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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보호할 수 없는 법 3가지(3)와 팔정도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아리요- 앗탕기꼬- 막고-’라고 하는
팔정도의 법을 설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깊이가 있고 어려운 내용의 법일 수도 있지만
수행자들께서 잘 전해 들으시면 훌륭한 이익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maggaṅga 막강가’ 라고 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magga 막가’라고 하는 것은 길을 의미합니다.
‘aṅga 앙가’라고 하는 것은 요소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maggaṅga 막강가’라고 하는 것은 길의 요소를 의미합니다.
즉 갈래를 지닌 길의 요소를 의미합니다.
팔정도라고 하는 여덟 가지의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그 여덟 가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sammādiṭṭhi 삼마-딧티’ 정견, 바른 견해,
2 ‘sammāsaṅkapo 삼마-상까뽀-’ 정사유, 바른 생각,
3 ‘ssammāvācā 삼마-와-짜-’ 정어, 바른 말,
4 ‘sammākammanto 삼마-깜만또-’ 정업, 바른 행위,
5 ‘sammāājīvo 삼마-아-지-오-’ 정명, 바른 생계,
6 ‘sammāvāyāmo 삼마-와-야-모-’ 정정진, 바른 노력,
7 ‘sammāsati 삼마-사띠’ 정념, 바른 알아차림,
8 ‘sammāsamādhi 삼마-사마-디’ 정정, 바른 마음집중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 여덟 가지 요소를 부처님께서 세 가지 길의 요인들로 축약해서 설명하실 때는
첫 번째가 ‘paññā maggaṅga 빤냐- 막강가’ 라고 해서
두 가지 요소인 정견과 정사유를 지혜의 길의 요소라고 설하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의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라고 하는 영역은
‘sīla 실-라’ 라고 하는 계행의 영역입니다.
‘sīla maggaṅga 실-라 막강가’ 라고 하는,
계행이라고 하는 길의 요소들이라고 부릅니다.
나머지 세 가지의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마음집중은
‘samādhi maggaṅga 사마-디 막강가’ 마음집중, 삼매라고 하는 길의 요소로 구분이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팔정도라고 하는 법을 설하신 순서대로 언급된 영역들입니다.
세 가지 ‘maggaṅga 막강가’ 가 존재합니다.
첫 번째는 지혜라고 하는 길의 요소들,
두 번째는 계행이라고 하는 길의 요소들,
세 번째는 삼매라고 하는 길의 요소들입니다,
이것을 실제로 존재들이 닦아나가게 될 때
‘sikkha 식카’ 라고 하는 수행의 영역으로 이야기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께서 전해 들으실 때
삼학의 법이라고하면 계, 정, 혜라고 이해를 하게 됩니다.
즉 ‘sīla sikkha 실-라 식카’ 라고 하면 계학, 계율을 닦아나가는 것입니다.
‘sikkha 식카’라고 하는 것은 닦고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계학이라고 불러도 크게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그다음 ‘samādhi sikkha 사마-디 식카’ 라고 하는 것은 정학, 마음집중의 무리입니다.
세 번째는 ‘paññā sikkha 빤냐- 식카’ 라고 해서 혜학, 지혜수행의 영역이라고 부릅니다.
수행자들이 일반적으로 수행의 영역에서는 이와 같은 단계를 지니게 됩니다.
‘maggaṅga 막강가’ 의 영역에서는 지혜가 우선해서 언급이 되고
그 다음은 계행,
그 다음은 삼매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sikkha 식카 ’라고 하는 수행의 영역에서는
계ㆍ정ㆍ혜의 영역으로 닦아 나가게 됩니다.
‘sīla sikkha 실-라 식카’,
‘samādhi sikkha 사마-디 식카’,
‘paññā sikkha 빤냐- 식카’,
즉 계학, 정학, 혜학입니다.
청정의 단계를 이야기하는 영역에서 가장 먼저
‘sīla visuddhi 실-라 위숫디 ’라고 하는 계청정을 언급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수행자들이 경험해야할 수행의 영역이 계학의 영역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청정을 이루어야하는 단계도 계행의 영역일 것입니다.
그다음은 ‘citta visuddhi 실-라 위숫디’ 라고 하는
심청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마음의 번뇌의 요소들이 잠재워진 고요하고 맑은 특성을 의미하게 됩니다.
수행자들이 그렇게 고요하고 맑고 집중된 마음으로
실제 존재하는 물질과 정신현상들의 법을 관하게 될 때
이전에 지녔던 자아라고 하는, 자아의 소유라고 하는, 나라고 하는 그릇된 견해를 지니지 않고
오온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됩니다.
그러한 영역이 ‘diṭṭhi visuddhi 딧티 위숫디’ 라고 하는
견해의 청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 ‘sīla maggaṅga 실-라 막강가’ 를 통해서
‘sīla sikkha 실-라 식카’를 수행하게 되고
계행이라고 하는 바른 길을 통해서 계행이라고 하는 훈련이 이루어지고
계행의 청정이 이루어집니다.
