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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문학] 허형만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목요시》 전후
장발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유신과 신군부 독재라는 캄캄한 터널을 지나와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65학번인 나는 2학년을 마치고 고향 순천에서 입영 기념 시화전을 치른 뒤 강원도 양구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제대와 동시에 복학할 날짜를 맞추고 있던 차, 김신조 사건으로 꼬박 3년을 채운 바람에 복학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고향에서 할 일을 찾고 있던 나는 학업 대신에 마침 〈순천산경신문사〉 편집부 기자 시험에 합격하여 기자생활을 한 1년 했으나 그만두고 형님 농사를 거들며 농사꾼이 되었다. 4H 활동을 하면서 포도밭을 가꾸기와 고추, 깻잎 농사에 익숙해갈 무렵 대학에서 복학 독촉이 왔다. 다시 상경하여 복학했다. 복학하고 보니 민윤식, 유비룡과 함께 65학번 때 창립한 ‘정오문학회’는 그대로 건재하고 있었다. 1
973년 2학기, 《월간문학》에 시 〈예맞이〉를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에 들어섬과 동시에 전남 함평군 학다리 중고등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했다. 그곳에서 교생과 강사를 겸하느라 10년 만의 대학 졸업식에도 참석 못 하고 정교사자격증이 발급됨과 동시에 양성우 시인 후임으로 전임교사가 되었다. 유난히 안개가 많은 곳, 학생들은 모두 선했고, 선생님들은 모두 다정다감했다. 3년 뒤, 밤새워 강의 준비하느라 다음 날 교탁에서 코피를 쏟곤 했던 학다리를 떠나 광주로 학교를 옮겼다. 1976년 호남시조백일장에서 시조 〈조국강산〉이 장원으로 뽑혔고, 1978년 《아동문예》에 동시 〈나무와 나뭇잎〉 외 1편이 천료됨으로써, 아동문학가와 시조시인을 겸하게 되었다. 그해 12월 2일, 광주 YMCA 강당에서 나는 첫 시집 《청명(淸明)》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광주 숭일고등학교에 재직 중일 때였는데, 후에 평론가 구중서 선생께서 평론집 《분단시대의 문학》(전예원, 1981)에 이 시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셨다.
《淸明》이란 제목으로 나온 許炯萬의 첫 시집이 정직과 성실성을 겸해 맑고 어린 눈길, 求道的인 가슴의 열기를 담아 주목할 만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 시집에서는 우리가 흔히 상실해버린 첫사랑의 순결함, 애틋함 같은 것을 충격적으로 느끼게 하며, 동시에 “선짓빛 핏물로 응얼지는 東學의 후예” “忠壯路 저녁 일곱시/ 저마다 알타이語를 발음하며” 등에서도 선뜻 느낄 수 있듯이 母土의 역사에 대한 애정의 가슴마저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독을 충만히 겪는 속에서도 조용히 인내하며 시를 생명처럼 아는 시인이 아쉬운 세태에서 이 시인의 앞날을 기대하게 한다.
1979년 여름, 광주 금남로 가톨릭회관에서는 김동리 선생 초청 강연이 있었다. 한국 문단의 어르신이 오신 자리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강연이 끝나고 문인들이 끼리끼리 헤어진 뒤 강인한 시인을 비롯한 몇몇 시인들이 찻집으로 옮겨 동리 선생에 관하여, 강연 내용에 대하여 환담을 하다가 이 어두운 시대에 그냥 있을 수만은 없으니 문학동인회를 하나 만들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9월, 《목요시》 제1집인 5인 시집이 한국 문단에 그 이름을 알렸다. 동인은 강인한, 고정희, 국효문, 김종, 허형만 등 5인이었다. 회장은 가장 연장자이자 등단 대선배인 강인한 시인이 맡았는데, 강인한 시인은 동인지 맨 앞 장에 우리의 마음을 담아 ‘첫 번째 선언’을 발표했다. 그 선언은 다음과 같다.
