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안 상 명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 ♬ ♩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니하고 두우울이 아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찌 이세상에 생겨나와 ~
◆ 한맺친 사건
安氏 관향(貫鄕)인 순흥은 삼국시대 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으며 조선 초기에는 지금의 대학 격인 서원(소수서원)을 세울 정도로 영남지역의 문화 중심지로 그 명성을 떨쳤는데 북쪽에는 송악(개성)이 있고 남쪽에는 순흥이 있다고 할 정도로 큰 도시였다고 한다. 이처럼 명성을 떨치던 순흥이 멸망의 길을 걸은 것은 조선 세조 때 이곳을 근거지로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역모의 땅으로 지목되면서 부터였다. 모사 한명희의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한 살상이 시작되었고 우리조상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는데 일부는 북쪽으로 가서 영월에 정착한 친척도 있고 일부는 남쪽으로 가서 영양, 울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단다.
◆ 할아버지의 로맨스
어머니 ! 할아버지랑 할머니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우리 증조할아버지(義鎬)는 육척장신에 아주 건장한 미남이셨단다.
그래서 읍내 부잣집에 장가를 가셨는데 할머니가 부자로 잘살다보니 씀씀이가 너무 헤퍼서 재산이 거덜나고 말았단다. 그래서 그 아들(承龍)은 이웃 마을(두실)에 머슴살이를 갔는데 주인집에는 어여쁜 딸이 남편과 사별하고 친정에서 살고 있었단다. 그런데 머슴이 너무 잘생기고 부지런하고 마음씨도 착하여 두 사람은 남몰래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의 풍습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사랑이라 두 사람은 야간에 도주하여 멀리 깊은 산속(영양 수비)에 덜어가서 아들 삼형제(相德,相碩,相壽)를 낳고 잘사셨단다.
◆ 소쿠리 장사와의 첫사랑
아버지랑 엄마는 어떻게 만났어요?
아버지가 태어난 영양 수비는 산 높고 물 맑은 곳이라 싸리나무가 많았단다. 농한기에 싸리나무로 소쿠리를 만들어 읍내 장에 가서 팔고 생필품을 사서 돌아가곤 했는데 길이 멀어 당일 돌아가지 못하고 어머니가 사시던 마을(평전)에 아버지 고모 되시는 분이 살고 계시어 그곳에 자주 다녀가시곤 했단다. 그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잘생긴 총각이 마음에 드시어 중신을 넣고 결혼하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천생연분! 아들 딸 9남매를 낳고 고운 정 미운 정 나누며 두 분이 함께 80여년을 잘 사시고 계신단다.
◆ 무릎이 나왔어요
그 때는 지금처럼 시장에서 옷을 사지 않고 가족의 옷을 모두 집에서 길쌈을 하여 만들어 입혔다. 엄마들은 낮 동안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길쌈을 했다. 여름에 삼을 베어 삶아서 껍질을 베껴 하나하나 무릎에 올려놓고 손으로 비벼 실을 만들었다. 이때는 처녀들의 고운 무릎에는 피멍이 맺힌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은 베틀에서 엄마들의 신기한 손재주로 삼배옷감으로 탄생하는데 일부는 가족의 옷을 만들고 남는 것은 시장에 내다 판다. 우리 어머니는 솜씨가 좋아 늘 일등 상품을 생산하셨고 그 수입이 제법 가계에 도움이 되었지만 어머니는 날밤을 세울 때가 많았다. 어릴 때 이른 새벽에 어름푸시 잠이 깨면 그때까지 딸그락 딸그락 어머니의 베짜는 소리가 들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겨울에 입는 무명옷은 가을에 목화를 따서 씨를 빼고 물래를 돌려 실을 뽑아 베를 짠다. 밤 낮을 모르고 물래를 돌리다 보니 어느 때는 졸며 물래를 돌리다가 물래 위에 쓰러지기도 했단다. 하얀 무명옷은 때가 잘 타므로 다시 검은 물감을 더리고 그리고 풀을 빳빳이 먹여 정성들여 다림질하여 입힌다. 그런데 개구쟁이 어린 아이들은 얼마나 나부대는지 사흘도 못가서 무릎이 헤지는데 한 아이 기워 입히고 나면 또 한 아이 무릎이 - - -
◆ 발가락이 쏘옥.