정 이라고 하는, 사마디 라고 하는 바른 길들에 의해서
‘samādhi 사마디’가 훈련되어지고 마음의 청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paññā 빤냐-’라고 하는 지혜의 길의 요소에 의해서
지혜의 훈련, ‘paññā sikkha 빤냐- 식카 ’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릇된 견해들이 바르게 정화되는 영역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들은 계ㆍ정ㆍ혜라는 영역으로
부처님께서 설해두신 불법의 유산들을 자신이 스스로 체험하고 소유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각각의 요소들을 어떠한 구성성분들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maggaṅga 막강가’의 영역에서 설한 법의 순서대로 이야기해보면
가장 먼저 ‘paññā aggaṅga 빤냐- 막강가 ’라고 하는 지혜의 길에서
‘sammādiṭṭhi 삼마-딧티’ 라고 하는 정견, 바른 견해의 영역이 설해졌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되도록 이야기하면 바른 견해라고 하는 것은 다음 네 가지를 말합니다.
1. Dukkhe ñāṇaṃ
둑케- 냐-낭
2. Dukkha samudaye ñāṇaṃ
둑카 사무다예- 냐-낭
3. Dukkha nirodhe ñāṇaṃ
둑카 니-로데- 냐-낭
4. Dukkha nirodha gāminiyā paṭipadāya ñāṇaṃ
둑카 니로-다 가-미니야- 빠띠빠다-야 냐-낭
고통의 법에 대한 정견,
고통의 조건이 되는 법에 대한 정견,
고통의 소멸이라고 하는 법에 대한 정견,
고통의 소멸에 이르도록 하는 바른 수행의 길에 대한 정견입니다.
즉 사성제에 대한 바른 견해를 정견이라고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부처님 법의 영역 안에서 자신이 바른 견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고ㆍ집ㆍ멸ㆍ도에 대한 정견이 생겨나야 정견이 완성이 되게 될 것 입니다.
‘sammāsaṅkapa 삼마-상까빠’
정사유라고 하는 것은 흔히들 바른 생각이라고 합니다.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법의 영역에 있어서는
‘sammāvitakka 삼마-위딱까’ 라고 하는 대상에 대한 바른 적용을 의미합니다.
‘vitakka 위딱까’ 라고 하는 정신요소는 대상에 마음을 전향 해주는 특성입니다.
‘sammāsaṅkapa 삼마-상까빠’ 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올바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주는 정신적인 기능입니다.
그것이 바로 바른 사유,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마음을 적용한다는 것은 경의 영역에서는 어떻게 설해두고 있을까요.
첫 번째로 ‘nekkhamma saṅkappa 넥캄마 상깝빠’ 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kilesa 낄레-사’ 라고 하는 번뇌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생각입니다.
감각적인 즐거움의 대상들이라든지
자신에게 불만족과 성냄을 일으키는 집착의 대상들로부터
벗어나고자하는 마음의 전향의 힘입니다
.
그러한 방향으로 마음을 틀어주는 정신적인 기능입니다.
‘nekkhamma 네캄마’ 라고 하는 것은
세간의 감각적인 대상들로부터 생겨나는 번뇌로부터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번뇌의 요인으로부터 마음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바른 숙고를 의미합니다.
두 번째로는 ‘abyāpāda saṅkappa 아뱌-빠-다 상깝빠’ 라고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byāpāda 뱌-빠다 라고 하는 것은 존재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 하는 정신적인 특성을 의미합니다.
흔히 수행자들께서 ‘dosa 도-사’ 라고 하는,
진심이라고 하는, 성냄이라고 하는 말을 자주 들으실 것 입니다.
탐ㆍ진ㆍ치라고 하는 용어들도 친숙합니다.
이러한 영역에서 ‘dosa 도-사’ 의 영역의 한 가지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존재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 하는,
다른 존재들에 대해 적의를 지니는 것을 포함하게 됩니다.
‘abyāpāda 아뱌-빠-다’ 라는 것은 적의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abyāpāda saṅkappa 아뱌-빠-다 상깝빠’ 라는 것은 적의로부터 멀어지는 마음의 전향입니다.
그러한 방향으로 마음을 쏟고 쓴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일으키고 숙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avihiṃsā saṅkappa 아위힝사- 상깝빠 ’라고 하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vihiṃsā 위힝사-’라는 것은 잔인함의 특성을 의미하는데
잔인함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들이 고통 받기를 바라는 특성입니다.
‘byāpāda 뱌-빠다’ 라고 하는 것은 고통 주기를 바라는 상황이고
자신이 직접 고통 주고자 하는 상황으로부터 생겨나게 됩니다.
‘vihiṃsā 위힝사-’라고 하는 것은
존재들이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고통의 요소에 대해서 만족해하는 특성들입니다.
존재들의 고통을 고통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만족으로 여기는 특성입니다.
첫 번째 조건인 ‘nekkhamma 네캄마’ 탐욕이라고 하는
번뇌를 떠나는 마음은 이탐의 마음,‘alobha 알로-바’ 라고 하는 탐욕 없는 마음입니다.
‘sammāsaṅkapa 삼마-상까빠’ 라고 하는 것은 탐욕 없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abyāpāda saṅkappa 아뱌-빠-다 상깝빠’ 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존재들을 해치고 다른 존재들이 행복하지 못하도록 고통 주고자 하는 특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특성들은 ‘dosa 도-사’ 라고 하는 성냄의 성향들과 관련 맺어지게 됩니다.
