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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회 카페문학상 응모작품으로
각자 자기 작품을 찾아 다시 수정하여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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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들
작년 가을 50세의 아들과 그 가족을 분가시켰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긴 세월 낳고 기르며 아들을 얼만큼 사랑해줬는지 자문해 보게 되었다. 그런데 아들은 전에 내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ㆍ그때 놀랐던 게 생각난다, 조금은 부족했음을 자책하기도 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ㆍ
모처럼 가족 동반 낚시를 갔을 때 저만치 숲쪽에서 네 살의 어린 아들이 벌에 쐬어 몹시 아파하는데 아내가 얼른 뛰어가 안아주고 달래주고 있었다. 물 이쪽 편에 있던 나는 바라만 보고 괜찮으니 좀 참으라고 소리만 질렀던 게 그의 생애 깊은 상처로 남았던 것이다. 네 살 때 일을 그렇게 기억한다는 것 그때의 아비에 대한 원망이 그렇게 각인 되어있다는 것이 무섭기도 하다, 그리고 부자 사랑의 해석이 그 일로 해서 그와 나는 많이 달랐었음을 깨우처줬다. 꿈에도 생각잖은 것을 실제로 이야기하므로 듣는 나는 사실 무척 괴로웠다ㆍ그때 정말 내가 잘 못 한 것일까? 얼른 쫒아가 보듬어 줬어야 할 일이기는 하나 좀 거리가 멀고 아내가 갔고 넌 남자이니 아비가 겪고 살았던 그 정도는 참고 살 줄 알라는 넉넉한 처사였었다. 후다닥 뛰어갔으면 이런 일은 없었겠지라는 후회가 당연한 것인가 ? 그러나 50여 년 지난 걸 어찌하겠는가?
놀길 좋아 했던 아들은 중학교 1학년까지는 중간쯤의 성적을 유지하더니 나와 비슷한 정신체질이라선지 싫어하는 영어 수학에 뒤떨어지면서 점점 학업을 포기했다. 그때 나는 큰 실망과 고민 끝에 약간의 체벌을 준 적도 있다. 그러나 소용없었고 더욱 파탄 쪽으로 흘러갔다. 결과 고등학교에서 다른 과목에까지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처 대학입시에 모두 낙방했다, 이미 예견한 사태여서 나도 마음을 추스르고 기능직 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어떻게 해서든 안정한 공직자 길로 나가도록 평범하게 미래를 유도했다ㆍ원래 머리가 나쁜 게 아닌데 아비를 잘못 만나 제대로 관리를 못 한 걸 나는 늦게야 자책했다. 궁여지책으로 정부가 설립 관리하는 기술학교를 보냈다. 거기를 졸업해서 무난히 자격증을 취득하고 학교 기능직으로 근무하게 됐다., 가정을 꾸려 남매를 잘 길러 성장시켰고 이제는 대학 나온 손자가 아비처럼 일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두 달 전 취업을 하였으니 큰 걱정은 없다ㆍ
아들이 직장에서 만난 며느리는 예쁘고 순박하고 머리가 좋아 기능직에서 일반직으로 30:1의 무척 어려운 시험을 통과했다ㆍ승진하여 잘하고 있으니 공직자 내외와 손자 남매의 미래는 탄탄해진 편이다ㆍ언젠가 아들이 내가 좋아하는 낚시 셑드와 가방을 사가지고 들어와서 “아버지 낚시도구 너무 낡았어요 이걸 쓰세요” 했다 뜻밖이라 고맙고 오래된 감정을 해소하는 어떤 무언의 화해처럼 따스했다ㆍ
공직자로 취업이 될 때도 내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수소문 끝에 기능계통의 어떤 후배 지인에게 부탁하여 몹시 어렵게 이뤄졌다. 그런데도 그때 아들은 공직자의 박봉 등 나빴던 선입감에 반발하는 표정을 보였고 더구나 임시직으로 시작된 터라 불만과 부적응으로 수년간은 편치 않았었다ㆍ자기 잘못으로 학창시절 불성실 하고서 책임을 부모쪽으로 전가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적응했고 그 직장에서 야간대학에 편입해 졸업하고 연륜을 쌓으면서 자기 동기생들과 비교해 별로 잘못된 선택이 아님을 인정했다. 지금은 그때와 달라 공직의 선호도가 하늘 끝으로 높아 졌지않은가? 세상이 이리 변하니 아비의 선견지명을 인정하고 오히려 안정감에 만족하며 고마움도 있는 듯 하다ㆍ
그러니 “ 잘 산다는 건 재산과 지위가 높은 것보다 우선 몸이 건강하고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되는 것“ 이라는 아비의 사상에 상당히 수긍의 태도를 숨기고 있는 듯하여 다행스럽다
그러나 어찌 아비 세대와 아들 세대가 완전한 동화를 기대하랴? 가끔 식사를 같이하는 가정 모임에서 정치적 시사적 담화에 엄청난 괴리(乖離)를 느껴 언성도 높이게 되고 너는 진보 나는 보수니 하는 또 다른 갈등을 느낀다ㆍ 너도 인생80을 살고 나서 지금 네가 생각한 걸 돌아봐라 해도 설득의 여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ㆍ 젊은이들은 거의 그래서 부자의 간격은 영원한 것일 것이다ㆍ
그리고 자식들의 입장에서 부모는 떠나간 후에야 진실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ㆍ내 아버지가 남기신 말씀 “죄짓지 말고 살아라” 이건 그분이 살아계실 때 지금처럼 깊은 느낌을 주지 못했다ㆍ난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였으며 지금은 어떤가? 말하기 어려우나 꼭 말해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가 낚시터에서 지금 벌에 쐬인다 해도 나는 “참으면 고통은 가랁는다 넌 남자니 좀 참아라 ”고 할 것 같은 또 다른 자신감도 있으니 말이다ㆍ아내는 예전처럼 불나게 쫒아가 자기 몫의 애정을 유감없이 표현 할테지만 나는 역시 그렇게 호들갑스러울 수는 없을 듯하다, 뒤에 또 후회할지 모르더라도 ,,,,
그리고 아들은 자기 아들에게 이런 때 어찌할까? 그건 그의 정신적 취향일 것이다 ㆍ
아들이 첫 직장에서 미처 차가 없어 출근이 어려웠었다 ㆍ나는 그가 차를 구입할 때 까지 수일간을 일찍 일어나 그를 출근시켜 주고 반대편으로 출근했다ㆍ100km거리를 달리면서도 조금도 힘든 느낌이 없었다 ㆍ그는 그걸 몰라도 좋다 그때 고마웠다는 말을 들은 적도 없다ㆍ그러나 난 부자란 이런 것이거니 한다ㆍ
아내는 “당신은 애들을 사랑해 주지 않는다” 고 가끔 불만을 토로한다 ㆍ나는 지금 80이넘어 직장에 다니고 남들보다 건강한 거 이런 게 다 자식사랑 아닌가 라고 변명 아닌 변명으로 대꾸하는데 아들 내외나 또는 누구의 객관적 공감을 얻고 싶지는 않다ㆍ자식을 사랑하는 감정의 표현법이나 상황은 사람마다 다르겠고 그것을 받아서 느끼는 것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한 정부의 통치가 끝나고 나서 한 시대가 또 지나야 역사 속에서 올바른 평가가 나오는 것 아닐까? 아들을 기르면서 그의 질병과 사고에 수없이 고난을 겪었고 어떤때는 목전에서 생사까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긴박한 때도 있었던 걸 생각해본다. 내 부모도 나를 기르며 그러하셨겠지 하면 가족사의 파노라마가 눈물겨워지기도 한다. 인생을 안다는 건 무엇일까? 부자지간의 정도는 무엇일까? 참으로 난제이기도 하다.