오늘의 시가 상업예술이 아니고 비상업적인 예술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에서 우리는 모든 상업주의를 거부한다. 지나친 테크닉 위주의 장인적인 상업성과 지나친 독선의 정치적인 또 다른 상업성도 우리는 거부한다. 시인은 가수도 정치가도 아니다. 시인은 다만 운율 있는 언어로 자기의 성을 구축하는 언어의 주인일 뿐이다.
주제가 없이 도도히 범람하는 현란한 의상과 공허한 핏대를 똑같이 우리는 배격한다.
그러나 시는 시인의 성실한 삶을 반추하는 그 시대의 사회적인 산물이며, 무엇보다도 시 정신을 내포해야 한다는 점을 결코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올바른 주제와 올바른 아름다움이 있는 참다운 시를 지향하며 우리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나는 지금도 강인한 시인의 참으로 비장한, 그러면서도 시인으로서 사명의식을 깨우치는 이 첫 선언문을 좋아한다. 각자 9편씩의 신작을 발표한 창간호는 당시 시단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비 나리는 밤이면
어머니는
팔순의 외할머니 생각에
방문 여는 버릇이 있다.방문을 열면
눈 먼 외할머니 소식이
소문으로 묻어 들려오는지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기대앉던
어머니.공양미 삼백 석이야 판소리에나 있는 거,
어쩔 수 없는 가난을 씹고 살지만
꿈자리가 뒤숭숭하시다며
외갓댁에 다녀오신 오늘,묘하게도 밤비 내리고
방문을 여신 어머니는
밤비 흔들리는 소리에 젖어
―차라리 돌아가시제.
돌아가시제.
— 〈밤비〉
《목요시》 창간호에 발표한 9편의 작품 중 한 편인 〈밤비〉다. 말년에 눈이 먼 외할머니는 갓난아이 때부터 나를 업어 키우신 분이었다. 아흔 후반에 돌아가셨고, 그 당시 외할머니 생각에 잠 못 이루시던 어머니의 연세가 어느덧 올해 아흔다섯이 되셨다. 어머니는 지금도 지리산 속 누이동생이 운영하고 있는 약초학교에서 여전히 폭포처럼 굽은 허리로 약초밭에서 호미질하고 계신다. 물론 당신의 모든 생이신 부처님을 찾아 절에도 부지런히 다니시면서 내가 찾아뵐 때마다 당신이 주신 금물로 쓴 《반야심경》을 잘 간직하고 있느냐는 물음을 잊지 않으신다.
《목요시》는 1980년 봄호 제2집부터 송수권, 김준태 시인이 합류하면서 명실공히 호남을 대표하는 동인지가 되었다. 그동안에 고정희 시인이 서울로 직장을 옮겼고 국효문 시인이 진주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곧이어 들불처럼 일어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로 하여금 ‘시의 책무’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날마다 금남로와 전남도청 앞을 오가며 군부의 만행을 목격했다. 우리 동인들은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마침내 전화도 끊기고 광주가 고립된 섬으로 변해 버렸을 때, 전남도청 앞 분수대와 상무관에 즐비한 관과 통곡을 목격하며 함께 울어야 했다. 낮에는 하늘에서 최루가스가 흩날렸고 밤이면 전기가 나갔으며 집 앞 골목길로 군화 발소리가 어둠을 더욱 할퀴었다. 김준태 시인이 학교에서 쫓겨난 아픔을 겪으면서 그토록 지루하던 여름 장마와 겨울 폭설 속에서 우리 동인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서로를 확인하는 침묵 속에 한 해를 보내야 했었다. 이렇게 우리는 1983년까지 다섯 권의 동인지를 발간하고 휴면에 들었다가 1986년 10월 청하에서 제6집 《목요시, 넋의 현실적 생살로 빛나라》가 출간되었다. 이 동인지가 사실상 마지막이 되었는데, 수록 동인은 강인한, 고정희, 김준태, 송수권, 장효문, 허형만이었다.