다른 존재들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자하는 마음들은
‘adosa 아도-사’ 라고 하는 성냄 없는 마음과 맥락을 같이하게 됩니다.
특히 정신적인 힘의 영역에서 보게 되면
‘mettā 멧따-’라고 하는 자애의 마음과 일맥상통 하게 됩니다.
‘mettā 멧따-’라고 하는 자애의 마음은
존재들이 행복하고 번영하기를 바라는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abyāpāda saṅkappa 아뱌-빠-다 상깝빠’ 라고 하는,
적의 없는 마음, 바른 숙고,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존재들에게 ‘mettā 멧따-’라고 하는 자애를 지니는 특성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생각, 바른 숙고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바른 팔정도의 한 영역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avihiṃsā 아위힝사-’라고 하는 잔인함이 없는 특성은 어떤 영역과 일맥상통하게 될까요.
다른 존재들의 고통을 고통으로서 자각하고
그 존재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기능입니다.
이는 ‘karunā 까루나-’라고 하는 연민의 정신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즉 다른 존재들에게 연민을 일으키는 정신적인 사고 과정이
‘avihiṃsā saṅkappa 아위힝사- 상깝빠’ 라고 하는 존재들에게
잔인함의 특성을 지니지 않는 정신적인 기능으로서 드러나게 됩니다.
정리하게 되면, 그릇된 생각에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감각적인 대상에 대한 탐욕에 이끌리는 마음,
다른 존재들에 대한 적의, 잔인함의 특성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이탐의 마음,
탐욕 없고, 적의 없고 잔인함이 없는 마음으로서 ‘alobha 알로-바’ 무탐의 마음,
‘mettā 멧따-’라고 하는 자애의 마음,
‘karunā 까루나-’라고 하는 연민의 마음.
이러한 마음으로 발현이 되게 될 때 수행자에게 ‘sammāsaṅkapa 삼마-상까빠’ 라고 하는
올바른 숙고, 올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영역이 완성이 될 것입니다.
어떠한 대상을 한 가지 마음에 떠올릴 때
탐욕에서 멀어지고, 성냄에서 멀어지고, 잔인함에서 멀어진 이탐의 마음, 자애의 마음,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수행자에게 바른 길을 걸어가는 한 가지 요소가 될 것입니다.
‘nekkhamma saṅkappa 넥캄마 상깝빠 ’라고 하는
세간의 번뇌의 요소로부터 떠나가는 이익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익들이 보다 구체적으로 설해진 주석의 영역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띠우따까’라고 하는 Aṭṭhakaṭha(앗타까타-) 주석서에 언급된 내용입니다.
‘nekkhamma saṅkappa 넥캄마 상깝빠’
번뇌로부터 멀어지는 바른 생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빱바자 빠타마 자낭 닙바-난짜 위빳사나 삽베-삐 꾸살라- 담마- 네캄마띠 빠웃짜띠’라고
해설을 하게 됩니다.
‘pabbaja 빱바자’ 는 출가의 영역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자신이 이탐의 바라밀을 쌓는 것입니다.
출가의 공덕을 쌓게 되는 것,
즉 지금 시대에 자신이 비구나 비구니로 출가하는 것, 단기로 출가하는 것, 출리의 이익을 쌓는 것입니다.
또 다른 형태로는 수행자들이 보름마다 포살의 계율을 지니고 여덟 가지 포살의 계율행을 지니며
법문을 듣고 수행 정진하는 그러한 시간들을 갖는다면
그러한 시간들만큼은 세간의 감각적인 대상에 대한 탐욕의 마음들,
번뇌의 마음들로부터 멀어지는 상황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pabbaja 빱바자 ’라고 하는 공덕은
자신이 수행자의 삶의 영역으로 들어감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생겨나는
출리의 공덕,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공덕이 됩니다.
두 번째로는 ‘pathama jhāna 빠타마 자-나 ’라는 영역이 언급이 됩니다.
‘pathama jhāna 빠타마 자-나’ 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 선정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첫 번째 선정이 지니고 있는 요소는 다섯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수행자들에게 마음집중이 잘 확립되어 선정이 갖춰지게 되면
‘vitakka 위딱까 ’라고 하는 대상에 대한 바른 전향들이 거듭거듭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vicāra 위짜-라 ’라고 하는 대상에 대한 순간순간의 전향들이
거듭거듭 그 대상에서 떠나지 않고 머무르게 되어
마음이 마치 그 대상을 쓰다듬고 문지르는 것처럼 그 대상에 거듭거듭 적용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산만하게 흩어지지 않는 특성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게 될 때 수행자의 마음이 이 대상, 저 대상으로 오고 가면서 마음이 지치고 오염되는 일이 없기에
‘pīti 삐-띠’ 라고 하는 마음의 기쁘고 환희로운 특성이 생겨나게 됩니다.
특성 이후에 마음이 더 번뇌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sukha 수카 ’라고 하는 행복한 정신적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pīti 삐-띠’ 와 ‘sukha 수카’ 의 차이는
‘pīti 삐-띠’ 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거친 동요를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기쁘고 즐거운 상황에 마음이 들뜸과도 함께하게 됩니다.