이 수필 한 편이 먼 훗날 내 자식들에게 보내는 서신같은 걸로 남아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2 큰 아들
공기 좋고 물 맑은 월악산 아래 오지 산골. 눈만 뜨면 황소 목의 풍경소리 발 맞추어 산새들 합창하는 아침, 은빛 햇살 품 안에서 농부는 하루를 열지요. 71년 봄, 일이 시작되는 어느 날, 시숙내외와 시부모님이 우리 내외를 불러 앉혔지요. 원인은 늘 먹고일은 안하면서 아프다고만 하는 남편이 큰 형님에게는 눈엣가시였지요. 그래서 그랬는지 시집살이 삼년 만에 우리보고 이웃 순남이네 집이 만원에 나왔다면서 집을 사줄 터이니 송아지 한 마리랑 가지고 나가서 살라고 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었지만 “예” 하며 학교사택 사 주시면 나가겠다고 했지요, 내말에형님은 깜짝 놀라며 그 집이 얼마짜리 인줄 알고나 말하는 거냐며 당돌하다고. 돈이 없어 못 사주니. 자네 마음대로 하라고 했지요. 나도 화가 나서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오촌 아주머님 댁 문간방을 얻어서 짐을 싸가지고 큰집을나왔습니다. 며칠 뒤 형님은 쌀 두말. 보리쌀 두말. 감자 한 포대를 가지고 오셔서 나를 살살 달래셨지요. 나 역시도 남에이목도있고 먹고 살기 위해선 할 수 없이 형님 말에 따를 수 밖에 없었지요.
이사 나와서도 나는눈만뜨면 큰집 가서 일을 해야 했지요. 이듬 해 오촌네 집 문간방에서 큰 아들을 잉태해서 심한 입덧으로 고기도 먹고 싶고, 일은 힘들고, 서러워서 부잣집도 별수 없다며 눈이 붓도록 울었지요. 얼마 후 비 오는 날 이었습니다. 남편은 아침에 나가면서 오늘은 화로 불을 꼭꼭 눌러서 잘 담아놓으라고 내게 말했지요. 그 시절. 촌에서는 비가 오면 날구지로 돼지를 잡아먹기도 했지요. 남편은 돼지 잡으면 고기를 사온다며 오전에 나갔습니다. 밤 늦도록 먹고 놀다 온 남편은 돼지고기 한 근 석 냥 이라며 어렵게 얻어왔으니 실컷 먹으라고 했지요. 먹고 싶던 차에 밤늦게 몰래 먹는 고기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가슴은 두근두근 오촌 아주머니한테 들킬까봐 마음 졸이며 먹은 한 근 석 냥 돼지고기는 영원히 기억에 남는 큰아들과 나의 영양보충이었으니까요.
마침내 시집살이 햇수로 5년 만인 72년 12월 27일 6만원짜리 내가 꿈꾸던 사택을 사줘서 이사하는 날 밤에 진통이 왔습니다. 남편친구들은 집 사서 이사했다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술판을 벌렸지요. 나는 아침부터 이사준비 하느라고 굶은 상태로 윗방에서 진통이 오는데 친구들은 갈 기미가 안보였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네 살짜리 큰딸이 아빠를 불렀지만 술 더 가져오란 말만 했지요. 나는 할 수 없이 윗방 미닫이 문을 크게 두드렸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육촌 시동생이 문을 열 길래 빨리 좀 가라고 했지요. 눈치 챈 시동생은 친구들을 다 데리고 나갔습니다. 정작 남편이라는 사람은 술이 취해서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시동생 불러서 친구들 보냈다고 화를 내면서 윗방으로 올라와 잠이 들었습니다. 육촌 시동생이 등 너머 큰집에 알려주어서 시어머님이 내려오셨지요.
그때는 시계도 없어서 짐작으로 시간을 볼 때였습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힘은 빠지고 아기는 못 나와서 사경을 헤매는데 남편은 윗방에서 “남들 안 낳는 애를 혼자 낳냐? ”하며 잠 못 잔다고 했지요. 시어머니는 아들 말에 화가 나서 욕을 하시며 개울물이라도 떠오라고 내쫓으셨지요. 남편이 나가자 애기가 나오다가 목이 걸려서 파랗게 질식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시어머니는 아들은 아들이다만,... 하시며 포대기를 푹 씌워놓고 나가셨지요. 나도 정신을 잃은 건지, 잠을 잔건지, 깨어보니 불순물이 다 굳고 말라서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요. 시어머님이 정신없이 들락날락 하는 문소리에 눈을 떴지만 움직일 수가 없어서 애기가 깨날 때 까지 나도 꼼짝을 못했습니다. 몇 시가 되었는지 문살이 훤 해질 무렵 포대기 밑에서 “킥킥”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시어머니는 큰소리로 아들을 불러 이제 되었다 하시며 애기를 울려서 따뜻한 물로 씻기셨지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끔찍한 광경에도 인내심과 지혜로우심을 보여준 시어머님께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후 꼼꼼하신 시어머님이 말라붙은 뒤처리 하시느라고 새참 때 쯤 늦게 해준 밥과 미역국은 먹어도 먹어도 속이 허전했지요. 아들은 첫 돌이 지나고도 경기를 해서 삼일 동안 늘어져 숨만 깔딱일 때도 있었습니다. 의사선생님도 이유를 모르는 병이었죠. 그때 이웃어른이 오셔서 아는 소리로 말 열두 필을 그려주면서 집에 쇳소리를 좀 내라고 했지요. 이튿날 남편이 와서 말 그린 쪽지를 가지고 집으로 간 뒤 정말 귀신이 곡하게 숨만 깔딱이던 아들이 앉아서 놀았습니다. 5일만에 집에 온 아들은 늘 마음졸이며 일곱 살이 되어도 말을 못해서 노심초사 걱정하는 불안한 아들이었지요. 그 당시 나는 선생님들 식사를 해 드릴 때였습니다. 선생님들도 내가 애태우는 모습에 같이 걱정하시며 학교에 입학시켜서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무릎에 앉혀 놓고 말을 한자 한자 가르쳐 주셨지요.
