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時 체인점 앞에서 - 최을원
창틀에 25時 체인점이 환하다
새벽 2시를 막 넘은 시각,
초록 불빛은 간판 속에, 나는
글자키 사이 크레바스에 갇혀 있다
은밀한 사이트에서 불륜의 꽃들이 피고 지고
네트웤 사거리엔 중세의 하수구 냄새가 올라온다
서류 가방을 옆구리에 낀 초로의 한 사내
낡은 활자를 게우다 모니터 밖으로 쓰러진다
두 발목이 창틀에 잘리자 건널목 신호등이
무거운 눈을 질끈 감았다 뜬다 2시 반,
그들이 온다 정확히 열 두 대의 오토바이들,
컵라면 하나씩 주유한 후 차례로 떠나 보낼 때
종일 수신된 정체 불명의 메일 꾸러미들이 실린다
도시 전체를 실어 보낸 적도 있었다 이 밤엔
그 사내를 첨부 파일로 전송한다
오토바이들이 사이버 거리를 거슬러 暴走하고
빌딩 너머로 색상도 높은 보름달이 뜰 때
나는 비로소 空디스켓처럼 가벼워진다
체인점 간판을 뗏목 삼아 저어 가면
오늘밤엔 젊은 날의 장자에 닿을지도 모른다
그도 분명 25時 체인점 앞을 서성이거나
250cc 오토바이를 남악 형산 너머로 暴走하고 있을 것이다
멀리서 전송된 나비 한 마리 커서 위에 앉아
깜박깜박 졸고 있다 하루가 슬며시 삭제된다
* 횡단 보도에 갇히다 - 최을원
강남대로 건너다 횡단보도에 갇혀버렸다
나를 싣고 온 길이 터덜터덜 뒤돌아 간다
처음 본 길의 뒷모습 너머론
유년, 허기진 낮달이 떠가는데
사방엔 미친 듯이 내달리는 속도들
빌딩마다 폭포가 걸려 있고
폭포 속에 폭포가 떨어지는 이중 폭포
사이에서 아우성 치는 외침들,
한꺼번에 흐르고 흘러, 굽이치는 거대한 물줄기
내 발 밑에서 아찔하게 철썩인다
어디로 가야하나
빌딩 위 대형 전광판은, 이것이 유일한 종교요, 진리요,
구원이라고, 함께 흐를 수 없는 자가
이 도시 최고의 이단이요, 치욕이라고,
번득이는 눈빛 쉴새없이 보여주는데
누가 나를 이곳에 세워놓았나
시간이 사방 팔방 엇갈려 달리고
교차점마다 황금의 꽃들이 피어나는 엘도라도,
너무 잘 보여,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속도의 제국,
눈 시린 形役의 이 한복판에
* 부부 - 최을원
허리 굽은 할머니가 숨 헉헉, 지나갔다
잠시 후,
더 한층 허리 굽은 할아버지 또, 헉헉, 지나간다
잽히면 죽일 겨,
딱 저만큼의 距離를 두고, 숨 가쁘게 달려온 生이었을 것이다
저 距離의 팽팽한 긴장이 칠순의 노구를 달리게 하고,
내가 놓을까
당신이 놓을까
두렵게, 때로는 안쓰럽게
그렇게 바라보며 건너온 生이었을 것이다
* 겨울 버드나무 - 최을원
그 집, 한세월의 길가에 서 있는 겨울 버드나무
지나온 모든 길들이 그 나무로 모였다 흩어진다
한 때는 그 나무 같은 머리칼 긴 여자 하나 있었다
바람 속에서 빛나던 여자
세상의 작은 상처 낱낱이 감지해 잔잔히 떨어주던 여자
맑은 날이면 눈부신 햇살의 물결로 길게길게 쓸어주던 여자
그 여자, 그 나무 곁에서 떠나갔다
오지 않는 날들과 갈 수 없는 날들 사이에서
긴 손길 흔들며 서 있던 그 겨울나무
텅 빈 그 집, 눈발 속에 서 있다