그 때는 지금처럼 버스가 없던 시절이라 무거운 곡물을 머리에 이시고 15리(약 6km)나 되는 먼 길을 걸어 읍내 시장에 내다 팔고 운동화 한 두 컬레 사오셨다. 가고 오는 길에 때로는 억수 같이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기도 하고 무릎까지 쌓인 눈길에 발이 얼기도 했다. 한 아이 새 신발 신기고 돌아서면 다른 아이 발가락이 쏘옥 ~, 늘 어머니는 눈 코 뜰 사이가 없으셨다. 어머니가 무거운 농산물을 이고 다니시던 그 길을 승용차로 달려본다. 지금은 너무 멀다고 빈 몸으로도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없는 아득히 먼 그 길을 ~
◆ 발이 시러워
우리 동내에는 집 앞에 냇물이 흐른다. 지금은 멋진 교량이 놓여져 있지만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신발을 벗고 건너다녔다. 한겨울에는 냇물이 꽁꽁 얼어 그 위에서 썰매도 타고 팽이치기도 즐겼지만 초겨울과 이른 봄에는 살얼음이 언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찬물을 건너 학교가면 하루 종일 벌벌 떨다가 공부를 못한다고 기어이 업어 건너 주셨다. 한 아이 업어 건너주시고 돌아와서 또 한 아이 업어 건너주시고 - - - 어느새 어머니 발바닥엔 자갈이 얼어붙는다. 발이 시리다가 감각이 없어진다.
◆ 새벽 밥
우리 동내에서 중학교(평해읍 월송리)까지 약 2십 여리(8km)를 걸어 다녔다. 학교 시작이 9시니까 집에서 7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그러니 아침밥을 6시에 먹어야 하니 지금처럼 전기밥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을 지으려면 적어도 5시에는 일어나셔야한다. 한겨울 새벽 5시는 한밤중이다. 낮엔 농사일, 밤엔 길쌈, 새벽에 밥 짓기, 어머니는 진짜 진짜 철인 이셨나 보다. 한 두 해도 아니고 그 많은 형제들 모두가 졸업할 때 까지!
◆ 개란 밥
지금은 쌀이 남아돌아가고 잡곡(보리, 조)이 건강식품으로 인기 있지만 그때는 쌀이 귀했다. 학교에서 정심시간에 도시락을 펼치면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집 아이가 구분된다. 우리 집도 그런대로 잘 살았지만 늘 잡곡이 많았다. 한쪽엔 흰 쌀밥, 다른 한쪽엔 노란 조밥, 우리는 그것을 계란밥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기죽지 말라고 저는 껄끄러운 조밥 드시고 자식들 도시락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 형님 누나 장가 시집가시던 날
oo네 탁주 1말, xx네 감주(식혜) 1말, ㅁㅁ네 콩나물 1통 - - 이게 무슨 소리냐 구요? 지금은 잔치 부조 목록에 누구 몇 만원 - - 그렇게 쓰여 있지만 그때는 이웃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잔치에 부조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바지음식은 물론 혼수 이불, 신랑 신부 한복 등 혼수품은 모두 집에서 손수 만들었다. 옷장(농)도 가구점에서 구매하지 않고 오래된 오동나무를 베어 하나 하나 톱으로 켜서 나오는 판자를 대패로 다듬어 농을 만들었다. 이때 덤으로 책상도 만들어 어린 동생들이 공부를 잘할 수 있었지만 목수랑 일꾼들의 세끼 식사와 잠을 재우는 일은 어머니 몫이다. 그러니 결혼 날자가 잡히면 신랑 신부 엄마는 한두 달 전부터 거의 밤잠을 잘 수 없었다. 그렇게 곱게 꾸며 큰아들 말 태워 장가보내고, 두 딸들은 가마 태워 시집을 보냈다. 둘째 아들도 결혼식은 부산(예식장)에서 했지만 그때의 풍습에 따라 신행은 집에서 동내 잔치를 하느라 여러 날 손님을 치루셨다.
