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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태원 장군 (1868~1908) |
호 |
죽봉 |
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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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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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나주 |
주요활동 |
-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요시다 광주수비대를 격파 -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정비하여 호남의소(湖南義所)로 이름을 바꾼 뒤 더욱 맹렬하게 반일투쟁을 펼침. 일군뿐만 아니라 친일파인 일진회원과 밀정, 자율단원들을 닥치는 대로 처단 - 죽봉장군의규율 주민들에 대한 토색(討索; 금품을 강요하는 행위)을 금지 (매천야록 - (“기발한 전략을 많이 이용하여 일여 년 동안 수백의 일병을 죽였으며, 부하를 엄히 다스려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 1908년 3월 26일의 토물(土泉)전투에서 적 30여명 사살 - 1908년 3월 29일 김율이 광주 소지방(현 송정읍)에서 일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 - 허리를 다쳐 광주 박산마을 뒤 어등산에 들어가 잠시 신병을 치료하려다가 거미줄처럼 쳐놓은 일제 밀정의 제보로 1908년 4월 25일 토벌대에게 발각되었다. 일제 기병대와 특설순사대가 김태원 의병부대를 포위 부하들을 피신시키고 일본군경의 집중사격을 받아 전사. - 일제는 한 달 전 체포되었던 아우 율을 데리고 와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킨 뒤 그 자리에서 총살시킴 |
묘소, 생가 |
*나주시민공원 죽봉김태원장군기적비(紀蹟碑), 담양군 남면 초등학교 김태원장군동상,광주농성광장(동상), 김태원, 김율형제의병장생가터(나주 문평 북동 갈마지마을) |
주변인물 |
동생 김율, 기삼연 의병장 |
어록, 유언 |
<어록>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의기충천한 남아가 어찌 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겠나? 온 힘을 다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려는 것은 아니라네. 전쟁이란 본시 죽음을 각오하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것이 옳으리라. 1918년 2월 18일 친형 태원이 쓰다. -아우에게
<유언>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 이미 결정하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왜놈 총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이로다. 나와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너희들은 나를 대신하여 뒷일을 도모함이 옳다 |
후손 |
김태원 의병장 손자 김갑제씨 (광주민주화운동) |
참고, 출처 |
네이버백과, EBS 한국독립운동사, 개인블로그(박도글방), 개인블로그(네이버/revolution2007) |
▲ 구한말 의병 격전지였던 광주 어등산. 김태원 의병장은 이곳에서 순국하였다. ⓒ 박도 어등산
기삼연 의병장 순국 김태원 의병장은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요시다 광주수비대를 격파한 기쁨도 잠시였다. 1908년 1월 말, 기삼연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담양의 금성산성에 머무는 중, 일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기삼연은 다리에 부상을 입어 순창에 은신하다가 일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김태원은 날랜 병사 30명을 이끌고 광주에 이르는 경양역까지 추적했으나 허사였다. 이미 기삼연 의병장은 광주로 호송이 끝난 뒤였다. 일군은 김태원 의병부대가 기삼연을 탈옥시키려 하는 움직임을 눈치 채고서는 정상적인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호송 뒤 곧장 광주천 백사장에서 총살시키고 말았다. 김태원은 그 소식에 통곡하면서 전 의병에게 상복을 입게 하고는 하늘을 향해 빌면서 복수를 맹세했다.
기삼연의 순국 후 김태원 김율 형제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정비하여 호남의소(湖南義所)로 이름을 바꾼 뒤 더욱 맹렬하게 반일투쟁을 펼쳤다. 이들은 일군뿐만 아니라 친일파인 일진회원과 밀정, 자율단원들을 닥치는 대로 처단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형 죽봉부대를 ‘참봉진(參奉陣)’, 아우 청봉부대를 ‘박사진(博士陣)’이라 불렀다고 한다. 김태원 김율 의병부대는 당시 민중들의 전폭 지지를 받은 바, 이는 이들 의병부대는 주민들에 대한 토색(討索; 금품을 강요하는 행위)을 금지하였으며, 뛰어난 지략(智略)과 용맹으로 부하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호남 각처에서 수십 차례의 크고 작은 항일전투에 승리했기 때문이다.