텅 빈 겨울, 그 나무 곁에 서 있다
* 버스 운전기사 박씨 - 최을원
박씨는 꽁꽁 언 바위에 기대앉아 있었다
주변엔 각혈이 붉은 꽃처럼 피어 있었다
아래편 도시엔 불빛들이
찬바람에 이리저리 쓸리고 있었다
자신의 버스도 어딘 가에서
고단한 잠들을 내려놓고 있을 것이었다
추위에 몸을 비트는 나목 사이로
보따리를 든 아내가 어린 아들의 손을 끌고
고샅길을 되풀이해서 내려가고, 내려갔다
어둠이 고인 소주잔이 눈알을 번들거렸다
들이키자 구멍난 폐의 어딘가에서
차가운 통증이 피어올랐다
참 먼 곳까지 달려왔음을, 그는 문득 깨달았다
자넨 이제 그만 쉴 때라네,
텅빈 방이 검은 입을 쩍, 벌렸다
아빠, 자폐아인 아들의 조개처럼 꼭 닫힌 입이 열리자
따뜻한 불빛이 비로소 새어나왔다
그 불빛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던 박씨의 깡마른 몸이
어느 순간,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의식의 한 사거리에서,
철컥! 대문 따는 소리를 그는 분명히 들었다
그 소리를 향해 부릅뜬 그의 눈 속에
버스 한 대, 캄캄한 밤하늘 천천히 가고 있었다
* 대문만 있는 집 - 최을원
녹슨 철대문 걸린 집, 어린 소년이 밖에서, 밖으로 들어간다 방안 어둠 속, 온갖 부서진 것들이 파랗게 눈을 뜬다 이불 뒤집어쓰자, 꽁꽁 언 골목들이 덜덜덜, 떤다 기이한 신음들이 이불 속으로 기어들자 소년은 귀를 틀어막는다
허기진 꿈속엔 오늘도 대문 하나 서 있다 문을 밀면, 안팎이 모두 벼랑이다 검은 아가리들이, 긴 혓바닥들이, 껄껄껄, 올라온다 이불자락 부여잡은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어디선가 소주병 끝없이 부서지고, 잡아죽일 겨, 방문 걷어차고 취한 음성이 뛰쳐나간다
고양이들이 어둠과 밤새 교접하고 간 그 집, 예각의 기억 가득한 꿈속에선 마을버스 한 대 끝없이 되풀이하여 고샅을 내려가고,
저도, 제발, 데려가줘요
기억의 가장 먼 곳으로 손을 뻗고 잠든 소년의 얼굴엔 지친 새벽이 식은땀처럼 눌어붙어 있다
* 계단 - 최을원
남루한 두 외투가 오르는 살얼음 깔린 돌계단,
몇 劫의 인연들 폐지처럼 밟히고,
한 계단 오를 때마다, 한 계단씩 지워진다
빚 문서처럼 쫓아온 어린 길들이 연신 발목에 감기자,
한 사람 뒤돌아 서서 펴 보이는 손바닥엔
벌겋게 녹슨 대못이 박혀있다 부디,
용서하지 말아라, 마침표 하나 그 위에 툭, 떨어진다
이곳까지 오기 위해 밤은 그리 깊었고
가난한 인연은 그렇게 수시로 가출했었던가,
늘 앞서 가던 사람도 뒤돌아 서서
낯선 시간의 뒷모습, 처음으로 본다, 오랫동안 본다
서럽게 휘청거리던 자정의 골목길 비벼 끄자
버티던 가로등 비로소 꺼진다
계단마다 깊은 협곡이 보이고,
시퍼렇게 멍든 날들이 流氷처럼 떠내려간다
결국, 얼음 위의 집이었다, 스스로 녹아
언젠가는 제각기 흘러갈 집이었다
상처 많은 손, 주머니에 단단히 찌르고,
작은 손가방을 生의 담보처럼 꼭 움켜쥔다
中年의 언덕에 놓인 그 계단은
