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통신사 김성일
조선 통신사(通信使) 김성일
통신사는 조선시대에 일본으로 보낸 외교사절을 말한다. 조선은 1403년(태종 3) 명(明)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고, 이듬해 일본의 아시카가정권[足利政權(족리정권)도 책봉을 받아았다.
이로인해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사대하며 일본에 대해교린한다는 기본적인 외교체제가 성립되어 조선 국왕과 일본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통치권자로서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이 일본에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일본이 조선에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통신사들중 가장 민감한 시기에 파견된 것이 현재에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김성일이다. 과거에는 김성일에 대해 임진왜란 촉발의 책임을 전가하다시피 하였지만, 최근에는 그의 업적을 다시 평가 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특정 인물에 대해 평가하는 관점은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과대포장하여 마치 김성일역시 역사의 피해자이며 심지어 영웅시 하는 경향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좀 더 냉정한 자세로 당시의 상황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업적을 살펴 보기로 하자.
김성일은 임진왜란의 원흉처럼 여겨져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다. 그 이유는 1591년 정사 황윤길과 함께 부사로서 일본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전쟁의 가능성을 역설한 황윤길과는 달리 전쟁의 가능성이 없음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좀 더 후일의 일이지만 김성일은 전쟁의 위험보다 민심의 이반이 더 걱정되었던 때문에 라고 하였다. 즉 김성일 자신도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한 우려는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과하고 거짓보고를 하였다는 셈이다.
또 전쟁대비를 목적으로 무리한 징집과 군비확장을 한다면 오히려 백성의 원성을 사, 막상 전쟁이 발발하면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이러한 변명은 정당화 될 수 있을까?
그런데 팽팽이 맞서던 조정은 유비무환의 정신을 살려 황윤길의 주장을 받아들여 장정을 징집한다. 그런데 무리한 부역과 공역으로 인해 민심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성일은 다시 상소를 올려 "두려운 것은 섬나라 도적이 아니라 민심의 이반이고, 민심을 잃으면 성과 무기가 있어도 지킬 수 없으니 차라리 내치에 신경쓰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여기에 임진년 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이유로 과도하게 백성들을 전쟁준비에 내몰지 않아 민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서포 김만중의 말을 인용하여 김성일의 이같은 지적은 매우 적절하였다는 주장이다.
김만중은 물론 위대한 위인이지만 정치가라기보다는 문예방면에 더 재능이 있는 인물이었다. 또 당시의 정서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오늘날의 관점과 다소 차이가 날 수 있다.
김만중이 민심을 잃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선조임금의 충성심에서 나온 발언일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선조임금은 야밤을 틈타 도성을 빠져 나가려 하였지만 백성들이 막고 나서 다시 궐로 돌아와야만 할 실정이었다.
더구나 조선은 전쟁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북변에서 전공을 쌓은 이일, 이순신, 원균 등의 장수들이 남도에 배치되어 있었고, 명종대 새로 건조가 시작된 판옥선도 원래 목표한 대로 맹선을 완전히 대체하고 있었다. 제승방략에 의해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도 나름대로 정비되어 유사시를 대비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 부산과 동래에서 성공적인 지연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이때 성을 다시 고쳐 쌓았기 때문이다.
만약 김성일이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군사에 대한 재배치가 전혀 없이, 이순신이나 원균같은 장군이 기껏해야 선조임금의 호위를 전담하는 장수로 전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가정을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김성일이 영웅적인 인물이라면, 최소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그의 주장이 올바른 것이었을 뿐 아니라 그 주장을 실천하였을 경우 분명한 효과를 거둘 수 있어야만 한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런 준비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러한 준비된 것들을 사용하여 적을 막아야 할 국왕을 비롯한 지휘부가 무기력하게 도주하였다는 것에 있다. 일본군의 압도적인 수에 밀린 박홍과 원균은, 일본군에게 배와 물자를넘겨주지 않기 위해 모조리 불사르거나 자침시키고 후퇴해야만 했다. 밀양에서는 병사를 모아 일본군과 싸우려는데 상황이 불리하다고 경상우감사 김수가 적전도주를 해 버리는 바람에 병사들이 싸워 보지도 흩어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가장 철저한 사전준비를 하였던 이순신만이 유일하게 서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여기에 원균등도 합세하여 전력을 보태긴 하였지만 실질적인 작전 통수권은 이순신 장군에게 있었다.