◆ 두루막 대령이요
지금은 조금 중요한 옷은 세탁소에 맡기고 웬만한 옷은 세탁기에 넣고 돌려서 그냥 말려 입으면 되지만 그때에는 빨래를 솥에 삶아서 머리에 이고 멀리 개울까지 가서 살얼음 깨고 손으로 빨아 풀 먹여 말린 다음 다듬 방망이로 두드려 펴고 두 사람이 빨래를 마주잡고 이글거리는 숯불 다리미로 다려서 바느질로 동전을 달고 그렇게 정성을 다해 준비해 두었다가 아버지가 외출하실 때 입고 나가신다. 그것도 외출하실 때 마다 새것으로! 게다가 9남매 11식구 대가족 입고 벗는 빨래는 얼마나 많았겠나? 생각하면 끔직한 일이지만 그래도 남편과 자식들이 밖에 나가 기죽지 말라고 정성을 쏟으셨다.
◆ 시퍼런 물속에 아이들 얼굴이 !
그렇게 그렇게 힘에 겨웠던 어머니 !
어느 때는 너무 너무 살기 힘들어 죽고 싶어 앞개울 물 깊은 소에 나가셨단다. 신발 가지런히 놓고 물에 풍덩 뛰어 들려는데 시퍼런 물속에 어린 자식들 얼굴이 하나 둘 떠올라 되돌아 오셨답니다. 어머니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진짜 진짜 잘하셨습니다.
◆ 지금은
큰아들(啓修)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 되었고,
둘째(在修)는 나라를 지키는 국군장교,
셋째(道修)는 회사 중역 이사,
넷째(淸修)는 자수성가하여 회사 사장,
다섯째(能修)는 대기업 현장소장,
여섯째(哲修)는 멋진 훈장 선생님,
일곱째(鍾修)는 교회목사,
이제 대견한 자식들이랑 사랑스런 손자들을 보노라면 힘들었던 지난날이 눈 녹듯이 사라졌데요.
어머니 감사합니다.
꽃다발 한 아름 선사 드릴께요,
그리고 이제는 저이들이 어머니를 지켜 드릴께요.
(2011. 3. 20. 고향 시골에서 어머님을 보살펴 드리며 지난 세월의 이야기들을 남겨보았다.)
첫댓글 읽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저희 세대가 얼마나 편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 생각하며 제 생활을 되돌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 작성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큰아버지
너는 과연 훌륭한 멋진 훈장이다. 파란 많은 安시 가문의 역사와 , 생계도 못 해결 헤서 아웅치는 시대에 아버지 ,어머니 눈부신 노력과 , 남보다 룰륭한 생각으로 우리 九남메 을 잘키우신 부모님의 은공은 무엇으로 보답하리 ........
아른히 떠오르는 생각의 조각들...퍼즐처럼 맞춰본다..
산길따라,들길따라,물길따라 할메하고 장에 가던길..
흰 두류막에 갓쓴 여려친지 어른들..
삼베옷 입은 아낙네들..
지계지고 가는 아저씨..
할배가 장에서 자주 사주시든 뜨건뜨건하고 김이 모락모락나던 놋그릇에 담긴 떡국...
[발이 시려워]에피소드는 지난 서빈이 돌잔치때 붉은바위 작은아버님께서 해주셨던 적이 있어요.
작은 아버님께서.. 할머님께.. "엄마 옛날에는 애들 그냥 쉽게 키웠잖아요" 라고 말씀하셨다가
크게 야단 맞은 적이 있으시다면서.. 그때 그 에피소드를 들으면서 참으로 대단하시다..라고 생각했는데..
초당작은아버님의 이 글을 읽고 있으니.. 절로 코끝이 찡해지네요..
[시퍼런 물속에 아이들 얼굴이] 얘기는.. 참.. 찡하고.. 부모님들 생각이 나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