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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공학의 실상과 근본 대안
박 병상 생명공학의 정체 흔히 생명공학을 부가 가치를 드높일 과학기술, 굴뚝 없는 산업이라고 칭송한다. 제레미 리프킨조차 21세기는 생명공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일부 생명공학자는 그 말을 인용하여 생명공학이 21세기의 대세임을 은근히 강조한다. 그러나 제레미 리프킨은 생명공학을 예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공학의 암울한 미래를 경고한 것이다. 없던 유전자가 새로 생기거나 있던 것이 없어지는 현상을 돌연변이라 한다. 따라서 종의 경계를 넘어 유전자를 끼워넣는 생명공학은 마땅히 돌연변이 유포 기술이다. 모든 생물 종은 38억년 동안 진화라는 혹독한 역사를 거쳐 지금의 환경에 최대한 적응해왔다. 돌연히 나타난 돌연변이 유전자는 현재 환경에 부적당하다. 그러므로 지금 환경에 악성으로 발현되거나 아니면 침묵할 가능성이 높고, 침묵할 경우 환경 여건에 따라 후손의 세대에 악성으로 발현할 수도 있다.
거대자본이 동원되어야 하는 생명공학은 중앙집중 구조를 한층 공고히 하는 ‘조갈증의 과학기술’이다. 거대자본은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농수축산물을 생명공학으로 개발하여 식량과 기아문제를 해결한 수 있을 것처럼 치장하고 있지만, 사실 이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돈이다. 즉 일부 세력의 이익을 위해 생태계의 질서를 교란시켜 후손의 생태계와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다.
생명공학의 허구 첫째, 유전자조작 식품은 식량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킨다. 지금까지 생명공학은 식량증산을 위한 연구개발을 하지 않았다. 식량이 남아도는 마당에 거대자본이 돈 안되는 분야에 자본을 투자할 까닭이 없다. 대신 몬산토는 '라운드업 레디'라는 이름이 앞에 붙는 씨앗을 개발했다. 자사가 개발한, 독성이 강한 농약인 '라운드업'을 뿌려도 준비가 되어있다는 유전자 조작된 씨앗을, 몬산토가 독점 생산하는 '라운드업'과 한 세트로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다. 이들은 '불임기술'도 마다하지 않는다. 밭에서 씨앗을 직접 받아 다시 뿌리면 싹이 트지 않거나 열매가 맺지 않기' 때문에 농부는 해마다 씨앗을 새로 구입하지 않으면 안된다. 거대자본은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전자조작 농산물은 식량자원의 단순화를 촉진한다. 종자주권을 잃은 세계 농촌은 수천년 이상 전수되어온 전통 농사법과 토종 종자들을 포기하고, 거대자본이 권고하는 방식으로 농약과 화학비료를 뿌리고 유전자조작 씨앗을 파종하지 않을 수 없다. 토종 종자들로 다양성을 이루 있던 농장은 갈수록 단작화 되어갈 것이다. 반다나 시바는 단작은 식량과 식성의 단순화에 그치지 않고 정신과 문화의 단순화까지 몰고 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정 지역에서 개발된 유전자조작 농산물은 환경조건이 다른 지역에서 어떤 결과를 빚을지 거의 예측할 수 없다. 실제로 환경이 다른 농토에 심었다가 뜻하지 않은 피해가 나타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유전자 발현은 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돌연변이 유전자가 지금 현 지역예서 별 문제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앞으로 다른 지역에서도 괜찮을 것이라는 단정을 할 수 없다. 몇 세대가 지나간 뒤, 또는 다른 환경에서 악성으로 발견할 수 있으며, 사람을 포함한 다른 생물에 전이되어 나타날 수도 있다.
현재, 칼로리로 따지면 지구상에는 식량이 남아도는 실정이다. 그중 상당량은 그대로 버려지거나 가축이 대신 소비한다. 쇠고기 1킬로그램에 곡물 9킬로그램, 돼지와 닭고기는 1킬로그램에 각각 5킬로그램과 3.5킬로그램 정도의 곡물이 소비된다고 한다. 또 달걀이나 우유 1리터를 얻으려면 곡물 4리터 정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렇게 생산된 단백질은 가난한 사람들의 몫이 되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다. 따라서 분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생명공학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쿠데타"라고 제레미 리프킨은 혹평하고 있다.
