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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식의 시세계
―고향의 마음, 조화와 일치의 삶
이은봉(시인, 문학평론가, 광주대 문창과 교수)
시인 고증식은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다음, 원주로 옮겨 고등학교(원주고)를, 대전으로 옮겨 대학(충남대 국문과)을 나왔다. 다른 많은 젊은이들처럼 군에서 전역한 후에는 그 역시 얼마간 대도시의 살림을 경험한다. 하지만 부산에서 산업체 고교 교사를 잠깐 지낸 뒤부터 지금까지는 벌써 10여 년을 넘게 밀양의 한 고등학교(밀성고)에서 줄곧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강원도에서 태어나 충청도에서 학업을 마치고 잠시 대도시의 생활을 경험한 뒤 내내 경상도에서 직장을 얻어 살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떠돌이로 살아온 그의 삶은 말할 필요도 없이 그의 시세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시는 시인의 살아 있는 경험 속에서, 일상의 삶 속에서 구체화되기 마련이고, 그것은 고증식 시인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밀양에 안착한 그가 본격적으로 시심을 가다듬어 창작의 길로 나서게 된 것은 1997년 5월에 작고한 이재금 시인을 만나면서부터이다. 밀양문학의 중흥을 위해 함께 일을 도모하던 1988년 무렵 고인은 고증식 시인이 근무하던 밀성고와 같은 재단인 밀성여중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고인과의 이러한 인연이 그로 하여금 타향살이의 고달픔을 딛고 용기 있게 시의 길로 나가도록 한 것이다.
그 이후 고증식 시인은 고인과 형제간을 방불할 정도로 밀착되어 밀양문학의 중흥을 위해 노력한다. 나이 차이는 많이 났지만 밀양문학의 디딤돌이었던 고인과는 가장 실질적인 동지 관계였던 셈이다.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벌써 12호 째나 {밀양문학}을 간행하는 일에 앞장을 서오고 있는 것이 그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고인과 관련된 추모사업에도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고 일하고 있다. 추모문학의 밤을 개최하는 일은 물론 추모사업회를 결성하는 일에도, 유고시집을 간행하는 일은 물론 시비를 세우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여 애를 써온 것이 그이다.
고인에 대해 시인 고증식이 갖는 추모의 정은 그의 시를 통해서도 익히 확인할 수 있다. [강물에 띄우는 편지] [작별] [밤길]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작별]은 작품 자체로도 적잖이 성공을 거두고 있어 자못 관심을 끈다.
어떻게 손길 거두셨을까
마지막 숨결로 어루만지던
고향집 뒤란 호박 모종들과
뒷동산 망울지는 매실들
아롱아롱 눈물로 매달아 놓고
어떻게 돌아 누우셨을까
한평생 바람을 불러
온몸으로 맞으시더니
못 다한 사랑 노래
뜨거운 가슴에 묻고
이젠
첫 걸음마 자죽자죽
엄마 품 찾아가 안기셨을까
노랗게 떠다니는 들꽃들 사이
소쩍새 울음 저리도 아득한데
이 시에서 "손길 거두"고 "돌아누"운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이재금 시인이다. 군더더기의 감정을 털어 내고 고인의 생전의 벗이었던 "고향집 뒤란 호박 모종들과/뒷동산 망울지는 매실들"을 생생한 이미지로 드러냄으로써 이 시는 일정한 미적 성취를 얻고 있다. 작품 자체만으로 보면 추모의 마음을 객관화시키고 있는 시인보다 추모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고인의 삶이 훨씬 대단하게 생각되기도 한다.
