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불교의 역사성에 대한 고찰 진관 (문학 박사 )
1. 서론 2, 양곤의 불교 3. 바간의 불교 4. 민군의 불교 5. 만달레이불교 6. 헤호의 불교 7. 결론
1. 서론
미얀마는 불교의 나라다 미얀마를 보지 않고서는 불교의 바른 정신과 사상을 접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나라다 불교가 처음에 인간 세상에 보였을 때에 그 역사를 접할 수 있는 나라, 특별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얀마 국민들의 불심관이다 미안마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하여 온 몸으로 지킨 미얀마인들에게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미얀마에 불교를 접하고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미얀마가 불교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점에 대하여 분단이라는 이름으로 민족을 지키지 못했던 한국의 불교를 반성적 입장에서 참회를 미얀마 부처님 도량에서 기도했다 그 많은 외세의 침략이 있었는데도 불교가 그대로 전해진 것은 미얀마인들의 지혜가 그만큼 크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침략자들에게 미얀마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굴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미얀마는 황금의 나라다 미얀마는 몽고로부터 침략을 받았고 근대에 와서는 영국으로부터 100년간의 지배를 받았고 일본이 미얀마에서 3년간 전투를 강행하여 일본인들이 8만 명 이상 전사한 나라다 「미얀마로 하여금 벵골 만 지역에 대한 영국의 주도권을 인정하도록 만들어 미얀마의 지위를 약화시킨 3차례의 싸움(1824~26, 1852, 1885).제1차 전쟁은 미얀마 서부 아라칸과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치타공 사이의 분쟁에서 비롯되었다. 1784~85년 미얀마가 아라칸 왕국을 무찌른 후 아라칸 피난민들은 북쪽의 영국 영토로 들어갔다. 이들은 벵골의 보호구역에서 군대를 조직해 국경을 다시 넘어 아라칸에 주둔중인 미얀마를 공략했다. 아라칸 애국지사들이 음로하웅 왕국의 주도(州都)를 점령했다. 미얀마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벵골 만을 넘어들어 왔다가 벵골 지역 지배자들의 공격을 받아 철수했다. 1823년 미얀마군이 다시 국경을 넘자 영국은 이에 무력으로 대응했다. 영국 원정대는 한 차례의 싸움도 없이 항로를 통해 양곤에 상륙했다(1824). 삼각주 지역을 점령하고 수도를 위협함으로써 미얀마를 항복시키려 했던 영국의 의도는 미얀마인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1825년 영국령 인도 군대는 북쪽으로 진격했다. 아바 남쪽 소규모 전투에서 미얀마 장군 반둘라가 전사했으며 그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제1차 전쟁은 얀다보 조약을 맺어(1826. 2) 종결되었다. 영국의 승리는 인도의 우수한 군수 물자가 우기가 2번이나 지나도록 계속된 전쟁을 뒷받침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영국군이 지휘한 인도군에서는 1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왔다.25년간 평화가 지속된 후, 영국령 인도 정부는 해군 관리 코모도르 램버트를 랑군에 파견해 영국 상인들의 애로점을 조사하게 했다. 램버트가 미얀마 국왕 소유의 배를 나포하자 제2차 전쟁이 시작되었다.1852년 7월경까지 영국은 하(下)미얀마의 항구들을 점령하고, 수도로 진군하려 했다. 영국령 인도 군대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미얀마 중부의 티크 삼림지대를 점령했다. 미얀마의 새로운 왕 민돈 민(1853~78 재위)은 영국군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영국은 이 요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더이상 북쪽으로 진격하지는 않았다. 양측이 모두 곤경에 처하자 싸움은 간단히 끝났다. 영국은 이제 하미얀마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미얀마 왕실의 공식적인 인정은 없었다. 민돈 민은 다시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응할 방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행정개혁법안을 만들어 미얀마가 외국의 요구를 더 잘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영국을 몰아내기 위해 그는 프랑스에서 온 사절단을 환대하고 프랑스에 밀사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영국의 의심을 사게 되어, 영국과 미얀마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티바우 통치기간(1878~85)에 영국은 상(上)미얀마를 무시한 채 라오스·베트남·윈난[雲南] 지역 등에서의 프랑스의 움직임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뒤의 영국과 프랑스 간의 긴장은 프랑스가 의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얀마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흘루트다우(각료회의)가 프랑스의 총리에게 상호방위조약을 제안하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영국의 하미얀마 티크 독점권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다. 