낮고도 가파른데,
손 잡아줄 것 하나 없는 인연의 허공
떨어지다 잠시 서로 스친 낙엽들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공중의 길 가고 있다
* 발치(拔齒) - 최을원
맑은 햇살,
눈부신 沙丘 위에 그는 길게 길게 누워 있다
카리브 해의 해풍에 실린 잔잔한 음악
코끝을 찰싹찰싹 친다 어딘가에서 몰려온
순진한 *사자 떼 서로 뒤엉켜 논다
아-, 하세요, 길고 긴 실업의 시간이
사구 밑바닥까지 지긋이 틈입한다 사자들
놀라 화들짝 돌아본다 목재소 둥근 톱,
바오밥나무 거대한 원목을 켠다 태양이 입 속 가득
부풀어오른다 잘 사세요, 꼭 챙겨 먹고,
좁고 긴 계단을 아내가 천천히 내려간다
사자들 앞다리 근육이 부르르 떨린다
으 * 뫼르소, 갑자기 총소리 들린다 사자 떼들
일제히 까마득한 사막을 넘는다
사구의 한 능선이 쩍, 꺼져 내린다
그 자리에 붉은 해당화 셀 수 없이 피어난다
해당화 가시 달린 긴 뿌리들이 골목마다
퍼져 간다 녹슨 철대문 앞에서 노모는
여전히 연탄재를 부엌칼로 떼고 있다
입 가시고 다시 누우세요, 沙丘 밑바닥으로
한 컵의 회의가 스며든다 가늘고
차가운 손이 불온의 뿌리들을 찾고 있다
잡아뜯는다 웬 뿌리가 아직도 질겨, 다시 톱소리,
이곳은 왜 이렇게 낯설까, 하는 찰라의 생각
캄캄해진다, 캄캄한 모래 사막이다
어디서 날아온 작고 검은 새떼들
검은 모래를 따갑게 뿌리며 지나간다
그 새떼 사라진 어둠 속에서
거대한 포크레인의 손 슬며시 내려온다
그의 가장 축축하고 허술한 곳에서
모래 한 삽 크게 푹, 푼다
* 훼밍웨이 <노인과 바다> 中에서
* 까뮈 <이방인> 中에서
* 길림성 여자 - 최을원
낮에는 커피를, 밤에는 술을 파는 곳
길림성 여자는 잇달아 잔을 채우고,
연변 대학 회계학 전공의 그 여자
억센 억양 사이로 검푸른 압록강 흐른다
술잔 속에 붉은 달 떠 있는 밤
보부상 같던 젊은 날들이
터덕터덕, 수수꽃 핀 소수 민족의 마을을 찾아가는데,
그녀가 건너온 몇 개의 도시가
수시로 앞을 막아선다
부딪치는 술잔에서 천안문 광장의 총성이 울리자
그녀의 가냘픈 몸피 이곳, 저곳에 깃든
야윈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
술잔을 넘쳐 핏물이 흐른다 그 여자
손바닥에 말라버린 강의 흔적들
따라서 紅軍들 긴 행렬은 광야를 건너고 나는,
탁자 위 지나가는 붉은 강을 보았다
담배 연기 속으로 수수밭 끝없이 출렁거리고
한 무리 흰 옷 입은 사람들이
異國의 달빛 아래로 끝없이 가고 있었다
그녀가 꺼내 놓은 좁고 외진 그 길들을 지나
내가 내게 바닥 없이 깃들고 있을 무렵,
싸구려 양주병 사이를 돌며
生을 회계하던 그 여자 고운 얼굴에서
떨어진 수수꽃 몇 잎,
내 젊은 날의 붉은 시간 속으로 부끄럽게,
부끄럽게, 지고 있었다
* 빙어(氷魚) - 최을원
소양호,
빙판 구멍에 가늘고 긴 촉수 내리고 앉은 사람들
깊고 어두운 곳에서 올라온 기억이 눈부시게 파닥거린다
그 젊은 날, 소양호는 허공에 떠 있는 유리 공이었다
유리 공 너머에서, 계절이 휘어지고, 건조한 햇살도 휘어지고,