《풀잎이 하나님에게》부터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까지
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3학년 진학지도에 몰입했던 나는 1982년에 국립목포대학교로 직장을 옮기면서 가족들도 모두 목포로 이주했다. 《목요시》 동인 활동만 하느라 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가끔 세미나에 참석한 걸 빼고는 사실상 문단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나는 1981년 ‘새 시대의 문학운동을 실천하는’ 무크지 《실천문학》 제2권에 시 〈산(山) 하나〉 〈하늘의 연인들〉 〈꽃씨를 묻으며〉 〈우음사행시(偶吟四行詩)〉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발표한 시 〈산 하나〉이다.
어스름 저녁
빈 들판 한가운데
山 하나 있었다.몹시도 흔들거리는 기차
신문 한 장 다 읽고
다시 쳐다본 차창 밖으로
山 하나 그대로 있었다.山은 말이 없었다.
경기도 송탄 공사판
푹 패이신 아버님 두 눈처럼.집에 돌아와 방문을 여니
그 山이
빈 들판 한가운데 그 山이나보다 먼저 와 웅크리고 있었다
불씨를 지피며 기다리고 있었다.
— 〈산 하나〉
이어 1984년 창작과비평사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허송씨(許松氏)〉 〈대전역(大田驛)〉 〈삼재(三災)〉 〈울음이 잦은 아들놈에게〉 〈들꽃 한 송이〉 등을 발표했고, 이 시집은 그해 일본 청목서점(靑木書店)에서 일본어판으로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그해에 나는 영언문화사에서 제2시집 《풀잎이 하나님에게》를 출간하여 본격적인 시인으로서 소생을 세상에 알렸으며 이 시집으로 같은 해 제7회 전남문학상을 수상했다. 여담이지만 이 시집이 출간된 영언문화사는 작고하신 이탄(본명 김형필) 시인의 아우인 김형구 씨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평소 나를 아껴주던 이탄 시인께서 김제현(《辭說時調》), 정진규(《연필로 쓰기》), 이승훈(《상처》) 시인 등 쟁쟁한 분들과 함께 내 시집도 출간해주셨다. 이 시집은 당시 “삶의 현장 속에 내리꽂히는 의식의 뜨거운 화살. 산문적인 소재의 것이면서도 언제나 시의 본질을 잃지 않는 승화의 뜨거운 작업 속에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는 그 시대의 나의 시적 삶에 대하여 시집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의 시의 내면에는 늘 ‘역사 속에서 시인의 존재 가치’에 대한 물음으로 넘친다. 이 숨 쉬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새로운 언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신선한 포에지, 그리고 나의 시와 함께하는 독자에게 공감을 줄, 살아 움직이는 시를 쓰고자 지난한 몸짓과 치열한 삶을 잠시도 멈추어 본 일이 없다. 오로지 시 하나만을 위한 오늘까지의 이러한 삶은 한 편 한 편의 시들이 성공했든 못했든 또는 평가를 받든 못 받든 하등의 구애를 받질 않았다. 이는 오직 나의 진솔한 삶이, 모든 세상에 감사하고 사랑을 쏟는 삶이 곧 나의 전부이며 나의 시이며 나의 시가 곧 나의 삶 그대로이기에 오늘날까지 손끝이나 혀끝으로 써본 일이 없을 뿐 아니라,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구도적 신앙정신은 시를 통해서만이 이루어진다는 나의 신념 때문이다.
그 후 이탄 시인께서 1999년 처음으로 문예지 《미네르바》를 창간할 때 잡지 이름이며 운영 방식을 나에게 설명하던 그 진지한 모습이며 사모님이 운영하는 약국에 찾아갔을 때 사모님이 은근히 잡지 걱정을 하시기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아무튼 이 시집이 출간되고 서울 향린교회를 비롯하여 몇몇 교회 주보에는 시집 표제작인 〈풀잎이 하나님에게〉가 실리기 시작했다. 내가 국립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전임교수가 된 것도 바로 1984년이었다. 그러기에 1984년은 나의 삶과 문학에서 큰 변환의 해였다.
