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한자 문화 뜨락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中國의 文化史 스크랩 사기<史記>를 통해 본 人物들의 名言(명언)
시너먼 추천 0 조회 106 13.08.27 12: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창업(創業) 


  失敗(실패) 속에서 成功(성공)의 열쇠를 찾아라. - 사마천(司馬遷)
2세기까지 중국에서 나온 역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히는

〈사기 史記〉의 저자이다.

그는 BC 140~110년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이란

천문관측, 달력의 개편, 국가 대사(大事)와 조정 의례(儀禮)의 기록 등을 맡는 직책이었다.

사마천은 젊어서 여러 지역을 여행한 뒤에 조정의 관리가 되었고,

BC 111년 중국 남서부지방의 군사원정에 참여했다.

  BC 110년 황제가 국가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례인 봉선(封禪)을 거행하기 위해

타이 산[泰山]으로 갈 때 수행원의 자격으로 따라갔다.

그해 아버지가 죽었고,

의무적인 상례기간이 지난 후인 BC 1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BC 105년 무제(武帝)의 즉위가 한나라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중국 달력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어

사마천이 이 작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버지가 못다 이룬 꿈이었던,

중국 역사서의 집필에 착수했다.

역사서 집필에 대한 열망은

무제의 통치하에서 중국의 발전이 절정기에 달했으므로,

그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해서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겠다는 믿음으로 인해 한층 강해졌다.

그러나 역사서를 완성하기도 전에 당시 평판이 나쁘던 이릉(李陵) 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황제 비방혐의로 심문을 당했다.

무제가 그를 죽이기에는 아까운 인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마천 자신이 역사서를 완성하기 위해 처형의 연기를 간청했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아무튼 처형되는 대신 궁형(宮刑:去勢刑)을 선고받았다.

 

훗날 무제의 화가 누그러지자

다시 황실의 총애를 받아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그러나 자기가 당한 치욕을 잊지 못한 채

은퇴해서 역사서 완성에 몰두했다.

 

<사기〉의 구성과 내용

  〈사기〉는 그에게 커다란 명성을 가져다준 책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많은 역사서가 있었으며,

궁정의 연대기 기록은 이미 이전의 황실에서는 관행으로 되어 있었다.

 

작은 제후국이었던 노(魯)의 〈춘추 春秋〉가 그러한 종류이다.

공자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기록된 사건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어

유교 경전으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역사서인 〈사기〉가

이 위대한 경전 〈춘추〉와는 전혀 비교될 수조차 없으며,

자신은 공자와 같은 창작자가 아니라

단지 과거의 사실들을 전달하는 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한의 역사가로서 그의 뒤를 이은 반고(班固:32경~92)는

사마천이 여러 학파의 주장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도가사상에 몰두한 점을 비난했다.

그러나 반고 및 그의 동시대인들이 당연한 규범으로 받아들였던 유교적 도덕기준은

사마천의 시기에는 반고의 시대(1세기경)와 같은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자신과 동시대에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학파를 절충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국교(國敎) 혹은 널리 통용되는 도덕적·정치적 기준이 아직은 유동적인 상태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주술적·초자연적인 힘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내린 도덕적 평가는 어느 하나의 일관된 이론에 부합될 수 없었다.

 

〈사기〉에서 그의 주된 업적은

과거의 복잡한 사건들을 질서정연하게 기술했다는 점이다( 역사학).

그가 서술한 과거의 사실들은

대부분 각자의 연대기를 따로 가지고 있던 많은 독립적인 제후국에서 유래하는,

서로 모순되는 자료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과거의 사실들을 이전의 역사가들처럼 단순히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5부분으로 분류하여 기술하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5부분 가운데 본기(本紀)는

당시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왕실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중심으로 하여

연대순으로 기록한 것이다.

 

표(表)는

연표(年表)인데 여러 독립적인 제후국들의 복잡한 역사를 명확하게 밝혀

어떤 시기에 각 제후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각 제후국의 상세한 역사는

세가(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행정의 중요한 측면들을 다루었다.

이들 부분으로부터 그가 유교의 도덕적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보다는,

당시 점점 중앙집권화되고 있던 조정에서 새로운 정책을 추구하던

실제적·개혁지향적인 정치가들을 더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끝부분은 열전(列傳)으로

다양한 유형의 유명 인물들의 전기를 다루었다.

여기에 선정된 인물들은 여러 가지 유형의 행위에 있어서 본보기가 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열전에는

여러 이민족에 관한 사항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국과 이들 이민족 간의 관계는 무제 때 점점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사기〉는 뒷날 기타 왕조사(正史)의 모범이 되기는 했지만,

다른 정사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사기〉는 다루고 있는 시대가 훨씬 긴데,

사마천 이후의 역사가들은 이 책에서처럼 인류의 전역사를 다루려는 시도를 한 경우가 드물었다.

또한 책을 저술하기 위해 모은 자료도 훨씬 다양했다.

그는 진(秦)·한(漢)의 황실 문헌뿐만 아니라

그보다 이전에 나온 여러 역사서, 제후국들의 궁정 연대기,

경전이나 제자백가의 저술 등의 기록을 모았다.

심지어 역사적인 사실에 어느 정도 근거한 가공의 이야기까지도 자료로 이용했다.

 

이 책의 주제는

후기의 역사서들처럼 궁정 중심의 정치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훨씬 폭넓은 사회계층을 다루어

대부호·상인·협객·비적떼·배우·총신(寵臣)과

훌륭하거나 혹은 그렇지 못한 관리 등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그는 객관적인 역사를 구성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 역사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교훈적인 역사를 고집해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들에게 도덕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 다루고 있는 인물들을

특징에 따라 유형화해 어떤 인물의 본보기가 될 만한 행동을

한 장(章)에서 기록했는가 하면,

동일한 인물의 잘못된 행동을 다른 장에 기록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가 역사에서 이끌어낸 교훈은 다양한 것이었는데,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러나 사료(史料)에 대한 그의 비판적 안목이야말로 훨씬 더 주목할 만하다.

그는 각 장의 끝부분에 예리한 비판적 논평을 첨가했다.

영향

 

  그는 역사가로서 뿐만 아니라

생동감있고 유연한 산문의 거장으로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후대의 작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초기 설화문학이나 소설에 미친 영향이 컸다.

그가 살던 시대 이래로 〈사기〉는

줄곧 중국 역사서의 걸작으로 인정받아왔으며,

훗날 중국 역사서의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은 물론이고 중국 문학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던 여러 나라에서도

역사서의 모범으로 인식되어왔다.

사람이 길을 넓힌다. - 진섭(陳涉)

  陳涉은 陽城사람이고,

吳廣은 陽夏사람으로 젊었을 때 같이 머슴살이를 했다.


일단 行動(행동)에 옮기면 끝까지 가 보라. - 장건(張騫)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탁월한 탐험으로 실크로드의 개척에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으며,

서역의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했다.


創業(창업)보다 守城(숭성)이 더 어렵다. - 진시황(秦始皇)

  진(秦) 나라 시황제(始皇帝).

 '나라의 첫 황제'라는 뜻.

본명은 영정(?政).

실제로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나라의 '첫 황제'였을 뿐 만 아니라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서 '시황제'라고 불릴 만한 인물


잃는 것을 두려워 말라. - 이사(李斯)

  무자비하나 매우 효율적인 법가(法家) 사상을 이용하여

여러 나라를 합병하고,

통일제국 진(秦:BC 221~206)을 건설하는 데 공헌했다.

 

BC 247년 진나라로 가서

그후 거의 40년간 나중에 시황제(始皇帝)가 된 진왕 정(政)을 위해 일했다.

진의 승상으로서

BC 221년 이후 시행된 거의 모든 정치·문화의 급진적 개혁을 주도했다.

 

이사는 전국을 36군(郡)으로 나누었으며,

모든 군은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가 다스리도록 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시황제는 화폐단위와 도량형을 통일하고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또한 그는 천하의 모든 문자를 전서체(篆書體)로 통일시키도록 했는데,

한자(漢字)는 그후 큰 변화없이 지금까지 존속되어왔다.

 

마지막으로 불온한 사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BC 213년 역사교육을 금지하고 분서(焚書)를 명령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후대 모든 유학자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BC 209년 시황제가 죽자, 황위 계승자를 바꾸려는 환관 조고(趙高)의 음모에 가담했다.

그러나 2년 후 둘 사이에 암투가 생겼고

조고는 그를 사형에 처했다.


自慢(자만)은 沒落(몰락)의 조짐이다. - 한신(韓信)
(漢)의 개국공신 장수이다.

유방의 부하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유방의 패권을 결정지었다.

한초삼걸 중 일인이며, 세계 군사사상 명장이라 할수 있다.


  불굴(不屈)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 - 구천(句踐)

중국 춘추시대 월(越)의 왕(BC 497~465 재위).

월은 구천의 부친 윤상(允常) 때부터 인접국 오(吳)와 숙적관계에 있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구천은 쳐들어온 오왕 합려(閤閭)를 격퇴, 전사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그러나 BC 494년 합려의 유언을 받고 침략해온 아들 부차(夫差)에게 패하고 회계산(會稽山)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어야만 했다. 그뒤 명신(名臣) 범려(范)와 함께 군비를 증강하고 힘을 키우며 와신상담(臥薪嘗膽)하기를 20년, BC 473년 구천은 드디어 부차를 물리쳐 자살하게 함으로써 복수에 성공했다. 그뒤 월의 국력은 더욱 막강해져 구천은 패왕(覇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묵묵히 담금질을 견디며 力量(역량)을 蓄積(축적)하라. - 장의(張儀)

 

  장의(張儀, ? ~ 기원전 309년)는 위나라 출신으로, 연횡책의 대가이다.

친구 소진(蘇秦)과 함께

귀곡 선생(鬼谷 先生)에게서 수학한 적이 있었다.

 

그는 진나라에 등용되기 전까지

갖은 수모를 겪다가

마침내 진 혜문왕을 만나 정치 고문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재상으로 승진되었는데,

촉나라를 평정하고 위나라의 일부를 차지하는 공을 세웠다.

 

6년 뒤에 진나라와 짜고 위나라의 재상이 되었는데,

위나라로 하여 진을 섬기게 하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아니 하자

진에게 몰래 연락해 위나라가 크게 지도록 만들었다.

 

이듬 해 제나라위나라를 공격하고

마침내 진나라가 위를 공격할 목적으로

먼저 한나라를 쳐, 8만 명을 몰살시켰다.

 

이에 장의는 위나라 왕을 설득하여

소진이 이룩해낸 합종책의 약속을 깨고 진나라와 화친했으며,

장의는 다시 진으로 돌아가 재상이 되었다.

3년 뒤 위는 진을 배반하고 합종에 재가담했으나,

진이 공격하자 다시 화친했다.

 

장의는 강대국 초나라로 달려가

초를 망국의 위기에 몰아넣고,

다시 한나라로 가

그 왕을 협박, 한 역시 진을 섬기도록 했다.

 

진나라로 돌아간 그는

혜문왕으로부터 무신군(武信君)이라는 칭호를 받고 다시 제나라로 갔다.

 

제나라 왕 또한 장의의 설득을 듣고 진을 섬기게 되었으며,

조나라로 간 장의는 또한 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연나라까지 설득하여,

진나라와의 연횡책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그는 진나라로 돌아갔으나

왕이 혜문왕의 아들 무왕으로 바뀌어 있었다.

진 무왕은 어릴 적부터 장의를 싫어하였을뿐더러,

이를 눈치챈 신하들이 비방을 하기 시작했다.

장의와 왕의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이 퍼져

다시 모든 나라는 연횡책을 버리고 다시 합종책을 택하였다.

이후 장의는 자원해서 위나라로 간 뒤

1년 동안 재상으로 있다가 죽었다.

 

信念(신념)만으로는 勝利(승리)할 수 없다. - 형가(荊軻)

 

  형가(荊軻, ?~기원전 227년)는

중국 전국시대의 자객으로,

자는 차비(次非)이며 (衛)나라 사람이다.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던 인물이다.

 

형가는 전국시대 위나라에서 출생하였다.

그 후 전광을 통하여 연나라태자 (丹)을 소개받았으며,

태자 (丹)에게서 진(秦)나라 영정을 암살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에 형가는 부탁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연나라 곡창지대의 지도와

당시 진(秦)나라 사람으로 죄를 짓고 연나라로 망명 중이던 번오기의 목,

그리고 무사 한 명을 요구하였다.