김태원 의병장 최후 ▲ 김태원 의병장이 마지막 은신했던 박산마을, 멀리 보이는 산이 어등산으로 장군이 일제 군경에게 집중 사격을 받고 순국한 곳이다.
ⓒ 김태원 의병장 기념사업회 박산마을 1908년 3월 26일의 토물(土泉)전투에서는 토물 뒷산에 보루와 방어진지를 쌓은 다음 적을 유인하여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 30여명을 살상케 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들 형제 의병부대에 철저히 농락당한 일제는 제2특설순사대를 편성하였을 뿐 아니라, 광주수비대와 헌병을 총출동하는 대 토벌작전을 펼쳤다.
이에 김태원 김율 의병부대는 전력에 큰 손실을 입었다. 영광 낭월산 전투에서는 도포장(都砲將) 최동학(崔東鶴)을 잃었고, 대곡전투에서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 가운데, 3월 29일 김율이 광주 소지방(현 송정읍)에서 일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되었다.
형 태원은 아우의 탈옥 작전을 펼치려 하였다. 하지만 허리를 다쳐 광주 박산마을 뒤 어등산에 들어가 잠시 신병을 치료하려다가 거미줄처럼 쳐놓은 일제 밀정의 제보로 1908년 4월 25일 토벌대에게 발각되었다. 일제 기병대와 특설순사대가 김태원 의병부대를 포위하였다.
이를 알아챈 김태원은 부하들에게 “나의 죽음은 의병을 일으킨 날 이미 결정하였다. 다만 적을 멸하지 못하고 왜놈 총에 죽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이로다. 나와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너희들은 나를 대신하여 뒷일을 도모함이 옳다”고 이르고는 짙은 안개를 이용하여 부하들을 탈출시켰다. 기어이 끝까지 남겠다는 부하 김해도(金海道) 등과 함께 적진을 향해 총탄을 퍼붓다가 일군의 집중사격에 쓰러졌다. 죽는 순간까지 의병장다운 의연하고 장렬한 순국이었다.
다음 날, 일제는 한 달 전 체포되었던 아우 율을 데리고 와서 형의 시신을 확인시킨 뒤 그 자리에서 총살시켰다. 이로써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부대의 활동은 종식되었지만, 이들의 영향을 받은 조경환, 전해산, 심남일, 오성술 등의 의병장에 의해 의병전쟁은 이어져 갔다.
충의가의 귀감 ▲ 김태원 의병장 동상(광주 농성 광장). ⓒ 박도 김태원 의병장 동상
매천 황현은 김태원 의병장을 다음과 같이 높이 기렸다.
“기발한 전략을 많이 이용하여 일여 년 동안 수백의 일병을 죽였으며, 부하를 엄히 다스려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1919년 초, 김태원 부인 낙안 오씨는 “나라가 망했으니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남편의 뒤를 이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충의의 맥은 형제뿐 아니라 부인에게도 이어진 집안으로 호남 충의가(忠義家)의 귀감이라 하겠다.
김갑제씨는 무등일보사를 나온 뒤, 먼저 할아버지 형제 김태원 김율 의병장이 순국하신 어등산 전적지로 안내했다. 이곳은 한말 의병 격적지로 숱한 의병들이 일제의 총칼에 전사한 곳이다.
이곳이 의병 근거지가 된 것은 그 무렵 행정사각지대로 장성, 함평, 영광, 송정 등 일제 헌병분파소나 분견대에서 출동하기가 어중간지대요, 어등산 아래에는 부자들이 많이 살았기에 의병들이 은거지로 이용한 듯 하다고 갑제씨는 풀이했다.
그런데 ‘어등산(魚登山)’이란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뜻의 지명인 바, 수많은 의병들이 죽음의 산인 줄 알면서도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던지 이 산에 숨어들었다고 한다. 그런 탓으로 이 산기슭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병들이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한말 호남 의병 피의 산'이라고, 갑제씨는 어등산 전적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호남의 이름 있는 몇몇 의병장의 현창사업은 그런대로 이루어졌지만, 군소 의병장이나 무명 의병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요. 이분들의 충혼을 기리는 ‘한말 호남의병기념공원(가칭)’을 이곳에다 만들어 의향(義鄕) 광주 시민의 자긍심을 드높이는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게 모든 의병 후손들의 한결같은 바람일 겁니다.”