학교에 들어가서도 아이들은 벙어리라고 놀려서 같이 어울리지를 못했습니다. 우리 집은 바로 학교 정문 앞에서 구멍가게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라면땅 ,비과 사탕, 빵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 아들과 어울리도록 늘 신경을 썼습니다. 단순한 아이들은 먹는 재미로 서로 아들과 놀자는 친구들이 하나 둘 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 선생님들과 친구들 덕분에 여덟 살이 되면서 말문이 트이기 시작 했지요. 하루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태경이 엄마가 헐레벌떡 밭에까지 뛰어와서 우리 아들이 자기네 집 문 앞에 서서 ‘에오야 노자’ 하며 태호를 불렀다는 말에 이웃들도 엄청 반가워했지요. 이렇게 말문이 트이자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아들은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지요.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사고로 삼학년 때는 정강이뼈가 부러지고 오학년 때는 새총 만든다고 낫으로 손등을 찍어 힘줄이 끊어져서 부모 애 간장을 태운 아들입니다. 중,고등학업이 친구들보다 늦다는 사실을 느낀 아들은 공부보다는 기술을 택한 철이 빨리 든 아들이었지요. 고졸 후 아들은 돈 번다고 연탄공장도 다녔지요. 퇴근하고 올때면 까만 얼굴에 이빨만 하얀 아들 모습이 짠했던 기억이 납니다. 대학 가라하니 대학 보내는 돈으로 기술 배운다는 아들, 커서는 의젓하게 부모 속 안 썩이고 연탄공장 다녀 번 돈으로 특수차 기술을 배워서 지금까지 한 직장에 몸담아 30년을 바라보며 결혼해서 부모형제 잘 섬기는 든든한 나의 큰 아들입니다.
3 아들, 미안해
"아~아"
남편이 왼쪽 발을 잡고 거실을 뒹군다. 깜짝 놀라 주물러주려고 손을 장단지에 대니 더 소리를 지르며 손사래를 친다. 쥐가 난 것이다. 슬그머니 일어난 아들이 장난감 바구니를 뒤지더니 봉제 인형 고양이를 들고 쫓아와 남편의 다리 옆에 놓는 것이었다. 아버지 다리에 쥐가 났다고 하니 고양이를 들고 왔단다. 쥐가 고양이를 보고 도망가면 아버지 다라가 아프지 않을 거라고 했다.
한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아이었다. 42년을 교직에 있었지만 내 아이들에게는 이름 석 자도 가르쳐주지 못했다. 매스컴을 접하면서 스스로 터득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10세 이전의 자녀들을 보면서 천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예쁜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남기고 싶은 어록이었고 행동 하나하나가 창의적이었다. 학교에서 퇴근하여 집으로 오면 내 아이와 보낼 시간에는 지치고 피곤하여 놀려고 하는 아이들을 데리고 잠자기에 바빴다.
어느 날 거실에 벗어놓은 점퍼를 들었더니 모래가 우수수 떨어졌다. 무엇을 하고 놀았기에 이럴까, 아들을 불러 물어보니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많이 불었단다. 날아갈 것 같아 양쪽 주머니에 돌을 넣고 왔다고 했다. 참 천진스러운 생각이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작은 자갈 무더기가 보였다. 이른 봄 꽃샘추위와 함께 바람이 심하게 일 때 있었던 일이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나는 나에게 맡겨진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그들의 호기심과 꿈을 키워주려고 노력을 하면서 내 아이들은 누군가 그 아이들을 맡은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의 소박한 바람일 뿐 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들과 함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에 대하여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다. 우리 반 아이들과는 이야기는 물론 꿈을 실천하기 위한 계획까지도 써 보게 하고 20년 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여 글로 써 보게도 했었다. 내 아들도 담임 선생님이 당연히 그렇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도 그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는 것이다.
후회가 된다. 지금에 와서 어쩔 수가 없는 상황이지만 가끔은 아들이 어렸을 때로 돌아가고 싶다. 그때로 갈 수 있다면 더 많이 이야기하고 관심을 가져줄텐데, 인생의 농사 중에는 자식 농사가 최고라고 하시던 어른들의 말씀을 지금에서야 이해를 하나 이미 시간은 늦었고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있었다.
부모이며 인생의 선배로서 앞길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함이 후회가 되고 미안할 뿐이다. 가끔은 아들의 의견을 많이 존중하고 자신의 계획과 실천을 존중해 주면서 키웠던 것이 40이 되어가는 아들을 보면서 후회할 때도 있다. 당시는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하고 모두가 다니는 학원을 다니지 않고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웠지만 새삼 후회를 하는 까닭은 좀 더 나은 직장에서 높은 보수를 받으면서 생활하기를 바라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잔소리가 필요 없는 아들이기에 미래에 대하여 구체적인 대화가 부족했던 것 같다. 생각할수록 미안함의 깊이가 더 깊어지고 있다.
꽃망울이 아홉 개나 생긴 대국 화분을 선물로 받아와서 꽃망울 속에 예쁜 꽃이 들어 있다고 이야기를 해주면서 손으로 만지면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궁금증이 생겨 통통하게 부풀어 오르는 국화 꽃망울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하느라 손톱으로 파 보고는 꽃이 없었다고 하며 해맑게 웃던 어릴 적 내 아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호기심이 많고 궁금증이 많았던 녀석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마음 아플 뿐이다.
아들이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는 물론 졸업식 때도 가보지를 못했다. 30년 전 그때는 주변의 눈치가 보여 법으로 정해진 연가도 제대로 쓸 수가 없었다. 가슴은 아리고 쓰렸다. 미래를 위해서라고 자신을 위안하며 열심히 일했지만 언제나 아들에게 미안해 미안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엄마를 제일 필요로 할 때 옆에 함께 있어주지 못했음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프다. 남의 자식들 잘 키워주느라 나의 미래인 내 아들에게는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 아닌 죄책감에 가슴이 아리다. 난 지금 생각해도 내가 담임한 우리 반 친구들이 먼저라고 생각할 것 같다. 그래도 부모님이 롤 모델이며 부모님처럼 살고 싶다는 아들을 볼 때 마음이 흐뭇하다.
아들! 미안하고 사랑해.