이어 《모기장을 걷는다》(1985, 오상), 《입맞추기》(1987, 전예원), 《이 어둠 속에 쭈그려 앉아》(1988, 종로서적), 《공초(供草)》(1988, 문학세계사), 《진달래 산천》(1991, 황토),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1995, 책만드는집) 등 시집과 시선집 《새벽》(1993, 대정진)을 출간하면서 오로지 시 하나에만 온몸을 바쳤다. 김선태 시인은 나의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979년 ‘목요시’ 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부터 허형만 시인의 시 세계는 일대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특히 1980년 벽두의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기점으로 거세게 몰아닥친 민주화의 열풍은 그를 비롯한 이 땅의 젊은 시인들에게 ‘시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자문하도록 만든다. 그 자문의 결과 그의 시적 자아는 초기 내면의 집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오게 된다. 시적 화자 또한 ‘나’에서 ‘우리’로의 전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뛰쳐나온 시적 자아는 이후 1995년까지 16년 동안 거친 역사의 광장에서 ‘진솔한 삶의 역사와 향토적 서정’을 일관되게 노래한다.
그랬다. 1980년대를 살아오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많은 아픔과 눈물을 함께해왔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진솔한 삶의 역사’를 확인하는 작업이 바로 이 시기였다. 시를 쓰는 순간, 나는 살아 있는 나를 확인하곤 했다. 시는 곧 내게 있어 생명과의 입맞춤이며 빛이며 목마른 희망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역사는 산골짜기를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나는 깊이깊이 골이 파인 이 시대의 골짜기마다 뿌리내린 가녀린 실핏줄을 확인하고 사랑하려고 했다. 돌멩이 하나, 풀잎 한 촉에까지도 뜨거운 가슴으로, 순수의 사랑으로 꼬옥 품어 안으려 했다. 비록 역사는 산골짜기를 볼 필요조차 없다 할지라도, 나의 삶의 확인을 위하여 그리고 나의 시를 위하여 이 시대와 함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시집 한 권에 2천 원 하던 이 시기에 “거리에 나가자. 보라, 시는 거리에 있다. 문학은 개인의 배설이 아니라 역사의 생산이다.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아니라 문화는 만인의 복지이다. 우리에게 아직 거리가 낯설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거리가 불안하다 하더라도 그러나 우리의 삶의 중심은 오늘과 내일의 거리에 있다. 이것이 거리의 문학이다.”를 주창한 강형철 시인은 ‘전예원’이라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거리의 문학을 강조했다. 고은, 문병란, 김준태, 곽재구, 문충성, 이성부, 이성선, 박성룡, 박봉우, 오세영, 문정희 시인 등이 이 출판사를 통해 시집을 출간했다. 나도 이 출판사에서 《입맞추기》를 출간하면서 거리의 문학에 동참했고 나의 시도 거리로 뛰쳐나갔다.
이 시대를 어떤 이는 ‘절망의 시대’라 하고 어떤 이는 ‘눈물의 시대’라 하며 또 어떤 이는 ‘아픔의 시대’라고 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서 나의 시혼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한낮이요, 설령 암흑과 겨울이라 해도 그 암흑과 겨울을 밀어내는 불기둥이었다. 하여, 나는 이 시대를 ‘그리움의 시대’ ‘희망의 시대’라 보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날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에 발간된 나의 시집들은 모두 이러한 신념에 의한 것이었다. 다음 시는 시집 《입맞추기》의 표제작 〈입맞추기〉이다.