둘째, 의료의 불평등 구조를 심화시킬 것이다. 미국의 프로 농구선수였던 매직 존슨은 결국 에이즈에서 해방되었지만 인도 봄베이 사창가에는 오늘도 10대 창녀들이 에이즈로 줄줄이 죽어나간다. 에이즈로 죽는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굶주림에서 벗어나려고 사창굴을 찾아오는 그들, 그들에게 에이즈 치료의 시혜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부모가 불임이라면, 아이를 복제할 수는 있지 않을까?" "아이를 둘씩이나 낳은 당신은 불임부부의 고통을 모를 것이다"라고 일부 불임클리닉의 생명공학 관계자들은 엄숙하고 고상한 표정을 짓고 나온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했을까? 과학기술을 신봉하는 일종의 종교단체인 '라벨리안 무브먼트'에서 설립한 '.클로나이드'라는 인간복제회사는 20만달러에 고객을 모집하고 있다.
개구리의 머리 이식실험에 성공한 과학기술은 '가치중립'을 앞세우며 머리 없는 몸뚱이만을 성장시키는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몸뚱이를 속성으로 키우는 실험도 시도되고 있다. 낙태와 제왕절개가 죄의식 없이 시행되는 생명경시 풍조와 몸뚱이 복제기술이 만나면 과연 어떤 '가치중립'적인 작품이 구상될 것인가.
환경이 열악해지자 장기가 나빠지는 환자가 급증한다. 기증자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 장기 이식용 돼지를 개발하면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희망이 안겨질 것인가. “반대만 일삼는 혹자들은 거부반응이나 돼지 바이러스 전염을 염려하지만 눈부신 과학기술은 거부반응을 무력화시키고 바이러스를 퇴치할 것” 이라고 장담한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거부반응은 제거해야 할 군더더기에 불과했던 것일까.
수정 후 14일 이전의 수정란을 ‘세포 덩어리’로 규정하여 확보한 간세포 복제기술에 ‘휴먼게놈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가미할 경우, 최첨단 기능이 부가된 자신의 장기를 주문하는 시대가 장기 이용 돼지를 ‘명퇴’시킬 것으로 예견하는 생명공학자도 있다. ‘그림 그리는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혹세무민은 정말 곤란하다. 질병의 원인인 악화된 환경은 그대로 둔 채, 그로 인해 발생하는 ‘말초적 치료’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가능성이 희박한 돌연변이 기술을 앞세우는 행위를 양심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엄청난 자금을 투여해야 연구개발이 가능한 생명공학이 어떤 성과를 거두게 된다면, 그 혜택은 당연히 지불능력이 충분한 계층에게부터 돌아 갈 것이다. 따라서 부유한 자들이 밀실에서 생명공학과 관련된 정책을 움직일 때, 사회적 약자들은 의료비가 충분히 하락할 때까지 그 혜택을 유보해야 한다. 마침내 그 차례가 돌아올 때면, 인위적으로 조작된 돌연 변이 유전자가 만연하여 환경은 더욱 악화될 것이며 기존 생명공학의 성과는 이미 '구닥다리 기술'이 되어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일부 계층만이 한시적 혜택을 만끽하는 대가로 환경을 더욱 악화시키고 더욱이 그 가능성조차 확실하지 않은 생명공학 기술에 기대를 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연한 질병을 근원적으로 감소시키기 위해 환경을 정하고 복원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생명공학에 투자되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생각한다면 이 길도 충분히 고려할 만한 것이다.
셋째, 생명공학이 생태계를 풍요롭게 한다는 주장은 차라리 코미디이다. 뉴질랜드 생명공학 연구진은 우리보다 먼저 체세포동물 복제에 성공한 기술력을 십분 발휘, 도도새를 복제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도도새만이 아니다. 매머드를 빙하에서 발굴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떤 생명공학자는 마치 영화 '쥐라기 공원'을 연상케 하는 제안을 했다고 하고, 심지어 네안데르탈인을 복제하자는 안도 대두되고 있다는 소식이다.