 

태자 (丹)은 형가의 요구를 수락하였다.

태자 (丹)에게 승낙을 받은 형가는

번오기를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번오기에게서 목을 받아내었다.

 

다만, 형가는 처음에 요구하였던 조건 중

무사를 절친한 벗이자 검객이던 노구천(魯句踐)과 함께하기로 생각하였는데,

노구천(魯句踐)이 당도하지 않아서

연 태자 (丹)이 추천한 무사 진무양(秦舞陽)과 진왕 정의 암살 길을 떠났다.

 

태자 (丹)과 사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흰 상복으로 갈아입고,

역수(易水) 부근까지 전송을 나와 제를 올릴 때,

형가의 친구 고점리는 축을 타고,

형가는 그의 심정을 노래하였다.

風蕭蕭兮易水寒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
?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이 시구는 사기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면의 하나로,

사람들의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것을 들은 선비들은

모두 그 처절한 축과 목소리에 머리카락이 하늘로 곤두섰다고 한다.

이윽고 형가는 배를 타고 떠나며,

끝내 뒤를 뒤돌아 보는 일이 없었다.

 

진나라에 당도한 형가는

진(秦)시황제 영정에게 연나라의 지도를 헌상하는 형식을 취하며

무사 진무양(秦舞陽)과 함께 진(秦)왕 영정을 찾아뵈었다.

 

무사 진무양(秦舞陽)이 왕의 단 앞에서 떨자

형가는 직접 진(秦)왕 영정에게 연나라 지도를 해석해주겠다 하며

진시황제에게 가까이 접근했고,

미리 지도 속에 준비해두었던 검으로

진(秦)왕을 암살하려 시도하였으나

영정이 진무양(秦舞陽)을 보고 낌새를 채 결국 실패하고 죽음을 당하였다.

형가에게는 그을 따르는 또 한명의 자객 고점리 라는 인물이 있었다.

 
恥辱(치욕)을 딛고 捲土重來(권토중래) - 항우(項羽)는 不行

 

BC 232 중국 초(楚)나라~202 안후이 성[安徽省].

  중국 진나라(秦 : BC 221~206) 말기의 장수이며

秦(진)을 멸망시킨 반란군의 지도자.

 

이름은 적(籍). 자는 우(羽).

한(漢 : BC 206~AD 220)을 세운 유방(劉邦)과

관중[關中]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항우가 패함으로써 중국에서 봉건제가 일소되었다.

 

  항우는 진나라가 전중국을 통일하고 전국에 할거하던 제후국들을 폐지시킬 때

진에 흡수된 나라 가운데 하나인 초나라 유력가문의 후손이었다.

 

진에 대항하는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났을 때

항우는 삼촌인 항량(項梁)이 이끄는 초군(楚軍)에 합류했고,

나중에 그를 이어 초군의 최고 지휘자가 되었다.

 

항우가 이끄는 군대는

결국 진의 수도를 점령하고 진의 마지막 황제를 처형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옛 통치체제를 회복시키려고 했다.

우선 옛 초 왕실의 후예를 맞아 회왕(懷王)이라고 했다가 의제(義帝)로 존중해주었고,

반란에 가담했던 여러 장수들에게 전국의 여러 지역을 분봉해주었다.

 

자신은 옛 초나라의 영토에 자리잡고 패왕(覇王)으로 자처했다.

그러나 항우는 곧 의제를 살해했고,

각지의 장수들이 패권을 놓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자가

중국의 서부 지역인 파(巴)·촉(蜀)·한중(漢中)에 분봉받았던 유방이었다.

 

원래 농민 출신인 유방은

민심을 얻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차차 서쪽 지역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입지를 강화했다.

 

반면에 항우는 봉건제를 재현시키고 있었다.

그는 장신에 우람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학식을 갖춘 시인이었으며, 탁월한 군사전략가였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그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인간적 매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두 세력의 공존관계는 유방이 초를 공격함으로써 끝이 났다.

유방은 육박전으로 승부를 내자는 항우의 제안을 번번이 거절했다.

202년 항우는 패하여 포위를 뚫고 도망가던 중 자살했다.

항우의 영웅적 행동, 특히 마지막 전투에서 보여준 용감한 모습은

중국 시와 소설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소통(疏通)
通涉(통섭)의 길을 열어라. - 노자(老子)

 

BC 6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도가(道家)의 창시자.

성(姓)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또는 담(聃).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도교경전인 〈도덕경 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도가).

현대 학자들은 〈도덕경〉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나,

도교가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자는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당(唐:618~907)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의 노자전(老子傳)이다.

그러나 BC 100년경에 〈사기〉를 저술한 이 역사가도

노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했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古縣) 여향(術鄕) 곡인리

(曲仁里: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루이 현[鹿邑縣]) 사람으로

주(周:BC 1111경~255)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사관은 오늘날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BC 551~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못지않게 유명한 전설은

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이야기이다.

그는 周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는

周를 떠나 진(秦)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상편·하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도(道)와 덕(德)의 뜻을 말한 〈도덕경〉이다.

 

그리고 나서 노자는 그곳을 훌쩍 떠났고,

"아무도 그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노자가 서쪽으로 간 사실과

〈도덕경〉을 저술한 점을 언급한 뒤에

사마천은 가끔 노자와 동일시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말했다.

 

"초(楚)에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어서

책 15권을 저술하여

도가의 정신에 대해 서술한 바 있는데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다."

 

"周나라의 태사(太史)이며 위대한 점성술가인

담(?)이 진(秦:BC 384~362)의 헌공(獻公)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노자는 150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200년 이상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초인(超人)의 장수를 믿었기 때문에

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매우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뒤에 생겨난 전통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로는 BC 4세기경에 활약했던 장자(莊子)가

노자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로

사마천은 그가 은군자였음을 들었다.

은군자인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실제로 중국 역사상 속세를 떠난 은자는 늘 있어왔다.

〈도덕경〉의 저자(또는 저자들)는

생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하는 의문은

많은 학자들이 제기해온 것이지만,

그같은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현존하는 〈도덕경〉은 1명의 저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내용 가운데는 공자 시대의 것도 있지만

다른 내용은 훨씬 후대의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BC 300년경에 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의 저자가 태사 담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사기〉에 나오는 노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술이 신빙성있다고 보고

노자의 생애가 BC 4세기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노자의 가계(家系)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에

이(李)라는 가문이 스스로 도교의 성현인 노자의 후예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해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자가 실제로 존재했었는가를 조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없다.

노자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보다 특정형태의 성인집단(聖人集團)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기〉의 노자전과

기타 오래된 문헌에서

이따금씩 나오는 기술을 제외하고도

2세기 이후부터는 노자에 대한 성인전(聖人傳)이 여러 편 저술되었다.

 

이같은 전기는 도교의 형성사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후한(後漢:25~220)시대에

노자는 이미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고

때로는 황제도 그를 숭배했다.

그뒤 종교계에서 성전(聖典)의 계시자이며

인류의 구세주인 노군(老君)으로 추앙되었다.

 

노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처의 기적적인 탄생신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노자의 어머니는 노자를 72년간 임신하고 있었고,

노자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이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또다른 신화는 노자의 성(姓)이 생겨난 유래를 설명한다.

노자는 오얏나무[李木] 아래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오얏을 의미하는 이(李)가 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신화는 도교신앙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 신화에 따르면

노자는 역사상 여러 명의 다른 인물이 되어

지상에 내려와 통치자들에게 도교의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해석된다.

 

 2번째 신화는

노자의 서행(西行:함곡관으로 간 것) 이야기에서 발달된 것으로

이 신화 속에서 부처는 바로 노자라고 간주된다.

3세기경 불교의 포교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같은 이야기를 조작하여 위경서(僞經書)가 씌여졌다.

〈노자화호경 老子化胡經〉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에서 불교는 도교의 아류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대 정부는 빈번히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노자라는 인물은

모든 계층에게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유생들에게는 존경받는 철학자였고,

평민들에게는 성현이나 신으로, 도교 추종자들에게는

도(道)의 화신이자 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들 가운데 하나로 숭배되어왔다.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도덕경〉을 통해 볼 때,

노장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僞自然)에 있으며,

그것이 ''(道)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여기서 '무위'는

우주론적 정향을 지향하는 것,

즉 부자연스런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무위자연의 구체적인 의미를 말한다면

'사실 자체의 바탕 위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자체란 다름아니라 노자에게 있어서는 자연이요,

도(道)요,

기(氣)요,

변화이다.

 

그리고 무위란

그 바탕 위에 서서 떠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가질수록 비워야 가라앉지 않는다. - 기자(箕子)

 

  고조선시대 전설상으로 전하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시조이다.

이름은 서여(胥餘)·수유(須臾).

기자조선이란 기자가 동쪽으로 왔다는 기자동래(箕子東來)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그 내용은 중국의 은(殷)·주(周) 교체기에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현인(賢人) 기자가

BC 1122년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건국하고

범금8조(犯禁八條)를 가르쳤으며,

무왕에 의해 조선왕에 봉해져 단군조선을 교체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해는 오랜 연원을 갖고 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시기에는

기자가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받들어졌고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 제사를 행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기자를 성현으로 숭배하는 풍조가 유행하는 등

19세기말에 이르기까지 기자동래설은 당연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졌다.

 

기자동래설은

중국 선진(先秦)시대 문헌까지만해도

기자와 조선이 별개로 취급되었다가,

진(秦)·한(漢) 대 이후에 연결되어 동래전설이 등장하니만큼 사실로 인정하기 힘들다.

 

그리고 1102년(고려 숙종 7)에 비로소 건립되었다는

기자묘중수기적비(箕子墓重修記蹟碑)의 사료로 보아,

당시의 사대사상에 의해 조작된 설로 여겨진다.

 

지금은 기자 자체를 본래 왕을 뜻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칭호였다고 해석하는 견해,

기자조선은 부정하지만 그 기간을 예맥족이 근간이 된 예맥조선으로 설정하는 견해,

동이족 계통인 기자족의 이동과 관련하여 기자전설을 이해하려는 견해 등이 제기되어 있다.

 

3번째 견해는

다시 기자족이 평양지역까지 도착했다는 것을 전제로

기자조선을 고조선의 한 시대로 인정하는 견해와

은의 변방 소국인 기자국이

고조선 변경지역으로 이동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견해로 나누어진다.


 

極端(극단)의 화살은 자신에게 돌아온다. - 여 태후(呂太后)

 

  고황후 여씨(高皇后 呂氏, ? ~ 기원전 180년)는

전한 고조의 황후이며 전한 혜제의 어머니이다.

명은 치(雉). 자는 아후(娥?). 시호는 고황후(高皇后)였지만, 나중에 광무제가 박탈하였다.

남편인 고조 사후,

황태후·태황태후가 되어,

려후·려태후 등으로 불린다.

 

'중국 삼대 악녀'로

측천무후, 서태후와 동급으로 취급한다.

중국사상 최초 정식 황후이며,

중국 최초 황태후이자 태황태후이다.

 

  현 산둥 성인 단부의 유력자인 여공의 딸로 태어났다.

성인이 된 후에 당시 패현 사수의 정장이던 유방에게 시집 가고

여동생인 呂須는 樊?에게 시집 갔다.

 

일남일녀(혜제·노원공주)를 얻었다.

말 혼란기 초한전이 발발한 직후에는

패현에서 시아버지인 유태공이나 아이들과 같이

남편이 없는 집을 지키고

시아버지와 농사를 도와 아이들을 키웠지만,

초한전이 격화하여 팽성 전투에서 유방이 항우에게 생포된 탓에

여치는 시아버지인 유태공과 같이

초 진영에 인질로 잡혔렸지만,

혜제와 노 원공주는 우여곡절 끝에 유방과 합류하여 관중으로 도망하는 때

유방이 항우 군대에 추격에서 안전하게 벗어나고자 혜제와 노원공주를 버리려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초한전은 유방의 지배하에 있던

한신에 의거한 초 진영에 모인 각국을 대상으로 한 와해 공작과 평정,

태공과 여치의 신병 해방이 초점화 하였고

항우 측이 유리하면서도 교착 상태에 빠졌지만,

기원전 203년에 들어서서는

한신에 의거한 와해 공작이 성공하여 형세는 역전되었다.

궁지에 빠진 항우는 유방과 강화하였고

여치는 태공과 함께 유방 곁으로 복귀하였다.