이들의 관계가 이처럼 각별했던 것은 무엇보다 고증식 시인의 타고난 성품도 큰 몫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자신이 매사에 정성스러움과 지극함을 잃지 않는 참으로 어진 마음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떠돌이로 이곳저곳 부랑하는 삶을 살다보면 어진 마음을 지니기가 결코 쉽지 않기 마련이다.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곳곳의 상황에 재빨리 적응을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강자의 편에 서서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합리화하는 비정을 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그가 매우 심지가 굳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때의 심지가 굳고 단단한 사람이라는 말을 강철의 심장을 지닌 의지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비판이나 야유의 독한 마음보다는 기본적으로 동정이나 연민의 따뜻한 마음으로 사물과 세상을 감싸안고자 하는 사람이 그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을 비판이나 야유의 마음을 그가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설령 비판이나 야유의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삶에서는 항상 그것을 사랑의 마음으로 걸러내고 있는 것이 시인 고증식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바람 부는 벌판에
한 점 억새로나 나부낄 일을
세월의 강물 따라
한 점 물살로나 흐를 일을
사람들은 발 밑에
산을 두어야 하고
사람을 두어야 하고
―[사자평에서] 전문
그가 보기에는 "바람 부는 벌판에/한 점 억새로나 나부끼는 일"이, "세월의 강물 따라/한 점 물살로나 흐"르는 일이 사람살이 바른 자세이다. 말하자면 항상 자연의 질서와 함께 하는 것이 그가 파악하는 올곧은 삶의 태도인 것이다. 하지만 부풀려진 욕망에 쫓겨 "발 밑에/산을 두어야 하고/사람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다. 그러고 보면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이러한 욕망을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의 어조나 분위기로는 비판적 정신이 일반적으로 갖는 차갑고 시린 맛, 곧 독한 맛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욕망조차 그가 따뜻한 사랑의 마음으로 감싸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가리켜 그는 직접적으로 "한 그루/그리운 나무를 심어/날마다 물주고/새롭게 눈 틔우는 설레임"([사랑])이라고 말한 바도 있다. 사랑을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달리 말해 식물의 이미지로 상상하는 것은 그가 아직도 온전하고 순수한 자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자본을 중심으로 마구 뒤얽혀 있는 오늘의 이 시대에도 이처럼 맑고 깨끗한 자아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이 그이다. 이러한 그의 자아는 그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자전거 이야기] [스승의 날] 등의 시에 의해서도 충분히 확인이 된다. 전자의 시에는 속도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재편되고 있는 현금의 사회에서도 '자전거'의 완만함을 잃지 않으려는 마음이, 후자의 시에는 스승의 날 제자들이 베풀어주는 감사의 행동들에조차 마냥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형편없이 타락해 있는 오늘의 이 사기사회에서도 여전히 그는 무구하고 순결한 마음을 지고의 가치로 받아들이며 연마를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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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러한 일들은 그의 마음이 매우 여리고 선하다는 것을 잘 드러내준다. 마음이 매우 여리고 순하다는 것은 자신의 인지영역 안에서 그가 끊임없이 무엇이 진실이고, 진리인가를 되묻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진실과 진리의 여부를 되묻는 일은 참다운 중도를 찾는 마음, 가장 보편적인 가치를 탐구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 가는 일과 결코 다르지 않다.
이러한 마음은 우선 그의 [대출 보증]에 의해 확인이 된다. "비싼 시외 전화 잦더니/대출 보증을 서 달"라는 "고향 같은 친구 녀석"에게 "일손 잡히지 않"고 "마음 자꾸 뒷걸음치는" 중에도 결국 "도장 눌러 주고/술 한잔 얻어먹"으며 느끼는 감회를 이 시는 담고 있다. 단지 우정만을 위해서라면 대출 보증의 면에서는 차라리 모르는 체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며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시인 고증식이다.
본래 그는 항상 타자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다. 특별히 욕심을 비워서가 아니라 생래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는 사람이다. 이는 우선 그의 시 [그대 저 들에]에서 확인이 된다. 이 시에서 그는 첫 출근을 하는 '너'를 세계의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한없는 염려를 보내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마음은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배려하는 데서 가능해진다.
타자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갈등이나 대립보다는 조화나 일치를 꾀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시 [싸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누구와 "싸운 다음 날 아침"이면 상대방이 이내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원천적으로 그가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얘기이다. 그의 자아가 지향하고 있는 이러한 면은 자신의 미래를 투영하고 있는 다음의 시에 의해서도 익히 확인이 된다.
