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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23) 2025. 1. 19
천사의 얼굴을 지닌 사람
사도행전6:8~15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 구제로 인해 내부적인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봉사자로 세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사도들은) 오직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헬라파 사람들로만 ‘일곱 명의 봉사자’가 피택되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에게 안수하고 그들이 책임을 맡아 구제하는 일에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갈등은 극복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더욱 부흥하여 갔습니다. 심지어 유대교의 중추 세력인 제사장들 중에서 적지 않은 무리가 개종하게 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이같은 예루살렘 교회의 부흥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위기감을 가져다주었고, 결국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박해의 출발은 ‘일곱 명의 봉사자’ 가운데 한 명인 ‘스데반’의 체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스데반>
오늘 본문 1절은 ‘스데반’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설명하여 줍니다.
8절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이 말씀에는 몇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첫째, 이전까지는 오직 사도들만이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주체로 나타났습니다(2:43). 그런데 이제 기사와 표적이 사도들의 전유물이 아니요 성령 충만한 모든 이들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으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나타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앞에서 일곱 봉사자들을 뽑을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뽑았습니다(6:3). 스데반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에게서 이러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스데반 외에도 앞으로 살펴보게 될 빌립 또한 같은 표적을 행하였습니다(행8:6).
둘째, 이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곱 명의 봉사자’들이 단순히 구제 사역만 감당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치는 일도 함께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양한 직분이 있지만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다양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남).
셋째, 그들의 활동 범위가 교회 내에 국한되지 않고 지역사회(‘...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로 확대되었습니다.
아마도 디아스포라 출신의 ‘헬라파 유대인’이라 활동 범위가 지역사회를 넘어 로마 제국 전역으로 넓어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복음의 세계화에 일조).
넷째,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주님의 말씀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주님과 3년 이상을 같이 다니며 배운 사도들과 달리, 스데반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 사건 이후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길게 잡아도 1년을 넘지 못하는 시간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스데반은 ‘초신자’나 마찬가지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 못지않은 능력을 행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7장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 내용을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보다 더 뛰어나고 월등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신앙 연수를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마음을 다해서 내가 주님의 종으로 사느냐, 주님이 원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논쟁이 일어나다>
그러던 중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9절 “이른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소위 ‘자유민들의 회당’이라고 불리는 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곳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성전과 회당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말 그대로 제사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회당은 유대인 공동체가 모여서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토론하던 장소였습니다. 회당은 바벨론 포로기에 생겨났다고 하는데,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회당에서 모이는 일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1km 이상을 여행할 수 없는 안식일 규정 때문에,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라면 사방 1km 안에 최소한 한 곳 이상의 회당이 있어야 했습니다.
(튀르키예 여행 중 크고 작은 마을마다 ‘모스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신자...)
회당 중에는 지역민들이 모이는 곳도 있었지만, 특별한 계층, 또는 같은 지역 출신 사람들이 모이는 곳도 있었습니다(외국에 한인 교포들이 한인교회를 만들고 모이는 것처럼).
본문에 등장하는 회당은 우선 ‘자유민들’이 출석하는 곳이었습니다. ‘자유민들’이란 로마 제국의 시민권을 획득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 중의 하나였습니다. 즉 ‘헬라파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이었습니다.
본문에 네 지역이 언급되고 있는데, ‘구레네’와 ‘알렉산드리아’ 아프리카 북부의 리비아와 이집트의 수도로서 당시 로마 제국 중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이곳에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길리기아’와 ‘아시아’(소아시아)는 현재 튀르키예에 있는 도시입니다. 길리기아 지방의 중심지는 사도 바울의 출생지였던 다소였고, 아시아 지방의 중심지는 에베소였습니다. 여기에도 각각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예루살렘에 와서 자기들만의 회당을 만들어서 출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데반이 이 회당에 가게 되었을까요?
스데반이 어느 지역 출신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가 ‘헬라파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에 이 ‘자유민들의 회당’에 출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자신이 다니던 회당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무슨 논쟁을 벌였는지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스데반이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 구약에 예언되었고 우리가 기다리던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다’라고 전했을 것입니다(스데반의 자세한 논증 내용은 7장에서). 그러자 예수를 못 박아 죽인 유대교 신봉자들이 아니라고 반박했을 것이고, 그러면 다시 스데반이 구약을 인용하며 맞다고 하며 논쟁을 벌였을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사울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길리기아 지방의 다소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그가 다니던 회당이 있었다면 바로 이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이 순교하던 현장에 왜 사울이 갑작스럽게 등장하는지(행7:58) 설명이 됩니다. 아마도 사울은 스데반과 논쟁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반대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스데반이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겼을 뿐만 아니라(행8:1), 그 이후에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행1:4).