예정대로라면 올 7월, 백두산호랑이의 복제개체가 태어날 것이라 한다. 팬더를 복제한겠다던 중국에서는 산양 복제를 먼저 시도했던 모양인 태어난 지 몇시간 만에 죽었다고 외신은 전한다. 아직 실패 확률이 휠씬 높은데 백두산호랑이는 과연 건강하게 태어날지 적정이다.
그런데 이렇게 태어난 백두산호랑이는 결코 백두대간으로 보낼 수 없다. 야성을 잃은 호랑이는 동물원 신세를 면치 못한다. 멸종 위기종은 복제한 개체 수만큼 멸종이 연장될 수는 있어도 생태계 회복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의 생태계, 그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남아 있는 동식물들이라도 제대로 보전하는 것이 훨씬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생명공학자들이 어서 인식했으면 한다.
특정 농약에 저항성을 갖는 유전자조작 농산물은 농약을 덜 뿌려도 되므로 환경에 이로울 것이라는 궤변도 들린다. 그런데 우리의 서글픈 환경을 농약을 덜 뿌리기만 해도 회복될 정도로 건강하지 못하다. 파종 전의 농약살포만으로 충분하다는 설명서를 믿고 "기왕이면 확실하게" 뿌리고싶은 충동심리는 둘째치고 농약소모가 많아야 돈을 벌 농약회사들이 적량 생산판매를 고수할 리 만무하다.
특정 농약 저항성이 있도록 조작된 유전자가 꽃가루에 실려 잡초에 전이될 경우, 그 잡초도 농약을 거뜬히 이겨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위 슈퍼잡초가 생겨났다. 특정 해충 저항성 농작물을 심자 뜻하지 않은 곤충이 몰살한 예도 있다. 경쟁사보다 먼저 상품을 생산하고 싶은 과학기술은 자료의 비공개는 물론이고, 연구개발 과정에서 규명되지 않은 결함을 애써 무시한다.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논하자고 떼를 쓴다. 그러나 유전자를 다루는 생명공학이라는 과학기술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살아있는 유전자를 다루는 기술인 까닭에 생각지 못한 경로를 거쳐 치명적 문제가 나타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환경에 불리할 경우 침묵하는 유전자의 특성상, 지금까지 생명공학으로 인한 피해사례가 구체적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단 문제가 드러날 때의 사태는 걷잡기 어려울 것이다. 1997년, 덜 익힌 쇠고기를 즐겨 먹었던 대부분의 영국인은 광우병 때문에 일제히 경악했다. 자신은 예외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광우병은 한 예에 불과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키 자기복제하며 유전되는 돌연변이 유전자의 정체는 아직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생명공학이 생태계를 풍요롭게 한다는 생명공학자들의 논리는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그리고 그 코미디를 코미디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는 심히 걱정스러울 정도이다.
시민의 힘으로 거부해야 할 생명공학
미국의 유아식품 회사인 거버는 10억달러를 들여, 유통중인 유아식을 모조리 회수해야 했다. 애초 발뺌하려 했지만, 질의서를 보낸 그린피스가 공개검사를 실시할 것이 뻔하고, 거짓이 드러날 경우 소비자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유아식만이 아니라 힘들게 개발한 모든 상품의 시장을 경쟁사에 넘겨주지 않으면 안될지도 모른다. 부랴부랴 이유식을 회수한 거버는 앞으로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네슬레, 유니레버와 같은 유아식 회사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홍콩과 일본 시장에도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천명하였다. 일본의 맥주 회사들도 앞다투어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넣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최대의 슈퍼마켓인 테스코에서 유전자조작 농산물과 식품을 철수시키기 시작한 이래 세계 각국 상당수의 식품 회사에서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취급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소비자를 위하는 따뜻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기업 속성상 불가피한 '항복 선언'이었다.