4 딸아 미안하고 고맙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에서, 온 들판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한송이 꽃에서, 하루를 보낸 후 잠자리에 누워서,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숨어 있음을 느낀다.
어느 날 갑자기 대학을 졸업한 딸이 서울을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 학원을 알아보려나 생각했다. 며칠 후 장문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사시 공부가 하고 싶어 등록했다며 부모님께 미리 말씀도 드리지 않고 일을 저질러 죄송하고 경제적 부담도 될 것 같아 많이 망설였단다. 남편은 펄쩍 뛰면서 당장 내려오라 불호령이다. 나는 마음이 불안해서 고시원을 찾아갔다. 공부는 독서실에서 하고 잠만 잔다고 하지만 창문도 없는 방에, 누워 잠만 잘 수 있는 침대 하나 달랑 놓여 있었다. 숨도 크게 쉴 수 없을 정도의 열악한 환경을 보고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내려왔다.
그러던 중에 내게 대상포진이란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와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몸무게가 너무 많이 빠지셨는데, 당뇨까지 있어 많이 힘드시겠어요”라고 의사 선생님이 걱정하셨다.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딸은 나를 부등켜 앉고 말없이 울기만 했다.“엄마가 자주 아파서 미안해.”“엄마 아프지 마세요”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 아프셔도 우리 곁에 있어만 주세요”딸이 손발을 수시로 닦아주며 간호하는 성숙한 모습이 감격스러웠다.‘딸아, 너희가 아니고 내가 아픈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나는 엄마니까 참을 수 있거든, 내가 빨리 일어나 꿈을 응원 할 테니. 너는 꿈을 펼쳐라’딸이 간호하는 동안 남편은 몸도 약한 딸아이가 너무 힘들게 공부하는게 싫다며 간곡하게 설득을 했다. 딸은 눈물을 흘리면서 청주로 내려왔다. 딸아, 너의 꿈을 지원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딸은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나서 사범대학에 편입학 시험을 치르고 3학년으로 입학을 했다. 꿈의 좌절을 딛고 일어서려는 몸부림 같았다. 편입해서 사범대학 공부를 하는 중 둘째 아이까지 생겨 무거운 몸으로 가사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둘째 아이을 낳고는 본격적으로 임용고시 준비를 했다. 온전히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 도서관 가는 시간에 숨겨진 보물을 찾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큰 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냈지만, 작은아이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해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었다. 나는 치매 시어머님을 모시고 있어 손자를 돌볼 수 없는 형편이라 마음이 편치않았다. 딸의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다. 남편과 상의 끝에 딸의 공부를 도와주기 위해 작은 아이를 일반가정집에 맡기도록 경제적 도움을 주었다. 사위가 직장에서 퇴근하면 아이 둘을 돌보고 딸은 독서실로 향한다. 새벽까지 공부하고 돌아와서 사위와 아이들 아침 식사를 챙겨주고 두 아이를 어린이집과 이웃 가정에 맡긴 후 다시 독서실로 향하는 일과다. 늘 바쁘게 뛰어다니며 열심히 사는 딸의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건강이 걱정되어 안타까웠다.
드디어 임용시험 날이 다가왔다.
큰 손자가 아프다고 울면서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며 떼를 쓰고, 작은놈도 덩달아 징징거린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시험을 보러 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애잔한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온종일 묵주를 돌리면서 긴장하지 말고 공부한 만큼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은총으로 도와달라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시험이 막 끝났을 무렵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단다. 아침부터 아프다던 큰 아이가 열이 너무 높다고 빨리 데릴러 오라는 전화다. 급한 마음에 신호를 위반했나 보다. 죄송하다며 사과를 드리고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시험 장소로 전화 확인을 했다. 빨리 가보시라는 인정스러운 말이 너무 고마웠단다. 하루가 숨 가쁘게 돌아간 하루였다.
딸은 임용고시의 높은 경쟁률을 이기고 합격자 명단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면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로 축하를 했다. 딸의 인생에 봄처럼 꽃이 피길 바라며, 자랑스러운 내 딸에게 박수를 보냈다. 시내 중학교로 발령이 나서 지금껏 근무를 잘하고 있다. 어느 날 학교 강당에서 진로 발표회가 열렸다고 한다. 교사의 꿈을 꾸는 학생이 딸 사진을 스크린에 띄우고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롤 모델로 삼고 싶다고 해 여러 선생님들의 박수를 받은 일이 있어 민망했다고 한다.
또 얼마 전에도 교생 실습을 온 대학생 제자가 딸을 찾아 왔더란다. 선생님의 열정적이고 재미있는 수업과 학생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모습이 좋아서 교사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딸은 너무 부끄러웠다고 하는데, 나는 딸이 교사의 자리를 잘 지키고 있다는 생각에 자랑스러웠다. 나는 딸에게 학생들의 장점을 보는 눈을 넓히고 지혜롭고 따뜻한 말로, 칭찬을 아끼지 말라고 했다. 학생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진정한 스승이 되길 희망해 본다.
삶의 목적이 있어야 의미가 있고 용기가 있는 삶이 된다. 의미가 있어야 가치가 있는 삶을 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직업을 선택할 때에도 근본적 계기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관이다. 우리는 보람 있는 삶을 원한다. 우리 인생에 희열과 행복을 주는 것은 보람이다. 딸이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은 가진 것에 감사 하는 것이다.
5 사랑스런 나의 아들
딸아이 둘을 낳고 셋째 아이를 가졌을 때, 아버님이 “딸 둘이라 이번에는 꼭 아들이어야 할 텐데…….”라고 말씀 하셨다. 아들을 못 나을 것 같은 두려움에 매우 힘이 들었다. 아이 나을 때까지 딸이 아닐까 하고 걱정했는데, 출산 전 병원에 남편과 어머님이 동행 하시어 산부인과에 대기하셨다. 아들이 좋은 데…….
출산 시간이 다가와 힘들게 아이를 낳고 의사에게 아들인지 딸인 지 물어 보니, 조용히 웃으시다가 “좋으시겠어요. 고추가 보이네요.” 라고 하셨다. “아! 아들이지요?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나 기뻐 시모와 남편이 다가왔을 때 자랑스럽게 아들이라고 말씀 드렸다.
아들이어서 무척 기쁘며 보람찬 시간이 되어 즐거웠다. 시어머님께서는 “우리 며느리 최고야. 그동안 고생 많이 했고, 소원을 풀어 아주 기쁘구나.”라고 말씀하셨다. 흐뭇하고 딸을 또 낳을까 걱정하던 근심이 없어지며, 매우 행복했다.