속이 훤히 비치는 풋사랑도 휘어졌었다
세상은 너무도 투명해서 공지천 똥물조차도
대학 노트만한 여인숙 방 하나 가릴 수 없었다
내 속에 심해어처럼 숨어 있던,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에게 건네던 말들이
지금, 내 손바닥 위에서 파닥이고 있다
알몸의 기억 초고추장에 찍으면,
몇 개의 거리들, 포구들, 주점들이 혀끝을 찌르며 지나간다
삭풍이 광활한 마당을 쓸고 있다
유배된 날들이 계곡으로 쓸려가고 있다
裸木들이 등뼈 완강한 산을 오르고,
소양호는 여전히 산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유리 공은 없다
내장마저 서럽게 내비치던 날들은 이젠 없다
겨울새 한 마리 계곡마다 끝없이 기웃거려도
유리 공 속에 갇혀 은빛 비늘 반짝이던 시간들,
순간이며 완성이던 그곳으로 결코 회귀할 수 없음을, 나도,
오래 전 나를 떠나간 사랑도,
이 도시의 어두운 터미널을 빠져나간 그 모든 연인들도
그때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자전거포 노인 - 최을원
노인의 손이 닿자 어린 자전거가
신음을 베어 문다 굳은 나사를 틀어
바퀴를 빼내는 노인, 타이어 찢긴 틈으로
고샅길들이 비어져 나와 있다 전봇대들이
취한 눈알을 부라린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욕설을 닦아낸 후 상처를
찬찬히 싸매 주는 노인,
비틀린 틀을 곧게 펴고 날카롭게 굽은
바퀴살을 하나하나 펴준다
날카로울수록 약한 법이지, 나사를
단단히 조이고 힘있게 펌프질하자 자전거
깡마른 몸에 탄탄한 근육이 부풀어오른다
축 늘어진 체인을 손본 후 페달을 돌리자
자전거가 된 숨을 토해낸다 고개 숙인 핸들을
툭툭 쳐보는 노인, 이런 것은 치욕이란다,
노인의 팔뚝에서 힘줄이 꿈틀하자 자전거
굽은 등뼈가 꼿꼿해지며 숙였던 고개가
세상 한가운데를 향해 슬며시 들린다 그러자
라이트 속에 멈춰져 있던 사람들이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차해 있던
트럭이 벌컥벌컥 출발하고 수족관의
생선들이 펄떡인다 짐받이에
집 한 채 실은 자전거가 세상 속으로
질주해 간다 도시의 먼 휘어진
길을 돌 때까지 자전거
어깨에 노인의 커다란 손이 얹혀 있다
* 높은 집 - 최을원
그 집,
절벽 위에 피어 있던 집
한강이 마당이던 집
비닐 창 새어나오는 불빛 강바람에
펄럭이고, 루핑 지붕에 파란 별
오래 머물다 가던 집, 평상에
온갖 일감 수북하여 고물 라디오
밤늦도록 목이 쉬던 집, 고샅길 쫓아
낡은 짐자전거 올라오면
수박 한 덩이로 가득 차던 집
가끔씩 개 끄스르는 연기 찾아들면
허기진 해바라기 흔들흔들 집 울타리
서성이던 집, 머리맡에 빗소리
찰박찰박 떨어져 꿈의 천장이
젖어 갈 때, 한 강 거슬러온 배 한 척
따라 밤의 저편으로
끝없이 흘러가던 집
헴머질 서너 방에 무릎
꺾이던 집, 무명 보자기 몇 개로
싸이던 집, 소형트럭에 실려
낯선 길 털썩털썩 가던 집, 지금도
