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년 전 오늘(1905. 1. 1), 대구역에서는 희뿌연 연기를 뿜으며 힘차게 달려온 철마가 처음으로 칙칙폭폭의 아련한 꿈을 펼친 날입니다.
1898년 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도 건설을 위한 측량과 함께 경부선철도주식회사가 일본의 자본으로 설립되고, 1901년 8월 20일에는 서울 영등포에서 북부 기공식이 있었고, 같은 해 9월21일엔 부산 초량에서 남부 기공식이 있었습니다.
경부선 철도 건설의 1차적인 목적이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이기 때문에 거국적인 저항과 반대로 공사는 지지부진 했습니다. 부지확보와 폭설과 잦은 홍수는 더욱 공사 진척을 저해했습니다. 일례로 대구서 성주를 거쳐 김천으로 가게 되었던 최초의 설계가 성주 군민들의 완강한 반대로 왜관과 구미를 통가하도록 설계가 변경되는 것과 같은 일들이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답보상태에 머물렀던 공사가 힘을 받기 시작한 것은 러일전쟁의 임박으로 군대의 수송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군수물자의 신속한 이동을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을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이 졸속공사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전운이 감도는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1904년 겨울 서울기점 323km에 대구역사가 건립되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초가 역사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낭만과 토속적인 정이 물씬 풍기는 풍경입니다.
<1905년의 대구역 모습>
이어서 1906년에는 서울~신의주 간의 경의선이 개통되고, 1908년에는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유명한 급행열차 융희호가 달리게 됩니다. 시속 40km의 속도로.
1936년 11월 1일부터는 부산에서 북경까지 직통급행열차가 운행되었습니다. 그때 연휴 다음날의 대구 풍류객들사이에는 으레 심양이나 북경 가서 한잔 하고 돌아온 영웅담(?)이나 객기가 화제에 오르곤 했습니다.
조국광복과 더불어 철길은 동강나고, 6.25는 수많은 피난민들을 대구역을 통해서 쏟아냈습니다.
10월 항쟁을 비롯해서 각종 시위의 단골 장소로 지정돼 민주화의 장으로 자리매김했던 대구역이 2003년 1월에는 10층짜리 민자 역사가 들어서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