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박희자
1. “ 까-악! 놀랬지!” 방문이 활짝 열리고 소년의 상체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숙제를 하고 있던 나와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하얀 피부에 큰 눈을 가진 소년이 순정만화의 주인공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워 나는 눈길을 떨구었다. 2. 바느질하시던 엄마는 소년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웃으셨다. “오라! 이삿짐이 들어오더니 그 댁 자제시구나! 괜찮다! 무안해하지 않아도 된단다.” 당황해서 머리 긁적이던 소년에게 엄마는 옆방이라 일러주었다. 그제야 소년은 고개 숙여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3. 소년과 내가 세 들어 사는 집은 방 한 칸에 부엌 하나인 일자 집이었다. 낮에 이사 들어오던 풍경을 보았을 때 내 두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세간살이가 내려질 때도 가슴이 뛰었었는데, 소년을 보고 내 심장 박동 소리가 요란해졌다. 내 촉각은 이사온 소년이 사는 옆방에 서성였다. 4. 언니가 어느 날 소년을 불러 세웠다. 이것저것을 물어보았고 소년은 대답했다. 사업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고, 모든 것을 잃었다 했다. 소년의 할아버지가 이웃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라 가까이 이사 오게 되었고, 소년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5. 나는 두 사람에게서 조금 떨어져 등을 돌린 채 마당에 앉아 낙서로 흙을 긁적거리고 있었다. 무심한척했지만 소년의 이야기에 내 귀도 쫑긋거렸다. 언니는 나를 불러 같은 학년이니 친구로 사이좋게 지내라며 자리를 떴다. 6. 소년보다 키가 컸던 내게 소년이 물었다. “넌 몇 살이니?” “응! 나? 열 한 살! 나도 열한 살이지!” “그렇구나! 그런데 키가 무척 크네!” 순간 소년에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소년과 친구가 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7. 그도 그럴 것이 오학년이지만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두 살 위에 있었다. 여덟 살에 나도 가슴에 손수건을 달았었다. 봄이 무르익던 날, 엄마는 선생님 만류에 눈시울 적시며, 어린 동생을 등에 맡겼다. 생계가 현실이었던 엄마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친구들이 3학년이 되던 해에 다시 손수건을 달았다. 8. 소년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거짓말을 하고 난 후부터는 소년을 향한 불편한 마음이 배로 커졌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소년은 자주 마주치려 했고, 언제나 웃어주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먹했던 감정도 편안해졌고 소년과 친구가 되었다. 9. 소년을 볼수록 발그레해지는 내 양 볼을 감싸야 하는 순간이 많아졌다. 시시때때로 번져 나오는 미소도 감춰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주하는 소년이 설렘이었고, 소년의 작은 것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어느새 내 감정은 소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10. 소년은 할아버지 댁인 교회에도 자주 놀러 갔다. 은빛 모래가 깔린 교회 마당에는 그네가 있었다. 어느 날 종일 소년이 보이지 않아 찾아 나섰다. 그곳에서 소년은 같은 반 친구 경아와 함께 그네를 타고 있었다. 하얀 피부를 가진 경아는 작고 귀여운 소녀였다. 경아가 부러워 쓸쓸히 돌아섰다. 11. 작고 귀여운 경아처럼 나도 작아 보고 싶었다. 키가 크지 않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내 외침은 아랑곳없이 6학년이 되면서 성장판에 과부하가 걸린 둣 했다. 하루가 다르게 키도, 신체도 여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봉긋했던 가슴이 점점 부풀어 올랐다. 12. 빠르게 성장하는 신체 변화에 가슴 조였다. 옷이 얇고 가벼워지는 여름이 두려웠다. 내 드러난 가슴을 가리려고, 언니 옷을 입어도 감출 수가 없었다. 체육 시간에 흰 러닝셔츠에 검정 반바지인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에 나설 수가 없었다. 제 시기를 맞춘 소녀에게는 축복받을 아름다운 성장 과정이, 내게는 아프고 아픈 현실이었다. 특히, 나이를 속인 소년 앞에 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숨바꼭질했다.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13. 6학년 졸업을 앞두고 소년도 나도 이사를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어느 날 소년의 동생이 노란 자전거를 타고 와서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지만, 받지 않겠다고 돌려보냈다. 편지 내용을 확인하지 않음을 못내 아쉬워하던 날, 또다시 소년 동생이 왔다. 14. 행여, 누가 볼까 문을 잠그었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편지를 읽다가 숨이 멎는 듯했다. “너는 경아와 무언가 많이 달라, 나 너 좋아해! 우리 커서 결혼할래?” 하얀 거짓말이었지만 소년에게 끝까지 실망 주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닫아두었던 내 몸과 마음에 문을 열고 물을 듬뿍 주고 싶었다. 엄마가 웃으며 건넨 라일락 꽃무늬 브래지어도 큰 자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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