가끔씩 하루의 가파른 곳에 피어나,
남몰래 들어가 그 평상에 앉아보는
기억의 금호동,
높고 높은, 그 벼랑의 집
* 목련 나무 - 최을원
그곳에 목련 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혼자서 찾아가던 그 나무 밑,
노래의 잔뼈들만 떨어져 쌓이고,
내 속 어딘 가에서 이끼만 무성히 자라 오를 때
우연처럼 바람이 불면
녹슨 목련꽃잎보다 더 빨리 지고 싶었네
노을 속으로 도시가 잠기어 가고
어둠이 천천히 고샅을 올라오면
지친 노래가 터덜터덜 그 길을 내려갔었네
그런 날 밤마다,
하숙집 낮은 창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던
누군가의 취한 노래 소리
비릿한 젊음이 휴지에 쌓이고 나서야 잠들던
새벽녘, 꿈은 폐비닐처럼 찢겨
담벼락에 꽂힌 병 조각 끝에서 펄럭거렸네
지금도 내 속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먼 곳에서 바람이 불면
화라락, 화라락,
꽃잎 떨어지는 소리 들리네
떨어진 자리마다 차가운 파문이 이네
몇 개의 낯익은 거리들이 순례자처럼 찾아오면
오래된 노래가 주섬주섬 대문을 또 나서네
* 浦口에서 - 최을원
포구의 포장마차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아나고 한 마리 주인 여자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포구를 순례하던 기억이 빈손을 펴보이며 들어선다 포장을 흔들던 해풍이 슬그머니 따라 들어와 소주병 속에 숨는다 소주에서 비린내가 난다 술잔에 바다가 출렁인다 그 속에, 안개가 서린 고대 사원과 코끼리 무덤과 수많은 상아 사이 사이에 솟아 오른 핏빛 양귀비 꽃! 흔들린다. 흔들거린다 저게 한계령이래 갈매기 몇 마리 알전구의 그림자 파문을 따라서 돌고 돈다 바다를 보면 밑바닥에 고대 사원이 있을 것만 같아 이쁜 갈매기 소리 들린다 소주 한 잔을 들이킨다 뱃속에서 포구의 따뜻한 불빛이 하나 둘 피어오른다 밤벚꽃놀이 꼭 한번 보러가 탁!탁!탁!탁!탁! 기억이 조각조각 난다 맛있게 드슈 밤하늘에 벚꽃이 흩날린다 어두운 하늘을 날던 벚꽃이 접시로 쏟아져 쌓이던 몇 잎 집어 초고추장에 찍는다
밤바다에 가득한 코끼리 떼들 어딘 가로 두런두런 가고 있다 그 많은 기억의 검은 등들. 난바다 멀리서 霧笛이 운다
* 천변 음악회 - 최을원
천 변 경로당 마당,
벗들 앞에서 아코디언 켜는 백발의 노인
양팔이 부드럽게 움직일 때마다
노을에 깊고 큰 주름이 잡히고
그 갈피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꽃잎들
꽃보라를 이루어 어딘가로 간다
두만강 푸른 물 힘 좋은 쏘가리 안주로
탁주 한 잔 하는 노인들
그 옛날 내 님 실은 배 삐걱삐걱 젖는다
달빛 교교한 백마강 전설이 찰싹! 찰싹! 거리고
목포의 눈물에 메마른 이마가 젖다가
제주도 유채꽃밭으로 흐드러지다가
울산 큰애기 잠시 만나서
울릉도 트위스트 차!차!차!
