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사이펀 신인상 당선
울타리의 시 외 6편
김 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비에 젖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나는 우산이다 엄격히 (말하자면/보면), 가족이 있다 어떻게 보면, 아직 20대의 청춘이다 어떤 면으로는, 노숙자도 된다 어찌 생각하면, 나는 전봇대다 보기에 따라(서), 나는 웃는다 보는 각도에 따라, 나는 운다 입장에 따라, 나는 입을 다문다 굳이 말하자면, 말이 나오다가 목구멍에서 막힌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어금니를 깨문다 넓게 보면, 나는 허수아비다 너그럽게 보자면, 길고양이 친구다 너그럽게 말하면, 새똥이 얼굴에 떨어져도 화를 내지 않는다 진짜, 나는 가슴이 하얗다 부분적으로는,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전체적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 특히, 정오에 낮잠을 자지 않는다 전형적으로, 전쟁터에 있는 병사 같다 따지고 보면, 서 있을 때가 더 늠름하다 사실상, 로봇이다 사실적으로 ----하면, 결국은 땔감이 된다 실질적으로, 불꽃이 된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보면/ 말하자면 생각하면), 나는 썩어야지 거름이 된다 한 측면에서 보면, 티끌이 된다 경험에 의하면, 티끌이 뭉쳐도 돌멩이가 되지 않는다 쉬운 말로 하면, 먼지는 바람이 날린다 한 마디로 한다면, 후 인간적으로 보면, 이름이라도 이 세상에 남을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도 잊힌다 엄밀히 말해서, 0만 남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바깥에 서 있으면 된다 겉보기로는, 멍하게 서 있다 편의상, 눈을 감으면 된다 한 마디로 말해,
*김진수, 「국어의 울타리 표현 1」, 『語文 硏究 46』, 2004. 12.에서 울타리 표현의 예시를 가지고 와서 변용.
-------------------------------------------
그냥
겨울비가 내리는 길 위를 달렸다
(비의 입장은)
나는 우산 없이 빗속에 뛰어들었다, 가 됐다
자동사였는지
피동사였는지
알리바이는 중요하지 않았고 속옷까지 빗물에 젖었다
카페에 오는 동안 고개가 옷깃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깜빡이 신호를 보고 따라왔는데 골목길을 돌아서 왔다
(깜빡, 깜박)
리듬을 타면서 독백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냥)
문을 열었는데 그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만)
독백에 마침표를 찍고 그와 탁자에 마주 앉았다
(다시 말해)
이때는 말줄임표만 남았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난로 옆에 의자를 하나 더 들고 왔다
그냥이 난로에 타닥 타닥 타고 있었다
그는 부사(통사적인 그냥)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독백을 시작했다
독백이 그에게 말(양태적인 그냥)을 걸었는데
그는 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젖은 옷에서 훈김이 피어올랐는데도 그의 커피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식었다
카페에서 나올 때도 겨울비가 그치지 않았다
--------------------------------------------------
오후
눈동자가 비스듬하게 비껴 줄을 긋는다
뚜, 뚜
왼쪽에만 신호를 보낸다
머리가 북극을 보고
발이 남극을 봐도
띠, 띠
되돌아오는 신호를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잡는다
이십사 시는 시간표가 없어도 세 시를 두 번 지나간다
회전하는 지평선의 밑줄이 겹친다
오전 세 시에 잠들어 있다
오후 세 시에 잠이 온다
오전 아홉 시에 메모장을 열었고 오후 세 시에 커피를 찾는다
일회용 종이컵 두 개가 쓰레기통에 버려졌는데 설탕이 뿌려진 꽈배기를 사 먹는다
일회용이 버려질 때마다 시계를 본다
몇 시를 보다가
몇 시 몇 분
틱, 틱
초까지 헤아린다
초침 소리가 머릿속에 갇힌다
tick, tick
영어사전을 찾아봐도 소리가 같다
한 번은 틱, 한다
한 번도 tick, 한다
눈동자가 틱과 tick 사이를 벗어나지 못한다
--------------------------------
하루하루
손목시계를 차지 않고 서랍 속에
넣어 둔지 오래입니다
하루는 괜찮고 그다음은
손가락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하루가 가기 전에는 손가락을 쥐고
하루가 지난 뒤에는 쥔 것을 풉니다
밥을 먹었는데 배가 오므라듭니다
부풀어 오를 때도 배가 고프고
그만큼 생각이 늘어납니다
생각을 동그라미로 그리고
그 속에 들어갑니다
출구가 막힌 동굴 같습니다
손전등의 광선이 어둠을
뚫지 못합니다
웅크리고 앉아
불이 켜지기를 기다립니다
몸을 일으켜도 가운데로 서지 못합니다
