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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읍 성동리 원성동-여트물-용산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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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동 마을은 10여년 전에 대사동 마을에서 분리되었다. 무안읍성 성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남문안 옆 마을로 무안의 중요기관이 들어서 있다. 농협무안군지부 광주은행 무안신협 박병원 전남약국 낙지골목 무안터미널 천주교 무안성당 서해안 설계사무소 등으로 성동1리에 해당된다. 대체로 무안공용터미널에서 무안군청까지의 국도1호선 아래의 마을이다. 현재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정참봉 박참봉 김참봉 등 세 참봉의 영역 속에 속한 마을이기도 하다. 예전 월성식당을 포함하여 농협군지부가 있는 자리 주변은 김참봉의 땅이었고 그 옆 천주교 성당을 비롯하여 무안공원 약사사 등은 정참봉 땅이었다. 그 외 원성동 마을의 땅은 박참봉의 소유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월성식당에는 물이 잘 나오는 우물이 있었다. 웃내 즉 성동제 부근에서 비롯된 水源이 월성식당의 우물과 쪼빡샘 그리고 초등학교 뒤 콩나물집 샘이 일치한다. 쪼빡샘은 현재 금영노래방 부근에 있었는데 깊이는 1미터 가량밖에 안되었지만 깨끗하고 물맛이 좋았으며 물의 양이 많아 1967년 1968년 같은 큰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로는 ‘해방 이후 주변에 있는 어르신들이 무안에 오면 반드시 삶은 돼지고기를 찾았는데 그 이유는 이 우물을 가지고 요리하면 맛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지로 월성식당의 돼지고기 수육은 무안 맛의 원조였다. 이 마을 맞은편에 있는 성동공원은 원래 정참봉 소유였다. 정상에는 정참봉 제각이 있었는데 그 제각은 무안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이 패망하면서 군대 해산 문서를 쓰게 되는데 무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이 제각에서 서명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무안에 있었던 일본군들은 정참봉 제각에서 닛뽄도를 앞에 놓고 미군 에게 항복했다는 것이다. 약사사를 포함한 대사동 주변의 땅은 조선조 이래 오랫동안 이 지역의 세도가였던 정참봉(정학정)의 땅이었다. 후손들의 관리가 부실하여 지금은 대부분이 남의 땅이 되어버렸지만 한때는 자기 땅만 밟고 다녀도 한나절을 간다고 할 정도의 넓은 규모의 땅을 소유했었다. 웃내에서 흐르던 月川의 줄기가 원성동 마을을 감싸고 흘렀던 적이 있었다. 무안읍이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에 대림장 부근에서 비롯된 한 줄기 또랑 물이 천주교 성당을 지나갔다. 그리고 팽나무거리와 똑다리 그리고 구술나무 거리를 지나 파크랜드 가게를 거쳐 하천에 합류했다. 나이 지긋한 주민들은 이 또랑에서 고기도 잡고 목욕도 했다고 한다. ▲ 읍내의 중심에 있으면서 개발이 안 된 마을-성동2리 여트물
여트물은 성동2리에 속하는 지역으로 여튼 물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오래 전 무안은 영산강 물이 유산정 앞까지 들어왔다. 지금도 무안천을 비롯한 수로에 해당되는 곳을 파면 어김없이 뻘과 모래가 나온다. 이러한 지역에서 여트물이란 지명은 강 가 또는 물길의 가에 위치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마을 구역을 보면 군청 앞의 광주-목포 간 도로 아래 부분에서 목포식당-덕신이발관-백악관모텔-제일병원-지적공사-청담주상복합아파트-황토클리닉을 포함한 지역이다. 이 마을은 140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구실(마기곡)은 말을 사육하던 고마청(雇馬廳)이 있었던 곳이며 성안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 타고 온 말을 매어 놓았던 곳이어서 성의 형성과 함께 주민들이 살았던 곳으로 여겨진다. 또한 동문 밖이란 말도 성의 축조와 함께 형성된 지명이어서 마을의 형성은 성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입향조는 추정하기 어렵다. 