다. 정의와 평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