스물세 분의 뫼밥 그동안 이 어등산 일대는 포병학교 포사격장 및 탄착지로 군사보호지역이었다가 얼마 전에 해제되었다고 한다. 현재 광주광역시에서는 이곳에다 종합 레저타운으로 개발할 계획을 세우는 모양인데, 의병 후손들의 바람이 얼마나 받아들일지 모르겠다고 갑제씨는 염려했다. 돈이 된다면 산도 허물고, 바다도 메우고, 강줄기도 바꾸려는 현실에, 이곳에다 놀이기구 하나 더 놓지 떡고물이 떨어지기는커녕, 생돈이 드는 의병 기념탑이나 조형물을 세울 만큼 의식 있는 지도자요, 지자제 단체장인지 두고 볼 일이다.
▲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장 생가 터(나주 문평 북동 갈마지마을) . ⓒ 김태원 의병장 기념사업회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장 생가 터
우리 일행은 어등산을 뒤로 한 채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장 고향인 나주로 달렸다. 점심시간을 이용한 답사라 생가 터인 문평면 갈마지 마을까지는 가지 못하고, 나주 시민공원에 있는 죽봉 김태원 장군 기적비(紀蹟碑)와 나주 향교만 둘러보고 차머리를 곧장 광주로 돌렸다.
갑제씨는 오후에는 사설을 한 편 써야 되는 눈치였다. 하지만 욕심 많은 나그네가 이태 전 어두운 밤에 제대로 보지 못한 죽봉 장군의 동상이 다시 보고 싶다고 청하자 곧 농성광장에다 차를 멈췄다.
이 일대도 재개발 붐이 한창인 듯, 머잖아 죽봉 김태원 장군 동상은 빌딩 숲 속에 외딴 섬이 될 성 싶다. 화승총을 들고서 호령하는 김태원 장군의 동상 앞에서 묵념을 드리자 그나마 묘지를 찾지 못한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김태원 의병장의 묘소는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77번)에 안장됐다는데 아우 김율 의병장은 시신을 찾지 못해 여태 묘소도 쓰지 못하였다고 한다. 28세로 후사 없이 돌아가신 김율 의병장은 갑제씨 아우 혁제씨가 출계(出系)하여 사손(嗣孫;대를 이은 손자)하여 대를 이었다고 한다.
김갑제씨가 헤어질 때 한 말이다. “저는 명절 때면 23분의 뫼밥을 제상에 떠 놓습니다. 할아버지 부하 가운데 후손이 없는 분의 뫼밥을 명절 때만은 궐식할 수 없어 올리고 있지요.”
명절 때마다 그 귀신들이 뫼밥을 들면서 얼마나 고마워할까? 호남 의병전적지 순례 길에 그래도 밥술이나 먹으면서 할아버지 부하까지 챙기는 의병 후손을 만나서 기분 좋은 하루였다. ▲ 김태원 의병장 기적비(나주 시민공원). ⓒ 박도 김태원 의병장 기념비 덧붙이는 글 | 다음 회는 오성술 의병장 편입니다. 이 기사는 홍영기 편저 <義重泰山>을 많이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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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샘물을 다기에 담아 책상 위에 놓다 (출처: http://blog.daum.net/revolution2007/1619761)
항일 의병전적지 답사기를 쓰면서 날이 갈수록 글 쓰는 일에 어려움을 느낀다. 지난해 가을부터 이 일에 매달렸으나 여태 15편밖에 쓰지 못했다. 일과에서 잠자는 시간 외에는 늘 글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지만 막상 컴퓨터 자판 앞에 앉아도 글이 줄줄 나오지는 않는다.
▲ 광주광역시 농성광장에 세워진 죽봉 김태원 의병장 동상 ⓒ 박도 죽봉 김태원 의병장 동상
이런 괴로운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한 텔레비전에서 티베트의 구도자들이 성지 순례를 하는 자세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들 구도자들은 성지를 찾아가면서 험한 산길에도 흐트러짐이 없이 오체투지(五體投地 먼저 두 무릎을 땅에 꿇고 두 팔을 땅에 대고 다음에 머리를 땅에 닿도록 절함)를 하고 있었다.
