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정 이지연 선생님 / 작가세게
궁체에 삶을 싣고
줄장미가 휘늘어지게 핀 여름날 종로에 있는 난정 이지연 선생댁을 찾아갔다. 난정선생과 대화하면서 “이름에 매이지 말고, 꾀의 창고가 되지 말고, 쓸데 없는 일 떠맡지 말고, 앎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장자의 말이 생각났다. 이 말은 난정선생을 만나면서 참으로 선생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었다. 한평생을 한글서예를 해 오신 선생께서 명함도 없이 소박하게 메모지에 메모를 해 주시는 모습은 이름에 매이지 않음이요. 오직 한글 하나로 외길을 걸어오신 과정은 바로 꾀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게 살아오신 모습이요. 괜한 일에 정신과 몸을 허비하지 않고 정진하신 모습에서 쓸데없는 감투를 물리치신 것이요. 아침마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비춰보면서 수많은 비움을 통해 늘 새로운 마음으로 서예를 대하였기에 단아한 궁체를 닮은 우아한 모습이었다.
난정(蘭汀) 이지연(李知姸) 선생은 조선시대 후기 대학자였던 성호와 동국진체로 우리서예의 주체성을 부각시켰던 명필 옥동의 후손으로서 1936년 경기도 화성 반월에서 이순구씨와 원용희여사의 6남매 가운데 장녀로 태어나 부천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부천초등학교와 인천여중에서 한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타고난 수재였다. 가족들이 거의 서울대학교에 진학하는 학구적인 집안의 영향으로 어릴적부터 학습열과 연구열이 남달랐던 선생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현 인문대학)에서 독일어를 전공하였는데 1960년 졸업하자마자 고등학교 교사와 서강대학교 강사로 독어를 지도하였고, 1983년도부터 서울교육대학교에서 한글서예를 지도한 이래로 1992년부터 예술의 전당, 2001년부터 경기대학교 전통예술대학원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또한 선생의 작가적 활동은 국전을 거쳐 1982년 미술대전 초대작가로 등단하여 90년대 초 갈물한글서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두 권의 작품집과 궁체교과서인 『옥원듕회연』, 논문인 <궁체미학> 등을 발표한 이론과 실기를 갖춘 한글전문작가이다.
우리는 이 글에서 국전시대부터 한글서예로 명성을 얻은 난정선생의 과거작품과 현재의 고민 그리고 미래의 꿈에 대해서 먹향이 번지듯 은은하게 펼쳐 보려고 한다.
현모양처와 작가의 두 갈래 길
여성작가들이 갖는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가 어떻게 육아와 작품활동을 무리없이 잘 병행할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난정선생의 삶을 통해 그 해법을 구할 수 있을듯하다. 우리는 선생의 어린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서 성장기부터 두 마리 토끼를 잡아온 선생의 삶을 엿보기로 한다.
학동기 선생은 부천초등학교 습자시간에 글씨를 잘 써 담임선생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인천에서 상을 받을 정도로 일찍부터 서예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중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바쁜 가운데도 묵향을 멀리 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이후 독문학에 심취하여 문리대 논문집에 대표논문을 실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서예를 할 시간이 부족하자 붓을 책상앞에 걸어두고 바라보면서 마음으로 글씨를 쓰는 연습을 하곤 하였다.
1960년 의과대학 의사였던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교직과 가사일 그리고 육아의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서예에 대한 열정은 버릴 수 없어 가끔씩 자습을 하였다. 그러나 혼자서 공부하는데 한계를 느끼게 되자 1970년대 초반 꽃뜰 이미경선생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이 시기 선생은 아이들이 학교간 사이에 글씨공부를 하였고, 아이들이 귀가하면 학습지도와 가사일에 최선을 다했다. 선생댁의 가훈이 “성실”과 “정성”인데 모든 일에 성실하게 정성을 다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자식들에게 강조하였고, 스스로 노력한 댓가는 반드시 하늘이 갚는다는 것을 자식들에게 몸소 실천함으로써 보여 주었다. 그런 엄격한 가정교육 덕분에 장남 병준씨(44세)는 서울대를 졸업하여 한림대 사학과 교수(동양사)로 있고, 차남 형준씨(38세)는 중앙대 의대교수(소화기내과 전문의)로 재직하고 있고, 장녀 희정씨(42세)는 이화여대를 졸업하였고, 첫째 며느리 임영애씨는 경주대 교수(미술사학)이고, 사위 윤의준씨는 서울대 공대교수(재료공학)로 있다. 남편은 병리학의 대가인 김용일(가천의과대학 총장)씨로 지금도 왕성한 학구열로 의학전문서를 집필하고 있는 학자형 전문의이다. 작은 대학을 설립해도 될 정도로 학자집안을 일군 성공적인 자식교육의 공을 모두 남편에게 돌리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의 미덕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렇게 남편과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면서 어떻게 공부를 하였느냐고 묻자 아이들과 남편이 공부할 때는 곁에서 먹을 갈면서 시중을 들고 모두 잠자는 시간에 혼자서 글을 썼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밤 시간에 홀로 깨어 적공의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이 때의 감회는 자작시조 <궁체 쓰는 밤>에 잘 나타나 있다.
