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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영화였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무더운 이 더위를 통쾌한 액션 영화로 풀어 보자며 개봉한 영화들 중에 평이 꽤 좋은 영화가 있다고 막무가내로 영화관으로 끌고 온 종운 때문에 보게 된 영화였지만 처음부터 차들이 부딪치고, 뒹굴고, 불이 붙고, 폭발하는 장면이라니. 결국 5분도 못 참고 시원은 영화관을 뛰쳐나와 화장실로 직행해 버렸다. 우우욱- 아직 식전인 속은 투명한 위액만을 힘겹게 토해낼 뿐이었고, 시원의 온몸은 오한이 든 듯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어지럽게 머릿속을 떠돌았다. 차가 부딪치고, 뒹굴고, 불이 붙고, 그리고...그리고?
“시원아- 여기 있냐? 괜찮아?”
화장실 입구 쪽에서 종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원은 손으로 입가를 훔치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시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여 종운은 빠른 걸음으로 시원에게 다가갔다.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괜찮아?”
괜찮냐고 연신 묻는 종운의 말이 들리지 않는 건지 시원은 아무 대답도 없이 무언가를 생각 하듯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차가 부딪치고, 뒹굴고, 불이 붙고, 그리고...?
“...누군가 있었어. 피를 많이 흘리고 있었어. 나는 그 사람을 불이 붙은 차에서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정신을 잃은 그를 안고 차에서 멀어지고 있는데 뒤에서 차가 폭발했어.”
허공에 시선을 둔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시원이 종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원의 눈도 종운의 눈도 무언가에 놀란 듯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누군가 있었어. 그 자리엔 나 말고 또 누군가가 있었어.”
바람에게 전해주시겠습니까?
W.한우주
딸랑~
문 위에 손님이 왔음을 알리기 위해 달아 둔 방울 소리에 정수는 마른 행주로 컵을 닦던 손을 멈췄다. 거센 바람 때문에 문이 흔들렸나 보다. 7월 중순. 올 여름의 첫 태풍이 불고 있었다. 정수는 바닷가 근처의 외딴 찻집을 홀로 운영하고 있었다. 파도가 높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결국 때를 놓쳐 다른 곳으로 피신도 못하고 가게 안에서 홀로 고립된 생활을 한지 3일째였던 정수는 그냥 바람 때문이려니 하며 다시 컵 닦기에 열중했다.
“저기요~ 아무도 안계세요?”
가게 입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수는 깜짝 놀라 정성스레 닦던 컵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쨍그랑- 컵이 깨지는 소리에 안에 사람이 있음을 확인한 시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 이었을까. 일주일 전 혼란스러운 머리를 식힐 겸 바다를 찾은 시원은 태풍으로 인해 3일 동안 호텔에 갇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끔찍한 고통에 머릿속 깊숙이 숨겨왔던 기억이 영화관에서 새로운 이빨을 드러낸 뒤로 시원은 계속해서 그 날의 악몽을 꾸고 있었다. 오늘 아침도 피투성이의 사람을 차에서 끌어내며 울부짖는 꿈속의 자신의 모습처럼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깬 시원이었다. 꿈처럼 현실의 자신도 울고 있었던 건지 눈가가 눈물로 질척였다.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어 알아 볼 수 없는 그의 모습에 누굴까...답답함을 느끼며 시원은 침대에서 내려와 바다가 보이는 통유리로 된 창가로 걸어갔다. 거센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파도가 높게 치고 있었다. 창을 때리는 굵은 빗방울에 오늘도 하루 종일 호텔에 갇혀 있어야 하나...한숨을 내시며 왼쪽으로 시선을 옮기는데 멀리 바닷가 끝 쪽에 홀로 덩그렇게 있는 누군가의 별장 같은 건물이 보였다. 시원은 알 수 없는 끌림에 그 건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였다. 건물의 어두웠던 창에 불빛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가 있다. 시원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자신의 객실을 뛰쳐나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위험하다며 자신을 말리는 호텔 직원을 뿌리치고 시원은 호텔을 빠져나와 무작정 달렸다. 거센 바람과 온몸을 강타하는 빗방울로 달리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못 뛸 정도는 아니었다. 시원은 달리고 또 달렸다. 가슴이 금방이라도 확 터질 듯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가까워진 하얀 건물을 보며 시원은 급격한 체력저하를 느꼈다.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에 이젠 발걸음 하나 떼는 것조차 힘이 들었지만 시원은 입을 악물고 건물을 향해 걸었다. 조금만 더...조금만 더...거친 숨이 입을 통해 토해져 나왔다.