 

익년인 기원전 202년,

유방은 항우를 멸망하게 하고

한조를 열어 황제[고조]가 되고

여치는 황후[여후]가 되지만,

아직 정치 상황은 유방이 스스로 반란을 토벌하지 않을 정도로 불안정하였고

궁중에서는 후계자를 놓고 암투가 벌어진 상황에서

남편이 원정으로 부재한 중에

여후는 한신을 반란을 시도하였다고 모함하여 살해하는

일변 자신의 친정인 여씨 일족과 중신 장량에게 도움받아서

황태자가 된 유영의 지위를 안정화 하려고 진력했다.

 

  고조가 죽고

혜제 유영이 즉위하면서

여치는 황태후로 그 후견을 맡았지만,

고조의 후계자를 둘러싼 다툼은 뿌리 깊어서

혜제가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치는 초왕 유여의를 독살하고

유여의의 모비인 척부인의 손과 다리를 자르고 눈을 도려내었으며

약을 이용하여 귀를 멀게 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게 없애고서

변소에 두어 '인간 돼지'라고 부르게 했다고 『史記』에 적혀 있다.

 

이 일에 충격받은 혜제는

정무를 방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자,

 

여치는 그 아들인 공[소제]을 황제로 옹립하고 태황태후가 되었다.

친정인 여씨 일족과 진평, 주발을 위시한 건국공신에게 협력받아

정치상 안정을 꾀했지만,

이때부터 각지에서 제후로 봉해져 있던 유방의 서자들을 차례로 살해하여

그 뒤에 자신의 조카를 위시해 여씨 일족을 봉하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소제 공을 살해하고

상산왕 홍[소제]을 옹립한 탓에

공신들이 반발하며, 공신들도 살해될는지 모른다는 불안감 탓에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여태황태후 자신도 이 일을 깨닫았으므로,

조카인 여산에게 공신들의 동향에 개의하게끔 실컷 타일러

더욱더 여씨 일족이 중앙의 병권을 잡는 중직에 절저히 기용하고서 죽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평과 주발을 위시한 공신들은

황족인 제왕의 유아들과 남은 유씨 왕들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여씨 일족을 대상으로 죄를 물어 모두 죽이고

유방의 오남인 대왕 유항[문제]을 새로운 황제로 책립하였고

홍[소제]도 혜제의 친자가 아니고

여치가 어딘가에서 데리고 온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문제의 책립 전후에 살해당했고

여동생이자 개국공신인 번쾌의 아내인 여수도

채찍형으로 살해되었고

여수의 아들인 번항도 살해당한 이 숙청에서

여씨의 피를 이은 사람 중 여치의 딸인 노원공주와 장이의 아들 장오와 사이에 태어난

장언만 생존하였다.

 

  여태후가 전횡하던 시대에는

황족이나 공신들이 살해당하는 등

정계에서는 피를 부르는 사건이 계속되었던 시대였지만,

여치가 대외 원정을 위시한 대사업을 극력 줄여 국민생활안정에 진력했므로,

시정은 매우 평화롭고 안정되었다.

특히 원정하느라고 고조가 부재한 사이에

건국공신이자 고조의 충복인 한신이 반란을 획책했다고 누명을 씌워서

허리를 끊어 살해한 일은,

천하가 재분열되어 전쟁하는 일을 막게 되어 그 공적은 크다.

 

후의 문제와 경제에 의한 문경의 치와

무제 시대의 대원정을 필두로 하는 대사업의 정치상·경제상 기초는

이 시대에 만들어진 데다가

새롭게 후한에 걸친 동란 때

적미의 군대는 전한 황제들의 묘를 도굴하여

안치되었던 여치의 사체를 훼손하였다.

 

광무제는 여치에게서 황후 지위와 시호인 고황후 칭호를 박탈하고

문제의 생모인 박 씨를 유방의 정실부인으로 인정하여서

시호 고황후를 추증하였다.


獨善(독선)은 改革家(개혁가)가 警戒(경계)해야 할 最大(최대)의 敵(적)이다. - 상앙(商?)

 

   상앙(商?)은 중국 춘추전국시대(BC 770~221)의 정치가·사상가이다.

본명은 공손앙(公孫?).

전국시대의 진(秦)나라를 재조직하여,

통일국가 진(BC 221~206)을 세우는 데 공헌했다.

 

국가는 오직 권력으로만 유지될 수 있고,

그 권력은 대규모 군대와 충분한 식량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전국시대에 진나라 효공(孝公)의 신하로 들어간 상앙은

나라를 분할하여 다스리게 했던 봉건제를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가 지방을 다스리는 군현제(郡縣制)로 대체했다.

그는 새로운 토지·조세·징병 제도를 만들고,

법을 엄격하고 획일적으로 시행할 것을 강조했다.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농사나 군역과 같은 생산적인 직업을 갖도록 강요했고,

상업을 억제했으며,

백성들 사이에 상호감시체제를 세웠다.

 

그러나 그는 388년 효공의 죽음과 함께 영향력을 잃고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상군서 商君書〉는

그의 사상과 저작을 수록하고 있다고 추측되나,

저자가 누구인지는 불확실하다.

이 책은 매우 실용주의적이며, 법가(法家)의 권위 있는 저작이다.


귀를 열고 입을 닫아라. - 순우곤(淳于?)

 

 淳于?(BC 385 ~ BC 305)은 중국 전국시대 나라 사람. 직하 학사출신으로,

데릴사위에 작달만한 체격이었지만 달변가였다.

유머러스한 화법을 구사해 상대를 설득하는 데 능숙했다.

그에 얽힌 일화는 재미있는 것이 많다.

 

   제나라 위왕(威王)이 주색잡기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간언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자 순우곤이 나서서 간언했는데,

목에 핏대를 세우고

'통촉하여 주시옵서서'만 외쳐대는 충신과는 격이 달랐다.

 

어느날 제위왕을 만난 자리에서 생뚱맞는 퀴즈를 툭 던진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새가 대궐에 앉았는데, 3년 동안 울지를 않습니다.

대체 이 새는 무엇입니까 ?"


위왕은 몇년새 국정을 등한시한 자신을 비유한 질문임을 깨닫고 대답했다.

"그 새는 일단 한번 날개짓하면 천리를 날아오르고,

한번 울부짖으면 만인이 놀랄 것이다."


그리고는 마음을 다잡고 국정에 전념하니

제나라는 비로소 제대로 다스려졌다.


 

이후 나라가 제나라로 쳐들어 왔을 때,

위왕은 순우곤을 사신으로 파견해 나라에 원군을 청하려 했다.

그런데 순우곤은 돌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려 갓끈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벙찐 위왕이 이유를 캐묻자 순우곤이 대답했다.

"오늘 아침 출근하는데요,

농부가 빌더라구요.

족발 하나 술 한잔 놓고서 농사가 대박쳐서 부자 되게 해달라고요.

겨우 그걸 받고 어느 정줄 놓은 이 소원을 들어주겠어요?"


그제야 위왕은 원군을 청하면서

터무니없이 적은 예물을 마련했음을 깨닫고서

순우곤에게 막대한 예물을 들고 가게 했다.

과연 순우곤은 조나라 원군을 이끌고 왔으며

초군은 물러났다.


 

  위기를 모면한 위왕은

기뻐서 잔치를 열고 순우곤을 대접했다.

 

잔치 도중 위왕은 문득 순우곤에게 주량이 얼마인지 물었다.

그러자 순우곤은 생뚱맞는 대답을 들려준다.
"한잔만 마셔도 ?가고, 한말을 마셔도 까딱 없지요."


이 해괴한 말에 낚인 위왕이 뜻을 캐물으니 순우곤이 답했다.


"높으신 분을 앞에 두고서야 한잔만 마셔도 ㅎㄷㄷ입죠.

친척 어르신을 모시는 자리라면 한병만 마셔도 GG 칩죠.

불알친구랑 노는 자리라면야 대여섯병이 대숩니까.

동네 청년 아낙이랑 놀아제끼며 처묵처묵하면 일곱, 여덟 병도 문제 없죠.

뭐 그렇다가 므흣한 분위기가 조성되면... 열 병도 우습죠."

 

이렇게 고도의 떡밥을 던진 순우곤은

주색잡기 좋아하는 위왕에게 간언한다.

"이처럼 세상 이치가 술을 마시면 반드시 어지러워지고,

기쁨이 다하면 슬픔이 오는 법입니다."

 

위왕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이후 술을 마실 때는 순우곤을 곁에 두었다.


 

  순우곤은 <맹자>에도 등장한다.

 

비록 맹자는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을 친숙한 문답이다.


"남자여자는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니죠?"
"그것이 예입니다."
"그럼 형수가 물에 빠지면 죽게 내버려두나요?"
"그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남자와 여자가 손을 대지 않는 것은 예의고, 물에 빠진 형수를 건지는 것은 도리입니다."


보통 여기까지 알고 계실 텐데,

사실 이건 다음 한마디를 던지기 위한 떡밥에 불과하다.


"지금 천하가 도탄에 빠졌는데 선생은 왜 건지지 않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은 손으로 건지고, 도탄에 빠진 천하는 도로 건집니다."

단박에 궁지로 몰아넣는 순우곤이나

냉큼 빠져나가는 맹자나 하여간 극강의 이빨들이다. 


너무 强(강)해도 부러진다. - 굴원(屈原)

 

굴원(屈原) BC 343경 중국 중부 초(楚)나라~ 289경 초나라.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애국시인이다.

이름은 평(平). 원(原)은 자.

 

  일찍부터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그의 詩들은 초기 중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굴원은 양쯔 강[揚子江] 중부 유역의 큰 나라였던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났다.

그의 친척이었던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20대에 벌써 좌도(左徒:侍從)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법령입안(法令立案) 때 궁정의 정적인 상관대부(上官大夫)와 충돌해

그의 중상모략으로 면직당하고 국왕 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굴원은 제(齊)와 동맹해 강국인 진(秦)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진의 장의(張儀)와 내통하고 있던 政敵(정적)과 왕의 애첩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왕은 齊(제))와 단교했으나

결국 진에게 기만당하고

진의 포로가 되어 살해당하고 말았다.

 

회왕이 죽은 뒤

큰아들인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인 자란(子蘭)이 영윤(令尹:재상)이 되었다.

굴원은 회왕을 객사하게 한 자란을

백성들과 함께 비난하다가 또다시 모함을 받아

양쯔 강 이남의 소택지(沼澤地)로 추방되었다.

 

〈어부사 漁父辭〉는 그때 쓴 작품이다.

그는 유배지에서

무속적 민속의식을 관찰하고

그의 작품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설들을 수집했다.

 

맨처음 회왕에게 내쫓기어 유배되었을 때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 서정시

〈이소 離騷〉를 써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는 '만나다'의 뜻이고 '소'는 '근심'이라는 뜻이니

이소란 곧 '근심을 만나다'라는 뜻이다.

〈이소경 離騷經〉이라 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것은 위로 당우(唐虞) 3후(三后)의 성왕을 법을 들어 말하고,

아래로는 걸(桀)·주(紂)·예(?)·요(?)의 패망함을 들어 말함으로써

군왕이 깨닫고 정도(正道)로 되돌아가 다시금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원한 것이다."

 

위의 글은

왕일(王逸)과 주자(朱子)의 〈이소경〉 서문의 한 토막이다.

굴원은 그토록 애타게 자기의 충정을 노래하다가 한 번 용서받은 바 있었으나,

다시금 참소를 받아 경양왕에 의해

멀리 양쯔 강 남쪽 강남지방으로 내쫓기는 몸이 되었다.

 

애국시인 굴원은 유배에 대한 절망감으로

강가를 하염없이 거닐며 시를 읊조리다가

〈회사(懷沙)의 부(賦)〉를 마지막으로

고결한 성품을 그대로 간직한 채

돌을 안고 미뤄 강[汨罷江:지금의 汨水]에 몸을 던졌다.

 

중국에서 음력 5월 5일에 벌어지는 유명한 용선(龍船) 축제는

이 애국시인의 유체를 찾던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굴원의 작품들은

고대 중국의 명시선집인 〈초사 楚辭〉에 실려 있다.

이 시집은 후세 시인들이 굴원의 전설적인 삶에 대해 쓴 글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부(漢賦)에 큰 영향을 주었고,

후대에 높이 평가되고 있다.

 
周邊(주변)을 내치면 自身(자신)도 버려진다. - 오기(吳起)

 

  오기(吳起, ? ~ 기원전 381년)는 중국 전국시대의 군사 지도자이며 정치가였다.