“한밤중 밀려오는/ 마음의 물결위에// 떨리는 선율있어/ 붓끝에 싣노라면// 천지도 감싸주는듯/ 숨을 죽인 이 고요//, 흐르는 숨결따라/ 붓길좇아 가노라면// 맺히고 풀어주다/ 숨돌리며 감아쥔다// 이밤사 젖어든 가슴/ 담아주는 지필묵//, 번지는 오색물을/ 궁체로 풀어내면// 비단올에 물이 들듯/ 올올이 감겨들고// 벙그는 글꽃송이는/ 무지개빛 고와라//”
이와 같이 선생은 보통주부가 학창시절이 끝나면 책을 손에서 놓는 것과 반대로 지금까지 서예와 시조 공부를 위해 촌음을 아꼈다. 자식들과 남편을 돌보면서도 시간을 쪼개 스스로 붓농사에 나태해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먹을 갈았기에 오늘날 다복한 집안과 넉넉한 예술세계의 양날개를 동시에 펼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궁체에 쏟은 예술혼
난정선생은 2002년 서예학논문집에 발표한 <궁체미학>이란 논문에서 궁체의 아름다움을 10연의 연시조로 우려내고 있다. 그 중 4연에서 “나무도 맑은바람/ 가지끝에 풀어이듯// 글씨의 매운향훈/ 끝자리에 일고있네// 판본에 끝동을달고/ 궁체기품 더높아//”라는 연과, 10연의 “소박하고 다소곳한/ 한국의 여인들이// 손끝에 가슴 끝에/ 떠올리는 둥근달을// 궁체로 받쳐든맵시/ 갈물처럼 고와라//”라는 구절에서 궁체의 아름다움을 잘 형용해 내고 있다. 또한 이 논문에서 궁체의 미학적 특징을 곡선의 미학으로 규정하면서 그 예로 시옷(ㅅ)을 비롯한 ㅈ, ㅊ, ㄱ, ㅋ 등은 모두 눈여겨 볼 곡선의 아름다움이 담긴 획으로 그것은 마치 우리 전통저고리의 앞섶과 한옥지붕의 추녀선이 보여주는 곡선의 미와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궁체의 특징에 대해서 “우리민족의 고유한 멋과 얼이 담긴 궁체는 매무새가 단아하고 깔끔하다. 글자의 획수가 간단한 만큼 점과 획이 군더더기 하나없는 세련된 획을 요구한다. 궁체의 획은 외유내강적인 것으로 운필에서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단아한 궁체를 쓸때는 현악기를 타듯 섬세하게 운필할 수 있어야 격조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궁체는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임에 틀림없다”는 논지를 펼쳤다.
우리는 위의 글에서 평생 동안 궁체사랑에 빠진 선생의 궁체관을 엿볼 수 있다. 궁체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70년대 초반 꽃뜰 이미경 선생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혼자서 하던 공부가 진일보하지 못하자 수소문 끝에 꽃뜰선생을 찾아갔다. 궁체의 특징을 살려내는 점획법에 대해 지도를 받자 금새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예백일장 장원을 하였고, 뒤이어 국전에 도전하였다.
1975년 국전에 첫 출품해 입선을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는데 인사동에서 낙셩비룡을 입수해서 열심히 임서한 결과였다. 서단에서는 무명의 신인이 한글궁체로 입선을 하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다음해는 지난해의 국전심사가 문제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공개심사로 전환되던해였는데 장서각에서 옥원듕회연 흘림을 대출받아서 부지런히 임서해서 출품하였는데 당당히 특선의 영예를 안았다. 여성작가로서 한글로 국전에서 처음 특선의 영광을 안았던 것이다. 그것은 공개심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선생의 서사능력이 공개적으로 인정된 셈이었다. 당시에는 특선을 하면 선생의 문하에서 독립시키는 풍조가 있어서 그 이후로 거의 혼자서 자신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야만 했다. 이미경 선생의 지도아래 갈물 이철경선생과 일중 김충현선생, 여초 김응현선생께서 공부과정에 많은 조언을 해 주신 분들이었다. 1981년 30회 마지막 국전에서 특선을 한 <농가월령가>(그림 1)를 보면 세로획의 기필이 다소곳한 곡선의 멋을 지닌 가운데 힘이 응축되어 있고, 고전을 충실하게 임서한 흔적이 고스란히 보인다. 1983년 작품<시조>(그림 2)는 공모전에 출품할 때처럼 정성이 가득담긴 작품이다. 이 시기의 작품은 꽃뜰선생과 갈물선생의 영향이 많았고, 고전의 기본을 충실히 지킨 작품들이 많았다.
