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가스 중독으로 일가족이 세 번씩이나
온종일 쉬지 않고 눈이 내린다. 모처럼 눈 닮은 겨울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바람이 차가워서 쌩쌩 흩날리면서도 소복소복 쌓인다. 지나간 흔적 없는 눈 위를 발소리 내며 걸어본다. 영락없는 내 모습 그대로 남겨지지만 금방 사라져 버린다.
이런 날엔 그저 멀찌감치 떠나 망망대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 들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백사장을 걸어보기도 하고 추운 계절 영화 속의 멋진 장면을 연출하듯 깊은 포옹과 키스를 하고 싶다.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는 내가 서러워 침대에 누워 밀렸던 책을 읽기만 했다.
요즘은 어찌 된 일인지 책만 손에 들면 이내 졸음이 쏟아지거나 읽었던 줄을 반복해서 읽는가 하면 한참을 읽어도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는 병이 생겼다. 이런 증상에 대해서 위기를 느끼기도 하고 이제는 늙어가는구나 하는 억울함이 엄습해 오기도 한다.
책을 덮고 거실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옛 추억이 어스름 떠오른다. 창 하나를 두고 그 밖은 얼음장이었지만 이 안은 이리도 따스한걸. 옛날 나 어린 시절 부여에서의 겨울엔 아궁이에 연탄을 지폈었다. 두 개를 쌓아놓는 것과 세 개짜리가 들어가는 아궁이가 있었는데, 우리 집엔 세 개짜리를 지폈기 때문에 구멍을 기술적으로 잘 맞추어야 했다.
그때는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장녀였기 때문에 연탄불 갈기 담당이었다. 아궁이 덮개를 열고 연탄집게로 끄집어낼라치면 연탄가스가 코끝으로 확 품어내는데 당연히 맡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나마 밑 탄이 고스란히 나오면 다행인데 중간에 부스러져 망가지는 때가 있다. 정말 짜증 나고 다시는 연탄 갈고 싶지 않을 때가 바로 그 순간이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것도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탓을 하셨고, 나는 정말 무능해서 밑 탄을 부숴 먹는 줄 알고 주눅이 들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연탄도 질이 다 달랐던 것 같다. 어떤 것은 다 타고 나서도 단단하게 모양을 유지하고 있지만 쉽게 부서지는 연탄재는 보기에도 부석거리는 게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연탄 이야기가 나왔으니 가스중독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야겠다. 우리 집 형제들은 타고난 건강 체질인데 유독 '두통'에 약한 이유가 있다. 다름 아닌 연탄가스중독 때문인데 온 가족이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다. 그 겨울날 추위를 피하느라 옹기종기 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새 잠을 자고 아침에 눈을 뜰라치면 집 밖 땅바닥에 모두 엎드려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 집은 가게(지금의 슈퍼)를 하고 있었는데 가게와 부엌 그리고 방이 하나로 연결된 형태였기에 합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락거리는 조그만 문이 있을 뿐이었다. 부엌에서 연탄불을 갈고 미닫이문을 열면 바로 방이 나왔다. 그 방 한 칸에서 우리 4남매가 흥부네 모양 꼴을 하며 살았던 거다.
그래도 방이 좁다고 투덜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렇게 모여 사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인식이 되어서 별 불편함은 없었다. 연탄을 갈 때쯤 되면 확 달아오르며 방이 최고로 따뜻해진다. 이제는 수시로 확인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갈 때가 됐구나! 여겨지면 수북이 쌓아놓은 까만 새 연탄 중 하나를 집어 날라 와 연탄 뚜껑을 열게 되는 거다.
대부분 연탄은 저녁 시간에 갈고 자는 것이 보통이어서 그 화력은 이튿날 아침이면 또 갈게끔 되어 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날씨가 좋지 않은 날에는 연탄가스가 위로 올라가지 않고 대기 아래로 스며드는 경향이 있는데 요 때 재수 없으면 연탄가스를 마시게 되는 줄도 모르고 잠을 자게 되는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흙냄새를 맡아야 한다며 찬바람을 쏘이게 하고 만만한 게 동치미 국물로 한 사발씩 들이키고 나면 그나마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으니 몽롱한 기분으로 학교엔 결석하기 싫어서 책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던 기억 있다. 아마도 내 생명의 줄이 짧기로 했다면 그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리라.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이 순간 두통이 뭐 대수라고 원망을 하리까.
괜스레 하릴없이 눈 내리는 이런 날에 하필이면 연탄가스 중독사건을 떠 올리게 되는 걸까. 아직도 두통으로 입원해 계시는 아버지와 낮에 통화했는데 자주 전화를 드리지 않는다고 투정하시는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그 두통이 그 옛날 어려웠던 시절 그 사건 때문이 아닐까? 내일부턴 자주 전화 드려야겠다.
작성일: 2003/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