위나라 사람이며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 밑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군대를 이끄는 데 재능을 보였으며 노나라, 위나라, 초나라를 섬겼다.

 

  전국 7웅(七雄) 가운데 가장 먼저 발전한 나라는 위(魏)였다.

위의 문후(文侯)는

이회(李)와 서문표(西文豹)를 등용하여

농업생산력을 증진시키는 한편,

오기(吳起)·악양(樂羊) 등의 장군을 기용하여 영토를 확대했다.

 

  위나라에서 그는 많은 큰 전투를 지휘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당시 재상으로 임명된 전문(田文)과의 공로를 비교한 문답이

<사기 '손자오기 열전'>에 나온다.

 

후에 그는 초(楚)나라로 가서

도왕(悼王)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초나라에서 봉건 혁명을 이끌어 초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혁명이 구귀족을 노하게 하고

초왕의 사후 피살되었다.

 

그는 초나라의 법을 이용해

죽을때도 화살이 죽은 초나라 왕의 시신에 맞게 하여

50여명 이상의 초나라 귀족의 일족들을 멸하게 만들었다.

 

  그가 남긴 저서로 오자병법(吳子兵法)이 있다.

연저지인의 고사로 유명하다.

그는 법가의 인물로 구분된다.

 
統合(통합)과 調整(조정)의 리더십(Leadership)이 必要(필요)하다. - 한안국(韓安國) 

天下(천하)를 얻는 자는 먼저 人材(인재)를 얻는다. - 유방(劉邦)

 

  유방(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은 한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으로 있다가

진(秦)에 맞서는 봉기에 가담하고서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키고

한때는 관중(關中) 땅을 지배 아래 두었다가

항우(項羽)에 의거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東進(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前漢(전한)을 세웠다.

정식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으로 고조(高祖)로 불린다.

고조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人材에 대한 投資(투자)야말로 永遠(영원)하다. - 여불위(呂不韋)

 

  여불위(?~ BC 235 중국 쓰촨 성四川省에서 죽음)으로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정치가이다.

허난[河南] 푸양[?陽] 사람이다.

중국 북서부의 많은 인접 국가들 사이에 끼어 있던 秦(진)은

그의 유능한 외교 능력 때문에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중국 통일이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었다.

 

원래 상인 출신이었던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해

진의 왕자들 중 왕위계승권을 절대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초(子楚)를 매수했다.

 

그의 첩 중 1명과 자초가 사랑에 빠지게 되자,

그는 이미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나돌던 그 첩을 자초에게 주었다.

 

그는 자초의 아버지 안국군(安國君 : 孝文王)과

화양부인(華陽夫人)의 환심을 사

자초가 태자(太子)로 책봉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BC 250년 장양왕(莊襄王)으로 즉위한 자초는

그를 상국(相國)으로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했다.

 

여불위는

장양왕이 죽고 자기 첩의 아들 영정(?政)이 BC 246년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도

직책을 사임하지 않았다.

 

BC 238년 어린 황제에 대한 반역 음모에 말려든 그는 파면당하여

자신의 봉지인 허난으로 돌아갔다.

그후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가 그를 촉(蜀 : 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지방으로

쫓아버리려 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스스로 시황제 (始皇帝)라고 칭한 영정은

그가 시작해놓은 중국 통일을 완성하여

통일제국 秦(BC 221~206)을 이룩했다.

 

여불위는 승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여러 학문을 집대성한 책을 만들게 했다.

그결과 최초로 정리되어 나온 방대한 내용의 〈여씨춘추 呂氏春秋〉는

제자 백가의 학설뿐만 아니라 민간전설·민간요법·도교 등에 관한 개론이다.

 


곁에 누굴 두느냐에 組織(조직)의 運命(운명)이 갈린다. - 유경(劉敬)

 

  유경은 전한의 인물로 자는 태현(太玄).

남양 사람으로 한문제 때 낭을 지냈다가

세상을 버려 한단의 장군이라는 사람에게 도를 배워

주영환방을 전수받아 이를 조제해 복용했으며,

나이 130에 마치 30살 쯤 되는 사람의 모습을 했다.

 

  뒤에는 계자훈을 스승으로 모셔

오제령비륙갑십이사, 신선십주진형 등의 비요를 전수받아

그 비결을 근거로 시행해 매우 효험이 있었으며,

능히 귀신을 부려 그 자리에서 바람과 구름을 일으키거나

이들을 불러 여행 중에 요리를 시켰다.

그 자리에 앉으면 귀신들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으며,

길흉이 일어날 날을 미리 알아

사람들을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 수명을 연장시켜 10년을 더해주지만

그 날짜가 되면 모두 죽었다.

  명산과 오악을 돌아다니면서

왕진과 동행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위나라의 조조황보륭이 자신을 따라다니자

운모구자환, 교접지도 등의 비방을 전수했으며,

222년에 형산으로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황보륭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다.

안정 사람으로 태화 연간에 돈황태수를 지낸 창자, 왕천, 조기 등의 뒤를 이어

가평 연간 부임했는데, 창자가 세운 법을 그대로 따랐다.

주민들에게 밭갈이 경작법을 가르치면서

농토 수리 시설을 강화해 수확철이 되면 능률을 높이고 수확량을 증가시켰다고 한다.


신선전이나 박물지에서는 방사로 나오는데,

조조유경이 옛 제자의 집을 두루 찾아다닐 때

유경이 도가 있다는 소식을 들어 유경을 따라다니다가

운모구자환, 교접지도 등 두 가지 비방을 전수받아

유경이 알려준 대로 약을 제조해 복용하자

얼굴 색이 젊어졌으며,

머리카락이 희지 않거나 이가 빠지지 않았다.

 

조조가 기공을 연마해 편지를 통해 단약을 먹으면서 양생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요청하자

아침마다 입 안의 침을 삼키면서

아래와 윗니를 서로 부딪치라고 했다.

 

3백 살이 넘었지만

능히 어떻게 해야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지에 대해 알지 못했으며,

유경이 입안의 액체를 복용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 침액이 입안에 가득하도록 해

이것를 삼키면서 이빨로 14번을 쪼면서

세 번을 반복하도록 하는 연정이라는 방법으로 시행하도록 했다.

 

또한 황보륭의 성품이 음란한 것을 좋아해

이를 경계로 삼도록 해

세상을 떠나는 법에 대해 익히도록 충고했지만

결국 유경이 염려한 대로 세상을 벗어나는 도를 성취하지 못했다.


人材는 리더(Leader)가 만드는 것이다. - 맹상군(孟嘗君)

 

  맹상군(孟嘗君 ?~ BC 279 설(薛: 지금의 산둥 성山東省 텅셴藤縣)은

중국 전국시대 제(齊)의 공족(公族)이다.

  성은 전(田)이고 이름은 문(文)이며, 맹상군은 시호이다.

 

제 위왕(威王)의 막내 아들이며 선왕(宣王)의 이복동생 정곽군(靖郭君) 전영(田?)의

아들로 태어났다.

 

식객 1,000여 명을 거느렸고

위(魏)의 신릉군(信陵君),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초(楚)의 춘신군(春申君)과 함께

전국시대 말기 4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진(秦) 소양왕(昭襄王)의 초빙으로 재상이 되었으나

곧 의심을 사게 되어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는데

그의 식객 중에 좀도둑질[狗盜]을 잘하는 사람과

닭울음소리[鷄鳴]를 잘 흉내내는 사람이 있어

그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하는 고사 '계명구도'(鷄鳴狗盜)가 유명하다.

 

제와 위에서 잠시 재상을 지냈고,

BC 284년 제의 민왕(?王)이 죽은 후에 자립해 제후가 되었다.

 


認定(인정)받는 만큼 해낸다. - 예양(豫讓)

 

   예양(豫讓)은 춘추시대 말기, 전국시대 초기에 유명한 협객이다.

형가와 더불어 협객의 시초로 분류되는 인물로서,

사마천사기 중 <자객열전>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晉)나라에서

여섯 가문이 싸웠는데

그는 맨처음에 범씨, 순씨를 섬기다가 지씨를 섬기게 된다.

후에 그가 밝히기로는

범길사, 순인은 그를 보통 사람으로 대하였고,

반면에 지백(智伯)은

심복으로 놔두어 자신을 알아주었다는 이유로 智伯(지백)을 섬기게 된다.


  조, 위, 한 세 가문을 멸하려한 지씨의 수장인 지백의

두개골이 옻칠, 금칠되어 조씨의 수장인 조양자(趙襄子)의 술잔으로 장식되었다는 말에

분개하여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처음엔 변소에 숨어 암살하려 했으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조양자가 변소를 수색하게 하자 곧 붙잡히고 말았다.

조양자는 그 충성심에 감탄하며

주위 가신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예양을 풀어줬다.


  풀려난 예양은 포기하지 않고

숯을 먹어 목소리를 바꿨으며,

얼굴엔 옻칠을 하여 얼굴을 변형시켰다.

이러한 차림으로 구걸하는 그를 아내조차 알아보지 못했다.

우연히 그를 알아보게된 친구가

그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를 묻자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고,

여자는 자신을 기쁘게 해주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한다."

(士爲知己者死 母爲悅己者容)라고 대답했다.


  趙(조)의 수도 한단에

새롭게 지어지는 다리를

조양자가 첫번째로 지나가게 되어 있었는데

이를 안 예양은 시체로 분장하고

다리 밑에 숨어 조양자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살기를 느낀 조양자의 말은

다리를 지나가지 않고 멈추어섰다.

이에 이상한 낌새를 느낀 조양자는 다리 밑을 수색하게 되고

새로 지어진 다리밑에 시체가 있음을 수상하게 여긴 조양자에 의해

두번째로 포박당해 조양자 앞에 끌려오게 되었다.


  분노한 조양자는

"너는 옛날에 다른 중신들도 섬기지 않았느냐?

그들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지백이었다.

그런데 너는 그 원수를 갚기는커녕 도리어 원수의 신하가 되어 나를 노리니

이야말로 어불성설이 아닌가?" 라고 예양을 꾸짖었다.

 

그러자 예양은

"저는 범씨와 중행씨를 섬긴 일이 있습니다.

범씨와 중행씨는 모두 저를 보통 사람으로 대접하였으므로

저 역시 보통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보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지백은

저를 선비로 대우하였기에

저도 마땅히 선비의 예로 그에게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國士遇之國士報之)" 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조양자는

예양의 충의에 감탄하며 눈물을 흘리며

"예자(豫子)여! 그대가 지백을 위해 충절을 다한 명예는 이미 이루어졌고,

내가 그대를 용서함도 충분하였으니 응당 각오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나는 너를 놓아주지 않으리라!"라며

병사들로 하여금 그를 포위했다.

 

예양은 피눈물을 흘리며 원통해하며

그의 옷이라도 벨 기회를 달라 간청하였다.

 

이에 조양자가

자기의 옷을 벨 기회를 주자

세 번 뛰어 그 옷을 베었으며

"내가 비로소 지하에 계신 지백께 보답할 수 있게 되었노라!"고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칼에 엎어져 목숨을 끊었다.

예양이 죽자 삼진의 식자들은 애통해하였다고 한다.


  옷에 맺힌 선혈에 충격을 받은 조양자는

얼마 되지 않아 병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기와 자치통감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여태후본기>에서 여후의 옆구리를 치고 간 개의 이야기나

<위기후, 무안후 열전>에서 귀신이 씌여 비참하게 죽은 이야기까지 적었던 사마천이

굳이 조양자의 이야기를 누락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놀란 조양자가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는 기술은

열국지에만 등장한다.


  참고로

이문열은 삼국지를 평역하면서

예양의 고사를 인용한 것을

예와 양 땅의 사람들로 오역하기도 했다.



義理(의리)에 죽고 義理에 살다. - 난포(欒布)

 

  ?寄는 중국 전한(西漢) 시기의 인물. 곡주후(曲周侯) 역상(?商)의 아들이다.
특별히 대활약을 하거나 그런 행적은 없고,

그저 역상의 평범한 아들이었는데

다만 역기는 여후의 인척인 여록(呂祿)과 친분이 있었다.

유방 사후 여씨가 천하를 장악해서

"주발(전한) 주발, 진평, 등은 가만히 기회만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내 여후가 죽게 되면서 기회가 찾아오게 되었다.