반면 흘루트다우는 봄베이미얀마무역회사가 퉁구로부터의 티크 반출량을 줄여서 보고한 것에 대해 벌금을 부과했다. 이러한 행위는 영국군을 자극했다. 1886년 1월 1일 영국은 상미얀마의 합병을 선언했다. 이로서 콘바웅 왕조가 무너지고 미얀마는 식민지가 되었다. 제3차 전쟁은 확대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그러나 영국 지배에 대항하는 저항 운동은 이후 4년 동안 계속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http://enc.daum.net/)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미얀마는 민족의 유산인 불교의 유적지를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도시 마다 탑을 모시고 있는 것에 대하여 내 자신은 미얀마가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화의 나라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얀마는 영원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인간의 존엄성을 성찰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점성가에 의하여 '자따'라는 출생표로부터 득도식 거행하기에 좋은 날짜와 시간이 결정되면, 모든 친척들과 친구들, 그리고 이웃들에게 득도식의 날짜와 시간을 알린다. 이때 소년의 집에서는 득도식 축하연회를 준비하며 친척과 이웃들을 이 연회에 초대한다. 연회를 좀더 성대하게 하기 위해 친척과 이웃들이 돈이나 음식물을 보내기도 한다. 득도식 당일이 되면 소년은 얼굴에 화장을 하고 몸을 화려하게 치장한 후, 말이나 혹은 아름답게 장식된 우차 또는 마차, 수레를 타고 마을 안을 돈다. 이때 밴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친척과 이웃, 친구들이 즐겁게 소년의 주위에서 득도식을 축하한다. 마을 안을 다 돌고 나면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 삭발을 하고 목욕재계한다. 목욕이 끝나면 밝은 색 미얀마 남성용 로웅지(lounji)인 빠소(pahsou)를 입은 채, 초대된 여러 승려들 앞으로 나아가 엎드려 세 번 절한 다음, 합장한 두 손을 들고 경건하게 일어선다. 그러면, 이때 소년은 수도승으로 인정되고 수도승의 한 일원으로 공포되어 정식으로 미얀마어로는 띵깡(thingan)이라고 불리는 가사를 걸치고서 그 길로 불문에 들어가게 된다. 소년의 입문하는 때를 맞추어서 소년의 집에서는 축하연회가 시작되고 시작된 연회는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된다. 미얀마에서 득도식을 마친 소년이 불문에 입문하는 기간은 따로 특별히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그 기간은 대개 부모의 신앙심에 따라 결정된다. 불교도의 사순절 기간인 와두잉 전 기간을 입문시키는 엄격한 불교도 부모가 있는가 하면, 1주일 정도 입문시키는 부모도 없지 않다. 이 득도식에서도 명명식에서처럼 낫에게의 공양은 빠지지 않는다. 득도식을 마치고 불문에 입문하게 된 수도승은 그 입문 기간 동안 엄격한 수도생활을 해야 한다. 특히 다음의 10계를 지켜야 한다. 첫째 살생하지 말 것, 둘째 도둑질하지 말 것, 셋째 간음하지 말 것, 넷째 거짓말하지 말 것, 다섯째 독한 술을 마시지 말 것, 여섯째 정오 이후에는 먹지 말 것, 일곱째 노래하거나 춤추거나 어떤 악기도 연주하지 말 것, 여덟째 얼굴에 화장하거나 몸단장하지 말 것, 아홉째 단상이나 높은 곳에 앉거나 서거나 잠자지 말 것, 열째 금이나 은을 만지지 말 것.」 최재현. 『미얀마 버마족의 통과의례』
미얀마가 있기에 불교는 존재한다 미얀마에 영광이 있기를 부처님 전에 발원하면서 미얀마인들에게 불심 충만에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영혼의 진리를 터득한 것이라고 본다 비행기안에서 바라본 미얀마는 영혼이 숨쉬는 나라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천행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강물 처럼 넘치는 나라, 인간의 존재 인간의 행복, 인간에 대한 평등의 불심, 미얀마 불교의 힘으로 신자유주의를 몰아내는 서원을 세우고 날마다 정토 사회를 건설하는 불공을 하고 있는 미안얀다 금덩이리만 가져가게 했다는 지혜 이것은 미얀마인들의 불심에서 나온 지혜라고 말한다 「미얀마 불교의 교학에 있어서는 두 가지의 팔리 경전 시험이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팔리 국가 시험과 사설 시험이다 팔리 사설 시험은 승려와 재가자가 중심이 된 감독 단체가 진행을 감독한다 미얀마의 승려 교육 기관은 크게 사설 교육 기관인 전문 강원(Mahagandayong)과 국립 불교대학(State Pariyatti Sana University)으로 대표된다 사설 전문 강원이 전국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고, 국립 불교대학은 양곤(Yangon)과 만달레이(Mandalai)의 두 도시에 설치되어 있다」 난다라타나 .스리랑카 씨얌종파(Siam Nikaya)승려.
