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 2009. 9. 19(토) 20:00~21:00 (KBS 1TV) ▣진행 : 한상권, 엄지인 아나운서 ▣연출 : 이승하 PD ------------------------------------------------------------------------
왕권은 불안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끊이지 않던 1300여년 전 신라. 서라벌에는 그 누구보다 아들을 기다렸던 왕이 있었다. 바로 신라의 제 26대왕 진평왕.
그는 재위기간동안 끝내 왕위를 물려줄 아들을 얻을 수 없었다. 대신 왕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영리한 덕만, 온순한 천명 그리고 아름다운 선화.
이 세 자매의 삶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된다.
진평왕의 세 딸 덕만, 천명, 선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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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 이야기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 탄생하기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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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영정 |
632년 1월 신라의 화백회의에서는 역사적인 결정이 이루어진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왕의 즉위를 결정한 것이다. 바로 신라의 27대왕 선덕여왕이다. 하지만 덕만공주가 왕이 되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미 공주시절, 여왕의 즉위를 탐탁치않게 여긴 귀족들의 반란이 있었다. 칠숙·석품의 난이 그것이다. 이런 반대세력의 존재가 있었음에도 덕만공주는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
▶‘성골남진(聖骨男盡)’은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한 핑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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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성골남진(聖骨男盡)’이라 하여 왕위를 이을 성골 귀족 중 남자가 없으니 성골혈통을 지닌 덕만공주가 왕위를 잇었다고 기록한다.
선덕여왕의 즉위에 있어서 가장 큰 명분이었던 성골혈통. ‘성골’은 사실 진골과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대를 거치며 왕실의 혈통을 강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다거나 왕위를 계승할 성골의 남자가 없어서 여자인 덕만공주가 여왕이 되었다는 것은 당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었다. 사위가 왕이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이 딸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위한 명분이었던 것이다. |
▲삼국유사 권1 왕력편 |
▶시련, 수세에 몰리는 여왕 |
선덕 11년에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신라 서쪽의 대야성을 비롯한 40여개 성을 잃는 국난을 겪는다. 특히, 백제와 접한 군사상의 요충지 대야성의 함락으로 김춘추가 고구려로 목숨을 건 외교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대야성 함락으로 여왕의 버팀목들이 떠나자 선덕여왕은 정치적으로 점점 고립되어 갔다. 이 때, 왕권 다음의 위치인 상대등 비담이 여성군주는 선한 정치를 펼칠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과 전쟁, 이 혼란의 시기 여성 군주 선덕여왕은 많은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
▶선덕여왕, 불교는 힘이었다. |
선덕여왕이 정치적으로 크게 의지한 것은 불교였다. 전장에 직접 나가 싸울 수 없었던 여왕은 불교를 국가 통치의 구심점으로 적극 활용했다. 선덕여왕 대 창건되었다고 알려진 사찰은 영묘사 분황사를 비롯해 25개. 다른 왕대의 창건사찰보다 2~3배나 많다. 또한 황룡사 9층목탑, 첨성대 등 수 많은 문화유산을 남긴다. 선덕여왕은 대규모의 사찰과 탑, 첨성대 등의 건립을 통해 외부적으로 건재를 과시하고, 내부적 결속력을 다져나가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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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
▲첨성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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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 이야기 -통일제국을 이룬 왕의 어머니 |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는 바로 천명공주. 그러나 그녀의 성격이나 일생과 관련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진위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천명공주는 진평왕과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용춘과 결혼하였다. 또한 진평왕이 덕만(선덕여왕)에게 왕의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자, 천명이 효심으로 순종했다고 되어있다. 왕권에서 멀어진 천명공주는 아들을 낳는다. 이 아들이 바로 훗날 삼국의 기틀을 다지고 진골신분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 김춘추다.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즉위한 후, 어머니 천명에게 문정태후라는 시호를 올린다. 왕권 안정을 위해 결혼했던 천명공주가 죽어서 태후의 시호를 받게 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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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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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 이야기 -국경을 넘는 사랑인가, 정략적인 결혼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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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과 선화공주 조각상 |
서동(훗날 백제의 무왕)과의 사랑이야기로 잘 알려져 있는 선화공주. <삼국유사>에는 바로 이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가장 아름다웠다는 선화공주는 서동과 결혼해 백제의 왕비가 된다. 그렇다면 선화공주의 결혼은 국경을 넘는 사랑이었을까? 그들의 사랑이야기와는 달리 역사적 사실은 냉혹하다. 그녀의 남편 서동은 백제 무왕으로 즉위 후 신라를 줄기차게 공격한다. 장인인 진평왕과 한치의 양보 없는 전쟁을 치룬 것이다. 서동이 선화공주와 결혼한 것은 사위로서 신라의 왕권을 계승하고자했던 정략적 결혼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선화공주와 무왕의 이야기는 치열한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쟁시기, 평화에 대한 기원이 담긴 당시 백제와 신라의 험악한 관계를 반증하는 설화가 아닐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