다만 군사권을 가진 여록은 껄끄러운 편이었는데,

이에 주발과 진평은 사람을 시켜 역상을 위협하여 손을 쓰게 만들었고,

역상은 어쩔 수 없이 역기에게 여록을 유인하도록 시켰다.

여록이 유인되어 나오자

주발은 곧바로 군권을 장악해서 여씨를 학살했다.

한나라 입장에서 보면

권력을 훔친 외척을 처단한 행위지만,

친구 사이로 치면

그야말로 배신 행위라

당시 사람들은 역기가 친구를 팔아먹었다면서 비난 했다고 한다.


그 후에는 별다른 행적이 없는데,

이후 한경제 시절 오초칠국의 난의 난이 일어났을때

나라를 공격하는 장군이 되었다.

그런데 10개월이 지나도 이기지를 못했다.

결국 난포(欒布)가 도움을 준 후에야 조나라를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이후 BC 148년,

평원군(平原君)이라는 여자를 부인으로 삼으려고 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황후의 어머니로, 황제의 장모였다.

신하가 황제의 장모를 아내로 삼으려고 들자,

황제인 경제는 대노했고

결국 역기는 작위가 폐지되었다.

대신 역상의 다른 아들인 역견(?堅)이 작위를 잇게 된다.


사기 번역등관열전(樊??灌列傳)에서

역상 열전의 말미에 살짝 언급되는 정도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그 얼마 안되는 기록이 있다. 


信賴(신뢰)는 올바른 原則(원칙)에서 피어난다. - 사마양저(司馬穰?) 

 

  사마양저(司馬穰?)는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장군이다.

성은 (?), 씨는 (田), 이름은 양저(穰?)이다.

재상 안영(晏?)의 추천으로 등용되고,

제 경공이 제나라의 번영에 공적을 올리자

그를 대사마로 임명되었고, 사마씨(司馬氏)로 칭하여 사마양저로 불리었다.

그리고 대사마가 이전에 불렸던 전양저로 불리도 한다.

병법서 사마법(사마병법)의 저자이자, 전완의 후예이다.

 


  전략(戰略)

 


이기는 법이 아닌 지지 않는 법도 있다. - 손자(孫子)

 

  손자(孫子)는 중국 고대의 병법가(兵法家)이다.

보통 손무(孫武) 또는 손무의 후예 손빈(孫?)에 대한 경칭이다.

 

손무는

춘추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자는 장경(長卿)이다.

일찍이 〈병법〉 13편을 오왕(吳王) 합려(闔閭)에게 보이고

그의 장군이 되었으며,

대군을 이끌고 초(楚)나라를 무찔렀다.

군대를 중시했으며

"적과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百戰不殆)고 주장했다.

즉 적과 나의 상황을 파악하고 군사의 많고 적음, 강약(强弱)·허실(虛實)·

공수(攻守)·진퇴(進退) 등의 형세를 잘 분석하여 적을 제압하면 승리를 얻는다는 것이다.

 

또한 전략전술을 활발하게 운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저서 〈손자병법〉은 중국 최초의 병서이다.

1972년 산둥 성[山東省] 린이 현[臨沂縣] 인췌 산[銀雀山]에 있던 한묘(漢墓)에서

죽간 〈손자병법〉 13편이 출토되었는데,

기본적으로 당시 통행되던 송본과 같다.

 

손빈은

전국시대의 兵家(병가)이며, 일찍이 방연(龐涓)과 병법을 공부했다.

 

방연은

위(魏)나라 혜왕(惠王)의 장군이 되었는데,

손빈의 재주를 시기해서 위나라로 그를 불러들여

빈형(?刑 : 슬개골을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이로 인해 손빈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손빈은

후에 제나라 위왕(威王)의 군사(軍師 : 참모)가 되었는데,

위왕은 계릉(桂陵)과 마릉(馬陵)에서

위군(魏軍)을 차례로 무너뜨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손빈은 전쟁을 수단으로 삼아 중국을 통일할 것을 주장했고,

전쟁중에 특히 사람의 주관적인 능동작용을 중시하여

"천지간에 사람보다 귀한 것은 없다"(天地之間莫貴於人)고 했다.

단지 좋은 무기에만 의지하는 것으로 강대하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갑옷의 견고함이 병사를 이롭게 하나, 강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甲堅利兵不得以爲强)라고 했다.

저서 〈손빈병법〉은 당나라 이후에 유실되었는데,

1972년 인췌 산 한묘에서 그 죽간이 발굴되었다.

 


君子(군자)도 現實的(현실적) 基盤(기반)은 必要(필요)하다 - 자공(子貢)

 

  자공(子貢, 기원전 520년경 ~ 기원전 456년경)은

중국 춘추 시대 위나라의 유학자이다.

본명은 단목사(端木賜)이다.

그의 자인 자공으로 통칭된다.

공자가 아끼는 제자로서 언어에 뛰어났다.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노나라 · 위나라의 재상을 지냈다.

공자를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주었다.

 


豊足(풍족)해야 名譽(명예)와 恥辱(치욕)을 안다 - 관중(管仲)

 

  관중(管仲)은 중국 춘추시대 초기의 정치가·사상가이다.

이름은 이오(荑吾).

영상(潁上:지금의 안후이 성[安徽省] 서북부) 사람으로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에 경(卿)의 벼슬에 올랐던 그는

환공의 개혁 추진을 도왔다.

 

토지등급에 따라 세금을 걷고 농업을 발전시켰다.

동시에 염전·제철업을 일으켜

제나라를 춘추시대 가장 막강한 맹주(盟主)로 만들었다.

 

〈관자 管子〉의 목민(牧民)에선

 "창고가 가득 찬 뒤에야 예절을 알게 되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넉넉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

라고 써서

도덕교화(道德敎化)가 물질생활을 기초로 하고 있음을 설파했다.

 

또한

"4유(四維:禮·義·廉·恥)가 널리 퍼지지 않으면 나라가 곧 망한다"

라고 강조하여 도덕교화의 역할을 중시했다.

 

관중의 이름을 딴 〈관자 管子〉는

86편 가운데 현재 76편만 전한다.

그중 목민(牧民)·권수(權修)·형세(形勢)·칠법(七法) 등은

관중의 언론사상을 기록한 것이다.

 


天下(천하)는 利益(이익)에 따라 움직인다 - 한비(韓非)

 

  한비(韓非, 한페이, 기원전 281년 경 - 기원전 233년)는

한비자》를 저술한 전국 시대 중국의 정치철학자, 사상가, 작가이다.

 

한비의 생애는 불분명하다.

알려진 정보의 거의 전부가 실린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그는 (韓)의 공자 가운데 한 명으로

일찍이 형명과 법술을 익혀

중앙집권적 제국의 체제를 적극적으로 창도한

법가 이론의 집대성자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한비자로도 불리나

한비자는 보통 그의 저서로만 불리고 있다.

순자의 문인이다.

 


利益(이익)을 셈하기 前(전)에 먼저 베풀어라 - 복식(卜式)

 


배짱은 交涉(교섭)의 必修條件(필수조건)이다. - 안영(晏?)

 

안영(晏?)은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정치가이다.

자는 평중(平仲).

BC 556년 아버지 안환자(晏桓子)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제나라의 대부(大夫)가 되었다.

영공(靈公)·장공(莊公)·경공(景公)을 섬겼으며

근검절약하고 힘써 노력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최서가 장공을 살해했을 때

장공의 시체 위에 엎드려 곡(哭)을 했지만

사람들의 신망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했다.

 

BC 517년 혜성이 나타나 두려워 떨고 있는 경공에게

사치를 삼가고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가볍게 하면 재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충간(忠諫)했다.

이같은 충직한 성품 때문에

관중(管仲)과 함께 제나라의 명신(名臣)으로 일컬어진다.

안자에 관한 이야기를 모은

〈안자춘추 晏子春秋〉(8편)가 있다.

 


臨機應變(임기응변)의 核心(핵심)은 決斷力(결단력)이다 - 주아부(周亞夫)

 

  주아부(周亞夫 : BC 199~143)는

한대의 승상 중 한사람으로

군사 출신인데 오초 7국의 난 때부터 회음현 백성들의 미움을 산 바가 있다.

그 당시의 진압이 너무 심했으며

이 일 때문인지 두태후와 동시에 미움받는 대상이 되고 만 상태였고

승상직을 물러나고 말았는데

처음부터 한 경제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장안에 계속 머문 상태라 회음현은 거들떠보지 않았다고 생각되는데

그래도 이미 두태후와 같이 미움받곤 하기에

지금도 그 부분에 대한 회음현의 악감정이 남아있다고 한다.

주아부는 부친인 주발(周勃)의 묘소를 고치려고

방패 500개를 맘대로 사들였는데

그 당시 출토된 도용의 손에 달린 방패들이 그 증거라고 생각되나

이미 그 사들인 것을 그렇게 매장해버리게 되었다.

 

이 일로 황제가 진노하여

그를 정위에게 넘겨 조사케했는데

계속 불복하였고 끝내는 곡기를 끊은 끝에 사망했으며

부인 또한 자결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주아부에 대한 회음현 사람들의 불만이 빗발칠 정도로 격렬해졌으며

그 증오를 두태후에게 퍼붓게 되어

이로 인해 두태후는 저번보다 심한 미움을 받고 말았다.

두태후만이 아니라

반란 진압 명령까지 내린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啓 : BC188~141) 역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되어버렸고

유계는 이를 무마하려해도 병중이기 때문에 너무 벅찬 상황이라 더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유무(劉武)도 미움받은 상황이라

역시 수습이 어려워서인지 주아부보다 일찍 사망하여 무산되어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주아부, 유무, 유계는 회음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상을 등졌다.

 

세 명이 모두 사망하고

두태후만 남아

셋에게 쏟아진 비난이 그녀에게만 돌려지게 되었고

두태후의 죽음으로

무제(武帝) 유철(劉徹 : BC 156~87)이 친정을 하여

그들을 제대로 설득하여 회유하고 무마시킨 뒤에서야

회음현 주민들이 안정을 되찾았다고 한다.

어쨌든 이들은 주아부, 유무, 유계, 두태후에 대한 불만은 지금도 남아있지만

그 부분은 역사로 남게 되었다.

 


時代(시대)를 읽는 눈을 먼저 길러라 - 소진(蘇秦)

 

  소진(蘇秦)은 중국 전국시대의 책사(策士)로 종횡가(縱橫家)의 한 사람이다.

자는 계자(季子).

동주(東周)의 뤄양[洛陽]에서 태어나

장의(張儀)와 함께 제(齊)의 귀곡자(鬼谷子)에게 웅변술을 배웠다.

 

처음에는 진(秦)의 혜왕(惠王)에게 유세했으나 기용되지 않았다.

후에 연(燕)의 문후(文候)에게 기용되어

동방 6국을 설득하고 합종동맹(合從同盟)을 체결해 진에 대항했다.

공을 인정받아 조(趙)의 우안[武安: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에 있음]에

봉토를 받았으나, 곧 참소를 받아 망명했다.

제에서 암살당했다고 한다.

 

〈사기〉에 실려 있는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종래부터 신빙성에 문제가 있었는데,

최근 마왕두이[馬王堆]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백서(帛書)에

소진에 관한 자료가 발견되어 〈사기〉의 착오가 분명하게 밝혀졌다.

 


進退兩難(진퇴양난)의 狀況(상황)에서는 차라리 行動(행동)하라 - 노중련(魯仲連)

 

  魯仲連은 전국시대 나라 사람이다.
빼어난 안목과 언변을 지닌 인물이나,

이 무렵 유세객들이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혓바닥을 놀렸던 것과 달리 사심없이 천하를 위해 유세한 은자다.


노중련은 나이 열두살 때

유명한 논객과 설전을 벌여 이겼으며, 천리구(千里驅)라는 별명을 얻었다.

장성한 뒤에도 벼슬자리를 구하지 않고 천하를 주유하며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살았다.

  장평대전이 벌어진 뒤,

백기가 군사를 몰아 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했을 때 일이다.


조왕이 원군을 청했지만

열국은 나라를 두려워하여 감히 나서지 보내지 못했고,

이웃한 나라에서 보낸 원군도 경솔히 진군하지 못한 채 몸을 사리는 판국이었다.


위왕은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평원군을 설득한다.

진왕은 사실 한단땅을 원하는 게 아니라

만천하에 제왕으로 공인받고 싶어서 군대를 일으켰으니,

조왕이 뜻대로 추대해주면 물러날려고 했다.
워낙 엄청난 내용이라

평원군이 차마 조왕에게 건의를 못하고 고심을 거듭하는데,

노중련이 이를 알고서 신원연에게 설파했다.