이것만 보아도 미얀마를 방문한 것은 내 자신에 출가수행한 수행자로써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진리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국토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국의 승려들은 반성하지 않으면 부처님에 바른 법을 습득할 수 없다 미얀마 불교를 보고 반성해야 한다
2. 양곤의 불교
미얀마의 수도인 양곤의 불교를 접하면서 불교인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번 부처님 전에 두손을 모우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바로 미얀마의 위대한 정신이 살아있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의 정신이 살아있는 양곤의 불교를 바르게 전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진리를 설파하신 부처님의 정법을 바로 보는 것이라고 본다 「양곤은 미얀마의 수도이며 미얀마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다. 일년 내내 무성한 열대나무들, 그늘이 우거진공원,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양곤은 한 때 동방의 정원도시로 알려졌다. 양곤은 알라웅파야왕이 1755년 미얀마 남부 지방을 정복한 후 '다곤' 이라 불리는 지역에 군을 주둔시키면서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양곤이란 이름은 "전쟁의 종식" 이란 뜻이며, 1885년 영국군이 미얀마를 합병한 후 양곤은 랭군이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방인들의 눈에 가장 신비롭게 보이는 곳은 미얀마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며 종교적 성지인 쉐다곤 파고다이다. 푸른 숲으로 우거진 양곤 시내 위로 약 100미터의 높이로 우뚝 솟아 찬란히 반짝이고 있는 쉐다곤 파고다는 수 킬로미터 반경에서도 보이는 세계적인 종교 건축물이다. 미얀마의 종교, 역사, 문화의 총집결체인 쉐다곤 파고다는 2,500년의 전설과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투어미얀마 Copyright 2001 Tour Myanmar, All rights reserved,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미얀마는 언제나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진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양곤의 불교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쉐다곤 파고다는 남방 불교(소승불교)의 상징으로 부처님 재세 기간 중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최초로 공양한 사람이 미얀마 사람들이라고 해서 건축했다고 하니까 적어도 2500년 이상은 되었다고 한다. 아름답고 큰 규모며 불탑의 숫자며 보석이며 참배객들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부처님의 머리카락 8개와 신성한 사리들이 안치되어 있고 원래는 8.2m 였으나 미얀마의 여러 왕조와 현재의 수상에 이르기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금판을 쌓아올려 현재는 높이가 100m에 이르고 사용된 금만 해도 62톤이나 되며 탑의 꼭대기에는 다이아몬드, 루비, 금종, 은종 등의 다양한 보석들이 장식되어 있다. 탑 주변에서는 곳곳에 불상과 정령들을 모셔두고 꽃이며 음식을 바치고, 물을 끼얹어 씻겨드리기도 하며, 향불을 피워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다. 」 바간 불교사원 쉐산도 사원(바간) 쉐다곤 파고다.자료 참조
「보타타웅 파고다(The Botataung Pagoda)는 2000년 전, 8명의 인도 승려가 부처님 사리 몇 점을 미얀마에 가져왔을 때 유래한 이름이다. 1,000명의 장교들이 부처님 사리를 호위하여 미얀마에 모셔왔으며('보'는 장교, '타타웅'은 1,000을 뜻함) 현재 사리들은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다른 파고다들과는 달리, 부처님 사리와 다른 진기한 물품들이 안치된 이 파고다는 내부가 비어있어 방문객들이 유리 모자이크 벽으로 된 벌집 모양의 내실에 들어가 볼 수 있다. 작은 내실과 명상을 할 수 있는 작은 골방의 미로들을 걷다 보면, 옛날 보타타웅 파고다에서 나온 보물들 - 금, 은, 동 그리고 테라코타 조상들- 로 가득 」 투어미얀마 Copyright 2001 Tour Myanmar, All rights reserved, 미얀마 불탑은 불교의 참 진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어느 곳에 가서 보아도 같은 의미의 탑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법화경에 나오는 법화 세계의 탑이다, 「차욱탓지(Kyauk Htat Gyi Pagoda)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파고다가 아니며, 실제로 70m 길이에 달하는 와불상을 모신 전시관(tazaun;pavilion)이다. 제작에 총 약 $7만 달러의 보시금이 든 수 십년 된 불상으로 현존하는 미얀마 와불 중 두 번째로 큰 와불로서 길이가 67m에 이른다.」 같은 자료 참조 미얀마에 와불의 모습을 보니 진실로 부처님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금시라도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와불이다. 「까바예 파고다(Kaba Aye Pagoda)는 세계평화라는 뜻으로 1956년 제6차 경전결집이 열렸던 곳이다. 버마 독립 후 인도로부터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가져오면서 지어지게 되었으며, 당시 인도의 수상 네루는 버마에 부처님 사리를 나누어 주면서 버마의 우 누 수상에게 황금색 탑을 건립할 것을 요구해1952년 우 누의 헌금으로 지어진 것이며, 그 사리는 현재 이 탑에 모셔져 있다. 」 같은 자료 참조 인도의 수상이 사리를 미얀마에 지원했다면 인도에 불교를 전하는 것이나 다름이 아니다 이제 인도에 불교를 회복시키는 것은 전 세계에 불교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3, 바간의 불교