반면 나는 이제까지 이미 역사학자들이 공들여 써놓은 기록을 보고, 길 안내를 받으며, ‘구름에 달 가듯이’ 전적지를 훑어본 뒤 내 글방으로 돌아온 다음, 다시 기록과 사진을 살피고, 후손이나 관계자들이 남긴 녹음을 들어가며 글을 써 왔다. 곰곰 생각할수록 내 정성이 부족했다.
오늘도 온종일 책상머리에서 궁싯거리다가 이런 원인을 깨닫고서는 목욕재계로 진지한 자세를 가다듬고자 전재 고개 너머로 가 몸을 닦은 뒤 돌아왔다. 그러고도 한 줄도 쓰지 못해 함박눈이 쏟아지는 한밤중에 다기(茶器)를 들고 뒷산 우물에 가 맑은 샘물을 길어다 책상 위에 올려 놓고는 먼저 나의 무지함, 교만함, 오만함을 빌었다. 그리고 천지신명과 선열에게 호남의병전적지 답사기를 매끄럽게 끝낼 수 있는 열정과 지혜를 달라고 빌고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지금 바깥에는 함박눈이 소록소록 쏟아지고 있다. 나는 글방에서 불을 밝힌 채 일백년 전 의병장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낮과는 달리 이제야 자판이 두드려지고, 글 쓰는 행복감이 스멀스멀 밀려온다.
상전벽해가 된 상무대 보병학교
2007년 11월 6일(화) 내 호남의병전적지 안내를 해 주시는 고영준씨가 하루를 쉬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아마도 피치 못할 집안 사정이 있는 듯하였다. 현지에서 답사자는 늘 상황대처를 잘 해야 한다. 생명평화결사 순례단을 이끌고 전국을 일주하시는 탁발 도법 스님이 순례자는 대중들이 주는 대로 먹고, 아무 데서나 잠자는 데 익숙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답사자에게도 마찬가지다.
어찌 숙소에서 하루를 빈둥거릴 수 있으랴. 마침 간밤에 이태 전 호남의병 전적지 순례 길에 만난 적이 있는 김태원 의병장 후손 김갑제씨와 연락이 돼 나 혼자 답사 길에 나섰다. 그는 광주 무등일보 논설실장으로 근무 중인데, 그곳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무등일보사는 상무지구에 있다는데 그곳은 바로 지난날 광주 보병학교가 있던 곳이다.
나는 학군단 7기 보병장교로 1969년 2월 말부터 그해 6월 중순까지 16주 동안 기초 보수교육을 이곳에서 받았다. 춥고 졸리고 배고팠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보병학교. 보병학교 하면 ‘3보 이상 구보’ ‘선착순’ ‘원위치’ ‘훈련’ ‘통일’ 이런 구호와 함께 엉덩이가 시퍼렇도록 매 맞은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나는 장교 계급장을 달고도 매를 맞았는데 그 무렵 신병 훈련소의 인권침해는 불을 보듯 뻔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지난날 우리 군이 왜 귀한 젊은이를 데려다가 그렇게 배 골리고, 두드려 패고, 인권침해를 하였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나중에 내가 부대를 운영해 보니까 사병들이 실컷 배불리 먹고도 1종(쌀이나 보리 등 주곡)이 남아 돌았다. 육군 정량대로 급식하면 배가 고플 리가 없는데 그것을 중간에서 갈취하는 무리들이 있었다. 아마도 그들 중에는 별까지 달고서 국가유공자 행세를 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지난날 우리 군은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비리의 온상이라고 할 만큼 온갖 비리들이 활개쳤다. 이는 창군 주역들이 일군(日軍)이나 위만군(僞滿軍) 출신으로, 식민지 찌꺼기를 벗지 못한 탓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백성을 위한 군인이라기보다는 권력자를 위한 군인으로, 백성 위에 군림하면서 사리사욕을 채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 택시기사가 상무지구 무등일보사 앞에 내려주었다. 혹이나 옛 보병학교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그 일대는 뽕나무 밭이 바다로 변하듯, 상무대 보병학교 블록 건물이나 연병장은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빌딩숲으로 변해 있었다.