딸랑~
하얀 건물의 입구 위엔 [기다림]이라는 팻말이 걸려있었다. 카페인가? 생각하며 시원은 문을 밀었다.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방울 소리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카페 안을 울렸다. 아무 인기척도 없다. 시원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쨍그랑- 가게 중앙의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카운터 뒤쪽으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벅저벅 카운터 뒤쪽으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내 카운터 끝 쪽의 바닥까지 닿는 긴 커튼이 걷히며 정수의 모습이 보였다.
카운터로 나오며 입구에서 비에 흠뻑 젖은 채 서있는 시원을 확인한 정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놀라 커진 눈을 몇 번 껌뻑이던 정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경련이 일었다. 울컥- 무언가 큰 응어리가 목에 걸린 듯 답답한 느낌에 정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목 안이 따끔거리며 뜨거워졌다. 어느 새 눈엔 눈물이 고여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어 목 안에서 멤 돌고만 있는 말을 꺼내려 할 때, 갑자기 시원이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놀란 정수가 카운터에서 뛰쳐나와 시원에게 달려갔다. 시원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가까이서 시원의 얼굴을 본 정수는 울컥하며 목안에 걸려있던 울음을 토해냈다.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는 거야. 정수는 더듬더듬 시원의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만졌다. 헛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정신을 잃었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조심스레 시원을 만지던 정수는 시원의 몸이 얼음장처럼 무척이나 차갑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도 잠시 시원의 몸이 갑자기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정수는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자신보다 큰 체구의 시원을 힘겹게 들쳐 업었다. 정신을 잃어 축 늘어진 시원의 무게에 걷기가 힘들었지만, 정수는 계속해서 울음이 터져 나올려는 입술을 꽉 물고 2층 한 구석에 마련한 자신의 공간으로 시원을 업고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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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형!! 눈을 떠!! 일어나!! ...형!!!’
“헉-”
거친 숨소리와 함께 시원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입에서 계속해서 뜨겁고 거친 숨이 뱉어졌다. 시원은 낯선 천장에 놀라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툭- 하고 이마 위에 놓여 있던 젖은 수건이 눈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시원은 순간 자신이 쓰러졌던 것을 떠올렸다. 오른 손으로 수건을 치우며 시원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낯선 방안 이었다. 두리번거리며 방안을 살펴보던 시원의 눈에 책상 위의 작은 액자가 들어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정수의 얼굴. 시원이 사진 속의 사람이 쓰러지기 전에 본 사람이란 것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은 뜨거운 몸이 휘청거렸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 일어서 시원은 책상으로 다가갔다. 액자를 잡아들었다. 툭.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액자 위로 떨어졌다. 유리 위로 흘러내리는 자신의 눈물에 시원은 놀라며 눈가를 만져보았다. 땀에 젖어 눈가가 축축하긴 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땀인가...생각하며 유리를 손으로 쓱 닦고 시원은 액자를 내려놓았다. 방 안 작은 창으로 보이는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비는 그쳤는지 쏴아아- 하는 파도 소리만 귓가에 들렸다. 시원은 창에서 시선을 거두고 방문으로 발걸음 옮겼다. 방문을 열자 어둡고 긴 복도가 나왔다. 복도의 끝에 또 문이 있었다. 시원은 복도를 따라 걸었다. 벌컥- 문을 열고 나가니 어둠이 짙게 내린 카페의 내부가 나왔다. 이층인가...시원은 카페를 둘러 보다 왼쪽에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이층에 아무 인기척이 없는 걸 보아선 정수는 일층에 있는 것 같았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시원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층에도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 한 시원은 카운터 뒤 쪽으로 걸어갔다. 커튼을 통해 불빛이 보였다.
정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열에 들뜬 숨을 내쉬며 잠을 자고 있는 시원은...죽었다고 했다. 분명 그는 그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했었다. 젖은 수건을 시원의 이마에 올려주고 떨리는 손으로 정수는 천천히 그의 얼굴을 만졌다. 울컥- 목을 타고 올라오려는 울음을 손으로 막고 정수는 급히 방에서 나왔다. 혹시라도 울음소리에 시원이 잠에서 깰까 정수는 터져 나올려는 울음을 꾹 참고 조심해서 일층으로 내려왔다. 주방에 들어오자 탁- 하고 다리 힘이 풀리며 정수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볼을 가르는 눈물이 뜨거웠다. 잠에서 깬 너에게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안녕? 오랜만이야? 잠에서 깬 너는 나를 보며 뭐라고 말을 할까? 우리...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거니?
