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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동요를 찾아서 22]
어머님 은혜
작사·윤춘병 작곡·박재훈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하늘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게 또 하나 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높은 것 같애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어머님의 큰 사랑 거룩한 사랑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드리자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
들어가는 글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어린이들이 주인공이고 어린이들이 행복한 5일의 ‘어린이날’과 교회에서의 첫 주일 ‘어린이주일(꽃주일)’이 지나면 곧이어 찾아오는 날이 5월 8일 ‘어버이날’이다.
교회에서는 둘째 주일을 ‘어버이주일’로 지키며 부모님들을 공경하는 주일로 지킨다.
원래는 어머니날로 시작하였는데, 아버지날이 별도로 없는 한국의 상황에서 ‘어버이날’로 이름이 바뀌었다.
어머니 사랑에 대한 노래는 일찍이 고려가요에도 전해오는데 제목부터가 <사모곡>이다.
현대어로 써 보면, ‘호미도 날이 있지만 낫 같이 들지 않아요. 아버지도 어버이시지만 어머니같이 사랑할 이 없어라’인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호미와 낫의 예민함에 빗댄 비유가 일품인 작품이다.
‘어버이날’에 많이 부르는 노래는 ‘높고 높은 하늘이라’로 시작하는 <어머님 은혜>와 ‘나살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로 시작하는 <어머니 마음>이다.
<어머님 은혜>는 윤춘병 작사에 ‘눈꽃송이’ 작곡가 박재훈 작곡이며, <어머니 마음>은 양주동 작사에 ‘섬집 아기’ 작곡가 이흥렬 작곡의 노래이다.
어머니의 마음과 같이, '높고 높은 하늘이라'라는 첫 소절을 들으면 자연스레 따라 부르게 되는 노래이다.
이 노래는 1948년 윤춘병 목사가 발간한 동요곡집 <산난초>에서 처음 발표되었다.
가사는 애초에 3절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교 교과서에 수록할 때는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드리자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이라고 하여 기독교 신앙의 색채를 짙게 드러내는 가사로 인해 제3절을 제외하고 제1절과 제2절의 가사만 수록하였다.
3절을 제외하면 조금 더 가볍고 동요 느낌이 나는 노래이다.
작사자·윤춘병 (尹春炳, 1918~2010)
윤춘병은 1918년 평안남도 중화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 요한학교, 중앙신학교 등을 거쳐 감리교 목사로 활동하다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초대감독으로 목회직을 은퇴했다.
그는 8·15광복을 맞은 1945년 월남했다.
서울에서의 삶은 어렵고 힘들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와 과로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
간호해주는 이 하나 없고 약 한 첩 먹을 수 없는 가난에다 마음의 고통마저 컸다.
방에 혼자 누운 그는 가슴을 깎는 외로움으로 눈물을 흘렸다.
누구하나 따뜻하게 대해주고 찾아주는 사람 없는 고독한 병상생활이 이어졌다.
잠들면 꿈속에서 고향길을 헤맸고 깨어나면 생각 속에 고향길을 하루에도 수십 번 오갔다.
마음은 창밖에 흐르는 구름을 따라 38선을 넘나들었다.
그 옛날 어린 시절 기억들이 현실처럼 되살아난 것이다.
그가 38선을 넘어오던 어느 날이었다.
마을 뒤 읍으로 가는 큰 길 가엔 쉼터인 늙은 소나무가 서있었다.
그곳까지 따라온 그의 어머니는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이제 가면 언제 오는 거냐?”며 목이 메었다.
목 메인 소리를 남기고는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들의 뒤를 지켜보시던 모습이 병상에 누운 윤춘병의 눈에 어른거렸다고 한다.
몸이 아파 누운 윤춘병 눈엔 그때의 어머니가 어른거렸다.
헤어지는 아들이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던 엄마의 모습이 뚜렷하게 떠오른 것이다.
윤 시인은 “어머니가 내가 병들어 누운 것을 알면 얼마나 애타 하실까”하는 생각을 하며 창밖의 흰 구름을 따라 고향하늘을 더듬었다.
그러던 중 “하늘은 높고 푸르기만 한데, 그 하늘보다 더 높고 더 푸른 건 어머님 사랑. ‘어머님 은혜’야말로 하늘처럼 넓고 다정하구나”하는 생각이 문득 났다.