어릴 적부터 사랑스런 아들은 듬직하게 공부도 잘하고, 책을 많이 읽었다. 그래서 서로 대화도 자주 하며 다정하게 지냈다. 고교 시절에 아들이 공부하다 힘들어 하면 격려도 했고, 주말이 되어 쉴 때는 아파트 탁구장에서 같이 유산소 운동인 탁구도 쳤다. 대학 시절에 열심히 공부도 하며 한식 양식 일식 조리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 콩과 멸치, 양파와 미나리 등 건강에 유익한 음식을 자주 섭취하게 해주어 고마웠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들을 소망 하시던 아버님의 말씀이 조금은 서운하고 두렵게 회상되었다. 소중한 아들이 여전히 나와 이야기를 잘하고 의사소통이 잘 되고 있다. 양상추나 오이 비트 등 건강에 좋은 식품을 매일 먹을 수 있게 해주어 늘 사랑스럽게 생각한다.
아들은 군대 갈 시기가 되어 용산 미군부대인 카투사에 가게 되었다. 영어를 평소에 열심히 배우고 익히더니, 토익 점수가 높아 미군부대에 가게 되었다. 굉장히 영광스럽고 매우 기뻤다. 부대에 아들이 잘 있는 지 궁금하던 차에 오랜만에 가족이 용산으로 아들 면회를 갔다. 용산 미군부대에 진입하니 아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마중을 나와 반가웠다. 아들과 함께 마주 보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카투사 병들은 미군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한국의 지리와 기후에 익숙하지 못한 미군들에게 유능한 안내자가 되었고, 방어진지를 찾아내거나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는 일을 카투사 병들이 도맡아 하였다. 또한 전투기술을 익혀가면서, 두려움 없이 훈련하는 용감한 모습은 미군들에게 좋은 도움이 되었다.
용산 미군부대에 꼭 가고 싶었는데, 대견한 아들 덕분에 카투사들의 중요한 업무를 다시 한 번 확인 후 알게 되어 즐거웠다. 군대 이야기만 나오면 전에는 6.25 사변 등 어려운 상황이 회상 되었는데, 이번 용산 미군부대를 방문하고는, 그런 근심 걱정들이 사라졌다. 용산 미군부대인 카투사에 아들이 가게 되어 듬직하고 반갑다.
요즈음 아들은 내가 좋아하는 반찬도 여러 가지 해 주어 즐겁다. 나는 대안교실이나 창의논술 강사를 하는 데, 아들은 시간을 내어 아이들이 좋아하는 액션이나 애니메이션 영화도 여유 시간에 보게 찾아준다. 수필을 써서 수필창작에서 발표하기 전에 아들에게 보여 주면, 틀린 곳 수정이나 보완 사항을 알려주어 매우 흐뭇하였다.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사랑스런 아들을 칭찬하며 자랑스럽다.
얼마 전 결혼기념일에 녹차 맛 빼빼로를 선물로 주어 정겹고 고마웠다. 견과류나 필요한 물품도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해 주며, 매주 화요일마다 내 어깨 두드리기도 한 번씩 해준다. 건강하고 고마운 나날이 되고 있어 이런 아들을 주신 창조주님께 나는 늘 감사히 생각한다.
6 아들에게 보낸 100통의 편지
어느덧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8년 12월 28일 21살의 아들이 공군에 입대하던 날이다.
한 겨울이라지만,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는데, 우리 집안의 분위기와 가족들의 심경(心境)은 무척이나 썰렁하고 쌀쌀했다.
공군교육사령부가 있는 진주(문산면)까지 가는 동안, 차안에서의 우리 네 식구는 서로가 입대하는 아들의 눈치를 살피며, 각자의 아쉬움만 가득 찬 마음속 이별 준비를 하다 보니 600여리 먼 길임에도 일찍 부대에 도착했다.
부대 연병장에서의 입대행사는 환송가족 모두가 마치 군인처럼 교관의 지시에 절도(節度)있고 말없이 잘 따르지만, 행동과 마음은 무겁고 숙연하다.
장병들은 삭발한 머리가 어색한 듯 두 손으로 연신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모와 고향을 향해 마지막 큰절을 하고는 우렁찬 목소리로 ‘잘 다녀오겠습니다’한다.
잠시 후 썰물처럼 휩쓸려가는 대열속의 아들은 점점 멀어지더니, 이내 보이지 않는다.
허공으로 두 손을 크게 흔드는 사람, 간절히 합장 기도하는 사람, 멍하니 멀어지는 대열만 바라만 보는 사람 등 가족들의 입대 이별의 모습도 표정도 모두가 다양하다.
아들들이 보이지 않자 대부분의 가족들은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허망한 듯 돌아서는 모습에서, 가족의 진한사랑과 예나 지금이나 아들과의 입대이별의 고통은 여전히 변함이 없음을 동시에 실감했다.
청주로 되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지루하기만 했다.
며칠 후 입대시 입고 갔던 옷이 소포로 배달되었다. 바지주머니 속의 구겨진 종이쪽지에‘잘 있어 걱정 말고 사랑해’라는 다급하게 쓴 듯한 아들의 10자 한줄 메모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메모라지만,‘사랑해’라는 말에 헤어진지 1주가 1년이 넘은 듯 보고 싶다.
아버지로서 군에 간 아들에게 아버지의 정과 간절함이 담긴 첫 번째 편지를 쓴다.
나는 아들에게 네가 제대할 때까지, 24개월 보름동안 매주 한통씩 100통의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하였다. 매 주마다 일어나는 우리 집안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생생하게 써서 아들이 항상 가족과 함께 있다는 생각으로 군 생활동안 위안과 용기를 갖고, 가족의 그리움을 조금이라도 달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그 후 나는 약속대로 아들이 제대하던 2011년 1월까지 꼭 100통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는 제대하는 날 기념으로 그 100통의 편지를 소책자로 만들어 아들에게 제대선물로 주면서 부탁했다.‘아들아 잘 간직하였다가 나중에 너도 네 아들이 군에 가게 되면, 지금에 이런 추억과 함께 이 편지를 보여주고, 너도 아빠처럼 그렇게 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고 그리고 ‘네가 살아가면서 혹여 아빠한테 서운함이 있을 때 면 한번 씩 읽어 보렴’ 하였다. 나는 아들의 두 손을 꼭 잡고 함께 웃으면서 그동안 수고 했고, 장하다고 했다. 몸과 마음이 듬직하고 늠름했던 그때의 아들 제대 모습이 어제같이 생생하다.
오늘은 오랜 가뭄 끝에 6월의 반가운 단비가 온다. 아침 조간신문에서‘답장 없는 편지, 30년째 부치는 부정(父情)’이라는 기사가 크게 눈에 들어온다.
