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겁니다.
뇌룡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갑자기 이백 여명의 식구가 늘었으니 당연했다. 엽광패를 비롯한 이백 명의 산적들은 모두 뇌룡장에 머물렀다.
은왕에게서 은환을 받아 복용한 사람은 엽광패와 소명학 두 명뿐이었다.
즉, 뇌룡장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은 그 둘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산적들은 굳이 떠나지 않고 끝까지 엽광패를 따라왔다.
뇌룡장은 그들이 모무 머무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었다.
"젠장. 다들 그냥 가라니까 정말 말 안 듣네."
엽광패의 투덜거림에 소명학이 빙긋 웃었다.
"그게 다 주군의 인덕 때문 아니겠습니까."
"인덕은 얼어 죽을."
그렇게 말했지만 그래도 엽광패는 기분이 좋았다. 거칠고 사나운 놈들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말은 충실히 따랐다.
"끄응, 그나저나 은환으로 얻은 힘을 모조리 토해내는 건 좀 아깝군. 안 그래?"
"그야 그렇지만 이렇게 은왕의 개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습니까. 전 그것보다 이 금제에서 정말로 확실히 벗어날 수 있는지가 더 걱정입니다."
소명학의 말에 엽광패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저래 보여도 실력 하나는 끝내 주니까. 겪어 봤으니 알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소명학은 말을 아꼈다. 무영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직접 몸으로 겪었으니 알고 있다. 하지만 은왕도 만만치 않다.
은환만 봐도 그렇다. 얼마나 치밀한가. 그저 힘만 주는 것이 아니라, 힘과 함께 금제라는 조종수단을 함께 넘긴다.
'문제는 금제를 은환으로 가했다는 사실을 아는 자가 거의 없다는 거지.'
소명학이나 엽광패도 이번에 무영이 말해주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소명학은 아직도 무영의 말을 반신반의하고 있다. 엽광패가 워낙 강력한 믿음을 보이니 마지못해 따라온 것뿐이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 그냥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분명히 해결해 줄 테니까."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지금이라도 은왕이 우리가 배신했다는 것을 알면 금제를 발동시킬지도 모릅니다."
"그 금제라는 거, 직접 은왕의 눈앞에 나타나야 발동이 가능한 거 아니었어?"
"만일 그랬다면 은환만 받아먹고 도망간 사람이 부지기수일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은왕의 휘하로 들어가서 멀쩡히 그들과 관계를 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엽광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
은왕은 직접 상대를 보지 않아도 금제를 발동시키는 게 가능함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은환을 쌓아 놓은 그들의 힘이 모조리 붕괴될 테니까.
'그저 공포로 쌓아올린 탑은 그 공포가 사라지면 무너지는 법.'
하지만 그 공포의 탑을 무너뜨릴 방법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엽광패는 무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탑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람은 무영뿐이었다. 적어도 엽광패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 노인장도 함께 있었다면 훨씬 더 확실하겠지만'
당할 때는 두렵기 그지없었는데, 막상 사라졌다 생각하니 아쉬웠다. 자신에게 고통만 준 사람이었지만, 그 와중에 정이라도 든 모양이었다.
"훗, 정은 무슨......"
엽광패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려 소명학을 쳐다봤다. 소명학은 엽광패가 갑자기 은근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의아한 눈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설마 남색에라도 눈을 뜨신 건 아니겠지요?"
엽광패의 눈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소명학은 마치 야차처럼 변하는 엽광패의 얼굴에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하하. 농담입니다. 농담. 명색이 녹림왕이라는 분이 그 정도 농담에 이성을 잃으시면 어쩝니까. 하하하."
소명학은 그렇게 말하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엽광패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했으니 잡히면 최소한 두 군데는 부러질 각오를 해야 했다. 그리고 그 농담 하나로 분위기를 많이 바꿔놨으니 나름대로 성공적인 농담이었다.
"거기 서라! 이 기생오라비 같은 놈! 다시는 그따위 소리를 못하게 입을 뭉개주마!"
엽광패의 외침이 뇌룡장을 뒤흔들었다.
강악은 오늘 할당된 신선주를 한 잔 마시고 맛과 기분을 음미했다. 신선주는 강악의 단전에서 꿈틀거리는 뇌기를 자극했다. 강악은 바로 그 자극을 즐겼다.
"크으. 이거 하루 한 병으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데. 쩝."
강악은 단전의 자극이 사라지자 입맛을 다셨다. 신선주는 벌써 반 병이 넘게 사라졌다. 강악은 조금 고민하다가 병을 조심스럽게 한쪽으로 치웠다.
"나머지는 밤에 마셔야겠군."
신선주는 너무나 오묘했다.
해가 떠 있을 때와 달이 떠 있을 때 맛이 다르고 효과가 달랐다. 맛은 누구나 확연히 알 정도로 달랐고, 효능은 강악이 아니면 알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하게 달랐다.