그는 그때 떠올랐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을 바탕으로 펜을 들어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높고 높은 하늘이라’의 아름다운 시(詩)였다.
윤춘병 목사는 우리나라 감리교 관련 역사책을 많이 쓴 제1세대 역사가다.
한국감리교 130년 발자취를 사실에 바탕을 둬서 되살리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연구자료들은 조선시대로 치면 ‘조선왕조실록’이라할 만큼 방대하고 알차다.
<한국기독교신문·잡지 백년사, 1885~1945>, <한국감리교 수난백년사> 등 낸 책들이 엄청나다.
목사 은퇴 후엔 감신대 역사박물관장을 맡아 우리나라 교회역사자료 발굴·연구에 헌신했다.
평생 모은 역사자료 2만여 점을 감신대에 기증했다.
노환을 앓은 그는 2010년 8월 16일 오후 9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4년 타계한 아내(권용희) 묘가 있는 원주시 신림면 황둔리 선영에 함께 잠들었다.
작곡자·박재훈 (朴在勳, 1922~2021)
박재훈은 신앙인이자 음악인이다.
1922년 강원도에서 박창숙의 4남으로 태어난 그는 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 요한학교에 입학, 1943년 3회로 졸업했다.
1938년 박재훈이 평양 요한학교 입학 때 윤춘병, 장수철은 3학년이었다.
윤춘병이 박재훈보다 2년 선배였다.
이후 박재훈은 일본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 들어갔으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훈련소에서 도망쳐 귀국해 평남 강서군 문동국민학교 교사로 교단에 섰다.
이유선(1911~2005년) 교수로부터 작곡법도 배웠다.
1946년 4월 월남해 서울 용산 금양국민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작곡해둔 동요들을 모아 그해 <일맥동요집>을 냈다.
서울 대광고 음악교사로 자리를 옮긴 그는 밤에 문을 여는 중앙신학교(제1회)와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 크리스찬신학교를 졸업했다.
6・25전쟁 땐 해군 정훈음악대에서 복무했다.
휴전 후엔 기독교방송(CBS) 음악과장, 영락교회 찬양대지휘자로 일했다.
‘펄펄 눈이 옵니다’, ‘시냇물은 졸졸졸’, ‘송이송이 눈꽃송이’ 등 동요 100여 곡과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 등 찬송가 1000여 곡을 작곡한 교회음악의 대부다.
그는 ‘에스더’, ‘유관순’, ‘손양원’, ‘함성 1919’ 등 창작오페라도 작곡했다.
1959년 미국 유학을 간 박재훈은 웨스트민스터대학교에서 교회음악 석사학위를, 퍼시픽대에서 명예 인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 음대 교수를 지냈고 2011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토론토 한인합창단을 창설, 지휘자로도 활동했다.
선명회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북미지역을 돌며 지휘하기도 했다.
1982년 회갑을 넘긴 그는 미주한인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8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큰빛장로교회를 세워 활동했다.
1990년 원로목사로 은퇴한 그는 암 투병을 하다 2021년 8월 2일 밤 캐나다 미시소가의 한 병원에서 99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은혜의 배경
박재훈은 자신의 저서인 <내 마음 작은 갈릴리(서울성실문화사)>에서 ‘어머님 은혜’의 사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해마다 어머니날이 되면 한국교회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어머님 은혜’는 1946년 윤춘병 목사님이 서울에서 작사하고 내가 작곡한 노래이다”라고 밝혔다.
작곡에 얽힌 뒷얘기는 평양 요한학교 2년 선배인 윤춘병 목사와 8·15광복 후 어느 날 월남해 살던 서울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둘은 서울 흑석동에 살고 있는 박 목사 형님(박재봉 목사) 집으로 가게 됐다.
전차를 타고 노량진 쪽으로 가면서 “5월의 ‘어머니 주일’이 다가오므로 어머니은혜를 담은 노래가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전차에서 내려 흑석동 고개를 넘어가다 양지바른 곳에 잠깐 쉬게 됐다.
그때 윤 목사가 메모지를 꺼내 긁적긁적하더니 “이게 노래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며 박 목사에게 줬다.
어머니를 그리는 시(詩)었다.
내용을 읽어본 박 목사는 같은 탈북민으로서 가슴이 뭉클했다.