한참을 울던 정수는 스스로를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 불을 켜고 정수는 시원이 깨어나면 먹일 죽을 끓일 준비를 했다. 물어 볼 게 너무 많았다.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았다. 야채를 씻는 손이 아직도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며 정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저...안녕하세요.”
등 뒤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정수는 들고 있던 감자를 떨어트려 버렸다. 진정되던 심장이 다시금 빨리 뛰기 시작했다. 너의...목소리다.
“많이 놀라셨죠. 갑자기 쓰러져서. 하하”
호탕하게 웃는 목소리. 너의 웃음소리다. 정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뒤돌아 주방 입구 쪽에 서 있는 시원을 봤다. 바보같이 멈춰있던 눈물이 다시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너에게 나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까...정수는 목을 꽉 막는 뜨거운 응어리에 입을 열수조차 없었다.
시원은 자신을 돌아 본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붉게 충혈 된 눈. 수척해 보이는 얼굴. 어디 아픈 사람인가...내가 괜한 폐를 끼쳤군. 생각하며 시원은 정수에게 다가 갔다.
“아...저...죄송해요. 제가 괜한 폐를 끼쳤나 보네요. 호텔에서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왠지 갑자기 궁금해 져버려서. 이런 날씨에 달려와 버렸네요. 하하. 그런 주제에 쓰러져 버리기 까지 하고. 많이 놀라셨죠? 정말 죄송해요.”
정수는 당황스러웠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죄송하다 말하며 미안한 듯 웃는 그는...정수를 꼭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말을 걸어왔다. 정수는 혼란스러웠다. 얼굴...목소리...모두 그가 맞는데. 내 앞에 서 있는 건 분명 그가 맞는데.
“혼자 사시나 봐요? 태풍 부는데 여기 계시면 위험하지 않아요?”
왜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거니. 돌아왔다고 말해주지 않는 거니. 보고 싶었다고 말해주지 않는 거니. 힘들었지. 미안해. 울지 마. 왜...왜...말해 주지 않는 거니? 정수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원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런 정수를 보고 시원은 아차하며 입을 열었다.
“아, 저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하하. 아- 이거 참 상황이 난감하네요. 하하.
저는 최시원 이라고 합니다. 서울 사는데 바람 좀 쐴 겸 일주일 전에 내려왔어요. 아까 말했듯이 호텔에서 여기를 발견하고 왠지 모르게 궁금해져서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달려온...바보라고나 할까요? 하하...아- 이게 아닌데.”
최시원 이라고 합니다. 최시원 이라고 합니다. 최시원 이라고...최시원... ...최...시원?
정수의 눈에 뭐라 말하는 시원의 입이 보였지만 더 이상 시원의 뒷말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최시원 이라니. 난...그런 이름 몰라.
“아...저기요? 듣고 계세요?”
무언가 이상해 보였다. 아무 대답도 없고, 멍해 보이는 눈빛이라니. 무슨 딴 생각을 하는 거지? 정말 어디가 아픈 사람인가? 시원은 정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으로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렸는지 자신을 바라보는 정수의 눈빛은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고. 왜 이러지?
“저기요, 저 정말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겁먹지 마세요. 아- 이거 정말 미안해지네. 저기 신분증이라도...아 호텔에 있지. 미치겠네. 저기요, 저 정말 수상한 사람 아니거든요?”
“...이름이...뭐라 구요?”
“네?”
정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시원에게 물었다. 잘못 들은 거겠지? 분명 잘못 들은 걸 거야. 내가 아는 너의 이름은 최시원이 아니란 말이야.
“...이름이 뭐라고 했죠?”
“...최시원입니다.”
정수의 눈에서 잠시 멈춰 있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닌...거니? 네가 아닌 거야?
너 맞는데. 분명 이 목소리. 이 얼굴. 모두 네가 맞는데. 아닌 거야? 정말 네가 아닌 거야?
“아, 이봐요!”
시원은 휘청거리며 주저앉으려고 하는 정수를 부축했다. 밀착된 몸으로 정수의 떨림이 느껴졌다. 옴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정수를 보며 시원은 왜인지 모르게 안타까워 졌다. 시원은 가만히 그런 정수를 품에 꼭 안았다. 정수의 얼굴이 닿은 가슴께가 축축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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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죄송합니다.”