아무튼 육지의 모든 방어선은 붕괴되고 선조 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치는 위기 속에 김성일은 다시 경상도 초유사로 임명되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경상도로 파견되었다. 김성일의 임무는 일본군의 지배 아래 들어간 백성들을 위무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장차 경상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병장 가운데 유력한 자를 골라 지방관이 없는 고을에 지방관에 임명하는 등 이들 지역에서의 행정력을 복구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일본의 점령 아래 있던 경상도에서도 조선 조정은 계속해서 지배력과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김성일의 뛰어난 재량이라고 할 수 있다.
내정은 물론 군사에도 힘을 써 군량미며 장정들을 모으고 이듬해인 계사년 정월 김성일은 15000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곽재우나 정인홍 등의 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장을 임명하여 이들을 통합하여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병들이 초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정상을 찾아가는 관군과 함께 유기적으로 협력할 수 있도록 양자 사이를 조율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김성일의 노력으로 인하여 경상도 일해를 조선이 회복하였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 물론 김성일은 경상도 초유사로서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였다. 특히 언제 일본군의 공격이 있을지도 모르는 전쟁상황에서 행정관으로서의 임무를 다 한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경상도 일부 회복은 명나라군의 조선파병이 본격화 되고, 이순신 장군이 일본해군을 이따라 격파한 영향이 컸다.
또 일본군의 잔혹성에 대한 실체를 목격한 민심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것도 한 이유이다.
여기에 진주성싸움을 김성일에 대한 전공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비약이다. 임진년 당시 일본군은 호남을 공략하여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불안불안한 전황을 일거에 바꾸기 위해, 진주성 공략을 선택하였다.
당시 진주목사로는 이경이는 일본군이 온다는 소식에 지리산으로 도망가 숨어버린 뒤였다.이에 따라 김성일은 이경의 밑에 있다가 부름에 응해 달려온 김시민에게 진주목사의 대행을 맡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과연 김성일에게 전공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다만 김성일은 관군과 의병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하여, 일본군의 진주성 공략이 본격화 되자 곽재우등의 의병장들의 외곽지원을 성사시키는데 상당한 일조를 하였다.
이런 그의 업무수행능력은 분명 뛰어난 것이다. 하지만 김성일은 전투 지휘관으로서의 역활이 아닌 행정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여지며, 이것을 가지고 전공을 논할 수는 없다.
또 김성일의 행정관으로서의 임무 수행을 과대 평가하여 도원수 권율이 결국 진주성을 포기하고 후퇴할 것을 결정한 일을 비유하며, 임진년 당시 진주대첩이 그의 영민함에서 비롯된 것처럼 이해하려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건 그 당시 상황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일본군이 진주성을 재차 침입하였을 때는 1차 전투때보다 몇배나 많은 병력이었으며, 조총도 완전히 구비된 상황이었다. 설령 김성일이 지휘관으로 부임하였다고 하여도 전혀 바뀔 것 없는 결과였다는 것이다.
더구나 당시 조정은 의병들이 무장세력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부분 해산하거나 관군에 편입시켜 오히려 전투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임진년에 있었던 관군과 의병의 유기적인 내외곽작전은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주장하다가, 막상 전쟁발발 당시에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한 황윤길보다는 낮다고 할 수 있다.
즉 김성일은 자신의 실수에 대해 책임을 지려는 자세와 함께, 전쟁상황에서도 행정관으로서 맡은 바 임무를 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가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