그러나 ‘sukha 수카’ 라는 영역으로 전향이 되면
마음이 안정되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서늘하고 시원하고 고요한 특성과 함께 오는 행복감입니다.
이러한 영역에서 대상에 대한 마음의 전향이 지속적으로 확립이 되기 때문에
‘ekaggata 에-깍가따’ 라고 하는
마치 대상에 확고하게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특성도 생겨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상황이
‘pathama jhāna 빠타마 자-나 ’라고 하는 첫 번째 선정의 영역에서 생겨나게 됩니다.
위빳사나 수행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선정의 요소들이 경험됩니다.
자신이 수행의 주제에 거듭거듭 마음이 머무르게 될 때 마음이 그 주제로부터 방일되지 않고
위빳사나 의 수행주제에 거듭 전향되는 기능들이 확립이 됩니다.
그리고 수행의 주제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특성들이 생겨나고
그러한 때 번뇌로부터 멀어진 이득을 경험하게 됩니다.
‘pīti 삐-띠 ’라고 하는 즐거움과 환희심,
‘sukha 수카’ 라고 하는 고요한 행복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수행이 깊어지게 되면 누가 불러도 잘 들리지 않고
밥을 먹을 시간이 되어도 밥 생각이 없고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대상에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힘으로 인해
외부세상의 대상에 대해서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 특성을 지니게 됩니다.
즉 ‘ekaggata 에-깍가따 ’라고 하는 마음이 대상에 잘 고정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와 같이 ‘pathama jhāna 빠타마 자-나 ’라고 하는 초선정의 다섯 가지 선정의 요소를 경험하게 될 때
수행자들이 외부세상의 대상으로부터 경험할 수 있는 번뇌로부터 멀어지는 이익을 경험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러한 이익을 이탐, 출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재가자의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자신이 수행의 주제를 계발하면 계발하는 만큼
출리의 바라밀을 닦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번뇌로부터 훌륭하게 멀어진 이익들을 경험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한 가지는 ‘nibbānanca 닙바-난짜’ 열반의 성분으로서 번뇌를 완전히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열반을 경험하는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일 것입니다.
즉 번뇌를 완전히 근절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영역까지 멀어지게 되면 완전히 멀어진 것입니다.
번뇌로부터 멀어지는 영역으로 치자면 가장 확고한 영역일 것입니다.
다음 한 가지는 위빳사나 라고 하는 통찰지로서도 번뇌로부터의 출리의 공덕이 생겨나게 된다고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번뇌가 생겨나고 있을 때 그러한 성분들을 물질과 정신현상의 측면에서 바르게 관하게 될 때
그 번뇌는 멈추고 지속되지 않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그 대상에 대해서 자각을 지니고
‘sati 사띠 ’를 지니고 알아차림을 지니는 순간들만큼은 번뇌들이 잘려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이익들을 ‘따당가 빠하-나 ’라고 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번뇌를 제거하는 기능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제거하고 뿌리를 뽑는 기능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nibbāna 닙바-나’ 라고 하는 열반의 성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magga phala 막가 팔라 ’라고 하는 도와 과의 의식은 번뇌를 완전히 끊어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영역으로 자신의 마음을 성숙시키게 됩니다.
그러한 영역은 ‘빠리체다 빠하-나 ’라고 부릅니다.
즉 번뇌를 잘라내어서 완전히 제거하는 특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위빳사나 의 수행자들이 경험하는 것은
자신이 수행의 주제에 마음이 잘 확립되어있는 순간만큼 번뇌를 잘라내게 됩니다.
방일되면 다시 그렇게 생겨나는 탐욕과 성냄을 나의 마음이라고,
내 것이라고 그릇된 집착을 일으키게 됩니다.
자신이 위빳사나 라고 하는 특성, 지혜의 특성이 생겨나고 있는 순간만큼은
번뇌에 대한 근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한 순간적인 번뇌의 근절을 ‘따당가 니로-다’ 라고 합니다.
순간의 소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위빳사나 의 수행자도 자신이 비록 출가자의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가건 오건 앉건 눕건 보건 듣건 냄새 맡건 맛을 보건 생각하고 상상하건
물질과 정신현상에 대한 바른 자각과 통찰이 이루어지고 있고
그러한 때 위빳사나 의 특성이 들어나고 있다면 그 순간만큼 번뇌들로부터 멀어진
‘nekkhamma saṅkappa 네캄마 상깝빠’ 라는 바른 팔정도에서 출리의 이익들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대상을 바르게 보고 있는 순간들만큼은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길들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완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sabbepi kusalā dhammā 삽베-삐 꾸살라- 담마-’
모든 종류의 선업의 법들에 있어서 번뇌의 요소로부터 벗어난 바른 생각들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수행자들이 팔정도의 요소에서 바른 생각의 길을 완성하는 한 가지 길이
모든 종류의 선업의 법과 함께한 생각들, 숙고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라고 하는 통찰의 영역은
위빳사나 라고 하는 지혜와 ‘nibbāna 닙바-나 ’라고 하는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열반의 이익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간에 붓다 께서 설하신 선업의 영역에 마음이 거듭 전향되고 있다면
수행자가 ‘samāsaṅkappa 삼마-상캄마’ 라고 하는
바른 숙고,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지혜의 영역에 머무르고 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라고 해설하는 것입니다.