"진나라 폭정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동해로 달아나겠다.

진왕을 제왕으로 높이자니 제정신이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데, 주둥이 몇마디 놀려서 화를 모면하면 거저먹기 아닐까요?"
"그 가까운 주먹으로 내가 너네 왕님을 가마솥에 삶아 죽여주겠소?"
"협박이 좀 심하지 않소?"
노중련은 은나라 주왕을 비롯해 온갖 폭군들이 아랫사람을 죽인 고사를

일일이 꼽더니만

"그걸 진왕이라고 못할 것 같니?"하고 결정타를 날렸고,

식겁한 신원연은 모든 논의를 없던 일로 하고 돌아갔다.
이후 위나라 신릉군이 독단으로 원군을 이끌고 와

마침내 진군은 물러났다.


국가 존망의 위기를 벗어나자

평원군은 천금을 주어 노중련에게 사례했으나,

노중련은 '곤란에 빠진 이를 돕고서 대가를 바라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다'며

끝내 사양하고 빈손으로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라가 나라를 침공했을 때 일이다.
연나라 장수가 요성(聊城)을 점령하자

계략을 써서 연왕에게 장수를 모함했다.

여기까지는 모략의 정석대로인데…

문제는 연나라 장수가 요성을 점거한 채 눌러앉아 버렸다.

더이상 전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돌아가자니

연왕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서 머뭇거리게 되었다.
제나라 장수 전단

1년 가까이 요성을 되찾기 위해 공격을 벌였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그러자 노중련이 화살에 편지 한통을 매달아

성안으로 날려보냈다.


그리고 사흘 뒤 연나라 장수는 자살했다(…).

매섭게 꾸짖자 수치를 느껴 자살했다는 소설 같은 얘기는 아니고,

편지 내용은

당시 국제정세를 냉철히 분석하고 진퇴양난에 빠진 장수에게

살 길을 귀뜸해준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지금 연나라 국력이 강한지라 조용히 군대를 끌고 물러나도 왕이 좋아할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넌 이미 승장인데다 전력을 온존해 귀환했는데 누가 뭐래냐?

정 연왕이 깨름직하면 안면에 철판 깔고 제나라에 귀순해라.

귀순용사 대접을 거하게 받아서 자손삼대가 호의호식한다.'는 내용이었다.
카오스나 다름없는 전국시대에선

어느쪽이든 타당한 해결책이었는데,

연나라 장수는 어느 쪽을 택해도 백배천배 보복을 받을 것 같아서

그냥 제 손으로 죽음을 택했다.
이렇게 장수를 잃은 연나라 군대는

힘을 쓰지 못하고 마침내 제나라가 요성을 탈환했다.


  여담으로, 조선시대 정조에 관련된 민담이 바로 노중련을 배경으로 한다.

정조가 왕세손이던 시절,

영조가 요새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은 질문에

실수로 강목이라고 답해버려서

홍국영이 등장하는 이른바 질차 이모비야 叱嗟 爾母碑也(네 어미는 종년이다)

구절이 사기 및 전국책 노중련편에 등장하는 구절.

실제로 강목에는 그 구절이 없다.

 


卓上空論(탁상공론)의 최후 - 조괄(趙括)
 

  조괄(趙括, ? ~ 기원전 260년)은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장군이다.

명장으로 알려진 조사(趙奢)의 아들로서,

조괄 자신도 병법에 통달한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장평 전투(長平之戰)에서 진나라(秦)의 백기(白起)에게 패해 전사했다.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 군대는 처음엔 명장 염파(廉頗)의 지휘로

방어전을 펼쳐 진나라는 곤란에 빠졌다.

전국의 타개를 노린 진나라의 재상 범수(范雎)가 계책을 내놓아

“진나라는 조나라의 장수 염파가 아닌 병법에 뛰어난 조괄을 두려워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조나라의 효성왕(孝成王)은

이 소문을 믿고 총대장을 염파에서 조괄로 교체시켰다.

조괄의 어머니는 남편이었던 조사로부터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조괄을 장군으로 쓴다면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다”

라는 유언을 들었기에

조괄을 장군으로 기용하려는 왕에게 사실을 말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책상위의 병법만을 이해한 조괄은

염파의 전법을 모두 변경하고 진나라군에게 도전했으나,

역전의 용장이었던 백기의 미끼작전에 걸려 군대가 분열당하고 보급로가 끊겨 대패하고,

조나라 군사 40만 명이 기아에 빠지게 되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괄은

직접 포위망을 뚫으려고 출진했으나 대량의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총대장이 죽자

조나라 군사 40만 명이 포로가 되었으나,

이들을 먹일 식량이 진나라군에도 없어

조나라 군사는 백기에 의해 모두 산 채로 매장되어 죽었다.

이 때문에 조나라는 병력이 크게 감소하여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괄은 여러 차례

“병법을 암기만 할 줄 알고, 그 응용을 알지 못한다”

라는 예로써 적합한 인물로 나오게 되었다.


奇拔(기발)함으로 虛(허)를 찌른다. - 전단(田單)

 

   전단(田單)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악의[樂毅]의 계책을 받아들여

거[?]와 즉묵[卽墨] 두 성만 빼고 제나라의 성 70여 개를 함락시켰는데,

소왕의 뒤를 이은 혜왕[惠王]이 참언을 듣고

악의 대신 기겁[騎劫]을 등용하여 전투하는 사이에

전단이 화우[火牛]의 진[陣]을 이용해 연나라를 격파시키고

이전에 잃어버린 땅을 수복했다.

 


自己 確信(자기 확신)이 浩然之氣(호연지기)를 키운다 - 인상여(藺相如)

 

  인상여(藺相如, 생몰년 미상)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趙) 혜문왕(?文王)의 가신(家臣)이다.

「완벽(完璧)」, 「문경지교(刎頸之交)」의 고사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

인상여는 문무와 지용(知勇)을 모두 갖춘 장수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기》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따르면,

인상여는 원래 혜문왕의 환관이었던 목현(繆賢)의 객인(客人)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목현이 죄를 지어

혜문왕의 노여움을 사서 처벌을 피해 (燕)으로 망명하려 한 적이 있었는데,

식객(食客)으로 있던 인상여가

목현이 연으로 망명하려는 이유를 물었고

목현은 "전에 연왕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연왕이 내 손을 잡고 친구가 되자고 했으니

내가 가면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라고 대답하자,

 

인상여는 "그건 잘못 생각하신 것입니다.

연은 약소국인데 비해 조는 강국입니다.

연왕이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고 한 건

당신이 강국인 조의 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어서였기 때문입니다.

총애를 잃고 노여움까지 산 당신이

연에 가봤자 연왕은 숨겨주기는커녕 당신을 잡아 돌려보낼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목현은 그의 말이 정연한 것에 놀랐고,

인상여는 이어 "여기서 차라리 스스로 처형대에 올라가서 조왕께 죄를 청하면

운좋게 용서받을 길도 있을 겁니다."라고 권했고,

인상여의 말을 따랐던 목현은 과연 혜문왕에게 용서받고

신뢰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조에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는 구슬이 보물로서 전해지고 있었는데,

(秦)에서는 자국의 성 15개를 줄테니 그 구슬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조건은 나쁘지 않았지만

상대는 늘 조를 침략할 기회를 노리는 강국 진이었고,

구슬과 성을 바꾸자고 한 약속도

실제로는 구슬만 빼앗긴 채 끝날 가능성이 컸으며

그것은 趙(조) 스스로가

진의 속국이라고 인정하는 굴욕적인 일로서

주변국에 대해서도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고 거절한다면

「이 정도의 좋은 조건을 거절하다니 무례하다」며

트집을 잡아 조를 침공할 가능성도 컸다.

 

혜문왕은 군신과 상의했지만

의론만 분분할 뿐 누구 하나 나서서 좋은 의견을 내놓는 사람도,

진에 사자로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는 가운데,

환관 목현이 혜문왕에게

"제 객인으로 인상여라는 자가 있는데 지용을 모두 갖춘 자입니다"라며

앞서 자신이 혜문왕의 노여움을 사서 연으로 망명하려 했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혜문왕은 곧 인상여를 불러

이 국난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물었고,

인상여는 "진은 강하고 조는 약하니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무슨 일이 생겼을 때의 잘못은 진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혜문왕이

"그러나 구슬만 잃고 성을 받지 못하면 어찌할 것인가.

그 일을 맡길 만한 사자가 없다"고 대답하자,

 

인상여는

"사자가 없다면 제가 진으로 가겠습니다.

성을 받지 못한다면 구슬을 온전하게 돌려보내겠습니다." 라며

자청하여 교섭 역할로 발탁된다.

 

진의 도읍 함양(咸陽)으로 간 인상여는

진의 소양왕(昭襄王)과 대면하고

화씨지벽을 건네지만,

성 이야기는 하지 않고 구슬을 받아들고 총비와 군신들에게 보이며 자랑하기만 하는 소양왕의 태도에

성을 넘겨줄 뜻이 전혀 없음을 판단한 인상여는

"실은 그 구슬에는 조그만 흠이 있사옵니다."라며

잽싸게 구슬을 빼앗아 들고

기둥 옆으로 달려가서는

관이 벗겨질 정도로 머리카락이 모두 곤두선 노한 모습으로

"조에서 진의 말을 의심하는 이야기가 많았음에도

조왕께서는 진을 믿고

5일간이나 몸을 청결히 하고서 화씨지벽을 넘기셨습니다.

이러한 조왕의 신의를 진왕께서는 참으로 무례하고 조잡하게 대하시니,

이제 이 구슬도 제 머리와 함께 이 기둥에 부딛쳐 부수고 말겠습니다"라며

소양왕을 협박했다.

그제야 소양왕은 다급히 지도를 가져오라고 하면서 15성의 이야기를 했지만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 실제로 성을 내줄 생각은 없다고 판단한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보물을 볼 때의 의식으로서 5일 동안 목욕재계를 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사이, 종자를 시켜 구슬을 가지고 몰래 조로 돌려보내는 한편

자신은 남아서 시간을 벌었다.

 

5일 뒤, 목욕재계를 마친 소양왕이

화씨지벽에 대해 묻자 인상여는

 "역대의 진왕 가운데 약속을 굳게 지킨 왕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사와

진왕께서 성을 내주실 뜻이 없는 듯 하여 이미 조로 돌려보냈습니다.

15성을 넘겨주신다면 조에서는 구슬 따위 아끼지 않겠지만

거듭된 무례함에 대한 보상으로서 저는 사형을 받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진의 군신들은 왕이 그를 처형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인상여의 대담함에 감탄한 소양왕은

"이 자를 죽여봤자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고 조의 원한만 살 뿐이다"라며

15성의 할양도 화씨지벽의 양도도 없던 일로 한 채

그를 잘 대접해 돌려보냈고,

한편 인상여가 진에서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그의 시신을 국장으로 치르고자 준비를 마친 상태였던 혜문왕은

인상여가 무사히 살아돌아오자 기뻐하며

임시 가신이던 그를 정식으로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담력과 지혜만을 무기로 삼아

강국 진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은 채

화씨지벽을 지키고 조의 체면도 유지한 그의 모습은

훗날 「완벽(完璧)」이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민지의 연회

   기원전 279년,

혜문왕은 진의 초청으로 민지(?池, 지금의 하남 성河南省 민지 현?池?)에서

양국의 우호를 다지는 축수를 겸하는 회합에 불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회합이 벌어지는 민지는

진의 영내에 있었고

조의 국경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을 때

조에서 군사를 보내 구원할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명목상 양국의 우호를 다지는 회합 장소에 많은 병사를 데리고 갈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진은

화씨지벽 문제에서도 보이듯

조가 믿을 수 없는 나라로

걸핏하면 조를 쳐들어오기까지 하는 나라였다.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은 자리에

혜문왕은 나아가기를 꺼렸지만,

염파(廉頗) 등이 나서서

"가지 않는다면 조는 약하고 비굴한 나라 취급을 받을 것이고,

진은 더욱 기고만장하게 되어 다른 제후들까지 조를 넘보게 될 것입니다."라며 충고했고,

인상여도 동의하면서

자신이 혜문왕과 동행하겠다며 나섰다

(혜문왕이 조를 떠나 민지로 향하면서

조에서는 30일 이내에 혜문왕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태자를 왕으로 세우고 진에 원수를 갚겠다는 확인을 거칠 정도의 각오를 다지는 등,

조에서는 혜문왕의 행차에 상당한 우려를 품고 있었다).