경북 경산시에 사는 전태웅(72세)씨가 30년째 매달 2-3통씩 답장이 오지 않는 손 편지를 쓴단다. 받는 사람은 그의 아들 고(故) 전새한 이병이다
그의 아들은 1991년 20살에 군에 입대를 했지만, 6개월 만에 부대에서 사고로 순직 현재 대전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그 후 전씨는 아들이 여전히 군에 복무중이라는 생각으로 고(故)‘전새한 이병 앞’이라고 적은 편지를 지금까지 대전 현충원으로 보내왔단다.
2012년부터는 대전현충원에도 누구나 하늘에 계신 호국영령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하늘나라 우체통’이 만들어 졌다니, 호국영령들과 보훈가족들에게는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들에게 900여 통의 편지를 보냈단다. 아버지로서 자식을 가슴에 묻은 단장지애(斷腸之哀)의 그의 애절한 아들사랑은 그 많은 세월도 어찌하지를 못했다. 조국을 위해 먼저 가 현충원에 잠든 우리 아들딸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이 어디 전태웅씨 뿐만 이겠는가?
6월은‘호국보훈의 달’이다.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품은 달이기에 마음이 더 아려온다. 덕분에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해본다.
지금에서 돌아보니 비록 편지였지만, 아들이 군복무시절 아들과의 진솔하고 정감있는 대화를 가장 많이 했고 즐거웠던 것 같다. 흔히 대부분의 아들들은 군 생활을 하는 동안은 일생에 있어서 최고의 효자가 된다고들 한다. 그리고 제대를 하면서 그 깊은 군대효심도 함께 제대를 한다고 한다.
이제 30대중반인 된 아들은 공직생활을 하고 있으며, 결혼도 하여 내게는 손자를 안겨 주었다. 요즘은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성실하게 자기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이 바로 효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아들내외가 세태변화를 핑계 삼아 무관심하고 소원한 듯 함에는 서운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고맙고 감사하다. 지금에 나의 이 행복이 군 생활 때 받은 아들의 반짝 효심보다 더 큰 효라고 생각한다. 아들은 여전히 내가 준 100통의 편지를 잘 간직하고 있다.
나는 훗날 손자가 군에 가게 되면, 그때는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로서 아들에게 했던 것 보다 더 정겹고 사랑스러운 편지를 손자에게 더 많은 쓸 것이다. 생각해보니 먼 세월의 아득한 일이다.
6월이기에 다시 한번 호국영령들의 명복을 빌며, 지금 이 순간에도 군에서 복무중인 우리의 아들딸들이 무사건승(無事健勝)하기를 부모의 심정으로 기원한다. <끝>
7 딸
여자는 나이 들면서 제일 필요한 것이 첫째가 딸, 둘째가 친구, 셋째가 돈이라 한다. 남자에게는 첫째가 부인, 둘째는 아내, 셋째가 와이프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남자에게는 나이를 들수록 아내가 있어야 되지만 여자들에게는 딸이 최고인 듯하다.
딸이 대학3학년 때였다. 평범하게 학교만 다닐 수 없다며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니더니, 외국에 가서 공부해 보고 싶단다. 유학을 갈 처지는 못 되었다. 캐나다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며칠간 외국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만 간단히 준비했다. 출발하던 날은 가족 모두가 잠도 못자고 어둠이 가득 찬 새벽4시에 출발하였다. 공항에 도착하고 보니,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억 만 리 외국 땅으로 가는 딸의 걱정이 이제야 실감한다. 학교기숙사는 잘 찾아 갈는지, 가서 잘 적응할지 걱정이 태산이다. 일 년을 고립무원인 낯선 곳에서 병이라도 난다면 어쩌나,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집으로 뒤돌아가자고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입 밖에 내지는 못했다. 출국수속을 밟는데, 마침 같은 또래로 같은 학교로 공부하러 가는 남학생을 만났다. 그 남학생도 부모님이 배웅 나왔다. 그나마 동행이 있다니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최소한 학교까지 찾아 가는 데는 도움이되리라 안도하였다. 게이트를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쩌면 마지막 모습 같다는 방정맞은 생각에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딸을 보내고 돌아오는 고속도로에는 안개인지 구름인지 자욱하여 시야를 방해하며 마음을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아내는 말없이 창밖으로 눈길을 돌려 눈물을 훔치고 있었고, 나는 캐나다 어디엔가 있을 것 같은 안개 자욱한 호숫가를 달리는 듯 한 환각 속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직선 도로를 달렸던 기억이 아련하다. 어렸을 때부터 제가 하고 싶은 것은 꼭 이루고 마는 고집스러운 데가 있어 믿음직스럽다. 그런 올곧은 성격을 가진 딸이 좋다.
지난해 딸이 제 엄마랑 스페인으로 9박10일을 여행하고 왔다.
그 여행을 이제야 기억하는 것은 그때 사진을 이제서 편집하여 같이 구경했다. 으리으리한 성당 건축물, 유명한 유적지, 멋있는 경치 등, 딸이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 사귄 스페인친구들 집에 초대받아 여행했다.
친구 가족들과 식사하며 파티 하는 장면, 코쟁이 친구랑 여행하며 찍은 사진, 만나본지 몇 년이나 지났는데 어찌 그리 친 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
아내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털 복숭이 아저씨(친구 아빠)가 인사하며 포옹 할 때 얼굴이 따끔거려 싫었다 하여 한참을 웃었다. 아내는 여행사에서 단체로 가이드 뒤만 쫒아다는 여행이 아닌, 스페인 일반가정에 초대 받고, 친구들이 멀리 한국에서 친구엄마 왔다고 친절하게 안내하며, 같이 구석구석 많은 것을 봤다고 은근히 딸 자랑이다.
나 역시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아내에게 그런 여행을 경험케 해준 딸이 은근히 든든하다. 그때 그 친구 중에 우리 집에도 초대 한 적이 있었다. 아내가 우리식 밥에다 국과 반찬을 상에 차려주고, 책상다리로 앉는 법과 젓가락질을 못하는 것을 억지로 쥐어주어 우리전통 문화를 경험케 하였다. 그들이 본 한국의 일반가정을 어떻게 평가 할지 궁금했다. 오랫동안 좋은 인상으로 남겨지길 기대하며 정성을 다해 대접한 기억이 아련하다.
회사가 서울에서 멀리 나주로 이사하여 주말이면 할 것 없다고 집에 자주 온다. 집에 오면 뭔 할 얘기가 많은지 제 엄마랑 옷 얘기를 비롯하여 자질 구례한 얘기에 내가 낄 공간이 없다. 늦게 까지 얘기하고는 이튼 날엔 쇼핑이라나, 눈 팅 이라든가? 를 간다. 나에게는 같이 갈 거냐고 묻지도 않고 아쉬우면 따라오라는 눈치다. 내 의견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 정해 버린다. 하는 수 없이 따라가는 때가 많지만, 퍽 재미있지는 않다.
