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 | 연대 | 조선 | 중국 | 중 요 한 일 |
48 | 1565 | 명종 | 20 | 가정44 | 하면서 의좋게 지낸것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니 만년에 퇴계이선생과의 경례 왕복소서가 많이 보였으므로 가히 상고할만하다.임갈천이 인물을 논평할때마다 선생을 미루니 이는 노소가 동향에서 의좋게 지내고 침밀한 것이니 선생의 평생 온고하며 시종 심복함이 이와 같았다. |
49 | 1566 | 명종 | 21 | 가정45 | 아들 사악이 요사하였다. 선생이 벼슬자리에서 부지런하여 힘쓰는 일과 한가한 일은 반드시 그일을 다스리고 그날일을 마친 연후에나 마음이 편안하였다. 고을이 남방의 매우 바쁜곳이어서 문서 수작하는 일을 하루도 궐할 수 없어 노고가 쌓여 병이 되었으므로 드디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니 관에서 물건을 보냈는데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더러 명절이나 생일에 의복 같은 것을 보냈으나 또한 사양하고 그 뒤에 다시 그러한 일이 있었으나 여전히 거절하였다. 선생이 상하지간에 매양 틈이 날까 미안하여 받아서 이속에게 주고 친족을 찾아서 다주니 고을을 떠나는 날에 또 표요(담비가죽으로 만든 요)를 가지고 와 간절하게 주니 선생이 굳게 거절하고 받지 않아 계속하여 물고기 반찬과 곡포 여러 짐을 집에 실어다 주니 고기 반찬은 받고 포곡은 사양하여 사물을 바르게 판가름하니 권간의 자질이 선생의 청백함을 두려워하여 능히 탐종하지 못하였다. 일찍이 근거없는 훼방으로 선생을 흔들었으나 선생은 못들은척하고 대하기를 간격없이 하였다. |
50 | 1567 | 명종 | 22 | 융경1 | 아들 사심을 낳다. 선생이 거처하는 집에 당을 짓고 양휴라 편액하고 또 작은 집을 그 옆에 지어 칙암이라하여 자호로 삼고 거기에 경서를 많이 비치하여 사친접빈의 여가에 수정하고 수성하는 곳으로 삼았다. 2월에 이조참의로 임명되었다가 얼마후 청홍도(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되어 나갔고 6월에 명종이 승하함에 슬퍼하던 중에 병이 낫고 졸곡을 지나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또 전주부윤을 제수하였다. |
51 | 1568 | 선조 | 1 | 융경2 | 정부인이 병으로 일어나지 못하니 선생이 홀로 모부인을 모시는데 봉선하는 즐거움이 전일 같이 아니하고 또 국상을 만나 일이 많이 막히고 곤경에 빠졌으나 항상 지조를 잃지 아니하고 일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아 청신한 덕과 관유한 풍습은 구속을 취하여 움직였다. |
52 | 1569 | 선조 | 2 | 융경3 | 선생이 가장 존신하고 애완하는 것은 논어, 대학, 근사록, 심경뿐이었다. 항상 갑에 넣어두고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비록 관에서 종일 응수하는데 골몰하였어도 밤에 들어와 쉴때는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안ㅈ아 읽으며 실마리를 푸는 것으로 일과를 삼아 그 위기하고 근독하는 공부가 탁월하여 다른 사람의 미칠바가 아니었다. 항상 말하기를 “학문은 많이 말하는데 있지 않고 대학편 열여섯 말이면 족하다.”하였다. 이러므로 반평생 공력이 오로지 대학에 있었다. 대저 그 학문은 기록하고 보고 탐구하고 토론하는 것을 일삼지 않고 지극히 간락한 것을 위주로 하였다. 그러나 한 번 자취를 감추면 그 높은 식견과 원대한 지식을 나타내지 아니하므로 세상이 모두 선생의 덕량이었음을 알고 이같이 치밀한 것은 알지 못한다. |
53 | 1570 | 선조 | 3 | 융경4 | 벼슬이 만기되어 집으로 돌아갈때 용양위대호군이 되었고 11월에 홍문관 부제학으로 교지를 내려 부르니 부임하여 공직한지 겨우 한 달이 지나자 곧 상소를 하여 전에 귀양하는 이유로 지금은 더욱 벼슬에 있기 어려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