 

민지에서 열린 잔치에서,

진의 소양왕이 혜문왕에게

"조왕께서는 음악을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양국의 우호를 기념해 슬(瑟)을 타는 모습을 보여주시지요"라고 주문했다.

 

어쩔 수 없이 혜문왕은 그 자리에서 슬을 연주했고,

소양왕은 그 직후 기록하는 관리를 시켜 국사에

"진왕이 조왕에게 슬을 타게 하였다"고 기록하게 한다.

이것을 조를 진의 신하 내지 일개 악사(樂士) 따위로 취급하며 업신여기는 것으로 본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다가가 질장구(?)를 내밀면서

"진에서는 축제에서 질장구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는데,

양국의 우호를 기념해 두드려 주시지요"라고 주문했다.

진에 실제로 그러한 풍습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당시 중원의 다른 국가들이 천박하게 여기는 행위였고,

더욱이 왕에게 그런 것을 시키는 것은 무례하다며

소양왕은 분노했지만,

인상여는 미동도 하지 않고

"지금 진왕과 저의 거리는 불과 다섯 걸음밖에 안 됩니다.

제 목을 쳐서 그 피를 진왕께 뿌려드리리까?"라며

넌지시 "거절하시면 여기서 당신과 함께 죽겠습니다"라며 위협했다.

소양왕 가까이 있던 호위가 무례하다며 죽이려 했지만

인상여가 일갈하자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그의 기백에 놀란 소양왕은

하는 수 없이 질장구를 한 번 두드렸고,

인상여는 기록하는 관리를 시켜 국사에

"조왕이 진왕에게 질장구를 치게 했다"고 적게 한 뒤

"진왕 덕분에 잔치가 무르익었습니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뒤 진의 신하가 혜문왕에게

"우리 왕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귀국의 15성을 우리 왕께 헌상하는 게 어떻습니까"라는

무례한 말을 던질 때에도 인상여는

"귀국도 우리 왕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함양 하나쯤 헌상하는 게 어떻습니까"라며 응수했다.

15성에 비하면 함양은

곧 진의 수도였기에,

말을 꺼냈던 진의 신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렇듯 시종일관 재치를 부리며 진의 무례함을 받아치는 인상여 앞에서

진은 끝내 조를 낮게 볼 수 없었고,

조로 돌아갈 때에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은 탓에 진은 나서지 못했다.

이로서 인상여는 진 앞에서 대등한 외교 의례를 지키고

조왕의 신변뿐 아니라 조의 체면까지 모두 지켜냈다.

刎頸之交(문경지교)

   귀국한 뒤 인상여는 진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상경(上卿)의 지위에 임명되지만,

앞서 숱한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용장 염파는

그의 이례적인 출세를 시기하며,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인상여에 대한 불만을 직설적으로 털어놓으며

"내 기필코 한 번 그놈을 만나 수치를 주고 말겠다"고 별렀다.

출세한 군인으로 늘 전장에서 생사를 오가며 진의 침공을 막아온 실적을 자부해온 염파였기에,

일개 환관의 식객으로

별다른 무공도 없이 말재주만 가지고

자신과 동격이 된 것도 모자라

지위가 자신보다 높아진 것에 염파는 불만을 느끼고 있었고,

"반드시 그에게 수치를 주겠다"는 염파의 말도

정직한 그의 성격상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한들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를 알게 된 인상여는

염파와 만나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로 집에 틀어박혀,

입궐하는 것조차 염파가 없는 날만 고르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레를 타고 외출한 인상여는

길에서 염파와 우연히 마주쳤고, 그대로 옆으로 숨어버렸다.

 

이러한 인상여의 모습에 실망한 종자들은

그날 밤 인상여에게 찾아가

"우리가 친인척을 떠나 나리를 섬기고 있는 건

당신의 높은 뜻을 존경해서였는데,

오늘 나리의 행동은 한낱 필부(匹夫)조차도 부끄러워할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부끄러워하지도 않으십니까.

더는 당신을 섬길 수가 없겠습니다."라며 항의했고,

듣고 있던 인상여는

 "너희는 진왕과 염파 장군, 둘 중 어느 쪽이 더 무서운가?"라고 물었고

종자들은 당연히 진왕이라고 대답했다.

인상여는

"난 그 진왕을 꾸짖고 나아가 진의 군신을 욕보인 자다.

이 상여가 염파 장군을 두려워할 이유가 있는가? 생각해보라.

진이 조를 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 장군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와 장군이 다투면

둘 중 어느 하나는 반드시 크게 다치게 된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도 국가의 위급함을

개인의 싸움보다 우선으로 여겨서다."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는 궁중에까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염파는 깊이 부끄러워하면서 인상여에게 찾아가

그의 앞에 어깨를 드러내고 꿇어앉아,

등에 지고 온 가시나무를 내밀며

"이 천한 자가

당신의 관대하심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으니

이 채찍으로 원없이 때려주시기 바랍니다.

당신께 지금껏 준 수모를 생각하면 그래도 부족하겠지만." 하며

속죄를 빌었는데,

인상여는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군이 있기에 조가 있는 겁니다."라며 용서했다.

 

더욱 감격한 염파는

"인상여, 당신을 위해서라면 이 목을 친다 해도 후회가 없겠소."라고 맹세했고,

 

인상여도

"나도 장군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을 치겠습니다."라며 맹세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위해 목을 친다 해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고,

이것이 「문경지교(刎頸之交)」,

「문경지우(刎頸之友)」라는 고사의 유래가 되었다.

그 뒤

  진은 인상여와 염파가 건재한 동안 조를 침범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정치, 군사 방면에서

趙나라를 지탱한 버팀목이었고,

그 재능만큼이나 유대관계 또한 강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인상여는 병으로 쓰러지고 염파도 늙었다.

혜문왕의 뒤를 이어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자,

진은 장군 왕흘(王?)을 시켜 조를 치게 하였다.

조는 염파를 총대장으로 삼아 출격하게 했고,

장평(長平)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노장 염파는 이 싸움에서 수는 비록 적지만 사기가 높은 진의 군사를 보고 농성전을 택했다.

정예병을 상대로 교전하는 것은 위험했지만,

숫자도 적보다 많은 데다 적이 먼 곳에서 온 원정군이라면

시간을 끌며 장기전을 벌이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진군은 조군을 상대로 몇 번이나 도발해왔지만 염파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급해진 진군은

효성왕을 상대로 획책에 나서서,

조의 총대장을 염파가 아닌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로

이름은 높았지만 실전 경험은 없었던 조괄(趙括)로 바꾸게 했다.

인상여는 이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효성왕에게 "왕께서는 명성만 듣고 조괄을 쓰려 하십니다만,

그것은 슬의 발에 아교풀을 칠해 고정시켜 놓는 것과  같습니다.

조괄은 고작 명장이었던 자기 아버지의 글이나 잘 읽었을 뿐,

실전에서는 때를 맞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모릅니다."라며

조괄의 실전 경험과 응용력 부족을 강조하며 염파의 해임을 철회시키려 했지만

효성왕은 듣지 않았고, 결국 조군의 총대장은 교체된다.

 

젊은 조괄은 적의 도발에 넘어가

우세한 병력으로 진군을 한꺼번에 치겠다며

전군을 거느리고 성을 나갔지만,

총대장이 조괄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왕흘 대신 진군의 총대장이 된 명장 백기(白起)에게 후방을 노출당하면서

조군은 산산이 무너져, 조괄 자신도 죽고 조는 45만 명의 병사를 잃었다.

다급해진 효성왕은 영토를 할양하고 화의를 맺었다.

그 뒤 인상여는 병사했다.

염파는 일시 조를 지탱하며 진의 침공을 막아냈지만,

그 뒤 (魏)와 (楚)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고,

많은 병력과 명신, 명장을 잃은 조는

차츰 약해져 매년 진의 침공을 받다가

마침내 멸망하고 말았다.

 


  浩然之氣(호연지기)는맹자()》 <공손()> 상편 나오는 말로, 사람 마음 있는 너르고 크고 올바른 기운.

하늘 사이 가득 채울 만큼 넓고 커서 떠한 에도 굴하지 않고 맞설 있는 당당한 기상.

 


  처세(處世)


높은 곳에 오를수록 발 아래를 살펴라. - 몽염(蒙恬)

 

  몽염(蒙恬)(?~ BC 209 중국)은  만리장성을 수축한 중국 진(秦)나라의 장군이다.

진나라를 세운 시황제(始皇帝)의 명으로

중국 북방을 넘나들면서 소란을 피우던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족인 흉노족을 토벌하고,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진나라 이전에도 북방에 소규모의 방어용 성벽이 축성되어 있었는데,

몽염이 이것을 보수·연결하여 만리장성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황제가 죽은 후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환관 조고(趙高)가 정권을 찬탈하고,

몽염과 정통 황위 계승자인 2세 황제를 죽였다.

 

한편 몽염이 (箏)과 붓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붓은 그가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기존에 있던 것을 현재의 형태로 개량하거나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驕慢(교만)이 不治病(불치병)이다. - 편작(扁鵲)

 

  편작(扁鵲)은 사기 史記〉에 전기가 실려 있는 중국 주대(周代)의 명의(名醫)이다.

성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 발해군(渤海郡: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사람이다.

제자와 함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진료했으며,

편작이라는 이름은 조(趙)나라에 갔을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는 광범위한 종류의 병을 침·약초 등으로 치료했으며,

맥박에 의한 진단에 탁월했다고 한다.

 

〈사기〉에는

조간자(趙簡子)가 의식을 잃었을 때 소생하리라고 알아맞힌 이야기,

괵(?)의 태자가 시궐(尸厥)이라는 병에 걸려 거의 죽은 것으로 여겨졌을 때

함석(鍼石)·위법(?法) 등을 사용하여 치유시킨 이야기,

제(齊) 환공(桓公)의 안색만을 보고도 병의 소재를 알아냈다는 이야기 등이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책에 있는 위의 해당인물에 대한 전기에는

그 기록이 없는 점과 그들의 생존연대가 수백 년에 걸쳐 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편작은 여러 가지 전설을 합해 만든 가상인물로 생각된다.

 

한편 산둥[山東] 지방에 있는 새의 전설이 변형된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

편작이 〈난경 難經〉의 편찬자라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그의 명성을 빌린 것이다. 그는 후세에 명의의 대명사로 알려졌다.


늘 낮은 姿勢(자세)로 權力(권력)을 警戒(경계)하라. - 소하(蕭何)

 

  소하(蕭何)(?~ BC 193)은 중국 전한시대(前漢時代)의 정치가이다.

패현(沛縣:지금의 장쑤 성[江蘇省]에 속함) 사람으로,

전한 건국의 일등공신이다.

 

그는 패현의 하급관리를 지내다가

BC 209년 훗날 한(漢)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을 도와

진(秦)의 수도 셴양[咸陽]을 점령했다.

 

그후 진의 승상(丞相) 어사부(御史府)에 있던 율령집(律令集)들을 거두어

전국의 호구(戶口)와 민정을 장악했다.

 

항우(項羽)가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했을 때도

그는 한의 승상으로 있으면서

관중[關中:산시 성(陝西省) 웨이허 강(渭河) 일대]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확대에 주력했고,

한신(韓信)을 유방에게 천거하여 대장으로 삼기도 했다.

 

초·한(漢)전쟁 때

그는 승상의 신분으로 관중 지방에 머물면서

그 지역을 한군의 후방기지로 만들어

병력·군비의 보급을 원활하게 했다.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 후

그는 찬후(?侯)에 봉해졌으며,

秦의 법을 참고한 '9장률'(九章律)을 만들어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유방이

자신과 성(姓)이 다른 한신·진희(陳?)·영포(英布) 등의 제후들을 암살하는 데 협조하여

상국(相國)에 임명되었다.


王(왕)의 그림자, 參謀(참모)로 살아가는 법 - 장량(張良)

 

   장량(張良)( ?~ BC 189)은  중국 전한(前漢) 초기의 정치가이다.

자는 자방(子房).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韓)나라 소후(昭侯)·선혜왕(宣惠王) 등의 5대에 걸쳐

승상을 지냈다.

 

진(秦)이 한을 멸하자

그는 자객들과 사귀면서 한의 회복을 도모했다.