그런데도 유돌 우리 사회는 조용하다. 환경단체의 질의서에 대해 기업들로부터 "표시제가 실시되면 규정에 따를 예정"이라는 무성의한 답변이 왔을 정도다. 맥주 회사나 콩 음료 회사도 비슷한 식이다. 우리 나라에 촉수를 내민 다국적 기업이나 우리 식품회사들만이 '특별히' 비양심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경찰이 묵인하는 가운데 운전자조작 농산물 시험재배 농장을 불사르는 행동, 운전자조작 농산물에 호의적 언사를 한 수상관저 앞에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트럭으로 쏟아붓는 과격한 행동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목소리와 행동이 상대적으로 '얌전'하다고 그들은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환경․단체, 여성 및 소비자단체, 종교단체들이 모여 1998년 발족한 '생명안전 ․윤리연대모임'과 농산물, 생산자, 유통 및 소비자단체들이 통해 올해 결성한 '유전자조작식품 반대 생명운동연대'에서 유전자조작 농산물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킨 데 힘입어, 우리 나라에서도 유전자조작 농산물과 식품에 대한 법적 표시제가 추진되고 있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비의도적으로 함유되었을 경우, 그 허용비율을 시민단체가 요구하는 1%에 크게 못 미친 3%로 하는 안이 채택되고 모든 유전자조작 농산물을 대상으로 표시제를 시행하라는 시민단체의 요구와 달리 콩과 옥수수를 우선 실시하려는 정부의 안이 받아들여졌지만, 유전자조작 여부를 밝히는 표시제의 법적 근거는 일단 확보한 셈이다.
정부는 표시제를 단순히 소비자와 '알 권리' 차원이라고 강변한다. 이는 '안 먹을 권리'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와 큰 시각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차이는 우리 나라만의 사정이 아니다.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나라의 정부 시각도 우리와 대체로 비슷하다. 생산자 또는 유통업자의 로비 하에 있는 미국정부는 자국의 이익에 충실한 식품의약국을 동원하여 안전하다고 강변하고, 유럽과 일본정부도 우리 정부와 마찬가지로 WTO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유전자조작 농산물로부터 확실하게 보호받으려면 소비자가 나서지 않으면 안된다. 유전자조작 농산물 수입에 문제를 제기하는 척하다가도 자국의 개발한 유전자조작 농산물은 환대하는 정부들의 이중적 자세를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정부를 믿을 수 없다.
유전자조작 농산물과 식품의 위험성을 널리 인식시키고 유통현황을 감시하는 일, 양심 있는 전문가와 손잡고 우리의 유전자조작 농산물 연구현황을 감시하는 일을 수행해야 한다. 나아가 이번 기회에 우리 체질에 맞고 우리 농산물 먹기를 생활화하고, 되도록 제철 제고장 음식 먹기 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2000년 1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국제거래를 안전 관리하려는 '생명공학 안전성 의정서'가 채택된 것을 계기로 정부의 부서들은 후속 조처를 서두르고 있다. 빗발쳤던 시민단체의 요구에 미온적 태도로 일관하던 정부는, 갑자기 부처간 주도권 다툼을 벌이며 떨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부를 비롯하여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 농림부와 같은 해당 부처들이 긴급히 내놓은 안은 안타깝게도 시민 참여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시민의 안전보다 부처 이기주의에 매몰된 서글픈 단면이 아닐 순 없다.
이전 추세대로라면 2000년 들어 세계 콩 재배 농토의 90%에서 유전자 조작 콩이 재배되어야 하나, 실제로는 오히려 감소하였다고 한다. 이는 소비자들의 외면에 기인한 것이다. 다소 성급한 감은 있지만, 유전자조작 식품은 결국 사라질 것으로 예단하는 사람도 있다, 유전자조작 식품이 결코 소비자나 생산자를 위한 기술이 아닌 것이 확실하고, 공급자들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인류의 수명연장'과 '불치병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료복지의 허무맹랑한 그림을 앞세우는 생명복제 기술이다. 결코 보편적이지 못할 것이 분명한 기술을 마치 누구에게나 곧 혜택이 돌아갈 기술인 양, 그리고 반대론자들에게 발목을 잡혀 뒤처지면 21세기의 주도권을 영원히 잃는 것인 양 일방적으로 광고를 해대고 있다. 그 바람에, 질병발생의 근본원인을 제거하려는 성의 있는 노력은 뒷전으로 밀리고, 돌연변이 유전자를 생태계 전체에 만연시킬 수 있는 천박한 논리가 분별없이 유포되고 있는 것이다. 생명공학의 이면을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서 다음 세대의 생명과 생태계가 심히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근본 대안을 찾아서
두부파동 이후 우리 콩 값이 뛰고 우리 콩으로 만든 두부가 잘 나간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 농부들이 우리 콩 재배에 열을 올린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에 반해, 우리 농산물 값이 오르면 서민들은 위험하다는 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는 현상이 우려된다고, 시민단체에 화살을 던지는 생명공학자들이 있다. 언제부터 그들이 서민들을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위험성은 그 음식을 먹은 사람에게서부터 발현할 수 있겠지만, 위험징후가 보일 때면 모든 계층의 인간사회는 물론 생태계 전반에 치명적인 위기가 이미 도래하고 있음이 분명할 것이다. 단지 돈 없는 서민만의 문제일 수 없다.