한참을 어깨를 들썩이며 울던 정수는 진정이 됐는지 죄송하다고 말하며 시원의 품속을 빠져나왔다. 그러곤 금방 먹을 것을 준비 할 테니 밖에 나가 기다리라고 하며 시원을 주방에서 밀어냈다. 촤악- 커튼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원은 당황스러웠다.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지만, 한 마디도 못했고, 거부당하듯 왠지 정수의 공간에서 밀려 난 것 같았다. 커튼 닫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시원은 작게 의미모를 한숨을 내시며 카운터에서 가까운 테이블로 가 앉았다. 카운터 안 쪽 주방에서 요리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투-투둑-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는 시원의 귀로 빗물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바닷가엔 파도가 무서운 기세로 모래사장을 삼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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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깜빡 잠이 든 건가. 시원은 어깨를 살짝 흔드는 정수의 손길에 눈을 떴다. 눈앞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는 죽 사발이 김치, 물 컵 등과 함께 놓여 있었다.
“아...제가 잠깐 잠이 들었나 보네요.”
“네...드세요. 지금 재료가 별로 없어서...야채 죽 이에요.”
“아, 저 야채 죽 좋아해요. 하하. 근데 그 쪽은 안 드세요?”
“저는 됐어요...”
물 컵을 시원 쪽으로 좀 더 가깝게 두고 돌아서려는 정수를 시원이 붙잡았다. 정수가 힘없이 시원을 돌아보았다.
“아...이거 저보다 그 쪽이 더 드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전 괜찮아요.”
“아니,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먹어요.”
“전...”
“제가 안 괜찮아서 그래요. 그 쪽이 안 드시면 저 미안해서 이거 못 먹을 것 같아서 그래요. 그러지 말고 앉아요.”
시원은 일어나서 정수를 반대편 의자에 앉혔다.
“수저는 주방에 있죠? 제가 가져 올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요.”
등 뒤로 정수의 시선을 느끼며 시원은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수는 멍하니 김이 피어나고 있는 죽 사발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플 때마다 해 주었던 야채 죽. 이젠 아무 감각 없는 눈에서 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수저를 찾아 카운터 밖으로 나온 시원은 멍하니 죽 사발을 바라만 보고 있는 정수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작은 저 어깨가 왜 그리도 안쓰러워 보이는 건지. 가만히 정수를 바라만 보다 시원은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먹고 있으라니까요. 저 기다린 거예요? 하...하... ”
일부러 밝게 같지도 않은 농담을 던지며 자리에 앉았는데 그새 또 울고 있다. 시원은 아무 말 없이 숟가락으로 죽을 떠 정수의 손에 쥐어주었다.
“먹어요. 정말 이 죽은 제가 아니라 그 쪽이 드셔야 할 것 같네요.”
“... ...”
“어서요.”
정수는 숟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우물거리는 입술 옆으로 눈물이 눈물길을 따라 흘러내렸다. 정수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한 숟가락 먹고 내려놓는 게 어디 있어요,”
시원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수를 바라보았다. 정수는 말없이 주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정수가 새 죽 사발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그 쪽 드시라고 만든 건데, 저 혼자 먹을 수는 없죠. 드세요.”
시원 앞으로 죽 사발을 내려놓고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는 정수를 보며 시원은 밝게 웃어보였다.
“잘 먹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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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 코코아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반대편엔 정수가 녹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밥 먹을 때부터 쭈욱- 이어진 침묵에 시원은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찻잔을 입에 물며 시원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고 다시 정수를 보는데 정수의 눈과 딱 마주쳐 버렸다. 시원은 순간 벌컥 하고 뜨거운 코코아를 목구멍으로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런 뜨거움에 시원은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비가 많이 오네요...태풍 때문에 3일 째 저도 가게에서 못 나가고 있었는데. 지금 상황으론 저기..묵으시는 호텔로 못 돌아가실 것 같네요.”
“아, 네...”
시원은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가게에 잠 잘만한 곳이 아까 그 방 밖에 없어서...”
“...네?”
“불편하겠지만 돌아가실 수 있을 때까지 여기 머무르셔야 할 것 같네요.”
“아...갑자기 불쑥 찾아와서...계속 민폐만 끼치네요. 이거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는 시원을 보며 정수는 엷게 미소 지어 보였다.