오늘도 출근하기 전에 아들놈
껴안고 입맞추기 아랫도리를 벗기고
엉덩이랑 똥구멍까지도 입맞추기
일기예보는 청명 출근길은 정상
기분상태 양호 아직도 풀잎은 초록
전봇대도 가로수도 품안 가득 품고
입맞추기 길바닥에 널린
달래 보리 풋나물에도 입맞추기
우리네 위대한 황토땅에도(교황성하처럼 근엄하게는 말고) 으스러지게
입맞추기 사람이라면 사람 누구나
그것이 비록 북풍이거나 창칼이거나
아님 시래기국이거나 라면일지라도
사람으로 치고 입맞추기 사람네
영혼으로 치고 사람네 가슴으로 치고
뜨겁게 뜨겁게 입맞추기
내 새끼 똥구멍 빨며 입맞추듯
이 세상 모든 살아 숨 쉬는 것과
이미 죽어 숨 끊어진 것과 이 세상
모든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것들을 위하여
온몸으로 온몸으로 입맞추기
땀 흘리며 햇살로 희망으로 입맞추기— 〈입맞추기〉
이 시는 실제로 어린 두 아들(지금은 큰 애가 한의사로, 그리고 둘째가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다)의 똥구멍을 빨면서 아비로서 자식 사랑을 모티프로 했지만 단순히 부자유친의 감정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이 시가 발표되자 최하림 시인은 “이 시는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입맞추기로 나타내고 있으며 그런 만큼 그것은 부자유친적인 보수적 시각과 소시민성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단순히 보수, 소시민성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다. 이 시는 육친 간의 입맞추기를 통해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근원적 사랑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근원적 사랑을 통해서 현대의 허위적 삶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허형만 시의 한 특징이 거기에 있다. 개인적인 취향일지는 모르겠지만 허형만의 시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끌어당기는 부분이 이곳이다.”라고 평했다.
《비 잠시 그친 뒤》와 《영혼의 눈》
20세기가 끝나가는 1999년, 나는 제9 시집 《비 잠시 그친 뒤》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했다. 이 시집은 제8 시집인 《풀무치는 무기가 없다》(1995, 책만드는집) 이후 무려 4년 만에 펴낸 시집이었다. 이 시집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이전의 시집들과는 성격이 달랐는데, 평론가들은 시적 관심사가 치열한 현실의 전면에서 일상과 자연으로 전환되었고, 대상을 보는 눈이 깊어지고 목소리 또한 고요해졌으며, 말을 최대한 아낌으로써 절제된 표현미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3년 뒤인 2002년에 문학사상사에서 제10 시집 《영혼의 눈》을 출간했다.
이 두 권의 시집은 나의 또 다른 시 세계를 알리는 대표적인 시집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는 나의 인생관은 물론, 통하여 변해야만 오래갈 수 있다는 ‘통변(通變)의 정신’을 내 나름대로 이 두 권의 시집 속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내 나이가 오십 중반, 내가 생각해도 말수가 적어지고 시를 보는 눈 또한 깊어지고 있음이 감지되던 시기였다. 나아가 마르틴 하이데거가 게오르크 트라클의 시를 분석하는 자리에서 “시 한 편을 제대로 썼기에 시인의 사람됨이라든가 이름을 부인할 수 있을 만큼 되어야만 제대로 쓴 시의 참된 값어치가 빛난다.”고 한 말을 늘 가슴에 담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가 짧아지기 시작했다. 이 말을 달리 말하면, 이승하 시인의 말처럼 비로소 시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고자 한 집념이었을까. 이 시기에 쓴 시 중 한 편이다.
이태리 맹인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눈먼 가수는 소리로 느티나무 속잎 틔우는 봄비를 보고 미세하게 가라앉는 꽃그늘도 본다. 바람 가는 길을 느리게 따라가거나 푸른 별들이 쉬어가는 샘가에서 생의 긴 그림자를 내려놓기도 한다. 그의 소리는 우주의 흙 냄새와 물 냄새를 뿜어낸다. 은방울꽃 하얀 종을 울린다. 붉은점모시나비 기린초 꿀을 빨게 한다. 금강소나무 껍질을 더욱 붉게 한다. 아찔하다. 영혼의 눈으로 밝음을 이기는 힘! 저 반짝이는 눈망울 앞에 소리 앞에 나는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다.