낮의 신선주는 활기찼고, 밤의 신선주가 주는 자극은 좀 더 부드러웠다.
"크흠. 역시 난 낮 쪽이 더 마음에 들지만, 미래를 위해서 한쪽으로 치우칠 수는 없지."
강악은 술병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하지만 고개를 저으며 욕망을 꾹 눌러 참았다.
최근 깨달은 것이지만, 이렇게 욕망을 눌러 참는 것도 수련에 도움이 된다. 그동안은 한 번도 참은 적이 없어서 훨씬 효과가 좋았다.
이래저래 뇌룡장에 눌러 않은 것은 잘한 일이었다.
강악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절대 뚫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깨달음의 철벽을 박살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그렇게 욕망을 눌러 참으며 마음을 다지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서라고 했다!"
내공까지 실렸는지 전각이 뒤흔들릴 정도였다.
"뭐야? 시끄럽게."
강악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뇌룡장에 있는 사람들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당백형은 뭔가 묘하게 껄끄러워졌고, 무영은 당연히 건드릴 수 없다.
그렇다고 뇌룡대를 건드리기엔 지나치게 수준 차가 났고, 뇌룡대의 경우 자신이 뭔가 건드릴 빌미를 제공하지도 않았다.
뇌룡장에서 일하는 일꾼이나 시비들의 경우는 당연히 건드릴 생각도 없었다. 그들은 무공도 모르는 일반인 아닌가.
"가만있자, 한데 대체 누구지?"
강악은 슬며시 호기심이 들었다. 목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전각을 뒤흔들 정도로 목소리에 내공을 실을 수 있다면 꽤 한다는 뜻인데, 뇌룡장에서 괘 하는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면 무영과 당백형뿐이었다.
"그 독 늙은이는 아마 오늘은 안 왔을 거고......"
강악은 아직 엽광패와 그 일당이 뇌룡장에 잠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강악의 관심은 오로지 신선주와 무영에게 집중해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렇게 강악이 슬며시 호기심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강렬한 폭움이 울렸다.
콰앙!
폭음은 전각을 더욱 거세게 뒤흔들었고, 그 흔들림은 한쪽 구석에 고이 모셔 둔 술병의 균형을 살짝 빼앗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흔들.
"어, 어라?"
강악의 몸이 잔상을 남기며 쭉 늘어났다. 어느새 강악의 손에 술병이 쥐어져 있었다. 강악의 얼굴이 있는 대로 일그러졌다.
"어떤 놈이 감히!"
강악이 머무는 전각에는 강악과 강악을 모시는 시비 두어 명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 전각에는 다가가지 않는 것이 천수를 누리는 데 지장이 없다고 알려져 가까이 가는 것을 대부분 꺼렸다. 자칫하여 강악의 성질이 폭발하면 아무도 말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벽력탄 같은 강악의 성질이 방금 폭발했다.
강악의 몸은 순식간에 방에서 사라졌다. 사라진 강악의 몸이 다시 나타난 곳은 전각 밖이었다.
"네놈들이로구나."
강악은 투기를 풀풀 날리며 소명학의 목을 움켜쥔 엽광패를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씹어 뱉었다.
엽광패는 고개를 돌려 강악을 쳐다보며 인상을 썼다.
"뭐요?"
강악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고작 마흔 정도로 보인다. 엽광패는 실제 나이가 마흔다섯이었으니 강악을 자신과 비슷한 연배로 판단했다.
"허허, 뭐요? 뭐요라...... 그래, 어떻게 죽고 싶은 거냐?"
강악의 말에 엽광패의 얼굴이 더욱 심하게 일그러졌다.
"죽고 싶냐고? 지금 그 말 나한테 한 거냐?"
엽광패의 몸에서 짙은 패기가 쏟아져 나왔다. 강악은 그 기세에 눈을 크게 떴다. 생각보다 대단한 기세였기 때문이다.
"호오,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하구나."
하지만 그게 다였다. 강악은 방금 전의 기세를 통해 엽광패와 자신의 차이를 명확하게 파악했다.
"두 놈이 한 패로 보인다만, 한 놈은 다 죽어가니 봐주도록 하마."
강악은 그 말과 함께 몸을 날렸다.
강악의 몸이 순식간에 엽광패 앞에 나타났다. 엽광패는 그때까지 소명학의 목을 쥐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해서 소명학을 집어 던져 버렸다.
"크어억!"
소명학은 비명과 함께 담장 아래 널브러졌다. 그의 왼쪽 눈에는 시퍼런 멍이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소명학은 아픈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고 엽광패와 강악의 싸움을 지켜봤다. 소명학의 눈이 점점 경악으로 커다래졌다.
강악의 손바닥이 하늘을 빼곡히 채웠다. 엽광패는 그 손바닥을 향해 불끈 쥔 주먹을 거칠게 내질렀다.
콰과광!