지난 년 말 ”아빠 차 낡았는데 언제 바꿀 거야” “응, 지금은 돈 없고 퇴직하면 퇴직금으로 바꿀까” 했더니, 제가 새 차를 할부로 사 줄 테니 헌차를 달란다. 저는 초보인데다 주말에나 가끔 이용 할 텐데 새 차가 필요 없다고. 그래서 못이기는 척하고 난생처음 2천cc 중형차를 선뜻 사는 모험을 강행하여 잘 타고는 다니지만, 뭔가 딸에게 미안한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하다. 알뜰살뜰 아껴 힘들게 모은 돈일 텐데 나 편하자고 딸이 거금을 썼다.
그런 딸이 요즘은 또 바쁘다. 뭔가 또 다른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단다.
무의미하게 직장만 왔다 갔다 하는 것 보다는 시간을 좀 내서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고 이직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회사가 학교 가까이 있어야 공부하기가 편리하다고. 왜 학교 다닐 때 진즉에 하지 그랬냐니까.“아빠가 힘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 하여 마음이 짠했다. 그래서 면접도 보러 다니고 틈틈이 공부도 하는 모양인데, 제 엄마는 그게 또 걱정이다. 저러다 시집갈 생각도 않고 공부한다고 나이만 먹으면 어찌 하냐고 걱정이다. 제가 알아서 잘하겠지. 지금까지 잘해 왔지 않느냐고, 마음에 없는 퉁명을 떤다.
하긴 나 역시 주말에 집에 왔다, 일요일 저녁에 3시간 이상 버스 타고 가는걸 보면 안쓰럽다.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제 엄마 생각처럼 공부한답시고 혼기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스친다. 인생은 가장 가까운 곳에 행복이 있고, 평범한 곳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데. 하고 부질없는 생각을 떠올려본다.
8 딸의 삶
첫선을 보는데 평소 내가 동경했던 여인상 이어서 첫눈에 반해 결혼하였다. 아들 둘에 막내로 딸을 낳아 좋아서 자랑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막내딸이 어느새 대학 3학년이 되었다. 딸은 1991년 교육부 시책의 일환으로 일본 연수생으로 전국 각 대학생 공모에서 선발되었다. 딸을 배웅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대합실을 가득 메운 남녀 대학생들의 패기 넘치는 분위기에 사람 사는 맛이 그곳에 있는 것 같아 즐거웠다. 딸의 발랄하고 생생하면서도 청바지 차림의 수수한 모습과 밝은 얼굴에 구애됨이 없는 당당한 젊음을 부모로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사각모를 쓰고 새로 마련한 자전거에 책가방을 싣고 자갈길을 달리며 희망에 부푼 꿈을 안고 땀 흘리던 나의 학창 시절이 떠올라 지난날의 추억이 그리웠다.
딸을 배웅하고 귀가 중에 공항에서 보았던 하얀 모시 중의 적삼을 입고 즐거움에 딸과 대화하는 남학생 모습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았다. 아내에게 말을 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하였다. 딸의 연수가 끝나고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에 모르는 번호의 전화가 왔다. 낯 설은 청년의 목소리이었다. 부산에 산다며 신상을 간단히 밝혔다. 주인공은 모시 중의적삼 학생이었다. 주저함도 없이 “딸과 결혼을 허락하여 달라“는 내용의 전화다. 싫지는 않았지만 웬지 망설여졌다. 그래도 자신만만한 부산 사나이 용기가 가상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딸의 의견을 듣고 신랑감 가정의 근황을 알아보려고 아내와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역에서 신랑 될 사람에 안내를 받았다,
부산 산중 턱 아담한 건물에 시 할아버지 시할머니와 건장하신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함께 기거 하신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안쓰러웠기도 했다.
아내는 딸에게 고생하려 시집을 가느냐고 공부나 더하라고 말렸다, 나와 함께 살아오며 대식구 생활의 힘듦을 잘 알기에 걱정이 많았다. 딸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때 가야 한다”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귀가해서 딸에게 평소 아버지가 말하였듯이, “시집가서 어른 모시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잘 산다.”라고 타이르고 층층시하 종가 맏며느리로 시집 보냄을 아쉬움으로 남기고 결혼 준비를 했다.
양가가 오고 가는 예물은 마음으로 주고받기로 하고, 간소한 준비로 검소한 결혼식을 올렸다. 사위가 청주에서 직장을 갖고 생활하는 동안은 외손자 둘이 유치원 다닐 무렵까지는 한 동리에 살았다, 사위가 부산으로 발령나게 되어 시할아버지 미수(米壽) 연세에 부산 집은 대식구를 이루게 되었다.
딸은 부산에서 맏며느리 역할로 90세의 시할아버지 모시는데 어려움 없이 지낸다는 전화를 친정엄마인 아내에게 가볍게 전해욌다, 기력이 없고 변비로 딱딱하게 굳은 시할아버지의 변을 손가락으로 파낸다 했다. 굳은 변을 파낸 후 시원해 하시는 모습을 보면 불편한 마음보다 편안함이 이었다 했다. 딸의 효행은 고마웠으나 어려움을 보이지 않으려는 딸이 가엽게 생각되어 마음이 쓰라려 눈시울 적셨다,
시 할아버지 대 소변을 받아 내고 목욕을 정성 들여 한다는 밝은 전화 소리 너머로 딸의 해맑은 얼굴을 보는 것 같았고, 또한 넉넉함이 묻어나 듣기에 부담은 줄었으나 가슴 한편 아려옴은 어쩔 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약해지는 시할아버지의 치매 정도가 심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여 민망하였고, 역겨운 냄새가 코를 들고 숨 쉴 수 없어도 며느리가 담담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지켜본 시아버지는, 미안한 표정을 하셨단다, 그 이후부터는 시중을 못 들게 하고 시아버지께서 직접 모시었단다.
거동이 불편한 시할아버지가 96세에 돌아가시기까지 시부모님께서 돌보시는 일을 같이 옆에서 거든 것뿐이라고 말하는 딸, 철부지라고 생각하고 걱정해왔으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시집살이 잘 이어와 주어서 고맙기도 하고 가슴이 아리기도 해 눈물이 난다,
시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딸의 막내 시아버지가 아내에게 손자며느리 잘 두게 하여 고맙다는 인사로 큰절을 해 황송하게 받았다고 전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내 삶에 자식을 어떻게 성장케 했는지 모른다, 나는 모든 일에 긍정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가훈이 “긍정의 생“이다. 평소 두 아들과 딸에게 ”어려운 문제는 홀로 해결할 능력을 길러야 하며 불우한 이웃을 보면 측은지심은 잊지 않고 이웃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 “고 늘 말을 해왔었다. 막내면서 외동딸이지만 말썽 한번 없이 잘 성장해주고 시집을 가서도 시할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펴드려 시댁에서 귀여움을 받고 사니 부모 된 도리로서 마음이 가볍다. 늘 건강하게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도리를 잘 지키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뿐 이다.