세간의 선업의 법과 출세간의 선업의 법에 마음이 늘 머무르도록 전향해주는 기능이
‘samāsaṅkappa 삼마-상캄마 ’라고 하는 정사유, 바른 생각 바른 숙고의 영역입니다.
‘samādiṭṭhi 삼마-딧티 ’라고 하는 정견,
‘samāsaṅkappa 삼마-상캄마’ 라고 하는 정사유의 영역이
‘paññā maggaṅga 빤냐- 막강가 라고 하는 지혜의 요소 두 가지를 이루게 됩니다.
그 다음의 영역은 ‘sīla maggaṅga 실-라 막강가 ’라고 하는 계행의 길의 요소들이 있습니다.
‘sīla maggaṅga 실-라 막강가’ 는 세 가지로 존재합니다.
첫 번째 ‘samāvācā 삼마-와-짜-’라고 하는 정어,
‘samākammanta 삼마-깜만따’ 라고 하는 정업,
‘samāājīva 삼마-아-지-와’ 라는 정명
즉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입니다.
무엇이 바른 말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부처님께서 다음과 같이 설해두셨습니다.
바른 말은 ‘musā vādā veramaṇī 무- 와-다- 웨-라마니-’
거짓을 말하는 것을 삼가는 언어들이 바른 언어입니다.
두 번째로, ‘pisuṇāya vācāya veramaṇī 삐수나-야 와-짜-야 웨-라마니-’
다른 이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이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나쁜 점과 허물이 되는 점을, 흉보는 것을 삼가는 것 입니다.
지혜 있는 이들의 숙고에서는 그러한 영역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냐면,
‘삐티맘시까’ 라고 하는 표현을 씁니다.
‘삐티’ 라고 하는 것은 등짝을 의미하고 ‘맘사’ 라고 하는 것은 살점을 의미합니다.
‘삐티맘시까’ 라고 하는 것은 등짝을 뜯어먹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pisuṇā vācā 삐수나- 와-짜-’라고 하는 다른 존재의 허물과 약점과 단점,
결점들과 흠을 보는 이들을 지혜로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등짝을 뜯어먹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가치를 지니면 자신이 좋은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설령 그러한 어떠한 단점과 결점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다른 이들이 지니고 있는 좋은 점을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이익과 번영과 화합과 조화를 가져다줄 말들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sammāvācā 삼마 와-짜-’라고 하는
바른 말을 행하는 길의 영역입니다.
다음 한가지는 ‘pharusāya vācāya veramaṇī 파루사-야 와-짜-야 웨-라마니-
거친 말을 행하는 영역입니다.
다른 이들의 마음을 거칠게 만들어주는 거친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삼가는 영역이 바로 ‘sammāvācā 삼마 와-짜-’라고 하는 정어,
바른 말을 수행한다라고 하는 팔정도의 영역입니다.
거친 말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욕설도 들어갈 수 있고, 다른 존재들의 마음을 상처 입힐 수 있는 정화되지 않은 말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아들딸이라면, 수행자라면 팔정도의 길을 걷고 있다면
늘 부드럽고 온화하고, 다른 존재들에게 행복과 편안함과 고요함을 가져다줄 수 있는
언어들을 사용해야할 것입니다.
그래야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른 언어라고 하는 팔정도의 길이 거듭 완성의 길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절에는 열심히 다니고 수행처에도 열심히 다니고 법에 대한 지식들도 많이 알고 있지만
그의 언어가 정화되어있지 못하다면 그는 그가 전해들은 법의 이익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행의 영역으로서 자신의 언어를 정화해나가고 다듬어 나감으로서
바른 이익들과 열반에 이를 수 있는 바른 길이 성취될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samphap palāpā veramanī 삼팝빨라-빠 웨-라마니-’
이익이 없는 쓸모 없는 말, 가치 없는 말을 삼가는 언어의 공덕입니다.
이익이 없다는 것은 선업의 법과 관계가 되지 않고 도와 과, 열반의 대상과 관계가 없는 말들,
즉 세간의 선업과도 관계가 없고 출세간의 이익과도 관계가 없는 말들입니다.
이런 말들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많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숙고해보면
자신이 걷고 있는 팔정도의 길이 어느 수준에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을 것 입니다.
수행자에게 늘 자신이 한 가지 말을 행할 때
말을 하기 전에, 말을 하는 도중에, 말을 하고 난 이후에, 이것이 이익이 있는 말인가 없는 말인가,
나 스스로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말인가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말인가,
다른 존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말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숙고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만약에 말을 하기 전에 그것이 이익이 없는 말이라면
‘veramani- 웨-라마니-’ 삼가야 할 것입니다.
말을 하는 도중이라도 그것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역시
‘veramani- 웨-라마니-’ 삼가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고 그런 말을 했을 때에는 다음에 그러한 말을 하지 않겠다고
‘veramani- 웨-라마니-’ 삼가겠다고 마음의 결정심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수행의 영역으로 ‘sammāvācā 삼마 와-짜-’라고 하는
바른 팔정도의 길이 완성이 되게 될 것입니다.