“다 드셨으면 올라가세요. 전 여기 정리하고 올라갈게요.”
정수는 찻잔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걸어가는 정수를 보며 시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에게 소리쳤다.
“저기요! 저...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요?”
“... ...”
“언제까지 저기요 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원은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정수를 바라보았다.
“..박정수...라고 해요.”
박정수...라. 시원은 커튼 뒤로 사라지는 정수를 바라보다 뒤돌아 이층으로 올라갔다.
시원에게 이름을 말하고 주방으로 들어 온 정수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성함이 뭐예요? 겨우 다잡은 마음이 다시금 아파오기 시작했다. 정말...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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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와 시원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불이 한 채 밖에 없어서 방에 공간은 충분히 남았지만 둘이 붙어 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시원은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 쓰러지면서 잔 것도 있었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왠지 듣기가 좋았다. 시원은 조심히 고개를 돌려 정수를 바라보았다. 정수는 이미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일정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느새 시원은 정수 쪽으로 모로 누워 정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울어서 살짝 부어있는 눈꺼풀 아래로 길게 뻗은 속눈썹이 순간 파르르 떨렸다. 시원은 무의식 적으로 정수의 속눈썹을 매만졌다.
“잠이 안와요?”
시원은 깜짝 놀라며 손을 거두었다. 정수가 스르륵 눈을 뜨며 시원을 바라보았다.
“아...깼어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도 잠이 안와서요.”
잠이 안와서요? 안자고 있었단 말이야? 시원은 정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자신이 생각나며 부끄러워졌다. 거기다가 속눈썹까지 만졌으니.
“안...잤어요?”
“...네.”
“...아...저...죄송해요.”
“...아니에요.”
정수는 일어나 방문 쪽으로 가서 형광등 불을 켰다. 파바밧- 하면서 형광등에 하얀색 불빛이 들어오고, 정수는 일어나 앉아 있는 시원의 앞에 가 앉았다.
“... ...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
“네? 여기요? 여긴 호텔에서...”
“아뇨, 바다요. 일주일 전에 오셨다면서요.”
“아...”
정수는 무릎을 세워 안고 시원을 바라보았다. 시원은 무언가 곤란 한 듯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말하기 곤란한 일인가 봐요?”
“네?”
“말 안 해주셔도 돼요. 그렇게 곤란한 표정 짓지 마세요.”
“아..,”
정수는 시원을 보고 생긋 웃어보였다. 시원은 그런 정수를 보며 이대로라면 왠지 대화가 끊겨버릴 것 같단 생각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요즘 계속해서 악몽을 꾸고 있어요. 잊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이 최근에 다시 떠오르면서...”
“아...”
“3년 전에 교통사고가 났었어요.”
3년 전에...교통사고? 정수가 흠칫 놀란 눈을 하고 시원을 바라보았다. 그런 정수를 알아채지 못한 채 시원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전 사고 이전의 기억이 없어요. 기억상실...이라고 하죠.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기억나는 것이라곤 사고가 났던 상황의 단편들 뿐.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친구도 아무도 못 알아보고, 심지어 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죠. 차가 폭발할 정도로 큰 사고였는데 그나마 다행인지 육체적으로는 크게 다치지 않아서 금방 퇴원을 했어요. 하지만 그 사고의 기억이 계속해서 절 괴롭혔죠. 차가 부딪치고, 뒹굴고, 불이 붙고...”
“... ...”
“결국 정신과를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고 일 년 뒤 쯤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어요. 그렇게 그 날을 머릿속 깊숙이 숨겨 두고 전 이 년 동안 평범하게 살았어요. 그러다 한 달 전쯤 친구 녀석이랑 영화관을 갔는데 영화 오프닝이 차 사고가 나는 장면이었지 뭐예요. 순간 그 날의 악몽들이 다시 떠오르며 저는 도망치듯 영화관을 뛰쳐나왔죠. 그런데...이 년 전까지만 해도 기억에 없었던 사실들이 생각난 거예요. 그게 사실인지 새로 만들어진 기억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어요. 불이 붙은 차 안에 피투성이가 된 누군가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어요. 저는 그를 차 안에서 빼내서 그대로 안고는 무작정 차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달려갔어요. 그러다 차가 폭발했고, 그 뒤의 기억은 없어요. 아마 정신을 잃었겠죠. 그리고 병원에서 눈을 뜬...거겠죠.”