바간의 도시는 탑으로 장엄되어 있는데 온 천지가 불교의 근본인 평화의 도시다 인간이란 누구나 인간 자신을 지키는 서원이 있어야 한다 바간의 불교를 보고 인간이 만든 역사의 창조물 중에 가장 아름다운 탑의 도시를 건설한 것에 대하여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미얀마 만달레이 관구(管區) 민잔현(縣) 서부에 있었던 옛 도시이다. 만달레이 남서쪽 150km 이라와디강 동쪽 연변에 있다. 옛날에 중국의 윈난성에서 인도의 아삼 방면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로 버마족의 파간왕조(11∼13세기)의 수도였다. 이 나라에서 가장 강수량이 적은 지방에 위치하며, 한때는 넓은 논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현재는 농산물과 목재의 집산지에 지나지 않는다. 손꼽히는 불교건축의 보고(寶庫)인데 비슈누파 사원이나, 주변을 포함해서 5,000여 곳에 이르는 불탑(佛塔) 유적이 있으며 불교도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도 늘어나고 있다. 미얀마는 세계최고의 불교국가 중 하나이다. 어디를 가나 불탑을 비롯한 불교유적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는데, 특히 불탑(파고다)은 그 숫자가 모두 4백만개가 넘는다고 하니 문자그대로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그 중 파간(Pagan)은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와 같이 세계 3대 불교 유적지 중의 하나로, 미얀마 불교의 변천을 한눈에 볼 수 있는, 16세기 파간 왕조의 전설을 간직한 신비의 장소이다. 양곤은 수도로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지만 이곳 역시 불교와 관련된 중요한 유적지가 여러 곳 있다. 특히 세계최대의 불탑이라 할 수 있는 쉐다곤 파고다는 미얀마의 상징으로서 시내 어느곳에서나 쉽게 눈에 띈다. 온통 황금색으로 덥혀있는 이 탑은 거대한 규모와 시설면에서 양곤시민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있다. 흔히 ‘쉐다곤 파고다를 보지않고는 미얀마를 완전히 보았다고 할수없다’ 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이 불탑은 유명하다. 파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하나의 명소는 아난다 사원이다. 이 사원은 부처의 시자인 아난존자의 존함을 따서 만든 것으로 내부의 사면에 부조되어 있는 입불상의 모습이 그 앞에 론지를 입고 정성스레 절하는 어느 여인(미얀마 여성들은 론지를 입을 때 속옷을 입지 않는 이들이 많다)의 몸매에는 왠지 종교적 엄숙함 이상으로 육감적인 볼륨이 넘쳐흐른다. 이 사원은 1091년 칸시타왕에 의해 건축된 하얀 색깔의 절로 부처님의 생애를 묘사한 독특한 조각양식과 다양한 불상들, 그리고 십자가형으로 완벽하게 조성된 택지가 매우 인상적이다. 파간의 서쪽 끝을 비껴 흐르는 이라와디강을 끼고 조금 북쪽에 위치한 곳에는 높이55m의 고도팔린 사원이 있다. 저녁나절에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해넘이의 정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이밖에도 파간에는 틸로밀로 사원, 마누하 사원, 탓빈뉴 사원, 따마양지 사원, 부파야 파고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적들이 즐비하다. 파간은 1287년 몽고 침입으로 많은 건축물과 불교 문화재가 파괴되었다. 그 후로도 영국 식민지 시절의 문화재 약탈과 1975년의 대지진은 화려했던 이 지역 역사와 문화를 매몰시켜 버렸다.」 바간 불교사원 자료 참조
「세기경 시작된 미얀마의 고대 수도인 바간은 1057년 첫번째 미얀마 왕인 아뇨라타(Anawrahta)왕 통치 기간동안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 히말라야에서 발원하여 미얀마의 최남단까지 이어지는 이라와디강 중부에 위치한 바간은 42평방킬로의 면적에 현재까지 2300여개의 탑들이 보존되고 있다. “탑들의 고장”으로 더 잘 알려진 바간은 아시아에서 귀중한 고고학적 유적지 중 하나이며,」「수천 개에 달하는 황금빛 또는 희거나 붉은색 벽돌로 만들어진 건축물들의 세련된 분위기 속에서, 쉐지곤 파고다와 아난다사원은 고대 문화와 예술미를 갖춘 부처님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는 중요한 파고다로 손꼽히며 석양이 질 때 밍갈라제디 파고다의 테라스에서 바라본 황토색 띈 바간의 전경은 그 절정에 달한다.」 투어미얀마 Copyright 2001 Tour Myanmar, All rights reserved, 바간을 참조하여 불교 문화적 가치를 논해야 한다고 본다. 「쉐지곤 파고다(Shwezigon Pagoda) 바간에서 가장 중요한 파고다인 이 황금빛 파고다는 첫번째 바간 왕조의 설립자인 아뇨라타(Anawrahta)왕이 A.D 1057년에기도와 명상의 중심지로써 건설했다. 쉐지곤 파고다는 후기 모든 미얀마 파고다들의 원형이 되었다.」 같은 자료 참조 「아난다 사원(Ananda Temple) 몬 스타일의 건축물인 이 귀중한 파고다는 바간에서 가장 유명할 뿐만 아니라 현재 남아있는 몇 안되는 내부공간이 비어있는 파고다이다.A.D 1091년 짠시타왕이 세운 이 파고다 내에는 부처님 생애에 관한 다양한 광경들을 묘사하고 있는 정교한 솜씨의 석조물과 불상들이 있다.」 같은 자료 참조 「탓빈뉴 사원(Thatbyinnyu Temple)바간에서 가장 높은 파고다로서 높이가 61미터로 1144년에 알라웅시투 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이 파고다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면 바간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그 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 만하다. 이 파고다를 건축시에 매번 만번째 돌을 빼내어 그 옆에 작은 파고다를 만들었는데 이 것은 텔리 파고다라 불린다. 텔리 파고다의 벽돌 수를 세어보면, 탓빈뉴 사원 전체의 벽돌 수를 알 수 있다.」 같은 자료 참조 「따마얀지 사원(Dhammayangyi Temple) 바간에서 가장 큰 사원인 따마얀지 사원은 1167년 나라투 왕이 설립했다. 이 사원은 완공된 건 아니나 아주 섬세한 벽돌공예를 보여주고 있다. 」 같은 자료 참조 1. 「쉐산도란 부처님의 금 머리카락이라는 의미로 1057년 바간 왕조 때 최초로 조성된 사원으로 바간 전체의 전망대 역할을 한다. 사원에 오르기 위해 신발과 양말까지 벗고 정상까지 오르면 둥그런 불탑의 정상이 나오고 몽골 침략 때 도굴 당한 부처가 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부조들을 볼 수 있다. 불탑의 내부는 하나하나 벽돌로 채워져있다. 」 바간 불교사원 쉐산도 사원(바간)자료 참조
