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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21) 2024. 1. 14
감격의 성벽 봉헌식
느헤미야12:27-43
느헤미야서는 13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1장~7장까지는 느헤미야의 소명과 온갖 방해 속에서도, 내부의 부패와 갈등을 이겨내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을 기록하였습니다. 140년이 넘도록 세우지 못한 성벽을 불과 52일 만에 완성하였습니다. 그 완성한 날은 기원전 445년 9월 21일입니다(하드웨어를 만드는 과정).
8장~12:26까지는 그 성읍을 채울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드는 과정을 기록하였습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를 초청해서 말씀을 듣기 시작하였고, 그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게 되자 금식하며 회개하며, 잘못된 부분들을 고쳐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절기(초막절)도 지키며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아 예루살렘 성읍 안에서 살 사람들을 선정하였습니다. 전체 인구의 십일조에 해당하는 약 천여 명이 예루살렘 도성 안으로 이주하여 이제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가 되었습니다(소프트웨어를 채우는 과정).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성벽 봉헌식’을 행하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성벽 공사가 끝나자마자 ‘성벽 봉헌식’을 바로 하지 않았습니다. 성벽보다 훨씬 중요한 성안에 들어갈 사람들이 영적으로 준비가 된 다음에야 비로소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봉헌식은 단순한 건물의 낙성식이 아니라 새로운 건물(성벽)과 새로운 사람이 연합하여 이루어 낸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건물이나 성벽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만리장성을 쌓아도, 사람이 준비되지 않으면, 뇌물 받고 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다고 예루살렘 성읍이 보존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진정한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봉헌식’은 단순히 성벽만을 봉헌하는 ‘봉헌식’이 아니라, 사람도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종합적인 봉헌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격의 성벽 봉헌식>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27~29절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28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29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먼저 레위 사람들을 각처에서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레위인은 예배를 돕는 일에 전문화된 사람들입니다. 이 레위 자손 가운데 특히 아삽의 자손들이 성전 찬양대로 활동했습니다(대상16:4~7, 대하5:12). 아삽은 다윗 시대에 성전 찬양대의 지휘자 가운데 한 명, 즉 성전 찬양대의 조상입니다. 그는 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는데, 그의 노래 12편이 시편에 수록되었습니다(시 50편, 73-83편).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제금을 치고 비파와 수금을 타게 함으로써 주님께 즐거이 감사 찬양을 드리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성읍 주변의 여러 마을에 사는 노래하는 레위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두 올라왔습니다.
찬양은 모든 예식의 중심입니다. 봉헌식을 포함하여, 모든 예배에서 찬양이 빠지면 안 됩니다(성가대의 중요성). 찬양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은혜를 즐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과 기도, 그리고 말씀 선포는 예배에서 빠질 수 없는 구조입니다.
불교에서도 특별한 행사를 할 때, ‘찬불가’를 만들어 부릅니다.
한 때, 찬송가를 작곡한 사람이 찬불가를 만든 문제로 시끄럽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정결 예식을 행했습니다.
30절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스스로 정결의식을 치렀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목욕을 해서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빨고, 마음을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봉헌식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온 백성들은 물론이고,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에도 물을 뿌려 정결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응암교회 고 이경구 장로님 – 매주 예배를 드리기 전 목욕을 하셨다고 합니다.
옛날 어른들은 헌금을 드리기 전에 돈을 다리미로 다릴 정도였습니다. 주일날 정성스럽게 준비한 헌금을 가슴에 품고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주일날 복장도 함부로 입고 오지 않았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온다든가, 짧은 반바지를 입고 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예배드리기 전에 정성스럽게 준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대통령을 만난다면 그냥 가겠습니까?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을 만나려면 옷매무시도 다시 가다듬고 만반의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자유롭게 만나기 때문에 너무 정성 없이 만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우리가 교회에 올 때까지 얼마나 잡다한 생각들을 많이 하고 옵니까. 교회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잡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눈에 초점이 없습니다. 방황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총기가 있습니다.
미션 스쿨의 채플 시간에 가보면,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학점 때문에 억지로 끌려와 앉아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백성의 지도자들을 모두 성벽 위로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31절a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
여기에는 세 가지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그 성벽 위를 행진하면서, 이 놀라운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또 하나님께 이 성벽을 보호해 주시기를 의뢰하기 위한 의식이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성벽을 불과 52일 만에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이 성벽을 맡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의 손 아래 있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성벽 위를 행진하며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2) 그 성벽 위를 행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존감(자부심)을 북돋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패배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성벽이 무너진 지 거의 141년이 지나도록, 수많은 이방 민족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성벽 하나 재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였습니다. 자신들의 헌신과 땀이 배어 있는 성벽입니다. 어떤 이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심지어 목숨을 걸고 작업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 성벽을 걸으면서,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가 해냈다’는 성취감과 더불어 깊이 잠들어 있던 자존감이 회복되었을 것입니다.
3) 자신들을 조롱하며 방해했던 적대자들에게 이 성벽을 얼마나 튼튼하게 쌓았는지 증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앞서,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방해하는 대표적인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산발랏, 도비야, 게셈).
산발랏은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견고하게 하려는가”, “그 위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일을 마치려는가”, “불탄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하며 조롱하였습니다.