“... ...”
“그의 얼굴은 피로 범벅이 돼서 알아 볼 수가 없었어요. 꿈속에서 몇 번이나 그이 이름을 부른 것 같지만. 기억나지 않고요...”
시원의 입에 작음 한숨이 걸렸다.
“처음엔 잊고 있었던 새로운 사실이라고 생각했어요. 처음부터 그 사고의 단편만 기억해 냈었던 거였으니. 전 너무 궁금했어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 속의 저의 모습은...물론 제 모습이 보이진 않았지만, 느껴졌어요. 차 안에서 안간힘을 써서 그를 빼내려고 하는 그 당시의 다급함이, 정신을 잃은 그를 깨우려고 소리치는 울음 섞인 절규가...꿈에서 깨고 나면 항상 베개가 눈물로 젖어 있었고, 가슴이 답답하고 묵직하니 아파왔어요. 저는 그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한데...그런데...아무도 모른데요. 부모님도 친구들도. 제 기억 속에 새로 자리를 잡은 그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어요. 다들 사고가 난 장소엔 너 밖에 없었다고, 병원에 가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물어봐도...그 날 병원에 실려 온 사람은 저 밖에 없었다고...”
시원은 허공에 시선을 둔 채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빠진 듯 멍하니 앉아 있던 시원은 말하는 동안 정수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시선을 정수에게로 돌려 정수를 바라보았다. 정수는 울고 있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시원에게 시선을 둔 채 그저 멍한 표정으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시원의 입에서 나온 말들에 정수는 머릿속이 하얗게 공황상태처럼 텅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난 기억들이 하나 둘씩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여름방학 바닷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그를 처음 만난 일. 서울 달동네 깊숙이 사는 자신을 아무 연락처 없이 찾아내 집 앞에서 기다리던 그. 그를 밀어내려고 안간힘을 쓰던 자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던 그의 고백과 첫 키스. 처음 만났던 바다로의 여행. 그와의 행복했던 시간들. 그리고 행복했던 만큼 고통스러웠던 그의 주변 사람들과의 만남...그리고 그의 어머니. 3년 전 정수와 그는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다. 세상에 피붙이 하나 없는 천애고아인 정수와 세계적으로도 꽤 알려진 대기업의 장남이었던 그. 그리고 동성애라는 이름의 족쇄. 자신의 가족들과 주변 사람으로부터 끊임없는 고통을 받는 정수를 보다 못 한 그는 무작정 정수를 끌고 도망치듯 차를 몰고 서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리 멀리 멀리 떠나자.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으로 가서 우리 둘이서만 살자. 정수야, 나 믿지? 그 때였다. 중앙선을 침범한 승용차가 그들의 차 쪽을 향해 돌진 해 왔다. 그리고 정수는 병원에서 눈을 떴다.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던 그의 어머니. 사고에 대한 보험금이라며 정수의 가슴으로 던져진 흰 봉투. 그리고...
“정...정수씨.”
시원은 놀라며 정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정수의 몸이 한 번 크게 흠칫 떨더니, 이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
“정수씨!”
“아아아아악-!!!!!”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오열하듯 소리를 지르던 정수가 갑자기 옆으로 쓰려져 버렸다. 시원은 놀라며 정수에게 다가갔다. 정수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정수의 관자놀이로 멈추지 않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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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애와 헤어져 줘.’
‘이 걸레 같은 것!’
‘제발...우리 애를 놓아주면 안 되겠니? 이렇게 부탁 할게...제발.’
‘우리 애의 미래까지 망칠 셈이니?’
‘얼마면 되니? 얼마면 떨어져 나갈래?’
‘보험금이야.’
‘죽었어. 이제 만족하니?’
“아아아아악!!!!!!!!!!!!!!!”
정수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눈을 떴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불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하아...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젖은 수건을 쥔 채로 모로 누워 잠이 든 시원이 보였다. 방 안 작은 창 안으로 정오의 뜨거운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멀리 잔잔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태풍이...지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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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으...으음.”
시원은 눈을 감은 채로 이불 위로 팔을 휘적거렸다. 탁- 탁탁- 정수가 없음을 확인한 시원은 재빨리 일어나 일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잘 잤어요?”
테이블 위에 김치찌개를 놓고 주방 쪽으로 돌아서던 정수는 계단을 내려오는 시원을 발견하곤 생긋 웃어보였다. 시원은 정수의 모습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괜찮아요?”