「바간은 유적의 도시. 파간 사람들은 이 지역 마지막 왕조의 시조인 아나우라타에 의해 057년에 축조된 슈웨지콘 대탑을 가장 걸출한 축조물로 꼽는다. 이 사탑은 쟈타카스 풍경을 양각으로 조각한 석판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수많은 다른 사탑의 모델이 되고 있다.특히 이곳에는 부처님의 두 전골과 치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다른 파고다와는 달리 일반 여행객들의 출입을 선별,통제하고 있다. 탑 위에 올라 바라보는 주위의 정경은 마치 1천년 전의 세계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파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하나의 명소는 아난다 사원이다. 이 사원은 부처의 시자인 아난존자의 존함을 따서 만든 것으로 내부의 사면에 부조되어 있는 입불상의 모습이 그 앞에 론지를 입고 정성스레 절하는 어느 여인(미얀마 여성들은 론지를 입을 때 속옷을 입지 않는 이들이 많다)의 몸매에는 왠지 종교적 엄숙함 이상으로 육감적인 볼륨이 넘쳐흐른다. 이 사원은 1091년 칸시타왕에 의해 건축된 하얀 색깔의 절로 부처님의 생애를 묘사한 독특한 조각양식과 다양한 불상들, 그리고 십자가형으로 완벽하게 조성된 택지가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이 사원의 내부로부터 사방으로 길게 뻗은 복도에는 그 좌우로 미얀마의 골동품, 토산품 더미가 기다랗게 늘어져 있고 상인들의 호객소리가 시장터를 방불케 한다. 게중에는 도굴품의 암거래 현장도 간혹 발견이 된다. 파간의 일부 젊은이들 중에는 미얀마 정부의 엄격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문화재인 파고다의 조각품들을 떼어내서 달러 몇 푼에 팔아넘기는 모습을 볼 때 가난과 고급 문화의 보존이 쉽게 공존할 수 없는 서글픈 단면을 본다. 파간의 서쪽 끝을 비껴 흐르는 이라와디강을 끼고 조금 북쪽에 위치한 곳에는 높이55m의 고도팔린 사원이 있다. 저녁나절에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해넘이의 정경은 참으로 아름답다. 붉은 듯하면서도 진흙빛 같은 구름이 옆으로 늘어서고 빛 잃은 태양의 섬광이 밑으로 가라앉는 절묘한 구도는 진정 비로자나불의 환영을 연상케 한다. 그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이라와디 강. 그 물에 몸을 담근 아낙들의 모습. 피부 색깔과 비슷한 론지로 가슴을 가리운 채 머리를 감아 휘젖는 모습은 여정에 지친 이방인의 마음을 괜시리 설레게 한다. 이밖에도 파간에는 틸로밀로 사원, 마누하 사원, 탓빈뉴 사원, 따마양지 사원, 부파야 파고다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적들이 즐비하다. 이런 유적만이 아니라 그 주위에 산재해 있는 승려을의 거처에도 또 좌선하는 수많은 수도승들에게서도 별난 문화를 읽을 수 있다. 그들의 모습은 삐쩍 마른 굴비 같다. 그들의 눈에는 무량수를 헤아리는 혜광이 빛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는 이곳 파간 역시 세속적인 욕망에 허덕이고 있는 인간 시장임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다.」 신비의 불교유적 바간 자료 참조
3.민군의 불교
민군이라는 지역은 배를 타고 가야하는데 그 지역에는 미얀마의 천재인 삼장 법사가 출현한 곳으로 많은 불교인들이 민곤에 참배한다 미얀마에 불교는 바로 민곤에 출현한 삼장 법사스님에 의하여 학교가 건립이 되고 미얀마에 불교를 교육하는 학교를 지었다고 한다 민곤에는 현존하는 종으로 세계에서 가장 무게가 나가는 종이 보존되어 있다 「무게 87톤, 높이 3.7미터, 넓이 5미터(종 입구 쪽)인 민군 종은 아직도 타종 가능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더 큰 종은 모스크바 크렘린에 있으나 이 종은 갈라져서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보다파야 왕이 세계에서 가장 큰 것으로 건설하려 했던 그의 거대한 민군 파고다에 헌정하기 위해 1790년에 민군종을 주조하였다. 민군 파고다[The Mingun(Mantara Gyi) Pagoda: Bodawpaya's Pagoda]민군 파고다는 민군종 서쪽 약 10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그 형태는 거대한 언덕처럼 보인다. 1790년에서 1797년 사이 알라웅파야의 넷째 아들이자 공파웅 왕조의 창건자인 보다파야 왕이 이 파고다를 설립하였다. 」 투어미얀마 Copyright 2001 Tour Myanmar, All rights reserved, 그러나 대탑을 완성하지 못하고 열반에 들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이시기에는 영국군이 미얀마를 침략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시기라고 말한다. 영국의 군인들이 침략군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점에 대하여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을 너무나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영국이야 말로 침략자나라다 영국은 분명히 말하지만 신사의 나라가 아니다.