— 〈영혼의 눈〉
나는 그 당시 이태리 맹인 가수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에 심취하고 있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와 〈블랙〉을 각각 서너 번씩 보았다. 이 한 편의 시 〈영혼의 눈〉은 그렇게 해서 마침내 나에게 왔다. 김재홍 평론가는 “허형만 시인은 〈영혼의 눈〉에서 시란 무엇인가, 서정시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이 시에서 서정시란 세계를 자아화하고, 자아를 내면화하고, 다시 내면을 심화하려는 노력임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소우주로서 시인이 대우주로서 세계를 자신의 영혼 속에 이끌어들이고, 이것을 내면화하면서 그 속에서 온갖 삶과 세계의 비의와 우주의 오묘한 이치를 창조적으로 형상화하는 일이 바로 시 쓰는 일이라고 표현한다.”고 말했다.
여담이지만, 시집 《비 잠시 그친 뒤》 속의 시 〈문 열어라〉는 1997년 1월 5일, 그 혹독한 눈보라가 휘몰아친 소한 날 돌아가신 아버지를 망월동 공동묘지에 모셔 드리고 돌아와 썼던 작품이다. 시집이 출간되고 얼마 안 있어 장사익 선생으로부터 그 시 제목을 〈아버지〉로 고쳐서 노래로 만들려고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전화가 와서 나는 흔쾌히 승낙했고, 후에 장사익 선생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중앙일보〉에 고은 시인이 소개한 나의 시 〈파도〉에 곡을 붙여 불렀던 인연이 있었기에 가능하기도 했지만, 〈찔레꽃〉의 장사익 선생은 내가 흠모하던 노래꾼(사실 요즘 장사익 선생 이름 앞에 붙는 ‘우리 시대의 노래꾼’이란 수식어는 내가 처음으로 부쳤지 싶다.)이었다. 이 아름다운 인연으로 2006년, 장사익 선생과 함께 KBS 〈낭독의 발견〉에 함께 출연(물론 장사익 선생이 초청 인물이고 나는 덤으로 붙여졌다.)하여 나는 〈문 열어라〉를 낭독하고 장사익 선생은 〈아버지〉를 불렀다. 이날 녹화는 녹화장에 가득 모인 청중들의 앙코르 요청에 무려 두세 시간을 넘겨 밤중에 귀가해야 했다. 또 있다. 장사익 선생이 지금은 한의사로 일하고 있는 큰아들의 결혼식 주례를 서주었다는 점이다. 그날 서울에서 비행기로 광주까지 내려온 장사익 선생은 주례사 대신에 나의 시 〈파도〉를 불러 하객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했는지 모른다.
한편, 목포 경실련을 처음 만든 김종익 선생(지금은 목포살림연구소장이다.)이 목포 경실련 사무실에서 시집 《영혼의 눈》 출판기념회를 열어주었다. 그날 내 삶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시 〈영혼의 눈〉을 점자로 찍어 예쁜 유리 액자에 담아 선물해주었는데 장애인연합회의 인사가 나에게 이 점자시를 전달해준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가슴이 뭉클하였던지 그 인사의 손을 꼬옥 잡고 한참을 놓지 않았다. 출판기념회가 끝나고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한 독자 몇 분을 모시고 목포 앞바다가 보이는 선술집으로 가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2002년 8월, 나는 목포대학교와 자매결연 대학인 중국 산둥 성 소재 옌타이대학에 교환교수로 갔다. 옌타이대학은 나에겐 이미 낯이 익고 정이 들었던 대학이었다. 왜냐하면 한중수교 전해인 1991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우리 목포대학교 중국어 어학연수단장 자격으로 학생들을 인솔하고 한 달간 머물렀던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는 한국어학과 3학년과 4학년 학생들에게 ‘한국현대시인론’과 ‘한국현대시사’를 강의했다. 동시에 옌타이대학 교수 신분으로 총장님과 외사처장님의 배려로 산둥대학, 청도대학 등 산둥 성 내에 있는 대학들에 재능기부 형태의 특강을 다녔다. 아울러 한국어 웅변대회와 한국어 글짓기대회 심사도 다녔다. 그러한 공로로 2003년 2월 귀국하기 전, 옌타이대학 총장으로부터 명예교수 증서를 받기도 했다. 물론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중국어 공부에 몰두하기도 했으며 한국어과 교수들과 함께 장자제(張家界) 등지로 여행도 다녔다. 교수들 중에서 특히 절친하게 지냈던 정봉희 교수(전남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2003년에 《비 잠시 그친 뒤》와 《영혼의 눈》 두 권의 시집 속에서 50편을 골라 뽑은 시들을 중국어로 번역하고 평설한 중한대조시집 《허형만시상석(許炯万詩賞析)》을 시 전문 계간지 《시와사람》에서 출간하여 중국 학생들의 시 창작과 이해를 돕는 데 활용했다.