90년대 접어들면서 선생의 작품은 직접 짓고 쓰기 시작한 작품들이 두드러지게 많아진다. 내생각이 아닌 남의 사상이 담긴 글을 쓰는것은 온전한 나의 작품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가능하면 자신이 자작한 글을 쓰고자 노력한 것이다. 1995년에 발표한 <우리글 우리글씨>(그림 3)는 광복 오십돌을 기념해서 직접 짓고 쓴 작품으로 반듯한 정자체의 단정한 맛을 잘 살려내고 있다. 1998년 발표한 <궁체별곡>(그림 4)은 흐름이 유려하고 삐침획의 곡선미가 잘 살아있다. 이와 같이 90년대의 작품들을 보면, 선생 나름대로 자신의 양식을 굳혀 나가는 시기로 보이며 아울러 갈물한글서회 회장직(90~92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시기였다. 제6대 갈물한글서회 회장에 취임하면서 『갈물이철경서집』을 발간하였고, 갈물회 회관을 마련하기 위해 건축기금을 조성하기 사작하였으며, 모든 사무적인 절차를 반석위에 올려 놓은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2000년 이후 선생의 작품은 이제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묵향에 가락실어』라는 자작 시조를 직접 정갈하게 써낸 서집을 발표하는 첫 개인전을 가지면서 시화를 겸전하는 작가로 우뚝하게 섰다. 여초선생은 이 전시를 평하면서 “난정여사는 궁체를 정확히 익혀 자유롭게 붓을 휘두를 뿐 아니라 때로는 정자, 흘림, 진흘림까지도 뒤섞어 혼연일체감이 들게 한다”라고 하였고, “문장에 있어서 자작시조를 써서 자기경지를 신선하게 개척하였다”라고 상찬하였다. 작가 스스로도 오랜세월 동안 먹을 갈고 붓끝을 세워 오로지 외골수 한글궁체만을 쓰는 동안 가슴 깊숙이 시정(詩情)이 움텄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갈물서회 회장을 할 때 회원들에게 시조짓기를 권장하였으며, 시조학습을 위해 정완영 시백을 위촉해 회원들이 시조공부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 후 한글서예가들이 자주 자신의 자작시를 자신의 글씨로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한글서단을 위해 보이지 않은 큰 공을 세운 것이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2000년 32회 신사임당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다.
첫 개인전 때 발표한 작품을 보면 이제까지의 공부가 농축되어 개성적인 양식으로 피어난다. <인왕산>(그림 5)은 획과 획 사이의 연결은 부드럽게 하면서도 문자의 속도감은 살아난다. 한층 원숙해진 점획조형은 안정감과 단아함이 물씬 묻어난다. 2001년 발표한 <축복의 나라>(그림 6)는 두 구 가운데 공간을 준 점과 점획의 여유로움에서 감상자들로 하여금 여유를 갖게 하는 작품이다. 이 전시에서는 옥원듕회연 등 고전를 바탕에 깔고 내용은 생활주변의 사물과 생활속에서 느낀점들을 담은 자작시들이 주를 이루었다. 시서(詩書)를 함께 병행해 온 첫 결실전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첫 개인전이 끝난 뒤 선생의 작품은 일변한다. 한문의 행초서격에 해당하는 흘림과 진흘림을 응용한 작품들이 다양하게 발표되고 있다. 그 시발점은 2004년 열렸던 “난정 이지연 한글전”이었다. 이 전시 이후 발표하는 작품들은 이제 고전에서 성큼 나아가 독자적인 양식을 선보이고 있다. 2004년 발표한 <성경구>(그림 7)에서는 흘림, 진흘림과 서간체를 혼용해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강약을 준 획들로 마치 한자서예의 행초서를 보는듯이 자유분방한 운필을 하고 있다. 2005년 항주국제전에 출품한 작품(그림 8)에서는 천의무봉이랄까 방필과 원필, 비균형, 비균제의 멋을 살려 붓가는 길에 맡겨 무심으로 운필한 듯하다. 이 작품을 본 중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서예이론가이며 중국미술학원의 교수인 왕동령(王冬齡)은 “난정 이지연 여사의 서예는 한글고유의 조형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특히 필세에 있어 한문 초서의 필의가 농후하여 절주감(節奏感)과 예술적 표현을 한층 더 끌어올려 표일하고 질박하고 생동감있는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라고 평하고 있다. 같은 해 발표한 <잠언 구>(그림 9)는 궁체 못지 않게 한문을 연찬한 운필로 근골과 미세한 절주를 살려낸 고체이다.