“네. 덕분에.”
시원의 물음에 밝게 대답하며 정수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쟁반에 반찬거리를 들고 나왔다.
“앉아요.”
쟁반을 빈 의자에 놓으며 정수가 의자에 앉았다. 시원도 정수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차린 건 별로 없지만, 많이 드세요.”
생긋 웃으며 정수는 시원의 앞으로 물 컵을 가져다 놓았다. 시원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김치찌개. 계란말이. 햄 부침. 콩나물 나물 등. 간단한 음식들 이었지만 다들 시원이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 시원은 숟가락으로 김치찌개를 떠 한 입 먹었다.
“와...맛있어요. 김치찌개 이런 맛내기 힘든데.”
계속해서 김치찌개를 떠먹는 시원을 보며 정수는 웃음 지었다. 어제는 계속 울기만 하더니 오늘은 계속 웃네. 시원도 정수를 따라 웃으며 정수의 밥 위로 햄 하나를 얹어주었다.
“부끄럽게 저만 보시지 말고, 하하- 정수씨도 드세요.”
“네...”
정수는 숟가락으로 밥을 뜨며 입을 열었다.
“...태풍이...다 지나갔나 봐요.”
정수의 말에 시원은 탁 트인 창 밖 바닷가로 시선을 돌렸다. 파아란 하늘 아래 잔잔한 파도가 모래사장에 부딪쳐 부서지고 있었다. 시원은 고개를 돌려 정수를 보았다. 정수는 조용히 밥을 먹고 있었다.
“... ...”
시원은 다시 젓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쁜데...왠지 욱신거리는 심장에 시원은 잔잔한 파도소리가 야속하게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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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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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가게 현관문의 작은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시원과 정수가 밖으로 나왔다. 쏴아아- 하고 불어오는 바다 냄새에 정수는 기분이 좋은 듯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카페 앞 공간인 테라스와 아스팔트 바닥을 연결하고 있는 계단을 내려오는 시원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오고 아스팔트 바닥을 몇 발자국 더 걸어가던 시원이 이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정수를 바라보았다. 정수는 아무 말 없이 시원을 보며 웃고 있었다.
“정말...신세 많이 졌습니다. 그럼 이만..가볼게요.”
“네...”
“...다음에 또 찾아 와도 되죠?”
시원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정수는 웃으며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은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시원씨!!”
등 뒤로 들리는 정수의 목소리에 시원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정수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시원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서울에 돌아가시면...바람에게...전해주시겠어요?”
“...바람에게요?”
“네. 바람에게 전해주세요.”
“.. ...”
“난 잘 지내고 있다고. 많이 울거나 많이 아파하지 않는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괜찮다고...”
정수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살아...있어줘서...고맙다고.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아프지 말고 잘 자고 행복하게 지내라고.”
그러나 눈물길 옆 입가엔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사랑한다고. 그래도...사랑한다고. 언제나 항상...사랑하고 있다고... ...바람에게...바람에게 전해주세요!!”
말하고 정수는 시원 앞에서 처음으로 크게 소리 내서 웃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한 번 더 소리치고 정수는 뒤돌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딸랑~ 방울 소리가 잔잔한 파도소리와 함께 하얗게 부서졌다. 시원은 한참을 정수가 서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뒤돌아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태풍이 지나가고 한 여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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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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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를 하러 정수가 주방에 들어간 사이 시원은 이층으로 올라와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제 내려가면 호텔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왠지 모를 아쉬움을 담은 미소가 시원의 입술에 걸렸다. 방 한 구석에 이불을 개서 놓고, 시원은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옷이 단정하게 개켜져 놓여있는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지를 갈아입고, 좋은 향이 나는 티셔츠를 펼쳐 입으려고 하는 시원의 눈에 살짝 열린 책상 서랍이 보였다. 조금 열려 있는 서랍 안으로 엎어 놓은 듯 액자의 뒷면 모서리가 보였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순간적인 호기심에 시원은 티셔츠를 책상위에 올려놓고, 조용히 서랍을 열어 액자를 꺼내 보았다.
“!!”
액자 속 사진을 본 시원이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뜻 커졌다. 시원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빨리 뛰기 시작했다.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시원은 떨리는 손으로 액자에서 사진을 빼내었다.