바른 말은 네 가지 ‘musā vādā veramaṇī 무사- 와-다- 웨-라마니-’
거짓되지 않은 진실 된 말만을 하는 것,
‘pisuṇāya vācāya veramaṇī 삐수나-야 와-짜-야 웨-라마니-’
다른 존재들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않고 좋은 점만을 이야기하는 것, 이익이 되는 말만을 이야기하는 것,
조화와 화합되는 말을 이야기하는 것, 즉 이간질시키지 않는 것, 조화와 화합을 깨지 않는 말을 행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pharusāya vācāya veramaṇī 파루사-야 와-짜-야 웨-라마니-’
거칠지 않은 부드럽고 온화한 말을 사용하는 것들, 다른 존재들에게 행복과 고요함을 가져다줄 수 있는 언어들
네 번째로는 ‘samphap palāpā veramanī 삼팝빨라-빠 웨-라마니-’
세간의 선업과 출세간의 이익들에 부합되지 않는 가치 없는 말, 쓸모없는 말,
세간의 이익이 없는 말을 삼가하는 것으로써 바른 언어의 길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영역으로 ‘sammāvācā 삼마 와-짜-’라고 하는
바른 말에 대해서 수행자들이 한 가지 팔정도의 길을 완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samākammanta 삼마-깜만따’ 라고 하는 바른 행위는 어떠한 영역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설하십니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kammanto?”
“까따모- 짜 빅카웨- 쌈마- 깜만또-?”
빅쿠들이여, ‘sammā-kammanta 삼마- 깜만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Pāṇatipātā veramaṇī,”
“빠-나띠빠-따- 웨-라마니-,”
다른 존재를 해치는 살생을 삼가는 행위를 바른 행위라고 부른다.
“Adinn’ādānā veramaṇī,”
“아딘나-다-나- 웨-라마니-,”
주어지지 않은 다른 이의 소유물을 부정하게 취하지 않는 행위를 바른 행위라고 한다.
“Kāmesu micchācārā veramaṇī,”
“까-메-수 밋차-짜-라- 웨-라마니-,”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이성과 부정한 음행을 취하는 것을 삼가는 행위를 바른 행위라고 부른다.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kammanto.”
“아양 웃짜띠 빅카웨- 삼마- 깜만또-.”
빅쿠들이여,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바른 행위들을 ‘sammā-kammanta 삼마- 깜만따 ’라고 부른다.
이 세 가지 행위를 완성함으로써
‘sammā-kammanta 삼마- 깜만따 ’라고 하는 정업,
바른 행위의 길이 완성이 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습니다. 분명히 알아두셔야 할 것입니다.
언어의 영역이 네 가지, 행위의 영역이 세 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sammā-ājāva 삼마- 아-지-와’ 라고 하는, 정명이라고 하는 바른 생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어떠한 방식으로 바른 생계를 유지해야 할까요?
재가자의 삶도 출가자의 삶도 유지해야할 생계가 자신의 의무로서 주어져 있습니다.
출가자도 탁발을 통해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해야하고
재가자들은 자신이 소속된 생계의 영역 안에서 가치를 창출해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팔정도의 영역에 부합되지 않는 생계의 영역이란
‘sammāvācā 삼마-와-짜-’와 ‘sammā-kammanta 삼마- 깜만따’를 활용해서 생계를 유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확장해서 말하면 자신 스스로가 ‘sammāvācā 삼마-와-짜-’와
‘sammā-kammanta 삼마- 깜만따’ 를 의지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도 이를 의지하도록 장려하지 않는 종류의 생계를 의미하게 됩니다.
자신 스스로가 살생하지 않는다고
다른 존재들이 살생을 장려할 수 있는 살아있는 생명을 사고 판다던지 무기를 사고판다던지
자신 스스로는 계행을 잘 지니기 위해서 술과 마약을 취하지는 않지만
다른 존재들이 술과 마약에 정신을 혼미하게 방일의 법에 머물 수 있도록 사고 파는 행위들,
그러한 것들은 ‘micchāājīva 미차-아-지-와 ’라고 하는
그릇된 생계의 영역에 포함이 될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가 범하는 것은 자신의 계행의 파괴의 영역에 속하게 됩니다.
자신 스스로는 계행을 파하지는 않지만 다른 존재들이 계행의 공덕을 무너뜨릴 수 있는 법들을 장려하는 영역은
‘micchāājīva 미차-아-지-와’ 라고 하는 그릇된 생계를 의미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계가 다른 존재들의 계행의 공덕을 무너뜨리지 않는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적절한 상거래에 대한 다섯 가지 법을 경에서 설한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인간존재를 거래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대표적인 ‘micchāājīva 미차-아-지-와’ 입니다.
인간존재를 직접 사고팔고 경제적인 가치를 따져서 거래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그릇된 생계의 한 영역,
두 번째로는 고기를 얻기 위해서 가축을 양육하고 사고파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단순히 지키고 보호하고 양육하는 차원에서 동물을 사육하는 일은 그릇된 생계가 되진 않습니다.
자신이 피와 뼈와 살을 취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으리라고
자신이 살아있는 축생들을 양육하는 행위들은 ‘micchāājīva 미차-아-지-와 ’의 영역에 포함이 되게 됩니다.
직접적으로 그것을 사고파는 행위들 모두 그릇된 생계의 영역이 됩니다.