여전히 절름거리는 다리가 몇 걸음
걷고 힘이 빠집니다
손으로 더듬고 걷는 어둠 속에서
어둠만 봅니다
잠들면 하루는 괜찮아집니다
--------------------------------------------
모자의 둘레
모자의 관점은
머리 둘레에 있다
모자가 가장 알맞은
손의 움직임을 고른다
머리에 얹어 덮다 쓰다
씌우다 는
같은 모양이 된다
모자와 모는
머리만 쓴다
야구모자는 챙이 있고
배레모는 그림자가 없다
야구공이 없으면 모자는
구두와도 어울린다
있을 때 없는 것을
없을 때 찾는다
어디 있는 거니?*
야광 꽃무늬 장식이 꾸며진다
작업모 안전모 밀짚모자
빵모자 .....,
모자들이 머리를 미리 마련하고 있다
*조말선의 「야간조」
---------------------------------------------
56세 이상 57세 미만 1월의 진술서
저 놈은 왜 저럴까, 로 불린다
어금니가 한 개 발치되었다
한 개는 영이 되지 못했다
머리숱이 가늘어졌다
머리에 이마가 넓어지는 땅 따먹기를 한다
넓어진 초원에서 사자가 사냥에 성공할 때 삐죽 서 있는
우듬지 둥지에 둥지와 새털이 떠나지 못했다
문: 생각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생각해서 진술하세요
답: 그래서 지금 내 머리를 도끼로 빠개고 있는데요
문: 피를 흘리고 있는데도 제멋대로군요
빨리빨리 머리로 흡입만 하지 말고
가슴의 창문을 열고 생각을 편집하세요
답: 휘휘 둘러보고 전부라고 입력하지 마세요
문: 다들 북극 기류를 이용하여 작심 3일을 꽁꽁 묶어 두려던
계획이 맥이 풀렸군요
답: ‘헛된 희망 증후군’*이 되기까지 3일간 벌어진 일입니다
문: 56세는 281번째 다음에도 실패를 맛볼까요
맛보다 나무에서 사과만 딸까요
답: 제가 러닝셔츠를 입고 뛰는 모습을 CCTV로 녹화해도 됩니다
나머지 11개월을 완주해서 꼭 성공하겠습니다
문: 그럼 재 도전을 하는군요.
이상 진술은 사실입니다
*윤대현, “새해 作心三日 원인은 '헛된 희망 증후군'”, 《조선일보》, A33면 2020. 1. 13.일자 신문기사에서 빌려옴.
---------------------------------------------
입 꼬리가 구두코에서 흔들렸다
나의 입 꼬리가 구두코에서 흔들렸다
사용설명서 첫 줄에 들이다, 가 있고 그
다음 들어간다, 가 있었는데
센 척 건너뛰고
매일 불광을 내준다고 했다
구두는 준비 운동 없이 하중을 받았고
뻣뻣한 구멍에 쑤셔 박기에 바빴던 나는
뒤꿈치에 피가 났다
왜 하필 나야
구두가 에스라인 몸매에 살이 붙고 허벅지 살이 트자
불평을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사용설명서를 다시 읽었다
들이다, 와 들어간다, 의 조건은 자동과 타동을 구분하지 않고
움직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와 구두는 무릎과 뒤축이 닳아 뭉툭 해졌다
식당에서 밥 먹고 나오려는 나에게
종업원이 부부는 닮는 거래요, 하면서
내 구두를 내밀었다
-------------------------------------------------
제6회 사이펀신인상 당선소감|김 서
대상 속에 뛰어 들어가 심장을 마주해 보라
가자미처럼 바닥에 엎드려 지낸 날들이 있었습니다.
한없이 나를 낮추었습니다.
용해되지 않은 담석이 심장을 찌르곤 했습니다.
반짝이는 금성이 장경성, 계명성, 명성, 태백성, 샛별, 개밥바라기와 비너스로 불린다는 것을 이때쯤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글로 푸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 속까지 쏟아내고 싶었는데 어쩌지 못하고 있을 때 페이스북에서 인연이 된 배재경 시인이 부산지역대에 있는 지평 동아리를 소개해주면서 “시인은 곰삭아야 진국이 된다.”라며 시 공부에 매진해서 ‘좋은 시인’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쭈뼛쭈뼛 청강생으로 찾아간 저를 유병근 선생님이 아버지 같은 미소로 맞아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SNS에 글을 올려서 소통하고 감정 풀이를 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조말선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면도칼로 어찌나 구석구석 해부를 하는지, 그냥 아마추어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 생각하던 날도 있었는데 “대상 속에 뛰어 들어가서 심장을 마주해 보라”고 독려해준 조말선 선생님 고맙습니다.
페이스북 인연이 심사위원으로 이어진 배재경 선생님, 평론가 정훈 선생님, 지평 동아리(문학회)에서 도움을 준 최성애, 김미희, 김연희, 강경숙, 김미라, 김단하, 이석동 선생님 고맙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항상 시를 생각하겠습니다.
부지런하고 인내하는 재주뿐이지만 ‘사이펀’과 함께 발전해 가겠습니다.
가을날이 아직 나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김 서
*본명: 김흥현
*1965년 생.
*2021년 방송대문학상 수상.
*개인 화물업, 방송대 국어국문과 3년 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