용맹하고 신출귀몰한 형제 의병장
호남의병장 가운데는 부자나 형제도 더러 있은 바, 김태원(金泰元, 본명 準)과 김율(金聿) 은 친 형제간이었다. 집안에 한 사람이라도 의병에 가담키가 쉽지 않을 텐데, 이들 형제가 의병에 뛰어든 것은 우리 역사에 한 귀감이다. 일제는 이들 형제를 동학당 이후 가장 용맹하고, 그 신출귀몰함이 난형난제(難兄難弟)라고 평하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참봉이라 호칭되던 김태원이 인솔하는 의병부대를 ‘참봉진(參奉陣)’, 박사로 불리던 김율 의병부대를 ‘박사진(博士陣)’이라 불렀다고 한다. - 홍영기 편저 <의중태산(義重泰山)> 67쪽 ▲ 죽봉 선생 친필 시비 //김태원 의병장이 아우에게 주는 글(나주 남산공원 소재)// 국가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의기 남아가 어찌 앉아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온 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는 것은 아니라네. ⓒ 박도 죽봉 선생 친필시비
11시 정각, 나는 이들 형제 의병장을 취재하고자 무등일보사 논설위원실 문을 두드렸다. 2년 전, 김갑제씨를 처음 만난 것은 저녁밥을 먹은 뒤 막걸리 잔을 나누는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그는 의병장 후손이 시민군이 되었다고 자기를 소개했다. 일제는 의병들을 '폭도'라고 불렀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은 시민군을 '폭도'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폭도의 후손이 다시 폭도가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때 그 이야기가 내게는 충격으로 각인되었다. 그날 그가 친일파 후손은 해방 60년이 지나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고 말하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랑스러운 조상을 둔 게 얼마나 자손만대에 떳떳하냐. 친일파 후손들이 비록 그동안 잘 먹고 잘 살았을지언정, 제 조상 무덤의 비석을 쫓아내고, 남 몰래 조상묘를 이장하는 그 작태가 얼마나 비참하냐. 인생을 길게 보면 '사필귀정'이다."
그러나 갑제씨는 내 말이 친일파를 변명하는 듯이 들렸는지 “의병이나 독립투사의 후손들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고 한 말씀”이라며 몹시 섭섭해 했다.
- 아직도 그때 제 말이 섭섭하십니까?
“아니에요. 어린 시절 하도 힘들게 살아서 그랬습니다. 그 시절 의병장 대부분이 절손이 되었지만, 다행히 저희 할아버지 죽봉(김태원) 장군은 39세로 일군의 총탄에 돌아가실 때 남매를 두셨습니다. 아들인 제 아버님은 동지들이 데려다가 일 년씩 돌아가며 키우셨고, 따님인 제 고모님은 신분을 숨기고 13세에 부산으로 시집을 보냈습니다.
ⓒ 박도 김갑제 할머니가 폭도 지아비를 둔 홀어머니로 움집에서 어린 자식들을 키운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한 편의 소설일 겁니다. 그런 할머니가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가 승하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로 사시다가 뒤늦게 어머니를 만나 오십이 넘어 저희 형제를 낳았습니다."
어린 시절 갑제씨는 당신 어머니가 남의 밭을 매거나 허드렛일을 하지 않으면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을 만큼 뼈저리게 가난했기에 할아버지의 의병장 활동을 많이 원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춘기 이후로는 오히려 할아버지가 의병 활동을 하신 긍지로 바르게 살 수 있었다고.
- 광주 민주화운동 때 시민군이 된 소감은? “당연히 나섰어야지요. 그때 저는 시민군이 되고서 ‘할아버님, 저도 폭도가 되었습니다’라고 영전을 향해 말씀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나라에 불의가 판치고, 무고한 백성들이 무고하게 살상을 당하면 비록 폭도라는 말을 들을지라도 다시 나설 겁니다.” 그는 의병장의 후손답게 매우 당차보였다. 마침 그의 집안 아우가 전적지를 안내해 주겠다고 찾아왔기에 세 사람은 무등일보 논설위원실을 나섰다.
덧붙이는 글 | '박도 글방' 카페를 열었습니다. cafe.naver.com/hiparkd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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