2006년 발표한 <성경 구>(그림 10)는 마치 연면초서를 보는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한층 더 심화된 속도감과 균일화된 세로획에서 벗어나 역동성을 더 느끼게 한다. 2006년 발표한 <수호천사기도문>(그림 11)은 연면초서를 연상하게 하면서도 날카로운 선질과 굵은 선질로 대비를 준 작품으로 이제껏 공부하고 다듬어왔던 것들을 풀어헤친 분위기이다. 2006년 발표한 <새>(그림 12)는 한자서체의 방원필과 속도감을 그대로 살려서 대소강약을 드러내는가 하면, 윤갈, 비수, 농담 등의 먹맛까지 드러난다. 이 작품을 보면서 젊은이 못지 않은 창작열로 또 다시 어떻게 선생의 작품양식이 변해나갈지, 앞으로 어떤 작품들을 선 보일지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와 같이 선생의 작품은 최근들어 급변하고 있다. 한글궁체에서 얻은 간결하고 정제한 맛, 장식적인 맛을 한자서예와 접목하여 행간의 변화, 자형의 변화, 장법의 변화, 점획의 연속성 등 여러 가지 기교를 부가하여 한 차원 높은 자신만의 예술적 단계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보여진다.
자연속에서 서예를 배워라
최근 유렵여행을 다녀온 난정선생은 훌라밍고를 보면서 방필과 원필의 조화를 생각하였고, 운필의 속도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궁체야 말로 한국인의 아름다움을 대변하는 가장 우리민족의 정체성이 담긴 서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는 궁체의 특징을 한 마디로 “단아하고 간결하면서도 그 속에 빼어난 우아함이 담겨있다”고 평한다. 처음 궁체를 배우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접근하면 좋겠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점과 획이 서법을 준수하고 있고 글자구성에서도 공간배분이 미적으로 완벽하고, 선질에서도 군더더기 하나없는 말쑥한 “옥원듕회연 권지육”을 배우기를 권한다. 행서격인 흘림에는 낙셩비룡을 추천하고 초서격인 진흘림에는 봉서를 권한다.
선생이 감명깊게 읽은 책은 성경이고, 좌우명은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열심히 노력하자”이다. 제자들에게는 “자연이 스승이니 자연을 통해 서예를 체득하라”고 항상 가르친다. 그렇다. 그는 여행을 통해 정서를 여유롭고 폭넓게 하고, 궁체의 사선은 우리주변의 곡선을 바라보면서 생각하고, 무진장한 산야에서 얻은 느낌들을 가지고 한국의 멋인 궁체를 바라보라고 주문하고 있다. 특히 여성작가들에게는 “자기의 임무를 완성하고, 시간을 지혜롭게 배분하여 잘 활용해야 가족들에게 지속적으로 예도의 길을 지원받을 수 있다”고 충고한다. 앞으로 선생의 꿈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 봉사하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작은 붓대를 가지고 즐겁게 작품에 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궁체는 우리민족의 매무새이다. 붓 한자루로 평생 동안 티없이 맑고 단아한 궁체를 연마하였고 그 궁체를 바탕으로 이제 훨훨 비상하려고 하는 선생의 모습은 물가에 피어있는 한 촉의 난초와 같았다. 은은한 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절대 쉬이 부러지지 않은 난초처럼 궁체를 예도의 동반자로 삼아 40년 동안 연마하는 붓 끝에 마음을 싣고 흔들리지 않고 외길을 걸어온 선생의 시조가 귓가에 남는다. “끝간데 모르는 예도/ 곧은 붓대 한 자루여”.
삼도헌에서 정태수(jts2003@hanmail.net) 이 글은 월간서예문화 2006년 8월호에 실려있습니다.
비엔나 여행을 하면서
중국의 서법가 협회 심붕주석과 함께
사임당상을 수상하고 남편과 함께
생일잔치에서 가족과 함께
갈물서회 후배들과 함께
개인전 오픈할 때 이미경선생님과 함께
박근혜대표와 여초선생님과 함께
난정 이지연 선생님 최근모습
부군과 단란한 한 때
조종숙 김단희씨와 함께
옥원듕회연 출판기념회에서 좌측 이미경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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