그러한 것을 삼가게 되면 ‘sammāājīva 삼마-아-지-와 ’라고 하는 바른 생계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한 가지는 갖가지 무기를 거래하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다른 존재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종류의 무기들을 거래하는 영역이
그릇된 생계의 영역으로 언급이 되어있습니다.
또 다른 존재의 생명을 해칠 수 있는 독극물을 거래하는 것도 그릇된 생계의 영역입니다.
존재들이라고 하는 것은 작고 미세한 존재들도 포함이 될 것입니다.
그들 또한 업과 마음을 지니고 있고 이곳에 있는 모든 존재들도
한때는 공덕의 부족으로 인해서 그러한 미천한 생애들을 수없이 경험했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지혜로 펼쳐 보이신 내용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존재들을 죽이고 살생할 수 있도록 독이든 약들을 사고파는 행위들은
옳은 생계의 영역이 아닐 것입니다 살생을 부추기고 장려하는 영역일 것입니다.
어떠한 종류의 독극물이건 그것을 사고파는 행위의 영역은
‘micchāājīva 미차-아-지-와’ 라고 하는 그릇된 생계의 영역에 포함이 됩니다.
다음 한 가지는 존재들이 방일의 법에 머무르도록
취하게 하고 술과 마약등,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물질들을 거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생계의 다섯 번째 조건입니다.
수행자들께서 숙고해 보시면 자신 스스로가 판단을 내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계행의 영역에서 다른 존재들의 계행을 무너뜨릴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고 장려하는 영역에서의 생계는
‘micchāājīva 미차-아-지-와’, 그릇된 생계라고 스스로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계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존재들의 건강과 행복과 안녕을 보장하고 보호하는 영역에서의 생계를 유지한다면
‘sammāājīva 삼마-아-지-와’ 라고 하는 팔정도의 길이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길을 수행자들께서 바로 걸어가셔야 할 것입니다.
계행이 지닌 가치에 대해서 수행자들께서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계행을 지니는 존재들이 어떠한 이익들을 경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짧은 설법으로 가르치신 바가 있습니다.
‘이짜띠 빅카웨- 실-라와또- 쩨-또-빤디띠 윗수따따’,
‘빅쿠들이여, 계행의 청정함을 지닌 모든 존재들의 소망은
계행의 청정함이라는 조건의 법에 의해 반드시 실현된다.’라고 하는 보장을 해두셨습니다.
세상에는 기원하고 소망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꿈은 반드시 실현된다, 소망은 반드시 실현된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행의 청정함을 지니는 이들에게.
이 빅쿠가 기도하고 소원하고 발원하는 것이 그릇된 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바램이 있어야 자신에게 이익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와 발원 자체가
그것을 성취시켜주는 근본동기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는 계행의 청정함이
그가 원하고 소망하는 바를 성취시켜줄 수 있는 근본조건이 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정말 바라는 일들이 있다면
나와 나의 가족들이 청정한 계행을 이룰 수 있도록 계행의 길을 닦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자신이 소망하는 일들이 바르게 실현이 될 것입니다.
자신이 조건은 만들어주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그것을 어느 누군가가 대신 이루어줄 수 있을까요.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법은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반드시 조건이 되는 법이 존재해야 결과가 되는 법이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계행의 청정함이라고 하는 선업의 조건이 선행이 되어야
자신의 선한 바램들이 실현이 된다고 하는 보장을 해두셨습니다.
이와 같이 ‘sammāvācā 삼마-와-짜-’,
‘sammākammanta 삼마-깜만따’,
‘sammāājīva 삼마-아-지-와’ 라고 하는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의 영역을 걸어가게 될 때
존재들에게 이익과 번영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소망하는 선한 발원들이 구족함을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같은 영역에서 실라 막강가 라고하는 계행의 바른 길들이 세 가지 완성이 되었습니다.
다음 ‘samādhi maggaṅga 사마-디 막강가’
바른 마음집중 이라고 하는 세 가지 길이 설해져야 할 것입니다.
첫 번째 ‘sammāvāyāma 삼마-와-야-마 ’라고 하는 바른 정진의 요소,
두 번째가 ‘sammāsati 삼마-사띠’ 라고 하는 바른 자각, 알아차림의 요소
세 번째가 ‘sammāsamādhi 삼마-사마-디’ 라고 하는 바른 마음집중의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른 노력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팔정도의 영역에서 부처님께서 정정진을 어떻게 설하셨나요.
네 가지 측면에서 설하셨습니다.
“Katamo ca bhikkhave sammā-vāyāmo?”
“까따모- 짜 빅카웨- 쌈마- 와-야-모-?”
빅쿠들이여, ‘sammā-vāyāmo 삼마- 와-야-모-’라고 하는 바른 노력의 요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Idha bhikkave bhikkhu anuppannānaṃ pāpakānaṃ
“이다 빅카웨- 빅쿠 아눕빤나-낭 빠-빠까-낭
akusalānaṃ dhammānaṃ anuppādāya chandaṃ
아꾸살라-낭 담마-낭 아눕빠-다-야 찬당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자네-띠 와-야마띠 위-리양 아-라바띠 찟땅 빡간하-띠
padahati.”
빠다하띠.”
