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山門)에 기대어
송수권
누이야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로
살아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山多花)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 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 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 옴을
▣ 시어 및 시구 풀이
․산문(山門) : ① 절의 바깥 문 ② 산의 어귀, 입구
․그리메 : ‘그림자’의 옛말
․낱 : 셀 수 있게 된 물건의 하나하나
․정정(淨淨) : 아주 맑고 깨끗한
․즈믄 : ‘천(千)’의 옛말
․산다화 : 동백나무의 꽃
․누이야 : 지금은 죽고 없지만 눈앞에 있는 것처럼 ‘누이’를 부르고 직접 말을 건네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누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애상적인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 가을산 그림자의 이미지처럼 깊고 아련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죽은 누이의 인상이 마치 살아 있는 듯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는 것을 : ‘즈믄 밤의 강’은 모든 것을 잠재우고 어둠 속에 묻어 버린 대상으로, 죽음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그 강이 ‘일어서는 것’을 보는 것이므로 ‘죽음-재생’의 형식으로 강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돌로 살아서~건네이던 것을 : 수식어를 통해 다양한 자연물에 재생의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누이와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다. 동양적인 윤회관을 바탕으로 한 표현이다.
․그 눈썹 두어 낱을~부리고 가는 것을 : 기러기가 열을 맞추어 편대 형태로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죽은 누이의 눈썹의 형상을 떠올린 것이다.
▣ 핵심정리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작가 : 송수권(宋秀權, 1940∼ )
운율 : 내재율
어조 : 한과 설움을 노래하는 어조, 청자에게 말을 건네는 대화체
성격 : 관념적, 정한적(情恨的), 서정적, 상징적
표현 : 의인법, 상징법, 직유법, 반복법
제재 : 누이의 죽음, 한
주제 : 누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부활의 의지, 한의 지속성
출전 : [산문(山門)에 기대어](1980)
▣ 이해와 감상
1
이 시에서의 '산문'은 단순히 절문이 아니라,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경계의 문으로 윤회와 부활을 상징한다. 이 시는 3연으로 구성된 자유시로 첫째 연은 '누이야 ∼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5항의 목적어가 결합된 형태의 구조이며, 둘째 연과 셋째 연은 첫째 연과 같은 질문에 목적어가 각각 2항, 1항이 결합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연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목적어인 '가을 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의 의미는 죽음이다. 시인의 전기적 사실을 참고한다면,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와 자살한 동생을 누이로 대치시켜 누이의 눈썹이 가을 산 그림자에 묻혀 떠돌고 있는 이미지로 부각시켜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시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무주고혼(無主孤魂)으로 인간이 이승에서 못 다 풀다 간 한(恨)의 덩어리이다. 그러나 그가 힘의 역학을 추구하면서 한의 덩어리가 승화되기를 누누이 강조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눈썹'이란 죽음이자 부활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목적어는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이다. 여기서 '즈믄 밤의 강'은 모든 것을 잠재우고 어둠 속에 묻어 버린 대상으로 결국은 죽음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러나 누이가 보는 것은 그런 강이 아니라, 그 강이 '일어서는 것'을 보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재생'의 패턴 속에서 강은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자작시 해설에 따르면, 죽은 누이의 혼은 신선한 물방울로 나타나기도 하고,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로, 또는 물 속에서 반짝여 오는 돌의 모습으로 부활하여 생명을 얻는다.
이렇게 일관되게 추구된 부활 의지는 마침내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없이/건네이던' 암시적 행위로 마무리된다. '누이야 ∼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의 마지막 목적어인 이 행위는 누이가 겪은 부활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자,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의 인과 법칙과 윤회를 암시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산문에 기대어'라는 이 시의 제목과도 일치되는 관조와 깨달음의 세계라고 볼 수 있다. - 양승준·양승국, [한국의 현대시 400선]
2
이 시의 화자는 죽은 누이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즉, 이 작품은 대화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내용상으로는 독백적인 성격을 띤다.
화자는 그리움과 애절한 슬픔을 드러내며 누이를 부르고 있으며,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정서와 소망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 2연에 반복되는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은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누이의 삶을 암시적으로 나타낸 이미지이며, 그것을 기러기가 강물에 빠뜨리고 갔다는 2연의 표현은 누이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 반면,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은 어느 날 다시 화자와 누이가 만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인데, 작품 속에 이 같은 재회의 희망이 나타나는 이유를 윤회와 불교적 가르침에 대한 믿음에서 찾을 수 있다.
▣ 생각해 봅시다
1. 이 작품에 쓰인 상징적 시어 '눈썹'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 이 시는 '눈썹'으로 표상되는 죽은 누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가장 오래도록 썩지 않고 남는 것이 머리카락이나 눈썹 같은 터럭이다. 이 시에서 그러한 '눈썹'이 '빠져 떠도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한의 응어리가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이 시의 핵심적인 이미지는 '물'에 의해 환기된다. 시적 화자는 죽은 누이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는데, 이는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비극적 현실 인식의 결과이다. 그러나 '눈물'은 다시 '강물'로 변용되는데, 이 때 '강물'은 눈물이 흐르고 있는 심상이자 기러기가 '눈썹'(죽은 누이)를 떨어뜨려 흐르게 함으로써 재회를 기대하게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강물'은 죽음과 재생 사이를 연결해 주는 희망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강물'은 3연의 마지막 행에 이르러 '못물'로 발전하게 되는데, 이는 물이 샘솟는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새로운 생명(재생) 혹은 재회를 상징하게 된다. 이 외에도 '돌'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에서는 누이의 죽음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떨쳐 버리고 일어서려는 굳은 의지 및 죽음에 대한 거부 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에서는 재회와 윤회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2. 이 작품에서 '누이야'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얻을 수 있는 효과를 생각해 보자.
: 누이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부름으로써 그리움의 간절함을 드러내며, 애상적이고 회한 어린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3. 이 작품에서 화자의 의지적 태도가 드러난 시행을 찾아보자.
: 정정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4. 이 작품에서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환기하는 분위기를 생각해 보자.
: '가을',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산문'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누이의 죽음과 연관되면서 애상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5. 이 작품의 시점을 살펴보자.
: 시적 화자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