한 평생
그를 싣고 다니던 자전거가
문간에 선 채 녹슬고 있다
쓸만한 안장과
멀쩡한 두 바퀴가
저녁 햇살을 쏘아올리면서
보란 듯이
―[정년 퇴직] 전문
이 시에서 그는 미래로 달려가 이미 정년 퇴직을 한 뒤의 시각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있다. 미래의 자아가 되어 정년 퇴직을 하기 전까지 자신이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차분히 응시하는 시각을 취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그로서는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온전하고 안정된 미래의 자아의 현존을 그려내고자 한 셈이다. 특별한 대립이나 갈등에 시달리지 않고 평화롭게 노년에 이르고 싶은 그의 마음이 잘 암시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처럼 그는 세계 일반과의 관계에서 조화와 일치, 화합과 합일을 모범적 가치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세계의 모든 존재를 아무런 의심없이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작품 [타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래도 "속물은 싫어서" "한 팔마저 잘라내는/또 다른 병신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너무도 똑똑하여" "하늘을 찌르는 탐욕 속에/낡은 깃발 되어 박"([풀밭엔 올해도 봄비 내리고])혀 있는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이 염치와 순리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이러한 자아를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세계의 일반과 비타협적으로 되기 쉽다. 따라서 자신이 추구하는 진실이 왜곡되고 어긋날 때 그가 막막한 외로움에 젖게 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자신의 "삶을 받쳐주던 사람들/하나 둘 서둘러 떠나고" 없는 "찬 들판 맞바람 앞"에 서서 그가 "몸 하나 가눌 길 없"([늦가을 저녁])음을 깊이 자각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입장에 설 때 좀더 잘 이해가 된다. 때로는 그도 "갈 곳이 없"는 마음이 되어 "텅 비어 버"리는 느낌에 빠져들고는 하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앉아/돌멩이를 던지"며 "하늘 내려와/산 그림자 더불어 흐르는 거기/뛰어들어/강물이고 싶"([강가에서])어 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를 지니고 있는 그라면 조그만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면도를 하다가 "너무 갉작대기만" 해온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아, 나는 너무 작은 일에만 조바심 치며 살아왔구나"([면도를 하다가]) 하며 깊은 회한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울음 마냥 깊어지면/저렇듯/홀로 청청할 수 있을까"([나무]) 하며 나무를 빗대어 자기 자신의 의지를 가다듬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이처럼 종종 동요하는 감정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그가 무욕의 청정한 삶을 추구해오고 있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세속적인 인간의 오염된 자아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온전하고 건강한 자신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사람이 그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조그만 일에도 이내 자족하는 마음으로 구체화되는 가운데 드러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겨울 볕 따사로운 날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다
일개미처럼 살다가
이런 날도 있구나
햇살 찰랑이는 어깨 위로
마흔의 나이가 내려앉는다
―[망중한] 전문
이 시에는 그다지 크지 않은 일에도 이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그의 성정이 잘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개미처럼 살다가" 어느 "겨울 볕 따사로운 날/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며 "이런 날도 있구나" 하며 젖어드는 자족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라고 할 것이다. 일거리에 쫓기며 평생을 떠돌다 보면 이러한 망중한이 더없이 고맙게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다.
고향을 떠나 타향을 전전하다 보면 아무래도 긴장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가슴 한 쪽에는 항상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도사려 있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야 된다는 의지가 그의 현존을 거듭 채찍질해대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정서적 특징은 그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출신이다. 그곳을 떠나 경상도 밀양에서 몸을 풀고 있는 지 오래지만 이러한 객관적 조건이 여전히 그의 시적 정서를 결정하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다. 그의 시에 드러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심리적 특징은 고향이나 가족들과 관련하여 발현되고 있는 질긴 그리움이다.
그의 시에서 고향이나 가족은 이처럼 언제나 그리움의 대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이 때의 그리움은 기본적으로 인류가 태초에 경험했던 원초적인 세계에 대한 회귀 의지로서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이는 특히 "고향 길 떠나는 날" 그가 끝내 "새벽잠"을 자지 못하는 것에서, "어둠을 떠밀며/온몸으로 만나는 하늘"과 관련하여 "우유빛 안개로 내리는 설레임"([귀성길])을 발견하는 것에서 확인이 된다.