마을의 특성상 동족 마을이 어렵고 오래 산 성씨가 없을 뿐 아니라 성씨도 성안의 성씨와 성 밖의 성씨가 달라 어느 성씨가 먼저 이 마을에 입향 하였는지 확인할 수 없다. 이 마을은 원당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마을 앞으로는 국도 1호선이, 옆으로는 무안 해제 간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다. 원당산은 무안읍의 후주산으로 공산(현재 무안 성동 공원)을 옆으로 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불만이 많다. 군청 앞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무안읍 내에서 가장 발전이 안 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지로 40여 년 전의 모습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다. 또한 폐가도 10호가 넘을 정도로 마을이 황폐해 있다. 도심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리고 군청 앞에 있으면서도 개발이 되지 않는 이유를 주민들은 여러 가지로 진단했다. 첫째는 정치인들의 관심이 없었고 둘째는 사회기반 시설의 미비를 들었으며 셋째는 주민들의 비협조도 한몫을 했다고 한다. 마을에 여트물샘이라 부르는 조그만 샘이 있었다. 주민들은 그 샘에서 ‘물을 대려 먹었다’고 한다. ‘대려 먹는다’라는 말은 물을 따뜻하게 데워서 먹는다는 말이 아니다. 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기다려서 먹는다’라는 말이다. 드물게 듣는 지역 사투리다. ▲ 용이 비상하는 형국의 비룡동 마을-성동 3리 용산
용산은 성동3리에 속한 마을로 마을의 뒷산이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 마을 앞으로는 영산강 물이 들어왔으며 그 물줄기는 불무제 저수지(현재는 불무제 공원)까지 이어졌다. 마을의 주산은 연징산의 한 줄기인 매봉이다. 매봉의 왼쪽으로는 원당뫼가 뻗어 나가 그 아래에 무안군청이 들어서고 오른쪽으로는 맥이 뻗어 내려 무안병원을 지나 영산강 물이 들어왔던 들판을 향해 뻗어내리고 있다. 이러한 산의 형상을 보고 당시에는 이 마을을 飛龍洞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나주김씨 제주양씨 남평문씨 등 세 성씨가 점차적으로 들어 와 마을을 이루었으나 이중 처음 들어온 성씨는 매봉 너머 대사동에서 들어 온 나주김씨이다. 성씨자료에 따르면 나주김씨 김수남(1487-1540)이 나주 거평에서 살다가 이곳으로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후에 제주 양씨 양의남(호-月軒)이 임진왜란 때 능주 월곡에서 이곳에 옮겨왔다고 한다. 현재 대사동 주변의 웬만한 임야는 나주김씨 소유의 門中 산들이다. 마을은 길에서 깊숙하게 안으로 들어왔으며 지형상 와우(臥牛) 형국으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지형 때문에 한국전쟁 때는 무안읍 등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몸을 피하러 찾아오는 피난지 역할도 했다. 마을 입구는 다른 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소나무와 느티나무를 주종으로 한 숲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이 가려져야 잘 산다’는 예부터 전해져 내려 온 말에 따른 것이다. 이른바 비보 숲의 성격을 띄는 데 마주 보이는 감방산에서 키질을 하면 이 마을에는 쭉정이만 날아든다는 어느 어른의 지적에 따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한 숲이라고 한다. 이 숲은 남평 문씨의 입향조가 조성한 것이라 한다. 주민들은 물을 소중히 여겼으며 1940년도에 마을 뒤 용산골에 용산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비로소 마을이 풍족하게 살게 되었다고 믿었다. 실지로 그때부터 주민들의 살림살이가 펴져 지금은 다른 마을 못지않은 넉넉함을 갖출 수가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풍수 사상을 빌어서 용이 물을 만나게 되니까 마을이 흥성해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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