연달아 폭음이 울렸다. 강악의 손바닥과 엽광패의 주먹이 어우러지며 나는 소리였다. 폭음이 한 번 울릴 때마다 엽광패의 얼굴이 점점 크게 일그러졌다.
"이이익! 이 미친놈이!"
엽광패는 그렇게 소리치며 몸을 몇 번 굴리고 날려 강악에게서 크게 멀어졌다.
"군사! 뭐하고 있어! 가서 내 도끼 가져와!"
엽광패의 말에 소명학이 부리나케 달렸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경공을 펼치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소명학이 달려가는 모습에 강악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호오, 도끼를 쓰나보지? 맨손도 꽤 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흥, 물론이지. 일단 내가 도끼만 들면 너 같은 건 단숨에 대가리를 쪼개버릴 수 있어."
강악이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핫! 좋아! 어디 한 번 해 봐라. 기다려 줄 테니."
강악은 근처 적당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어차피 기다릴 거 편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강악의 여유로운 모습에 엽광패가 이를 갈았다.
엽광패는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강악의 손바닥과 부딪쳤던 주먹이 아직도 얼얼했다. 팔뚝은 부들부들 떨렸다.
'젠장. 이걸 빨리 가라앉혔야 돼. 근데 대체 저놈 뭐야? 나보다 더 센 놈이 아직도 있단 말이야?'
엽광패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강악을 노려봤다.
잠시 후, 소명학이 헐떡이며 커다란 도끼를 들고 달려왔다. 도끼는 이내 엽광패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고, 엽광패는 자신만만한 눈으로 도끼를 붕붕 휘둘렀다.
"자, 이제 다시 해보자!"
엽광패의 외침에 강악이 느긋하게 일어났다.
"무기도 들었으니 본격적으로 힘을 좀 써 볼까?"
강악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슬쩍 들어올렸다.
빠지직.
강악의 손바닥에 뇌기가 슬쩍 흘러갔다.
소명학은 그것을 못 봤지만, 엽광패는 분명히 봤다. 엽광패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막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강악이 씨익 웃으며 몸을 날렸다.
꽈르릉!
강악의 손바닥에서 뇌기가 쏟아져 나갔다.
예전 무영에게 날렸던 것보다 훨씬 강렬한 뇌기였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나름대로 깨달음을 정리해 한 계단 올라선 것이다. 물론 벽은 그대로였지만.
엽광패는 도끼를 마구 휘둘러 굉뢰번천장을 흩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뇌기였다. 뇌기는 그대로 도끼로 스며들어 다시 한 번 사방으로 폭발하듯 쏟아져 나갔다.
번쩍!
"크악!"
엽광패는 뇌기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다섯 발이나 물러섰다. 내력을 끊임없이 운기해 몸에 스며든 뇌기를 쫓아냈지만, 덕분에 강악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엽광패는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급히 몸을 숙였다. 그리고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강렬한 내력이 팔을 타고 도끼에 흘렀다.
부웅!
도끼에 강기가 새겨졌고, 그 강기가 주변을 완전히 장악했다.
강악은 예상외로 엽광패가 역공을 가하자 약간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강악의 손이 도끼 아래를 노리고 쾌속하게 쏘아져 나갔다.
꽝!
강악의 손바닥이 도끼 아래를 올려쳤고, 도끼는 강기를 품은 채로 위로 솟구쳐 올랐다.
"크어억!"
갑자기 궤도가 바뀐 도끼 덕분에 엽광패의 팔에 큰 무리가 갔다. 팔 근육이 터질 듯 꿈틀거렸다.
엽광패는 이를 악물고 도끼를 한 바퀴 그대로 돌렸다. 회전력을 이용해 궤도를 바꾸고 더 강력해진 힘으로 공격을 다시 시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강악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강악은 도끼의 궤적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순식간에 도끼 뒤로 따라붙은 강악이 도끼를 향해 손바닥을 슬쩍 내밀고 궤적에서 빠져나왔다. 실로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강악의 손길 한 번에 훨씬 더 강한 가속이 붙은 도끼 덕분에 엽광패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빨라 제어가 어려웠는데, 더 빨라졌으니 이것을 다시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다.
강악은 그 광경을 보며 빙긋 웃었다. 강악의 손바닥에서 번득이던 뇌기가 다시 엽광패에서 쏟아져 나갔다.
꽈르릉!
엽광패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뇌기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도끼를 제어할 수 없어 피할 수도 없었다. 엽광패는 그대로 도끼를 놓았다.
도끼가 담벼락을 향해 날아갔고, 엽광패는 그 반대로 날아갔다. 관성에 의한 자연스러운 회피였다. 도끼와 엽광패 사이로 굉뢰번천장의 뇌기가 지나갔다.
엽광패는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싸움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강악이 엽광패 옆으로 다가섰다.
콰득!
"커어억!"