첫 번째로
‘anuppannānaṃ 아눕빤나-낭’ 아직 생겨나지 않는
‘pāpakānaṃ 빠-빠까-낭’ 불선업들을 생겨나지 않도록 힘쓰는 특성들이 있습니다.
Uppann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웁빤나-낭 빠-빠까-낭 아꾸살라-낭 담마-낭
pahānāya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빠하-나-야 찬당 자네-띠 와-야마띠 위-리양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아-라바띠 찟땅 빡간하-띠 빠다하띠.”
두 번째로
이미 생겨난 불선업이라면 이후에 생겨나지 않도록 힘쓰는 특성들이 있습니다.
“An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uppādāya
“아눕빤나-낭 꾸살라-낭 담마-낭 웁빠-다-야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ārabhati cittaṃ
“찬당 자네-띠 와-야마띠 위-리양 아-라바띠 찟땅
paggaṇhāti padahati.”
빡간하-띠 빠다하띠.”
세 번째로
‘anuppannānaṃ kusalānaṃ
아눕빤나-낭 꾸살라-낭’
생겨나지 않은 선업의 요소들은 처음 생겨날 수 있도록 힘을 쏟는 특성들이 있습니다.
“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ṭhitiyā
“웁빤나-낭 꾸살라-낭 담마-낭 티띠야-
asammosāya bhiyyo bhāvāya vepullāya bhāvanāya
아삼모사-야 비이요- 바-와-야 웨-뿔라-야 바-와나-야
pāripūriyā chandaṃ janeti vāyamati vīriyaṃ
빠-리뿌-리야- 찬당 자네-띠 와-야마띠 위-리양
ārabhati cittaṃ paggaṇhāti padahati.”
아-라바띠 찟땅 빡간하-띠 빠다하띠.”
네 번째로
‘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웁빤나-낭 꾸살라-낭 담마-낭’
이미 생겨나 있는 선업의 영역은 더 확장되고 증장되도록 노력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노력이라고 하는 바른 정진의 요소가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불선업들은 이후에도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특성들,
두 번째는 이미 자신이 지녔던 불선업의 요소들은 이후에 다시 생겨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특성들,
세 번째는 아직 생겨나지 않는 선업의 법들은 생겨나도록 힘을 쏟는 특성들,
네 번째는 이미 생겨난 선업의 요소들은 거듭거듭 증장되고 완성될 수 있도록 힘을 쏟는 특성들이
‘sammāvāyāma 삼마-와-야-마’ 라고 하는 바른 정진의 요소들입니다.
수행자들은 세간의 영역에서 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선업의 영역이라면
거듭거듭 새롭게 생겨나도록, 더 확장되고 완성되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 입니다.
수행의 영역에서도 자신이 이전에 갖지 못했던
‘sati 사띠’, ‘samādhi 사마-디’, ‘paññā 빤냐-’라고 하는
알아차림, 마음집중, 지혜의 요소들이 생겨나지 않았다면
새롭게 생겨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할 것입니다.
일정 부분 생겨났다면 거듭거듭 생겨날 수 있도록,
예를 들면 한 시간의 좌선 안에 자신이 ‘sati 사띠’와 ‘samādhi 사마-디’ 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십 분 정도 가능했다면 십오 분이나 이십 분이 되도록, 증장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반드시 앉아있는 시간 뿐만 아니라
가는 때도 오는 때도 앉고 서는 때도 먹고 마시는 때도
보고 듣는 순간마다도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sati 사띠’ 깨어있고 자각하는 알아차림의 힘들,
‘samādhi 사마-디’ 라고 하는 마음이 고요하게 집중되어 있는 특성들,
‘paññā 빤냐-’라고 하는 대상의 현상에 대한 바른 앎들이 점점 증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sammāvāyāma 삼마-와-야-마’ 라고 하는 바른 정진의 요소입니다.
이와 같은 형태로 네 가지의 영역에서 불선업을 막아내고 줄여나가는 영역에서
선업을 형성시키고 증장시키는 영역에서 네 가지의 노력하는 특성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sammāvāyāma 삼마-와-야-마’
정정진의 영역으로서 팔정도의 길에 완성으로 이를 수 있는 바른 길의 영역으로 기억해두시길 바랍니다.
그다음으로 ‘sammāsati 삼마-사띠’ 라고 하는 정념,
바른 알아차림 혹은 바른 자각입니다.
그렇다면 ‘sammāsati 삼마-사띠 ’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sati 사띠’는 무슨 기능을 의미하며 어떤 역할을 할까요?
‘sati 사띠’가 있는 마음과 없는 마음은 어떻게 다릅니까?
‘sati 사띠’는 기억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선업의 법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는 특성이 있습니다.
즉 선업의 법에 대해서 마음을 다시 깨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수행자들이 ‘sati 사띠’가 없으면 불선업의 영역에 대부분 마음이 머물게 됩니다.
그것이 ‘kāmāvacara 까-마-와짜라 ’라고 하는
욕계세상의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인 성향입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닿고 생각하고 상상하면서
거듭거듭 새로운 느낌을 근간으로 해서 새로운 즐거움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형태가
‘kāmāvacara 까-마-와짜라’ 라고 하는 욕계존재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게 되고 듣게 되고 냄새 맡게 되고 접촉하게 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