9. 사랑의 선물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가장 먼저 하는 건 양치질과 눈을 씻는 일이다. 입 안이 쓰고 눈이 침침하니 저절로 세면대로 향하게 된다. 항상 나보다 일찍 일어나 기도를 하고, 따뜻한 물 한 컵을 챙겨주고 아침운동을 나가는 남편의 선물에“고맙습니다.”라는 첫인사로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사과를 깎아 해독 쥬스를 만들어 놓고 아침을 준비하면서 살아있음이 행복하다. 해독쥬스는 남편이 경동맥 수술을 한 2011년부터 시작한 특별메뉴다.
토마토와 양배추 부로콜리와 당근은 삶고 사과와 바나나를 함께 갈아서 준비한다. 채식을 주로 하는 식단은 준비과정이 분주하지만 남편의 건강은 내게 가장 큰 기쁨이다.
핵가족을 이루고 부부가 직장생활을 하는 요즈음은 가족의 생일이나 행사를 대체로 주말이나 공휴일을 택하고 쿠폰을 곁들인 축하인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일 년에 단 하루 내 생일날 아침만은 딸들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공주처럼 우아하게 맛있게만 드시면 된단다.
이번에는 먼 나라에서 살고 있는 셋째 딸이 4년 만에 특별휴가로 귀국을 했다. 엄마 생일상은 제가 차리겠단다. 시장을 보고 솜씨를 발휘하여 정갈하게 마련한 터키 음식을 곁들인 생일상은‘와! 일류호텔에 온 것만 같다’는 말이 툭 튀어나오게 했다.
아홉 살 손자와 네 살 난 손녀의 재롱잔치가 분위기를 돋운다. 처음 본 바이올린이 신기하다고 이모에게 벼락치기로 배웠다는 손자의 바이올린연주에 장난감 마이크를 들고‘생일축하합니다 …♬♪’를 노래하는 손녀의 깜찍하고 귀여운 모습에 온가족은 떠나갈듯한 박수갈채와 환호로 웃음꽃을 피웠다. 말도 생활환경도 다른 외국에서 공부를 하여 학위를 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감내한 고생이 얼마나 버거웠을까. 사십을 넘어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기르면서 겪었을 수많은 어려움을 호소하기는커녕 씩씩하고 당당하게만 보이려는 딸이 자랑스럽고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마음이 아리다.
엄마 아빠에게 아이들도 보여주고, 가족과 어울리며 짜고 맵고 칼칼한 한국 음식도 마음껏 먹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싶었다는 딸이다. 아이들에게 한국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여행과 놀이, 문화 체험으로 보내는 나날이 너무나 빠르게 느껴져 아쉽기만 하다. 귀국 날이 가까워지자 딸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안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쓸고 닦고 꼼꼼하게 말끔히 해 놓고는 엄마께 드리는 생일선물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힘들게 웬 대청소는 하느라고……” 목이메이고 눈물이 핑 돌아 떨어졌다.
“엄마, 울어? 나 하나도 힘 안 들어. 나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얼마나 좋은데 왜 그래!~~” 어미를 끌어안고 어르며 덩달아 울먹인다. 아이가 하나였을 때는 몰랐단다. 둘을 낳고 보니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참 우리 엄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인정 많고 여리지만, 강인한 성격은 홀로서기로 꿈을 이뤄낸 장한 딸이기에 많이 미안하고 고맙고 더 안쓰럽다.
1개월의 휴가기간을 마치고 떠나는 날 이른 아침이다.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냈는데 몸이 매우 힘들고 피로해 보인다. 막내딸과 인천공항까지 나가 배웅을 하고 돌아오면서 마음이 산란하다. 두 아이를 데리고 이스탄불에서 또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가야되니 저 몸으로 얼마나 힘이 들까. 특이 체질인 건강이 염려되고 걱정이 태산이다.
아침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나가니 환해진 공간에 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고달팠던 나의 삶은 친정집에 들어서면 긴장이 풀리고 늘어져서 먹는 것보다 눕는 것이 더 좋았다. 겨우 하룻밤을 자고 오는데도 편안하게 쉬고 먹고 자고 수다를 떨다가 그냥 오기가 일수였다. 그래도 부모님은 좋아하셨다. 부모 마음은 그런 것이었다.‘그냥 그렇게 쉬었다가 가지!~~’
사위가 마중을 나오고 잘 도착했다는 딸의 밝은 목소리에 마음이 놓이니 머물다 간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말을 유창하게 따라하며 재롱을 떨던 외손녀, 수영과 줄넘기며 비이올린을 배우며 좋아하던 외손자, 집안 가득히 널려있던 장난감이며 그림책들, 강아지까지 합세하여 정신 못 차리게 떠들썩했는데 빈 집처럼 썰렁하다. 한여름의 더위도 한풀 꺾이고, 청명한 하늘, 따가운 가을빛에 불어오는 소슬바람이 스산하게 느껴진다.
가방을 열고 딸에게 받은 선물을 꺼내 본다. 고운 비단조각 미사보주머니와 탐스런 장미가 수 놓인 하얀 미사보다. 선물로는 너무 작다고 그건 엄마가 사고 다른 것으로 하자는 딸에게“선물은 받는 사람이, 필요하고 갖고 싶어 하는 것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거야. 아무리 비싼 것도 필요하지 않은 건 소용이 없어, 성당에 갈 때면 꼭 챙겨야 하고, 미사 때마다 머리에 쓰고 기도하면서 생각날 텐데 그보다 더 값지고 귀한 선물이 어디 있느냐”는 긴 설명이 필요했다.
엄마가 해주는 건 다 맛있다면서 음식을 먹을 때마다 행복해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외손주들과 함께했던 날들, 솜씨를 내어 별식으로 생일상을 차리고, 집안청소를 하며 어미를 위한 딸의 선물은 사랑 덩어리였다. 여행의 피로가 풀릴 새도 없이 또 얼마나 바쁠까.
“엄마,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이렇게 많다고요~~”강의하는 영상을 보여주며 나를 으쓱하게 하던 딸을 생각하며 오롯한 마음으로 손을 모은다.
‘주님, 늘 감사하며 건강하고 기쁘게 행복한 삶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