뿌리뽑힌 존재로 타향에 거주하고 있는 시인 고증식에게 고향이 핍박이나 억압의 공간으로, 나아가 일탈이나 탈출의 공간으로 자리하지 않는 것은 짐짓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에게는 언제나 평화와 안락의 공간, 마침내 회귀하지 않을 수 없는 복락의 공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객지에서 떠돌이의 삶을 전전해온 시인 고증식에게 고향의 공간이 이처럼 항상 아름답게만 상상되고 있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이를 가리켜 현실 정합성이 없는 낭만적 치기 운운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에게는 고향에의 회귀의지 자체가 순결하고 무구한 자신의 삶을 지켜 나가는 심리적 원동력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면 구체적으로 귀향을 실현하기 위해 이미 "태어나 자란 곳에/집 한 칸을 사"서 "십 수 년 허물어진 가슴/다리 하나 놓"([귀향을 꿈꾸다가])은 것이 그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사실 자신의 진실한 꿈을 실현하기 위한 조그만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 "아버지 무덤가 어디쯤 작은 집 하나 짓고 그 옆에 손바닥만한 텃밭이라도 한 뙈기 마련한다면 어릴 적 떠나보낸 노랑나비 한 쌍과 호박벌 몇 마리 붕붕거리며 찾아와 주리"([내 기다림은]) 라고 하며 오래 전부터 귀거래사를 불러온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고향의 세계를 이렇게 복락의 공간으로 설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도시보다는 자연이 인간의 근본적인 질서에 좀더 가까운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데서 근거한다. 도시의 인위적 시간보다는 농촌의 자연적 시간이 인간 본래의 생체 리듬에 훨씬 근접해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이다. 그로서는 세계와의 관계에서 아무런 괴리도 존재하지 않았던 유년의 시간, 원시의 시간을 나날의 일상에서 실제로 구현해 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의 시에서 그가 시골 마을의 저녁 풍경을 한 폭의 정갈한 수채화로 그려내고 있는 것도 사실은 이러한 의식지향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노을을 물고
멧새 한 마리 돌아오자
나뭇가지 잠시 몸을 뒤척여
귀가를 맞는다
노을진 자리마다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노오란 산수유꽃
―[환한 저녁]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시골집 툇마루쯤에 앉아 노을이 지는 산수유꽃 가지에 내려앉는 "멧새 한 마리"를 차분히 응시하고 있다. 이 때의 화사하고 밝은 마음에 비추어지는 풍경을 한 순간의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 이 시인 셈이다. 아무런 갈등도 없이 이러한 자연 공동체 속에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영위하는 일은 사실 더없이 아름다운 일이다. 구체적인 일상의 관점으로 그것이 비록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더라도 물론 이는 마찬가지이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환상을 갖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깨어 있는 행복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의 시에서 고향의 세계가 이처럼 아름답게 노래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곳이 아직도 가족들 전체의 활기찬 생활의 공간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가족들이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고 격려하는 상생의 관계로 존재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의 시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이내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전이되는 것은 따라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아직도 고향 마을에 어머니와 형님, 그리고 아우가 실제로 모여 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심리적 현존이 좀더 잘 이해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서 이들 가족은 거의 대부분 매우 생생하게 전경화되어 있다. [아버지 생각] [아버지의 땅] 등의 시에 따르면 아버지는 이미 작고한지 오래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황혼] [칼국수] [빈방] [어둠 속의 연가] 등의 작품에 의하면 연로하신 어머니는 벌써 상당한 기간 병환으로 누워지내는 것으로 추측이 된다. 작품의 양만으로 보면 그 역시 다른 여러 시인들처럼 아버지보다는 어머니로부터 좀더 많은 시적 영감을 얻고 있는 셈이다. [체념] [우리 누나] [가을 숲에서] [당신이 집] [내 안에 파랑새] 등의 작품이 씌어지는 과정을 보면 자궁암으로 투병 중이던 누나는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만 듯하다. 그에게 있어서 누나는 어머니 못지 않게 많은 시적 영감을 주는 존재였음을 잘 인식할 수 있다. 그밖에도 [중심잡기]에서는 큰형의 모습을, [마음밭]에서는 여러 형제들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가족사의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이다. 가족들에 대한 그의 집착은 물론 이러한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소가족의 면면들뿐만 아니라 핵가족의 면면들, 다시 말해 처와 자식들도 그의 시에서는 중요한 시적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아들 한규는 물론이거니와, 딸 원영이, 그리고 아내까지도 그의 시의 핵심 소재로 등장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 기다림은] [겨울 밤] [한규 옆에서] [희망] [봄밤] 등의 작품이 이들 핵가족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예이다. 