[이렇게 우리 언제까지나 행복하자. 정수야. 사랑해. -영운]
사진의 하얀 뒷면에 검정색 펜으로 쓴 글귀를 보고, 시원은 다시 사진의 앞면을 돌려 보았다. 배경으로 보이는 흰색 건물은 분명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카페의 외관이었다. 그리고 얼굴 가득 행복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사람은 분명 정수가 맞았다. 그리고 그런 정수를 뒤에서 안은 듯 정수의 왼쪽 어깨 위에 턱을 올려놓고 역시 행복하다는 듯이 웃고 있는 사람은 분명...시원, 시원 자신이었다. 시원은 다시 사진의 뒷면을 보았다. 검정색 글씨는...분명 자신의 글씨체였다. 시원은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우리 언제까지나 행복하자. 정수야. 사랑해. 영운. 영운. 영운. 영운. 영...운...?
끼익- 복도 끝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시원은 화들짝 놀라며 사진을 자신의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시원은 액자를 수습해서 책상 서랍에 넣고, 조용히 서랍을 밀어 닫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재빨리 티셔츠를 입었다.
“시원씨, 다 했어요?”
“아, 네. 네.”
“내려와요. 차 한 잔 하고 가요.”
먼저 뒤돌아 걷는 정수를 따라 시원은 방에서 나왔다. 가슴이 미친 듯 두근거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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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김이 나는 뜨거운 코코아와 녹차를 보며 시원은 문득 땀이 비처럼 쏟아지는 한 여름에도 뜨거운 코코아를 고집하던 자신을 떠올렸다. 시원은 코코아를 마시는 내내 생각 했다. 야채죽도, 김치찌개도, 코코아도...흔하게 만들어 먹는 음식들이었지만 이것은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시원은 한 번도 정수에게 코코아를 마시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시원은 조용히 정수를 바라보았다. 정수는 녹차를 마시며 바닷가를 보고 있었다. 시원은 사진이 들어있는 바지 주머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윽- 하는 소리에 정수가 놀란 듯 시원을 바라봤다.
“왜 그래요? 머리 아파요?”
“아...아니...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시원은 걱정하는 정수를 보며 정말 괜찮다는 듯 밝게 웃어보였다. 걱정의 눈빛으로 시원을 바라보던 정수도 시원의 웃음에 따라 미소 지었다. 정수가 다시 바닷가로 시선을 돌리고, 시원은 정수의 옆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무언 갈 결심한 듯 시원의 눈이 반짝였다. 시원은 정수가 타준 코코아를 단숨에 들이켰다.
“정수씨.”
“네?”
“이만...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시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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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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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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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박정수씨 편지 왔습니다.”
정수는 마른 행주로 컵을 닦던 손을 멈추고 일어나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창밖으로 겨울 바다의 거센 파도가 모래사장 위로 하얗게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 위에 우체부 아저씨가 놓고 간 편지가 있었다. 정수는 빠른 걸음으로 테이블로 다가가 편지를 집어 들었다. 아무 것도 써있지 않은 편지 봉투에 머리를 갸우뚱하며 정수는 봉투 윗부분을 손으로 잘라내고 안에 든 내용물을 꺼내 보았다. 내용물을 확인한 정수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편지 봉투 안엔 없어졌던 정수와 영운이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정수는 사진의 뒷면을 보았다. 정수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 언제까지나 행복하자. 정수야. 사랑해. -영운]
[많이 기다렸지? 정수야, 이렇게 우리 다시 사랑하자. -영운]
딸랑~
“뜨거운 코코아 한 잔...먹을 수 있을까요?”
한우주님 이야기...
2002년 이후로 처음 써보는 팬픽이네요. ;ㅁ;
노블에다가 처음으로 올리는 건데...부끄럽네요. 이거 참. ;;
말머리 때문에 3일 고민했는데 - _-;;
저렇게 한 거...문제가 되면 말해주세요. ;ㅁ;
그럼,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재미있게 읽으셨길 바랍니다.
Coment
WonnA
첫댓글 아..노블에 들어와서 처음읽는 소설 역시 강특 매니아라 강특만 찾아읽는데 이글은 너무 잔잔하고 감동적인 내용이었어요! 나름 예상은 했었지만 너무나도 멋진글. 기억을 할지 못할지 읽으면서 조마조마 햇지만 결국 기억을 하고 (사진을 통해서 였지만..) 마지막에 코코아 한잔 - 이잉 이말에 또한번 감동 ! 무튼 님아 잘보앗어요 늦엇지만 항상 건필하세요!
이렇게 다시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