며칠 후 그는 악상이 떠올라 작곡에 나섰다.
윤 목사의 시에 멜로디를 붙인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져 1946년 4월에 발표된 것이 <어머님 은혜>이다.
노래는 <어린이찬송가집, 1953>에 실려 널리 불렸다.
어버이날과 부모님 회갑, 고희, 팔순, 희수잔치 등의 축하행사 때 빠지지 않았다.
특히 기독교적 색채로 인해 1,2절만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국민애창동요가 되었다.
‘어버이 날’의 유래
‘어버이 날’은 미국에서 시작됐다.
사순절(四旬節) 첫날부터 넷째 주 일요일에 어버이 영혼에 감사하기 위해 교회를 찾는 영국·그리스 풍습과도 이어진다.
1907년 미국의 안나 자비스란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교회에서 흰색카네이션을 교인들에게 나눠준 데서 비롯됐다.
이어 1914년 미국 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은 5월 둘째 주일을 ‘어머니의 날’로 정해 기념했다.
그날이면 어머니가 살아있는 사람은 빨간 카네이션을, 돌아가신 사람은 흰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선물전달 등 행사를 갖고 있다.
우리나라는 1930년 구세군에서 관련행사가 시작됐다.
이승만 초대대통령(1875~1965)이 어머니 주일의 정신을 대중에게도 전한다는 뜻에서 1955년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제정·공포했다.
이듬해엔 국무회의를 거쳐 기념일로 정해졌다.
자녀양육과 생업의 책임이 무거웠던 어머니들을 위로하고 기리다가 ‘아버지의 고마움까지 포함하자’는 여론에 따라 1973년 ‘어버이 날’로 바뀌었다.
어머니 마음 (작사·양주동 작곡·이흥렬)
이 곡은 양주동(梁柱東, 1903~1977)의 시에 감동한 이흥렬(李興烈, 1909~1980)이 곡을 지은 것으로 1939년에 경성방송국의 응모를 통해 <가정 가요 제1집>에 발표되었다.
어머니의 사랑, 헌신과 희생을 노래한 단순한 선율의 1930년대 가곡의 특성을 잘 반영한 곡이다.
이 곡은 1956년에 국무회의(國務會議)를 거쳐 그해부터 매년 5월 8일을 어머니날로 정하자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음악 시간과 방송에서 자주 부르게 됨으로 애창곡이 되면서 국민 가곡으로 자리 잡았다.
1973년부터는 어머니날이 어버이날로 바뀌면서 매해 5월 8일 어버이날에 국민 애창곡으로 부르게 되었다.
어머니 마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리오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 속엔 온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고 부르면 가슴이 메어지는 노래이다.
하나님이 모든 곳에 존재하지 못해 세상에 어머니를 내셨다는 말이 실감나게 하는 노래이다,
이 노래에는 동요나 가곡, 대중가요 등 장르의 구분이 필요치 않으며 3세대를 넘어 4세대, 아니 생명을 넘어 생명으로 이어질 영원성을 지닌 ‘사모곡’이다.
‘어머니의 마음’에 얽힌 이야기
* 이 이야기의 신빙성은 확인할 수 없으나 이런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일제 강점기에 이흥렬(李興烈)이라는 음악의 남다른 재능이 많은 청년이 있었다.
그는 재능이 있는 음악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작곡을 위해 피아노가 없으면 음악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편지를 썼다.
“어머니, 피아노가 없으니 음악공부를 더 이상은 할 수 없어요.
음악에는 피아노가 필수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소자는 음악공부를 이만 접고 귀국하려고 합니다.”
한편 어머니는 혼자 몸으로 유학간 아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가진 것도 없었지만, 조금씩 늘어난 빚만 고스란히 남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다음날 새벽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동네 근처부터 원거리 산이란 산을 모조리 뒤져 쉼없이 솔방울을 긁어모았다.
불쏘시개로 화력이 좋은 솔방울을 팔아 거금 400원(1930년대 쌀 한가마는 13원)을 만들어 아들에게 보냈다.
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그 돈으로 피아노를 샀다.
그래서 '이흥렬' 그가 제일 처음으로 작곡한 노래가 시인이며 문학박사인 양주동님의 詩 '어머니의 마음'이다.
첫댓글 최정미: 저희 교회도 함께 불러보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