4. 만달레이불교
미얀마는 나라 전체가 하나의 불교의 상징물로 가득한 도시다 이것은 바로 부처님의 전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정치를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만달레이 민돈왕에 의해 1857년 수도로 지정된 만달레이는 미얀마 마지막 왕조인공파웅 왕조의 수도로 남아있다. 현재 만달레이는 미얀마 제2의 도시이며, 문화 예술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많은 유적지와 탑들로 가득한 불교의 근원지로도 유명하다. 부처님의 예언에 의해 세워졌다는 이 신성한 도시에는 유명한 마하무니 파고다, 석장경이 새겨진 729개의 석판을 간직하고 있는 쿠도도 파고다 사원 등이 있다. 화려했던 왕조의 영화를 보여주는 만달레이의 사원과 탑들은 미얀마인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 같은 자료 참조 미얀마 인들의 마음의 교향이다. 「해발 230미터에 위치한 만달레이 언덕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1,700개의 계단 위에서 만달레이 시 전경과 이라와디 평지의 외곽 지역, 그리고 안개 짙은 산언덕 등의 장관을 볼 수 있다.만달레이 언덕에는 부처님이 이곳을 방문하셔서 이 언덕의 아래쪽에 위대한 도시가 - 현재의 만달레이 - 세워질 것을 예언하셨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 같은 자료 참조 산 위에 올라가보면 산 아래로 보이는 들판이 온전히 연꽃을 피우는 도량 같다
「마하무니 파고다(Mahamuni Pagoda) 라카인 주에서 가져온 마하무니 부처상 을 모시기 위하여 보도우파야 왕이 1784년에 이 파고다를 만들었다. 만달레이에서 가장 숭배되고 있는 파고다 이며, 이른 아침 불상의 얼굴을 씻기는 의식을 하기 위해 매일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같은 자료 참조 「차욱토지 파고다(Kyauktawgyi Pagoda)민돈왕이 건설한 차욱토지 파고다(거대한 대리석상 파고다)는 만달레이 언덕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1865년 세워진 이 파고다는 하나의 온전한 아름다운 Sagyin 대리석에서 조각된 거대한 불상을 안치하고 있기 때문에 ‘차욱토지’라 불린다 」 같은 자료 참조
5.헤호의 불교
「헤호(Inle Lake)해발 1,328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인레 호수는 샨 주의 아름다운 산들에 둘러싸여 있다. 유리같이 투명한 푸른 물의 벌판인 이 호수에는 원주민인 인따족이 물 위에 지어놓은 대나무집에서 생활한다. 수상경작, 수상시장, 분주히 물고기를 잡고 있는 조그마한 배들, 독특한 외발 노젓기, 가내 공업인 비단 직조, 퐁다우 파고다 및 ' 고양이 점핑 사원'(Jumping Cat Monastery)으로 또한 알려져 있는 유명한 Ngaphe Chaung 사원 - 링 사이로 뛰어올라 통과하도록 승려들이 훈련시킨 수십 마리의 고양이가 살고있음 - 등은 아주 흥미로운 관광 코스이다. 인레 호수는 미얀마에서 빼어난 경관과 흥미로운 문화 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장소 중 하나이다. 주변 지역으로는 소나무 향으로 가득 차 있는 쾌적한 고산 휴양지인 깔로가 있다. 또한 가까이에 위치한 삔다야 동굴에는 여러 각도에서 부처님을 표현해 놓은 8,000여 개의 작은 석상들이 있다.」 같은 자료 참조
「깔로에서 북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삔따야는 수세기 동안 모셔진 수천개의 불상이 있는 동굴로 알려진 평화로운 마을로, 깔로에서 삔다야에 이르는 길은 빠오족 마을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지난다. 삔다야 동굴이 삔다야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 석회암 동굴 내부에는 수천개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으며, 그 중 몇몇 불상은 수백년 이상 된 것이다. 대나무 장대로 각각의 다른 석순과 종유석을 칠 때 울려 퍼지는 음색을 감상하는 것 역시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동굴 입구에 서서 탁 트인 시골의 인상적인 전경을 감상해 보는 것도 또 다른 특별한 경험이다. 삔다야는 또한 샨 종이와 승려 우산제작으로도 알려져 있다.」 같은 자료 참조
6. 결론
미얀마는 풍부한 자원으로 국민들에게는 불편함이 없는 나라다 미얀마는 가도 가도 끝없이 넓은 들판이며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는 생산의 고향 같은 들판이 눈앞에 펼쳐진다 영국은 미얀마를 점령하고 온갖 노략질을 다해간 뒤에도 미얀마는 그대로 불교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 미얀마가 독립할 때에 불교 국가를 선포하려할 때에 영국은 반대를 하였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나라다 미얀마는 그 어떠한 나라가 침략한다고 할지라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바로 부처님의 국토관이다 「미얀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갓난아이가 인간사회와 접촉할 수 있는 최초의 기회는 갓난아이의 이름짓기를 통해서이다. 