우리 농촌에서 우리 콩을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한다면? 그래서 콩의 자급구조가 크게 회복되기 시작한다면? 수입해야 하는 콩기름 대신 자급이 가능한 들기름을 사용하기 시작한다면? 기름에 튀기는 외래음식을 자제한다면? 수입 사료에 의존하고 식량 자급 구조를 크게 왜곡하는 기업형 축산업과 소품 종 다량 생산을 원칙으로 하는 환금작물 위주의 에너지 집약형 농사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의 가족농 또는 소농체제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채식 위주의 전통식단을 회복하고 고기를 적게 먹는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릴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생산력주의에 반기를 든 시민들이 환경위기를 반성하고, 생태 지향적인 삶을 실천하려는 귀농인구가 늘어가는 현실에서 희망을 엿본다.
자식들 집을 잘 다녀와 저녁상 거뜬히 비운 어르신이, 주무시는 듯 운명하셨다는 이웃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집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잘 놀던 아이가 집 앞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소아 백혈병이나 심장병으로 목숨을 잃을 때, 그 부모는 가슴이 미어지고 세상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과학이 발달하고 의학기술이 향상될수록, 사고의 위험은 높아져 당해야 하는 사람은 억울하다. 왜 내게 이런 일이, 특별히 잘못한 없는데, 다른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데 ‥‥돈이 없어, 빽이 없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상대적 박탈감으로 화가 치민다.
독특한 지역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생태계가 살아있던 시절, 건강하게 살다 행복하게 죽는 아름다움 삶이 보편적이었다. 당시 장례는 일종의 축제였다. 호랑이에 물려가거나 벼락에 맞는 사고가 발생해도 “다 내 탓이려니" 하며 자신의 행실을 먼저 나무라곤 했다. 그런 사회에서 상대적 박탈감이나 억울함으로 마음 상할 일은 없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그 수혜와 피해자가 극명하게 갈라지고 의료기술의 발달로 상대적 박탈감이 잉태된 것이다. 즉 사회정의에 반하게 된 것이다.
불확실한 기술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제거하는 편이 근본적이다. 늘어나는 인구와 기아문제는 화폐경제의 사슬을 풀고, 자급자족 공동체를 복원시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생명공학은 필요한 과학기술인가. 생태계를 재단한 인류는 생태계의 수명을 강제로 덧대어 자신의 수명을 늘여나갔다. 배타적인 위생과 영양으로 건강수명을 60년 정도로 연장시킨 인류는 생태계로부터 얻은 약에 의존하여 20년 이상, 자신의 수명을 덤으로 연장시키고 있다. 21세기의 총아라고 일컫는 생명공학은 건강수명을 200년 이상 연장시킬 것으로 장담하고 있다. 어디에서 인류의 수명을 공출하려는 것인가. 피폐해진 생태계는 더 이상 인류에게 얹어줄 수명이 없다.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 원시림 파괴와 사막화에 따른 기상이변은 그를 웅변한다. 생명공학은 누구의 수명을 빼앗으려 하는가.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후손의 생명이다.
생명공학은 대안일 수 없다. 대안은 생태사회에 있다. 가진 자의 욕심을 한시적으로 채워줄 뿐인 생명공학은 후손은 물론, 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늙은 뒤의 자신의 미래에도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사랑하는 후손의 건강을 위해, 따뜻한 이웃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 자신의 노후를 위해, 지금은 생명공학을 거부할 때다. 인류와 생태계 모두는 21세기는 물론, 22세기 한참 이후에까지 건강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이며, 생명안전․윤리연대모임 사무국장으로 수고하고 있다. 이 글은 녹색평론 제53호에서 인용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