엽광패는 옆구리를 파고드는 격통에 눈을 까뒤집었다.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온몸의 내력을 흩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오늘 네놈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마."
엽광패는 귓속을 파고드는 강악의 목소리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후로 무려 한 시진 동안이나 강악의 주먹이 춤을 췄다. 그리고 엽광패는 그 춤에 맞춰 비명을 질러댔다.
소명학은 엽광패와 강악의 싸움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모두 구경했다.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 인간이 이렇게 빠를 수 있단 말인가. 강악의 움직임은 벼락 그 자체였다.
엽광패가 휘두르는 도끼는 궤적조차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한데 강악은 그 도끼를 따라잡을 정도로 빨랐다.
아니, 사실 강악의 몸은 싸움이 시작한 후에 여기저기 번득이며 나타나는 모습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이다. 저 정도라면 십대고수라도 이길 수 없을 정도야.'
소명학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문득 강악이 손바닥으로 쏟아낸 뇌기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뇌기라는 것을.
'인간을 벗어난 속도와 강함, 그리고 뇌기를 쏟아내는 손바닥.'
소명학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처음부터 정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너무 당황해 미처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굉뢰번천장 강악!'
상대는 굉뢰번천장이었다. 십대고수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처음부터 승산이 거의 없는 싸움이었다.
'이런 제길!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소명학은 온몸을 벌벌 떨었다. 두려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천하의 굉뢰번천장이 이곳에 대채 왜 있단 말인가. 굉뢰번천장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은 걸로도 유명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설마 이런 보잘 것 없는 장원에 머무는 건 아닐 거야. 그건 절대 아닐 거야."
소명학은 속으로 끊임없이 아닐 거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또 다른 속마음은 이미 다른 쪽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무영은 집무실에 앉아 표중산과 마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마 이틀 후면 무한에 도착할 듯합니다."
무영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흑사맹이라니. 흑사맹이 무한을 향해 잔뜩 몰려오고 있다면 그들의 목표는 정협맹뿐이다. 그리고 정협맹에는 무영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영은 점점 머리가 복잡해졌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자신과 뇌룡대를 노리고 엽광패를 보낸 사람도 알아내야 한다.
"정협맹에서는 어쩌고 있습니까?"
"겉보기에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 분명히 중간에 기습을 할 것입니다."
무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대규모 싸움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천 명이나 몰려오는데 가만히 앉아서 적을 맞이하면 피해만 가중될 뿐이다.
미리 기습을 해서 적의 수를 줄여 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럼 싸움이 빨리 끝날 수도 있겠군요."
표중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큽니다. 흑사맹을 이끄는 마염공 동방극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직접 움직이고 있으니 분명 흑사맹도 숨겨둔 한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무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다 따져서 생각하는 것은 성격에 맞지 않았다. 무영의 바람은 그저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지 않고 평화롭게 사는 것뿐이었다.
표중산은 무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계속 이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더 큰 문제라는 말에 무영이 살짝 놀란 눈으로 표중산을 쳐다봤다.
"이번 싸움으로 인해 정협맹과 흑사맹의 대대적인 전쟁이 시작될 것입니다. 아마 정사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큽니다."
표중산의 말에 무영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렇게 큰 싸움이 나면 많은 사람들이 죽겠군요."
무영은 걱정스런 얼굴로 서하린과 모용혜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과 작게나마 인연을 이은 의선각과 의원과 약사들, 그리고 봉황단 사람들을 연이어 떠올렸다.
그들이 다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싸움이 커진다면 그들 또한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주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표중산이 결연한 표정으로 무영에게 물었다. 무영은 갑작스런 물음에 약간 당황했다.
"무엇을 말입니까?"
"주군께서 원하신다면 뇌룡대는 목숨을 걸고 흑사맹과 싸우겠습니다."
무영은 황당한 얼굴로 표중산을 쳐다봤다. 뇌룡대가 다치는 것도 무영이 원하는 바가 절대 아니었다. 게다가 뇌룡대는 아직 너무나 약하다.
"그런데......"
무영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흑사맹과 싸워야 하는 겁니까?"
무영의 말에 이번에는 표중산이 당황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현 정세에 대해서 설명한 이유가 무영이 뭔가 결단 내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한데 무영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산적들은 지금 뭘 하고 있죠?"
무영에게는 먼 곳에 있는 싸움보다 눈앞에 있는 산적들이 훨씬 피부에 와 닿는 문제였다. 물론 흑사맹이 정협맹과 싸우면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만.
무영이 궁금해하는 산적들은 지금 장원에 있는 연무장 중 한곳에서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들은 뇌룡장에 온 이후부터 전각 하나를 통째로 배정받았다.
마침 전각 근처에 적당한 크기의 연무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뇌룡장에 온 첫날을 거의 연무장에서 보냈다.
연무장에 오래 있다고 해서 수련을 열심히 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함께 모여 있고 싶을 따름이었다.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백 명이 먹고 마시는 데는 꽤 많은 음식이 필요하다.