출생 후 보통 1주일 내지 2주일 후에 행해지는 이 의식을 명명식이라고 하는데, 이때 갓난아이의 머리가 출생 후 처음으로 낑봉(kinbun: 일종의 아카시아나무로서 이 열매의 액은 미얀마에서 샴푸 대용으로 널리 쓰임)이라는 나무의 열매액으로 씻겨지기 때문에 미얀마어로는 이 명명식을 낑봉땃띠(kinbuntatthi)라고 부른다. 마을의 성직자나 권위 있는 점성가에 의해 명명식하기에 좋은 날짜와 시간이 결정되면, 부모의 능력이나 명성이나 부에 따라서 의식에 따른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이웃과 친척들을 초대한다. 이 의식에서 갓난아이의 건강과 앞으로의 행운이 기원되고 여러가지 음식물이 낫(nat: 정령)에게 바쳐지기도 한다. 갓난아이의 이름이 이 명명식에서 지어지지만, 그것은 부모의 뜻에 따라 마음대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어지는 이름에는 태어난 요일에 따라서 일정한 범위와 규칙이 있다. 」 최재현. 미얀마 버마족의 통과의례
미얀마 인들의 불심 관에 있어서의 면면을 볼 수가 있는데 특별히 아이들의 탄생에 대한 인연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미얀마에 사람이 처음으로 정착해 산 곳은 약 1만 1,000년 전 이라와디 강 중류유역으로 추측되고 있다. 대략 BC 100∼AD 800년경 피우족으로 알려진 일단의 티베트미얀마어계 민족이 이라와디 강 상류유역에 나타났다. 남쪽에는 몬족(族)으로 알려진 오스트로아시아어족(語族)에 속하는 민족이 시탕 강 유역에 정착해 타톤에 항구 수도를 세웠다. 수도를 프롬(피에)에 정하고 번영을 누렸던 피우국(國)과 마찬가지로 몬족이 세운 나라도 번영을 누렸다. 9세기 피우의 수도는 중국 남조(南朝)의 타이산에게로 넘어갔다. 피우에게 지배를 받던 미얀마인들은 티베트미얀마어계 여러 민족들을 장악하고 파간을 그들의 수도로 정했다. 1044년 파간에서 아나우라타가 왕좌에 올라 몇 년 동안에 미얀마 전체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고 최초의 미얀마 제국을 수립했으나 1287년 몽골족의 침략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다. 16세기 퉁구 왕조 치하에서 최초로 재통일이 이루어져 1752년까지 단속적으로 계속되었으나 곧이어 다시 몬족의 미얀마 지배가 시작되었다. 미얀마의 저항세력은 민중지도자 알라웅파야를 중심으로 다시 모였으며, 1759년에는 마침내 미얀마 전역을 확보하고 미얀마 최후의 왕조를 건설했다. 알라웅파야 왕국은 인접 국가들을 놀라게 할 만한 팽창정책들을 펼쳐 나갔다. 특히 아삼 지방에 대한 미얀마의 야심은 영국과 충돌한 계기가 되었다. 미얀마는 아삼 지방을 점령했으나 2번에 걸친 영국-미얀마 전쟁(1824∼26, 1852)으로 아삼 지방뿐만 아니라 마니푸르·아라칸·테나세림과 페구까지 잃고 말았다. 이어 미얀마의 나머지 지역은 제3차 영국-미얀마 전쟁이 끝나면서 1885년 영국으로 넘어갔다. 영국의 지배 아래에서 미얀마는 인도의 일개 주(州)로 전락했다. 영국은 불교를 국교로 계속 인정할 것을 거부하여 미얀마인을 분개시켰으며 더욱이 영국의 자유방임 경제정책들은 미얀마 국민 대부분을 소외시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일들로 1931년 농민 봉기가 일어났으며 그로 인해 1937년 영국은 미얀마를 인도에서 분리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일본에 점령당했으며 1948년초까지 다시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미얀마 [Myanmar] 자료 참조
「11세기에 활동한 미얀마 역사상 최초의 왕(1044~77 재위).상좌부(上座部) 불교를 도입했다. 그가 수도로 삼은 이라와디 강변의 파간은 많은 사원과 불탑을 간직한 도시로 이름이 나 있다. 그는 치세 기간중에 미얀마인의 고지(故地)인 북부영토와 남부의 몬 왕국을 통일했다. 북으로는 난차오 왕국, 서로는 아라칸, 남으로는 마르타반 만(지금의 양곤 근처), 동으로는 현재의 타이 북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057년 인도 문명의 중심지인 몬 왕국의 타톤 시를 점령함으로써 몬족의 다른 통치자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복속시켰으며 미얀마의 통치자로서는 최초로 이라와디 삼각주를 지배하게 되었다. 몬족과 접촉하여 미얀마 문명이 풍부해졌으며 또한 몬족들이 미얀마인들에게 미술과 문학의 전통 및 문자체계를 전해주었다. 몬 문자로 씌어진 미얀마 최초의 비명(碑銘)이 1058년에 제작되었다. 아나우라타는 몬족 출신의 승려인 신 아라한에 의해 상좌부 불교로 개종했다. 그는 국왕의 위세로써 당시 상(上)미얀마 북부지역에서 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던 대승불교 탄트라 종파의 일종인 아리 분파로부터 주민들을 개종시키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노력으로 상좌부 불교가 미얀마에서 유력한 종교가 되었으며 미얀마의 문화와 문명 발달에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실론의 비자야바후 왕과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며 1071년 불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미얀마 승려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비자야바후 왕은 부처의 치아 사리 복제품을 아나우라타에게 선사했으며 이 사리는 파간의 슈웨지곤 탑에 안치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http://enc.daum.net/)