<스데반의 승리, 그러나>
논쟁에서 그들은 스데반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10~11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그런데 그들은 스데반을 당할 수 없었습니다. ‘지혜와 성령’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 충만’하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말했을 뿐 아니라, ‘지혜’ 즉 헬라 철학과 종교와 역사의 지식을 가지고 논쟁할 수 있던 지성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사람들은 말로 이길 수 없다고 판단되면 그때부터 억지를 부리거나 폭력을 행사합니다.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매수하여 거짓 증언을 하게 했습니다.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면서 비난한 것입니다. 즉 ‘신성 모독’으로 몰아갑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신성 모독죄’를 범한 사람은 반드시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레24:15-16). 그러면 합법적으로 스데반을 죽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체포되다>
실제로 그들은 스데반을 산헤드린 법정에 고소하였습니다.
12-13절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결국, 스데반은 산헤드린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은 71명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최고 법정입니다.
그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즉 ‘신성 모독죄’를 범하였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그 구체적인 고발 내용은 14절에 나옵니다.
14절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지요. 예,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때 썼던 수법과 내용입니다.
예수님도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당하실 때에 스데반과 똑같이 거짓 증인들에 의해서 같은 죄목으로 고발되었습니다.
마26:59-61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그러나 이것은, 마태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거짓 증인’이 말한 ‘거짓 증거’였습니다.
본래 예수님께서 성전과 관련하여 말씀하신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요2:18-21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소위 ‘성전 청결 사건’ 이후에 벌어진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런 일의 정당성을 입증할 만한 어떤 표적을 보일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하고 결국 하나님을 모독한 증거라고 왜곡하여 고소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뒤집어씌웠던 죄목을 ‘스데반’에게도 똑같이 씌우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스데반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의미만을 살짝 틀어 ‘성전 모독죄’로 몰아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 증인, 거짓 증거, 소위 ‘가짜 뉴스’를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돌아다니는 ‘가짜 뉴스’들도 보면, 전혀 없는 것에서 만들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에다가 살을 붙이고 특정 단어를 첨가하거나 빼거나 하여, 의미를 왜곡하여 ‘가짜 뉴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한 것입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거짓 증인들의 거짓 증언을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일제히 분노에 차 스데반을 바라보았습니다. 스데반의 죄목이 사형에 해당하는 ‘신성 모독죄’ 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전에 죽였던 예수와 똑같은 죄를 지은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15절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그런데 예상외의 모습에 놀았습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에게서 어떤 얼굴(표정)을 기대합니까? 그것도 생명을 앗아갈 만한 엄청난 죄목으로 모함을 당한다면 어떤 표정이 나오겠습니까? ‘죽음의 공포에 질린 얼굴’, ‘목숨을 구걸하는 비굴한 얼굴’, ‘절망 속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분노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습니다.
‘천사의 얼굴과 같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실 천사를 본 사람은 없지만 아마도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담대함, 그리고 동시에 온화하고 평안한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떻게 그런 얼굴을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해답은 7:54~56절에 있습니다.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 스데반은 사람이나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한마디로 스데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이나 상황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천사의 얼굴과 같이’ 온화하고 평안한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재판이 끝나고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천사의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군사 전문가에 의하면, 전쟁에 참전한 군인 중에 정면을 집중하며 총을 쏠 수 있는 군인이 전체 군인의 10%만 되면 그 전쟁은 승리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영화의 장면과 달리, 실제 전장에서는 거의 모든 군인이 정확하게 목표물을 보지 않고 그냥 총을 쏘아대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두렵기에 목표물을 보고 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기기 목표물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향해 주목하여 살아가는 자가 10%만 있으면 이 세상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또,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벧전4:12~14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스데반은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에게 배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팔복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11-12a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예수님은 ‘나로 말미암아’ 고난받는 사람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맺는 말씀 - 천사의 얼굴을 가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스데반과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천사의 얼굴’을 한 사람이 따로 있고, ‘악마의 얼굴’을 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화가와 모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화가는 천사를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상상만으로는 그리기가 어려워, 모델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던 중 정말 천사와 같은 소년을 만났습니다. 화가는 그 소년을 모델 삼아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천사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화가는 이번에는 ‘악마’를 그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악마의 모습을 지닌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 악마 같은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화가는 그를 모델로 악마의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악마의 모델이 된 것을 뒤늦게 안 모델을 자신이 누구인지를 화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화가가 오래전 천사의 모델로 삼았던 바로 그 소년이었습니다. 천사와 악마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람이 천사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음을 일깨워 주는 좋은 예화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에게 집중해 있을 때, 우리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처럼 성령이 충만하여 온전히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을 할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인 ‘제이니’ 박사는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 앞에서 늘 행복한 얼굴빛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학생들이 그 이유를 묻자, 그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설명하면서 "기쁨이라는 것은 하나의 깃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에 깃발이 나부낄 때는 왕이 성에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듯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쁨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표시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고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위기의 순간에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이 났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얼굴도 ‘주님만 바라보기에’ 기쁨과 평강이 가득한 ‘천사의 얼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조건과 상황을 뛰어넘는 이러한 평온함과 기쁨이 여러분에게 충만하여 여러분의 얼굴을 통해서도 우리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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