뇌룡장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그 음식을 하루 내내 매번 연무장으로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대부분 그곳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산적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험상궂고 말도 험악했다. 그들의 몸에서는 절제되지 않은 거친 기세가 마구 뿜어져 나왔다. 힘을 갈무리하거나 절제하는 생활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했다.
그런 자들이 이백 명이나 우글거리는 곳에 가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오늘도 산적들은 음식을 날라 온 하인들을 거칠게 놀리며 자신에게 배정된 음식을 받아먹었다.
말은 거칠게 해도 절대 손을 대지는 않았다. 만일 그랬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엄청나게 두려운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엽광패와 소명학이 무영에게 어떻게 당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두 사람이 내뱉는 처절한 비명도 모조리 들었다. 이백 명 산적들의 뇌리에는 무영에는 무영에 대한 공포가 깊숙이 각인되어 있었다.
"젠장. 그나저나 우리 여기 왜 따라온 거냐?"
"크하하, 왜? 이제 와서 겁나냐?"
"그게 아니라 심심해서 그런다!"
두 산적의 말을 시작으로 같은 주제의 말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 비록 하루뿐이었지만 두려움 속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런데 계속 여기 있어야 하는 건가?"
누군가의 말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생각해 보면 그저 자신들의 거처를 정해줬을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어딜 가선 안 된다는 말도 없었고, 돌아가지 말라는 말도 없었다. 그들이 이곳에 남아 있는 건 순전히 자신들의 의지였다.
"그러고 보니......"
"그럼 장원 구경이라도 해볼까?"
꼬박 하루 동안 쥐 죽은 듯 웅크리고 있어 좀이 쑤셨기에 결정이 나자마자 모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연무장 밖으로 나갔다.
숫자가 많으면 용감해지는 법이다. 산적의 수는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이백 명이나 된다.
연무장에 웅크리고 있을 때는 한없이 움츠렸는데, 막상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움직이기 시작하니 없던 용기가 샘솟았다.
험악하지만 조금 주눅 들었던 그들의 표정이 연무장을 나와 반 각쯤 이동하자 어느새 주눅이 사라지고, 투기가 어렸다.
그들을 발견하고 황급히 몸을 피하는 하인들의 모습을 보니 더 더욱 기가 살아났다.
"크하하하! 누가 우릴 막을 것이냐!"
산적들은 크게 웃으며 힘차게 걸어갔다. 일단 용기를 되찾고 나니 산에서의 기억이 약간 흐려졌다. 자신들이 힘을 합하면 무영을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살짝 스쳤다.
그들은 너무나도 단순한 산적이었다.
산적들은 그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며 느긋하게 장원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과 마주쳤다.
"저 꼰대는 뭐야?"
마흔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몸내는 호리호리했지만 단단했고, 눈빛은 깊었다. 지금 막 뇌룡장에 도착한 당백형이었다.
당백형은 이백 명이나 되는 산적들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무영이 이들과 무슨 관계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산도적같이 생긴 놈들은 뭐야?"
당백형의 말에 산적들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산도적같이 생긴 게 아니라, 내가 바로 녹림의 호걸이시다. 크하하!"
산적 중 하나가 나서서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치자, 당백형이 더욱 인상을 썼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이따위 쓰레기들을 왜 장원에 들인 거지?"
쓰레기라는 말에 산적들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다. 이미 용기를 되찾은 그들에게 호리호리한 중년인은 더 이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다만 본능적으로 무영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루 동안 봤던 것은 그저 일하는 하인과 시비들뿐이었으니 조금 뇌룡장을 우습게 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들은 아주 단순했다.
"크아아! 가만두지 않겠다!"
이백 명의 산적들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최소한 산채의 부채주급 이상의 실력을 가졌다.
비록 산적들이 무림의 문파에 속한 무사들에 비해서는 상당한 손색이 있다지만 그들을 이끄는 채주나 부채주의 경우는 다르다.
아무리 힘이 모자란 산채라 하더라도 채주 자리에 있으려면 최소 일류에 근접한 수준은 되어야 한다.
게다가 이곳에 있는 이백 명의 산적들은 녹림왕 엽광패의 휘하에 있는 자들이다. 그저 그런 작은 산채주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무위를 자랑한다.
그런 자들 이백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무려 이백 명이나 되는 자들이 동시에 몸을 날리며 무기를 휘두르는데도 서로 간에 전혀 걸림이 없고, 적절한 위치를 점해서 효과적으로 공격했다.
당백형은 그것을 보고 눈을 빛냈다.
"호오, 이건 꽤 쓸 만한 쓰레기들 아닌가."
산적들의 무기는 대부분 도(刀)였다. 그들의 도에서는 예리한 도기(刀氣)가 일렁였다. 그 도기는 일제히 당백형을 덮쳤다.