귀국한 이듬해인 2004년 7월 1일, 나는 목포 근화건설 김호남 사장의 적극적인 후원과 배려로 ‘목포현대시연구소’를 설립하고 지역문학의 활성화와 시사랑 운동 그리고 시창작 지도 및 학문적 지원을 위해 심혈을 쏟았다. 강의는 학기별 주제에 따라 커리큘럼을 짜서 대학 강의와 같이 매주 전국 유명 시인, 평론가를 초청한 특강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이 연구소 운영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이유는 평소 생각하던 지역문학 활성화의 실현이었다. 나는 이미 2002년에 경남 하동문화예술회관에서 송수권, 나태주, 강희근 시인들과 함께 ‘지역문학인회’를 창립하여 공동 좌장을 맡으면서 “지역문학이 살아야 한국문학이 산다”고 주장했던 터였다.
《첫차》부터 《불타는 얼음》까지
제10시집 《영혼의 눈》에 이어 제11시집 《첫차》(2005, 시안 황금알), 제12시집 《눈먼 사랑》(2008, 시와사람) 등 세 권이 연속해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면서 나의 시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더욱이 이 세 권의 시집은 모두 나에게 문학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영혼의 눈》은 제1회 월간문학동리상(2003)을, 《첫차》는 제2회 순천문학상과 제12회 광주문화예술상 대상(2005)을, 《눈먼 사랑》은 제7회 영랑시문학상(2009)을 수상한 것이다. 이어 2010년 제13시집 《그늘이라는 말》(시안)과 2013년 제14시집 《불타는 얼음》(고요아침)을 출간했는데 시집 《그늘이라는 말》은 나에게 제10회 심연수문학상과 제43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안겨주었다.
2008년 4월부터 2010년 3월까지 한국시인협회 제36대 오탁번 회장을 보좌하는 심의위원장 직무를 수행했다. 나는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대학에 안식년을 신청했고, 사무총장 최영규 시인을 비롯한 간사들과 함께 최선을 다했다. 임기가 끝나고 우리는 ‘절기시회’를 만들어 오늘날까지 입춘, 입하, 입추, 입동과 같은 절기가 되면 한 번씩 모여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위로해오고 있다. 우리가 ‘촌장’이라 부르는 오탁번 시인은 이 모임을 “동인도 아니고 동인이 아닌 것도 아닌, 묘하기는 참 묘한 시인들의 모임이다. 가고 싶은 데가 생기면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서 떼 지어 간다. 여행이 끝나는 데서 시가 탄생한다. 시선이 지워져야 진짜 풍경이 그 원근을 회복한다.”고 말한다. ‘절기시회’가 떼 지어 다닌 여행 중에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국내에서는 강원도에서 1박과 해외에서는 2011년 5월 8일부터 15일까지의 티베트 여행을 꼽을 것 같다. 아래의 ①은 강원도 건봉사에서, ②는 티베트에서 쓴 시 11편 중 한 편이다.