 

박랑사(博浪沙: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위안양[原陽] 남동쪽)에서

진의 시황제(始皇帝)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전설에 따르면

하비(下?지금의 장쑤 성[江蘇省] 쥐닝 현[雎寧縣] 북쪽)에서 황석공(黃石公)을 만나

〈태공병법 太公兵法〉을 얻었다고 한다.

 

BC 209년 진에 반대하는 무리를 모아

유방(劉邦)과 합세했고,

이후 주요전략가가 되었다.

 

초(楚)·한(漢) 전쟁 기간에

그는 6국(六國)의 후예를 세우지 말고,

영포(英布)와 팽월(彭越)을 빼앗아오도록 했다.

 

또한 한신(韓信) 등의 책략을 중용하여,

항우(項羽)로 하여금 안팎으로 적의 공격을 받게 하라고 제안했다.

 

유방이 셴양[咸陽]을 함락시킨 후

장량은 진의 보물창고인 부고(府庫)를 봉하여 보관하고

바수이 강[?水]상류로 철군하도록 건의했는데,

유방은 그의 모든 의견을 받아들였다.

201년 유후(留侯)로 봉해졌다.


스스로에게 嚴格(엄격)하면 절로 威嚴(위엄)이 선다. - 자산(子産)

 

  자산(子産)(BC 585~ 522)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이다.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교(僑). 자는 자산.

 

정(鄭)나라 목공(穆公)의 손자이며 자국(子國)의 아들이다.

BC 554년 정경(正卿) 자공(子孔)이 내란으로 죽은 뒤 경(卿)이 되었다.

BC 543년 백유(伯有)의 내란 이후

정경의 위치에서 난을 수습한 뒤,

죽을 때까지 정나라의 정치를 지배했다.

 

당시 정나라는

북방의 패자인 진(晉)나라와 남방의 패자인 초(楚)나라 사이에 끼여 고초를 겪었으나,

자산은 그의 박식과 웅변으로써 두 나라의 세력 균형을 이용하여

일시적인 평화를 누렸다.

 

진·초 두 나라에 대한 공납의 부담을 줄이는 한편

국내의 농지를 정리·개척하여 토지세를 징수함으로써

국가경제를 부흥시켰다.

 

또 국내 귀족의 항쟁을 방지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을 만들고

중국 최초의 성문법(成文法)을 완성했다.

 

그는 전통적인 봉건적 통치에 대하여

법치주의에 의한 통치를 실현했다.

 

자산은 유능한 정치가·외교가일 뿐만 아니라

합리주의적인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종래의 구복(龜卜)과 무사(巫師) 등을 통해

하늘의 뜻을 받들어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데서 탈피해

법을 토대로 하여 합리주의적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이 합리주의 사상은

이후 공자의 원시유교에서 주장한 인간 자각의 선구가 되었다.


機會(기회)는 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 이광(李廣)

 

  이광(李?, 李廣, Li Kuang - 기원 전 119년)은

중국 전한시대의 장군. 문제, 경제, 무제를 삼 대에 걸쳐 수행하였다.

무용이 뛰어나 평생을 흉노와 싸워왔지만

번번이 전공을 인정받지 못하고 분사했다.

진의 명장 이신의 자손이다.

사촌동생으로 승상이 된 이채가 있다.

본적지는 농서군 성기현(현 감숙성 텐수이시 진안현)이다.

기원 전 166년, 흉노 정벌에 공을 세워,

낭이 되어 문제의 옆에서 장군으로 수행했다.

 

맹수를 사냥을 할 때

근접전에서 죽이는 무용을 보이자

문제는

"고조부 때 태어났으면 만호후(萬?侯)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게 했다.

 

경제 때는 효기도위에 임명되었고,

주아부 아래에서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는 공적을 세웠다.

다만 양왕 무의 장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한나라에서는 공적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

 

후에 상곡 태수, 상군 태수가 되었다.

그 때에 10배가 넘는 흉노군에 포위되었지만,

일부러 복병이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후퇴하자,

흉노군은 추격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그 후, 농서, 북지, 안문, 운중 태수(모두 한의 북변에서 흉노에게 가깝다)를 역임한다.

당시 흉노들에게 비장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후로도 무용이 뛰어난 무장을 이광을 모방해 비장군으로 불리는 일이 많았는데,

후한 말기의 무장 여포도 비장군으로 불렸다.

 

한 무제 때는

그를 천거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위위에 승진했다.

무제가 마읍에 흉노를 유인하여 공격하려고 했을 때에는,

효기장군으로 종군했지만 공적은 세우지 못했다.

 

기원 전 129년 흉노와의 싸움에 패해 포로가 되었다.

그 후 탈출하여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죄를 추궁 당해 평민으로 강등당했다.

이후 우북평 태수로 복귀하여, 낭중령으로 옮겼다.

흉노와 자주 전투를 벌였지만 좋은 전과를 얻지 못하고,

기원 전 119년 흉노 침공 때에는 고령을 이유로 배제되었다.

 

이광은 격렬하게 항의해 간신히 참전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무제의 밀명을 받은 대장군 위청에 의해서

후방인 익수의 군으로 돌려졌다.

 

이광은 불복하여 다른 방면에서 진군 했지만,

우연히 길 안내가 없었기 때문에,

길을 잃어 흉노와의 싸움에 늦어 버렸다.

 

위청이 그것에 대해서의 보고서를 보내려고 이광의 부하를 힐문하자,

이광은 담담히

「나는 성인이 되고 나서 흉노와 크고 작은 전투를 70여 차례 치렀다.

이번에도 위청 대장군을 따라서 선우의 군사와 싸울 수 있을 기회를 가졌지만,

대장군 위청이 나를 후방 부대로 돌렸기 때문에

길을 잃고 우회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것이 천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외치고, 그대로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광의 부하 장교는 물론이고,

백성들도 남녀노소 없이 울었다고 한다.

이광의 막내 아들 이감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위청을 원망하면서,

주연 자리에서 위청을 구타했다.

위청은 불문에 붙였지만,

이것을 안 위청의 조카 곽거병

원한을 품고 수렵장에서 이감을 사살했다.

 

이광의 장남 이당호는

무인은 아니었만,

무제의 측근인 한언이라고 하는 신하가 불손한 태도로 대하자,

이당호는 그를 폭행했다.

그 과감함을 본 무제는

그를 유능하다고 평가했지만,

이당호도 요절하고 말았다.

그의 아들이 이능이다.

 

또 이감은 이초(李椒)라고 하는 둘째 형이 있었지만

그도 맏형과 같이 요절했다.

이감은 두 명의 아이를 두었고,

아들은 이우이며, 인색하고 금전 집착이 강했다.

 

딸은 이우의 누나로 황태자 류거의 측실이 되어

려태자(류거)에게 신뢰를 받아 그의 시종이 되었다.

 

하지만 사촌 이릉이 흉노에게 항복하면서,

그도 이릉의 뒤를 쫓아 흉노로 도망치려 한다는 비방을 받아 사형당했고,

이릉의 처자와 어머니도 처형되었다.

 

이릉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기》의 저자 사마천

이릉을 옹호하다 궁형을 당하였다.

 

일화

 

  이광은 청렴한 인물이며,

샘을 발견하면 부하를 먼저 먹였고

식사도 하사관과 함께 하여,

전원이 식사를 시작할 때까지 자신의 몫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의 인품에 대해

복숭아나 자두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는 자연과 사람이 모이고 길이 생긴다”고 평가했다.

 

바위에 꽂힌 화살

  이광은 활의 명수이며,

어느 날 사냥하러 나갔다가 호랑이를 발견하고 화살을 겨냥해 쏘았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니 호랑이가 아니라 바위였으며,

이광의 화살은 그 돌에 박혀 있었다.

그 후 이광은 여러번 바위에 화살을 발사했지만 한번도 박히는 것이 없었다.

이것을 양자운에 있는 사람이 이야기했는데,

자운은 「지성이면 금석도 열린다」

(성심성의로 사물을 행하면 바위도 관통할 수 있다)이라고 말했다.

 ( 「서경잡기」) 소설 수호전의 등장인물로 활의 명수인 화영은

이 일화를 모방해 「소이광」이라고 불린다.

適切(적절)한 自己(자기) 演出(연출)도 必要(필요)하다. - 진평(陳平)

 

  진평(陳平, ? ~ 기원전 178년)은 한나라의 정치가이다.

위나라의 신하였으나 위왕이 장한에게 죽자 항우에게 귀순하여

항우의 책사가 되었다.

그 후 전한 고조 유방(劉邦)이 삼진(三秦)을 공격할때,

위무기의 설득으로 유방에게 귀의,

호군중위의 직책을 맡게된다.

반간계를 써 항우의 참모였던 범증을 내친다.

 

상국 조참서거후, 좌승상(左丞相)이 되었다.

유방의 아내인 여태후유방서거후 여씨친족과 모반을 꾀하자,

우승상(右丞相) 왕릉과 장군 주발(周勃)과 함께

여씨의 난을 평정한 뒤

문제 유항(劉恒)을 옹립하였다.

 

유방의 참모로 큰공을 세운 것을 인정 받아서 '호유후'에 임명되었다.

그 후 '곡역후'로 승진하였고,

조참(曺參)이 죽은 후에는 '좌승상'이 되었고,

여후가 죽자 주발(周勃)과 함께 여씨를 숙청한 후

유방의 차남 유항(劉恒)을 문제(文帝)로 옹립 하였다.

 

《사기》에 진평에 대한 전기인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가 전해지고 있다.

 

반간계

  진평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인 유방이

자꾸 항우에게 패배하자

그 원인이 항우에게는 범증이라는 뛰어난 참모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항우와 범증을 이간질 시키기위해

항우의 사신이 유방에게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자

일부러 진수성찬을 차려놓은 뒤

항우의 사신이 도착하자

"아니, 범증님의 사신인 줄 알았더니 새파랗게 어린 항우의 사신이잖아.

여봐라. 진수성찬을 당장 치워버리고

사신은 그냥 대충 대접해라."라고 말하며

진수성찬을 치우도록 하고

항우의 사신에게 매우 초라한, 가난한 집에서 먹는 밥을 식사로 대접했다.

 

항우의 사신은

항우에게 돌아가는 대로 이 사실을 항우에게 알렸고

항우는 범증을 크게 의심하여 결국 범증을 내쫓았다.

 

항우에게 쫓겨난 범증은 지병이 악화되어 숨을 거두었다.


賢明(현명)한 자는 떠나야 할 때를 안다. - 범저(范雎)

 

   혜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이복동생인 소양왕(昭襄王)의 시대에

재상 위염(魏?)과 백기 장군의 활약으로 진은 몇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소양왕을 즉위시킨 재상 위염의 권력이 너무 커진 것을 우려한 소양왕은

재상 위염을 숙청하고, 대신 범저(范雎)를 등용한다.

범저가 진언한 것은 유명한 원교근공책이다.

"가까이에 있는 한·위를 거느리고, 먼 제나라와의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승리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먼 토지가 되어, 지키는 것이 어려워져 버린다.

이것에 대해서 먼 제나라나 연나라와 동맹해 가까이의 한·위·조를 공격하면

가까이의 토지가 손에 들어 오게 되었고, 이는 곧바로 진의 영토로 집어 넣는 것이 용이해진다."

이것이 원교근공책이다.

이 진언에 감동한 소양왕은 이 진언을 채택하고, 범저를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260년에는 백기가 조나라로 진격,

장평 전투를 통하여 조군을 격파,

조의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의 예기를 꺾어버린다.

기원전 255년에 주나라를 멸해 그 영지를 접수하여

진의 위세는 한층 더 높아졌다.


幸福(행복)은 些少(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 안회(顔回)

 

  안회(顔回)는 BC 514 노(魯:지금의 산둥[山東] 지방)~ BC 483.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학자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자연(子淵). 안연(顔淵)이라고도 한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는

학자·정치가·웅변가로서 뛰어난 사람이 많았으나

안회는 덕의 실천에서 가장 뛰어났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연구와 수덕(修德)에만 전념하여, 공자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되었으며, 공자의 제자 가운데 겸허한 구도자(求道者)의 상징이 되었다. 32세에 요절하자, 공자가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도다"라고 탄식했다 한다. 저술이나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그의 자손은 공자·맹자의 자손과 함께 취푸[曲阜]에 모여살면서 명·청대에 안씨학(顔氏學)을 세워 나라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