부처님의 가르침은 생명의 존재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기에 그에 따라 국토를 장엄하기 위한 불심관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국은 미얀마를 침략한 100년의 역사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한다 「상좌란 장로(長老)라는 뜻이므로, 상좌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충실히 전수하는 권위있는 장로들의 전통 혹은 교설에 충실한 불교를 의미한다. 상좌불교는 팔리어로 쓰여진 경(經, sutta)· 율(律, vinaya)· 논(論, abhidhamma)의 삼장(三藏, tipitaka)을 경전으로 삼고 있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가장 충실하고 완벽하게 전수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부처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실천하는 출가승들의 집단이 아니라 2,000여 년에 걸쳐 스리랑카·미얀마·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등 동남 아시아 지역에서 하나의 불교 문화권을 형성해 온 종교 전통이다. 따라서 넓은 의미의 상좌불교는 동남 아시아의 사회·문화·정치·경제·윤리·사상·민속 등 삶 전체에 영향을 끼쳐 온 불교 전통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다. 모든 불교가 그러하듯 상좌불교도 불(佛, Buddha)· 법(法, Dharma)· 승(僧, Sangha) 삼보(三寶)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특히 삼신설(三身說, trikaya)과 같은 초월적 부처론을 전개하고 있는 대승불교와는 달리 역사적 존재로서의 석가모니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僧伽)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성(聖)과 속(俗), 출세간(出世間)과 세간(世間), 출가자(出家者)와 재가자(在家者)의 구별이 뚜렷하다. 상좌불교의 전통이 강한 나라의 승가는 나라의 정신적 지주로서 왕과 백성들로부터 숭앙을 받아 왔으며 양자 사이에서 매개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석가모니의 입멸(入滅) 후 100여 년이 지나면서 승가는 석가모니의 법(法)과 율(律)에 대한 해석과 전승의 차이로 분열하게 되었는데, 이중 최초의 공식적인 분열은 계율의 준수에 있어서 보다 자유로운 태도를 주장하는 대중부(大衆部)와 엄격하고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로 나뉜 것이 그것이다. 그후 승가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되어 대중부와 상좌부를 중심으로 대중부 계통은 6부, 상좌부 계통은 12부로 분열하여 모두 18개의 부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은 부파간의 이견을 해결하기 위해 상좌 불교의 고승 목갈리푸타티사의 주재하에 당시의 승려들을 모두 모은 다음 상좌 불교의 교설을 정통설로 확정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아소카 왕이 통치하던 기원전 3세기경에는 상좌불교가 인도에서 다른 종파들과 더불어 하나의 종파로서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성립된 상좌불교는 인도의 여러 지역뿐만 아니라 스리랑카 등 동남 아시아 지역에까지 전파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EnCyber.com, 미얀마의 불교는 소승불교라고 말하지만 철저한 자기의 수행과 부처님의 정법을 실천행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끝으로 우리가 말하는 불교의 실천 행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바른 법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미얀마의 불교를 숭상하며 미얀마의 불교 국가의 선포를 기다리며 한국의 불교인들이 반성해야 한다고 보며 본 연구의 성과를 통해 불교의 바른 정법이 전 국토에 실현될 수 있도록 부처님 전에 발원하며 이 논을 쓴다
_끝_
참고문헌
출처 : 다음백과사전 (http://enc.daum.net/) 난다라타나 .스리랑카 씨얌종파(Siam Nikaya)승려. 바간 불교사원 자료 참조 바간 불교사원 쉐산도 사원(바간)자료 참조 신비의 불교유적 바간 자료 참조 투어미얀마 Copyright 2001 Tour Myanmar, All rights reserved, 최재현. 미얀마 버마족의 통과의례 미얀마 [Myanmar] 자료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