쩌저저저저정!
사방으로 도기가 비산했다. 막대한 기의 폭풍이 장내를 휘감았다. 산적들은 자신들이 공격을 해 놓고도 깜짝 놀랐다.
그 위력이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이다. 이 공격을 받고도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 자신했다.
"쯧쯧. 공격은 좋았는데 너무 느리군."
산적들의 고개가 일제히 한쪽으로 돌아갔다. 당백형은 언제 움직였는지 삼 장이나 떨어진 곳에 여유롭게 서 있었다.
산적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놀라고 있을 시간에 나 같으면 무기를 들고 이걸 막을 준비를 하겠는데 말이야."
당백형은 그렇게 말하며 소매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한 웅큼의 침(針)이었다. 너무나도 가늘어 그저 한 움큼에 불과했지만 수백 개는 되는 듯했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그제야 당백형이 결코 예사 인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당백형의 손이 슬쩍 움직였다.
콰콰콰콰!
당백형의 손을 떠난 침들은 주변 공기를 찢으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저 손을 슬쩍 흔들어 던졌을 뿐인데, 하늘로 날아오른 침들은 사방으로 퍼지며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렇게 퍼지면서 공기를 뒤흔들었다.
산적들은 침이 공기를 찢는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산적들의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일정한 간격으로 하늘을 가득 메운 침의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산적들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허, 허억! 마, 만천화우!"
누군가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경악한 외침이 울렸다. 그 외침을 신호로 하늘에 떠 있던 침들이 일제히 내리꽂혔다.
콰콰콰콰!
"크아아악!"
바닥으로 쏟아지는 침은 어찌나 빠른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가늘고 작은 침이라 그냥 쏟아져도 구분하기 어려운데 속도까지 빠르니 산적들로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퍼버버버버버벅!
바늘이 살을 꿰뚫는 소리가 마치 악기를 연주하득 사방에 울렸다. 산적들은 온몸을 꿰뚤리는 충격과 고통에 그저 비명만 쉬지 않고 질러댔다.
"크아아악!"
"으아아악!"
"끄어어!"
당백형은 그저 무심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이내 비명소리가 잦아들었다.
산적들은 아무도 움직일 수 없었다. 목숨을 잃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혈도가 제압된 것뿐이었다. 당백형은 그 와중에 침의 방향을 조절한 것이다. 실로 가공할 정도의 통제력이었다.
산적들은 온몸이 싸늘히 식은 듯했다. 그들은 두려운 눈으로 당백형을 바라봤다. 고개를 돌릴 수 없어 그저 눈동자만 굴렸다.
당백형은 그런 산적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손을 한 번 휘저었다.
촤라라락!
바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던 침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라 당백형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침에는 핏방울 하나 묻지 않았다. 당백형은 손에 가득 모인 침을 다시 소매로 넣었다.
"자아, 이제 이 쓰레기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산적들의 귀에는 당백형의 목소리가 마치 지옥에서 온 사신의 그것처럼 들렸다.
"뭐야? 그놈이 녹림왕이었어?"
강악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강악의 말에 당백형도 고개를 끄덕이며 어이없어했다.
"십대고수의 수준이 낮아졌군."
무영은 두 사람의 반응에 쓴웃음을 지었다. 엽광패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눈앞에 있는 두 사람뿐일 것이다.
"그나저나 녹림왕이 왜 여기 있는 거냐? 설마 산적질이라도 하려는 거냐?"
강악의 말에 무영이 고개를 저었다.
"산에 갔다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우연히?"
"정협맹을 흔들려고 했다더군요."
무영의 말에 강악과 당백형의 안색이 동시에 변했다.
"정협맹을?"
"설마 녹림이 흑사맹과 손을 잡았단 말이냐?"
무영은 두 사람의 반응을 살핀 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녹림도, 흑사맹도 그 뒤에 다른 뭔가가 있는 모양입니다. 혹시 은왕이라는 자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은왕?"
"처음 듣는데?"
당백형과 강악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흑사맹과 녹림을 뒤에서 좌지우지할 정도라면 꽤 대단한 인물일 텐데도 아직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상당히 무서운 일이었다.
"그자가 흑사맹과 녹림을 휘어잡았다 이건가?"
무영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산적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은왕의 명으로 흑사맹을 도와 정협맹을 흔들기 위해 왔다고 말입니다."
당백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자네에게 거짓을 말한 건 아닌가?"
"아닐 겁니다. 그 산적은 꽤 오래전부터 저와 인연이 있었는데, 쉽게 거짓을 말하지 못할뿐더러 얼굴에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입니다."
"호오, 녹림왕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이건 또 예상밖인데?"
강악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하자 무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스승님과 이 산 저 산 돌아다녔을 무렵에는 산적을 자주 만났습니다. 그때 만났던 산적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하긴."