특히, 도비야는 “...그들이 건축하는 돌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4:3)라며 조롱하였습니다. 아마도 느헤미야는 이때의 수모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자신들이 쌓은 성읍이 얼마나 튼튼한지를 세상에 보여주려고 의도하였을 것입니다.
네 번째, 찬양대를 둘로 나누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행진하게 하였습니다.
31절 “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을 성벽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둘로 나누어 성벽 위로 대오를 지어 가게 하였는데 한 무리는 오른쪽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출발은 ‘서쪽 골짜기 문’입니다. 이 서쪽 골짜기 문은 느헤미야가 처음 왔을 때, 성벽의 무너짐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 출발했던 문임과 동시에 성전 앞까지 양쪽으로 나뉘어 걷기에 적당한 거리에 위치한 문입니다.
찬양대로 둘로 나누고, 뒤따르는 방백들과 제사장, 레위인들도 적당히 반으로 나누었습니다.
오른쪽 방향으로 향하는 찬양 대원들의 뒤로는 학사 에스라가(36절)가 무리에 앞서 걸었습니다(분문, 샘문, 수문 방향).
반대 방향으로(왼쪽) 향하는 무리에 느헤미야도 뒤따라 함께했습니다.
38절 “감사 찬송하는 다른 무리는 왼쪽으로 행진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과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벽 위로 가서 화덕 망대 윗길로 성벽 넓은 곳에 이르고.”
그리하여 ‘풀무 탑’을 지나 넓은 성벽에 이르렀다가 ‘에브라임 문’, ‘옛 문’, ‘물고기 문’, ‘하나넬 탑’, ‘함메아 탑’을 지나 ‘양 문’까지 가서 ‘감옥 문’에서 멈춰 섰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느헤미야가 에스라와 같이 앞장서지 않고 백성들 뒤를 따라 걸었다는 것입니다.
성벽을 쌓은 일등 공신이지만, 그는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닙니다. 총독으로 행정 책임자일 뿐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봉헌식을 올리는 시간입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앞장서야 하는 자리입니다.
느헤미야는 참 신앙인이면서 지혜로운 지도자입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사장과 함께 앞장서서 행진했다고 한들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느헤미야가 아니었다면, 성벽을 완성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등 공신입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겸손히 백성 중의 하나로 하나님 앞에서 이 기쁨을 누리는 중입니다.
아마도 느헤미야는 이 봉헌식 과정에서 하나님보다 자신의 공로가 더 부각되는 것을 두려워하였을 것입니다.느헤미야는 참 겸손한 지도자입니다.
다섯 번째, 이 두 무리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40절 “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무리가 하나님의 전에 섰고 또 나와 민장의 절반도 함께 하였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행진하던 찬송하는 두 무리는 하나님의 전에서 만났습니다. 예, 그들의 목적지는 바로 ‘예루살렘 성전’(스룹바벨 성전)이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그들 신앙의 중심이고, 하나님께 제사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던 봉헌식의 모습을 43절에서 이렇게 묘사하였습니다.
43절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큰 제사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의 관심은 그 봉헌식에 참여한, 큰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모두가 크게 즐거워했습니다. 성인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가 함께 기뻐하니, 그날 예루살렘에서 환호성을 외치며 기뻐하는 소리가 아주 멀리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큰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그가 ‘얼마나 큰 제사를 드렸느냐’가 아닙니다(대형교회, 작은 개척교회).
어떤 모습으로 드렸느냐는 것입니다(기쁨과 감사, 그리고 찬양).
예배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항상 예배란 엄숙하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건하기 그지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단에서는 악기도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손뼉도 치지 못하게 합니다. 큰소리로 기도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보십시오. 모든 악기가 동원된 기쁨의 예배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즐거움(기쁨)입니다.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율법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다 울었습니다. 그때, 학사 에스라가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느8:9)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이 기쁨의 소리가 교회 담장을 넘어가야 합니다.
예전에 버스에서 승객들끼리 다투자, 기사가 한마디 했습니다. “여기가 교회인 줄 아십니까? 조용히 하세요!”
웃지 못할 유머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가 이런 모습으로 인식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웃음소리가 교회 담장을 넘을 때입니다.
행 16장에서, 왜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바울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야여 구원을 얻습니까?”라고 물었겠습니까? 단지 감옥 문이 무너져도 도망가지 않은 것만 아닙니다. 감옥에 갇혔어도 찬송하고 기뻐하는 바울과 실라의 모습 때문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전도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아는 기쁨을 다른 사람들도 맛보게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미국을 여행하던 사람이 주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교통경찰에게 교회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경찰은 멀리 보이는 한 교회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있을 텐데, 왜 저렇게 먼 데 있는 교회를 가르쳐 주십니까?” 경찰은 “예배를 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이 근처에 있는 교회들보다도 저쪽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훨씬 기쁘고 즐겁게 보였습니다. 나는 불신자이지만 그 교회가 은혜로운 교회이고 참된 교회인 것 같아서 소개한 겁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도 은혜받은 얼굴과 은혜받지 못한 얼굴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는 축제입니다. 예배는 잔치입니다. 예배는 기쁨입니다.
삶이 힘들고, 때로 고통스러워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기쁨의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조건과 환경에 흔들리지 말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 하나님’으로 인해서 마음껏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2024년 올 한해,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고 기뻐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