①
강원도 건봉사 화장실 두꺼운 유리문에 손가락이 끼었다
검지와 중지 손톱에서 붉은 피가 솟았다
순간 멍했다 아득했다
짜릿한 아픔은 한참 후의 일, 희한하게 정신이 맑았다
겨울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까지 한결 더 빛나 보였다
시 쓰는 정신이 이럴 것이다
긴장과 소름, 통증과 눈물을 속으로 감추는 일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토해내는 피로 일갈하고 있는 손톱
시인으로 사는 일이 이럴 것이다— 〈손톱〉(시집 《그늘이라는 말》)
②
라싸공가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바라본 창밖 하늘 둘레가
팽팽한 활시위 같다
누가, 내 몸이 화살, 인 줄 알고
티베트까지 쏘았나
당신을 만나기 위해 태어난 몸
당신이 오체투지 마치고 돌아온 날이면
나는 야크 똥이 되어 온 집안 따끈한 불길이 되리
당신이 탕구라 만년설 봉우리마다 숨 쉬는 흰 눈이면
나는 야생의 맨살 그대로의 햇살로 스며들리
당신을 만나기 위해 태어난 몸
그렇다. 당신이 내 정신의 영주인 한 편의 시라면
내 삶의 팽팽한 긴장감, 죽는 순간까지 늦추지 않으리— 〈내 몸이 화살〉(시집 《불타는 얼음》)
70이라는 나이, 내 시의 세 가지 신비
올해로 우리나라 나이 칠십인 나는 해방둥이다. 1945년 광복 후 일본에서 귀국하신 어머니는 그해 음력 10월, 나를 낳으실 때 산신(山神)님이 당신의 치마폭에 예쁜 보퉁이를 던져주시는 태몽을 꾸셨다고 하셨다. 그래서였을까. 새벽마다 정화수 떠놓고 비손을 하신 다음 부엌 바닥의 황토를 한 삽씩 새것으로 바꾸곤 하시는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저러시려니 생각하며 자랐다. “절에 가거든 꼭 산신각부터 들러 합장하고 절해야 한다.”고 당부하시던 어머니 말씀에, 지금도 나는 가톨릭 신자임에도 어머니께서 시키는 일을 어겨본 적이 없다. 지금도 나는 절에 가면 산신각을 향해 절하고 법당 안에 들어가 부처님 앞에서 최소한 아홉 배는 하고 나온다. 서투르지만 《금강경》도 읊조리면서. 나를 위해 평생을 부처님께 공양드리시는 아흔다섯 어머니를 위해 어느덧 일흔의 자식이 해드릴 일이 그것임을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대우주인 삼라만상 앞에 겸손하고, 소우주인 사람 앞에 겸손해야 시가 나에게로 오는 것을 나는 40년 동안 시 쓰는 과정에서 체험했다. 모든 일에 감사하고 긍정적일 때, 늘 내가 허리를 굽힐 때, 시는 나와 함께 잘 놀아준다는 것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나에게 봉사하고 있는 우주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몸이 낮추어지고 눈물이 난다. 그래서일까. 나에게는 세 가지의 신비가 있다. 첫째는 빛과 소리의 신비요, 둘째는 만남의 신비요, 셋째는 은총의 신비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이, 요즘 나는 이 세 가지 신비로움을 더욱 절실하게 가슴에 품는다. 그리고 나는 다음과 같은 유언시를 미리 써놓고, 늘 나를 들여다보며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나를 위로한다.
이제 가노니,
본시 온 적도 없었듯
티끌 한 점마저 말끔히 지우며
그냥 가노니그동안의 햇살과
그동안의 산빛과
그동안의 온갖 소리들이
얼마나 큰 신비로움이었는지//
이제 가노니,
신비로움도 한바탕 바람인 듯
그냥 가노니나로 인해 눈물 흘렸느냐
나로 인해 가슴 아팠느냐
나로 인해 먼 길 떠돌았느냐
참으로 무거운 인연줄이었던 것을이제 가노니,
허허청청 수월(水月)의 뒷모습처럼
그냥 가노니
— 〈이제 가노니〉(시집 《눈먼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