이들 작품은 가족 공동체와의 애틋한 체험을 담고 있어 곡진한 정겨움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그의 시들 중에는 민중의 삶을 연민과 해학의 시선으로 포착하고 있는 작품도 상당히 발견되고 있다. [할아버지 빈터]의 "젊어서 권투했다는/앞집 할아버지", [밀양 사람들] 연작의 명물집 할머니, 송백댁, 하주사 등이 그 예이다. 그러한 면은 당대를 풍속화를 지향하고 있는 [내 친구 택수], [선산 소나무] 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고증식 시의 적잖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제로 여기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그가 몸담고 있는 교육현장의 체험을 다룬 작품들이다. [너희들의 교과서] [티없는 풍경] [야간보충수업] [처음처럼] [상수 휴학하던 날] [봄은 그렇게 왔다] 등이 그 구체적인 예이다. 이들 시는 심미적인 즐거움보다는 교사로서 그의 사심 없는 자세와 결의, 그리고 그것과 함께 하는 사랑의 정신 등을 살피는 데 오히려 적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봄은 그렇게 왔다] [티없는 풍경] 등의 시에 드러나 있는 교사로서의 개방적 자세는 아직도 전근대적인 면이 적잖은 교육현장을 생각하면 자못 돋보이는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들 시의 일부의 경우 미적 성취의 점에서 보면 크게 두드러진 성취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시적 진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소재나 표현에서의 신선함을 찾기가 어렵고 과도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 없지 않은 데서 이는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물의 이미지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가운데 몰개성을 이르고 있는 작품들이 좀더 심미적인 성취를 얻는 것은 그의 시라고 하여 예외가 아니다. 탈자아의 형상들이 상대적으로 상상력을 폭넓게 자극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섣불리 개입된 자아가 군더더기의 너스레를 떨거나, 불필요한 감정을 지나치게 피력할 경우 좋은 시가 되기란 참으로 어렵다.
객관적 이미지의 투사와 그에 따른 풍경의 창출을 통해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은 현대시 창작의 아주 일상적인 방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풍경의 주요 내용으로 일상의 정겨운 사람살이를 포섭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그의 시에서도 주관적 감정을 차단하는 가운데 주변의 일상을 하나의 객관적 풍경으로 제시하는 작품들이 대체로 성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이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좋은 작품의 예이다.
시어머니 누워지내는 동안
요강을 부시러 나온 며느리의
하얀 목덜미 서늘하다
밤새 쌓인 눈 위에
알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
그녀가 이마 위에 손을 얹어
하늘을 우러르는 동안
피어오르는 김발 속을 걷는
퀭한 눈길 하나
―[풍경] 전문
이 시는 "누워지내는" "시어머미"를 모시는 "며느리"가 "밤새 쌓인 눈 위에" "요강을 부시러 나"와 보여주는 몇몇 행동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시를 가리켜 한갓 작은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시어미에 대한 며느리의 지극한 정성과, 그러한 정성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의 "퀭한 눈길"이 불러일으키는 미적 기쁨을 미처 간과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다. 이 때의 기쁨은 당연히 시인에 의해 치밀하게 계산된 여백으로부터 나온다.
풍경의 선택이 곧 세계관의 선택이라는 말은 이제 하나의 상식에 속한다. 풍경 안에 형성되는 이미지들이 이미 시의 주요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시인의 세계관은 이러한 방식으로 표출될 때 좀더 설득력을 지니는 법이다. 화려한 수사를 동반해 억지로 주장되는 진실은 오히려 허위이기 쉽다. 그것이 설령 불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타자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깨어 있는 독자라면 적극적으로 반발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오늘의 독자들은 시적 풍경 속에 틈입되어 있는 일상의 정겨운 사람살이에 대해서조차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주체의 개입 없이 객관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는 그의 시의 대부분이 사람보다는 사물을, 즉 자연이나 생명을 대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이에서 연유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서도 이들 작품의 경우 대부분이 자연 혹은 생명의 이미지를 중심 대상으로 포착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이 좀더 신선한 이미지와 정화된 정서의 충격을 주리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이러한 시각을 선택하고 있는 작품들에 이르러 그의 시는 비로소 제대로 된 심미적 성취를 얻는다. [연륜] [봄비] [경칩] [波紋] 등이 앞에서 인용한 시 이외에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작품들의 예이다. 아래에 그 몇 편을 제시하며 여기서 글을 맺는다.
대추를 널어 말리다가
햇살 품을수록
주름살 깊게 패이는
고귀한 생명을 본다
―[연륜] 전문
달이 뜬다
달빛에 안겨
호수는 문을 열고
더운 숨결에 달아
물고기 떼
잠 설치고 있다.
―[波紋]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