당백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무영의 말에 수긍했다. 무영 정도의 능력을 쌓으려면 이 산 저 산 엄청나게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다보면 산적을 만나는 것은 일상다반사다.
'나도 그랬으니까.'
다만 녹림왕을 만났다는 것은 좀 의외였는데, 그것은 운의 문제였다. 당백형도 꽤 유명한 산적들을 여러 명 골로 보냈다.
"그럼 저 산적들을 이제 어쩔 셈이냐?"
"일단 금제를 풀어준 이후에 결정할 생각입니다. 아마 금제에서 풀려나면 다시는 산적질을 안 할 것 같습니다."
"금제?"
금제라는 말에 강악과 당백형이 되묻자, 무영이 설명을 덧붙였다.
"은왕이 아랫사람을 통제하는 방식이라더군요. 금제가 발동하면 사람이 공처럼 말려 죽는다더군요. 상당히 잔인하고 무서워서 그 광경을 보며 다음부터 금제에서 벗어날 생각을 못한다고 합니다."
"허어, 이거 정말 큰 문제일수도 있겠군. 그런 금제까지 동원하다니. 그나저나 그럼 은왕에게 속한 세력이 흑사맹과 녹림뿐 아니라 더 있을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당백형의 말에 강악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무영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끄떡였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거대한 집단일지도 모릅니다."
당백형과 강악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의 얼굴은 너무나 심각했다. 은왕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불길했다. 왠지 모르지만 거부감도 심하게 들었다.
"일단 이 일은 좀 더 조사가 필요해 보이는군. 내가 정협맹을 움직여 보도록 하지. 먼저 닥친 문제부터 해결하고 말이야."
닥친 문제라는 것은 몰려오는 흑사맹이었다. 그들과 정협맹의 싸움에서 정협맹이 큰 피해를 입는다면 앞으로 무림은 상당한 혼란기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은왕이 원하는 것도 그런 혼란일지도 모른다.
"어쩔 게냐?"
당백형의 물음에 무영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겁니다."
당백형과 강악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도와주마."
"술값은 해야지. 으하핫!"
무영은 고개를 들어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에 맺힌 웃음이 왠지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왔다.
흑사맹주 마염공 동방극은 교자 위에 비스듬히 앉아서 주변을 휩쓸 듯 나아가는 흑의 무사들을 쓱 둘러봤다. 가슴에 똬리를 튼 뱀이 수놓인 흑의는 흑사맹의 상징이기도 했다.
동방극을 따르는 일천 무사들은 그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는지 투지를 불사르고 있었다.
"큭큭큭. 기대되는군."
동방극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안에 든 피리를 만지작거렸다.
일단 이 피리를 불면 이곳에 있는 천 명의 무사들은 모두 피가 끓어올라 잠력을 격발하며 적을 박살낼 것이다. 그리고 결국 피가 말라 죽어버릴 것이다.
동방극은 그들의 목숨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고작 이류에 불과한 무사들 천 명을 이용해 정협맹을 박살낼 수 있다면 싸게 먹힌 거라 여겼다.
그렇게 한참 동안 피리를 만지작거리던 동방극의 눈빛이 갑자기 섬뜩하게 변했다. 동방극은 한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멈춰라."
동방극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천 명이나 되는 무사들의 귓가에 또렷이 울렸다. 행렬이 멈췄다.
"훗, 과연, 기습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웠겠지. 어디......"
동방극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품에서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한 쇠구슬 하나를 꺼냈다.
쇠구슬은 동방극의 손에서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눈 몇 번 깜짝할 시간이 지나자 쇠구슬의 회전은 너무나 맹렬해서 주변 공기를 태울 정도가 되었다.
"여기서 흑혈단을 발동시킬 수는 없으니 내가 나설 수밖에."
동방극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동방극의 손에 있던 쇠구슬이 맹렬히 회전하며 서서히 떠올랐다.
"내가 왜 마염공이라 불리는지 똑똑히 알려주마."
꽝!
동방극의 손가락이 회전하는 쇠구슬을 튕겨내자, 강렬한 폭음이 울렸다. 쇠구슬은 폭음과 함께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갔다.
쇠구슬이 날아가는 궤적을 따라 불길이 타올랐다. 마치 불로 만든 길이 만들어지는 듯했다.
쇠구슬은 바위가 몇 개 있는 곳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콰과과과광!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쇠구슬과 바위가 부딪쳐 만들어낸 폭발이었다. 쇠구슬 주변은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크아아악!"
"으아아!"
바위 뒤에 숨어 있는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나마 그들은 생존자였다. 폭발에 휘말린 대부분의 동료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혼이 되었다.
바위 뒤에서 튀어나온 사람은 고작 여섯 명뿐이었다. 그나마도 폭발에 휘말려 온몸이 너덜거렸다.
"죽여라."
동방극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던 흑사맹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 난도질을 시작했다.
극심한 내상에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의 외상을 입은 여섯 사람은 일말의 반항도 못하고 다진 고기가 되어 죽어 버렸다.
동방극은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재미있군."
동방극의 손에서 또 하나의 쇠구슬이 회전을 시작했다. 그 쇠구슬은 이번에는 방금 전의 폭발이 있던 곳의 반대쪽으로 날아가 똑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그렇게 수십이 또 죽고 나서야 거대한 외침이 울렸다.
"원수는 피로! 모두 쳐라!"
그 외침과 함께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무사들이 우수수 몸을 드러냈다. 그들의 얼굴에는 결연한 의지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렸다.
동방극의 손바닥에서 쇠구슬들이 쩔렁거렸다.
"큭큭큭. 부나방 같은 놈들."
끼이이이이잉!
쇠구슬들이 동시에 회전을 시작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동방극은 손바닥을 슬쩍 앞으로 날렸다.
콰우우우우우!
십여 개의 쇠구슬들이 맹렬히 회전하며 앞으로 날아갔다. 각각의 쇠구슬은 기다란 불길을 꼬리로 달고 날아갔다.
퍼버버버벅!
"크아아악!"
쇠구슬은 날아가며 앞에 있는 모든 것을 꿰뚫었다.
가장 앞에 달려오던 무사들은 커다란 구멍이 난 가슴을 부여잡고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일단 쇠구슬에 뚫리면 머리통만 한 구멍이 뚫렸다.
그렇게 수십의 생명을 앗아간 쇠구슬은 바닥에 떨어지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과아아앙!
기습을 위해 정협맹에서 보낸 인원이 무려 백오십이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폭발이 끝나고 남은 사람은 고작 열셋이었다. 그나마도 멀쩡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처리해라."
동방극의 무심한 명이 떨어졌고, 행렬의 가장 앞에 있던 무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살아남은 열세 명은 강한 무사들이었다.
하지만 극심한 부상을 안고 수많은 무사와 싸워 이길 수는 없었다. 결국 그들 역시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그때까지 흑사맹의 희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조금 심한 부상을 입은 자가 열다섯 정도 있을 뿐이었다.
열다섯의 부상자들은 동료들이 나서서 대충 응급처리를 하고 나자 그나마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조치가 끝나고 행렬은 다시 움직였다.
동방극은 부상을 입고도 다시 움직이는 열다섯 무사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들을 위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놓고 갈 생각도 전혀 없었다. 아무리 부상을 입었다지만 일단 흑혈단이 발동하면 훌륭한 투사가 된다. 피에 미쳐 날뛰는 투사가.
"맹주님! 당했습니다."
남궁무학은 돌진하듯 달려오는 총관의 목소리를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당했다니? 설마......!"
"기습을 위해 매복하고 있던 현무단 백오십 명이 전멸했습니다."
남궁무학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흑사맹의 피해는?"
총관이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전혀 없습니다."
이번에는 남궁무학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무단이 무려 백오십이나 매복을 했다.
비록 기습에는 실패하더라도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한데 적의 피해가 전무하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흑사맹에서 오고 있는 무사들은 고작 이류에 발을 걸친 정도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습니다. 분명히 정보는 그랬는데, 모두 당했답니다. 적의 피해는 가벼운 부상자 몇이 전부라 합니다."
남궁무학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적이 의도적으로 흘린 정보에 역으로 당했다는 뜻이 된다.
"생각보다 적이 뛰어나다는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니라면?"
"동방극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수일 수도 있습니다."
남궁무학이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거야. 동방극이 비록 십대고수라고는 하지만 현무단 백오십을 혼자서 상대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네. 현무단이 어떤 애들인지 총관이 더 잘 알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남궁무학은 알았다는 듯 손을 몇 번 휘휘 내저었다.
"이제 그만 물러가게."
남궁무학의 말에 총관은 불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후 조심스럽게 물러갔다. 남궁무학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총관을 계속 쳐다봤다.
"쯧쯧. 명색이 정협맹의 총관이란 자가 이렇게 독기가 모자라서야, 원."
남궁무학은 그렇게 투덜거린 후, 생각에 잠겼다. 사실 이건 큰 문제였다. 물론 정면으로 싸운다고 해도 정협맹이 질 리가 없다.
현재 정협맹이 보유한 무사들만 해도 이천이 넘는다. 게다가 흑사맹보다 훨씬 고수의 수가 많다.
하지만 그렇게 이겨도 개운치 않고 상처만 남는다. 정협맹이 타격을 심하게 받으면 향후의 전쟁 판도가 뒤흔들릴 수도 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긴 했지."
남궁무학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다.
"그나저나 명이는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거지? 지금쯤이면 그 뇌룡장인가 뭔가를 말끔히 정리하고 신선주의 제조법을 들고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남궁무학의 얼굴에 다시 못마땅한 기색이 비쳤다.
첫댓글 즐~감!
ㅎ늘 감사히 잘읽고 갑니다
재미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