노인들,
차례차례 아코디언을 빠져나와
굴곡 많은 길들이 흐른 흑백 사진 몇 장과
한계령을 넘은 숨 가쁜 바람 부려 놓는다
개천 곳곳엔 검버섯 돋아나고
건너편 가로등 피안처럼 피어난다
그 불빛 속에 옷 하나씩 벗어거는 날들이
불나방처럼 맴을 돌아도
이 강산 낙화유수 참 곱기만 하다
이쪽 언덕 작은 경로당 마당에는
경쾌한 연주가 다시 시작되고
밤하늘 보름달 두 볼이 소년처럼 붉다
* 용설란 - 최을원
용설란에서 사내 하나 걸어 나온다
작은 체구에 다리를 저는 초로의 멕시코 사내
가구 공장 뜰에서 사포질, 니스칠하며
낡은 모포처럼 웃던 그 사내
그가 대패질을 할 때면
카리브 해안에서 경기도 마석 변두리까지
좁다란 길이 돌돌 말렸다가 떨어졌다
미간의 협곡엔 안데스 산정 늙은 콘돌이 둥지를 틀고
잉카의 오랜 전설 컥컥거릴 때
굴곡 많은 사연들이 얼굴을 지나가고
움푹한 눈에 하나 둘 들어서던 이국의 저녁들
야심한 다릿목에 나앉아 있던 나직한 메스티조의 노래
문득, 떠오르던 태양과 사막과 용설란
천둥 사납던 날 그 노래, 모진 물살에 쓸려 갔다
내가 생의 한 국경을 건너왔을 무렵
하루의 끝에 서 있던 그 사내
천장 빼곡이 용설란 밭은 펼쳐지고
용설란 손끝에 찔려 밤의 곳곳이 쓰라리면
데낄라 노란 술병 들고 나타난 그 사내
데낄라, 데낄라, 데낄라
외치다가 지구본 위를 절룩이며 갔다
경도와 위도의 교차점에 찍힌 그의 발자국
천장에 대팻밥 가득 남기고
먼 회귀선 아래로 가고 있었다
* 鳶 - 최을원
겨울 저편에서 까마득히 올린 가오리연
빌딩에 앉아 손톱을 깎으며 본다
연과 나 사이에서 탁!탁! 튀는 기억들
포물선으로 먼 철교를 넘고
겨울새 한 마리 하늘 길게 자르자
실타래로 풀어져 내리는 노을
밑으론 한강이 흐르고
먼지 많은 기억을 싣고 유람선이 떠나면
길이 하나 생겨나고
길은 모두 하늘로 가는데
손톱 밑으로 숨는 도시의 하루
열 개의 낮달을 따라
골 깊은 마디는 수시로 늘어만 가는 데
도달할 수 없는 높이에 아프게 찍힌 저 느낌표!
사금파리 가늘게 긋고 간,
손바닥 위의 많은 길 가만히 들여다본다
* 봄 - 최을원
봄비는 타!닥!타!닥! 네 글자 사이로
온다
와서
컴퓨터 좌판 해묵은 먼지 씻어 내리고
글자키 사이 크레파스에 갇혀 동결 건조된 詩語 조각들 쓸어다가
산에 들에 뿌려놓는다
그것들 아지랑이로 꼬물꼬물 되살아나
숲속엔 온통 누에 뽕잎 먹는 소리
나무와 나무 사이에 타전되는 숨가쁜 모르스 부호
나무 속에, 우듬지 속에, 가지 속에 풀뿌리 속에 은밀한 집회
수많은 자객들 작고 푸른 칼을 번득이는데,
겨울잠 덜 깬 저 게으른 아카시아 나무,
긴 뿌리 기지개 쭉 펴자
간지러워라
산이 허리를 꿈틀한다 순간,
묵직한 겨울이불 아래쪽 사람들의 마을로 좌르르르 미끄러진다
* 오래된 항아리 - 최을원
그 집,
그 집 뒤란에 오래된 항아리
시간이 고여 찰랑거리고
산새들 내려와 목을 축이고
보름달 머물다 노란 알 하나 낳고 갔었다
달의 행로를 따라 고샅길 생겨나고
그 길 쫓아 1톤 트럭 한 대 거슬러 올라와 봄을 하역하고 간 후,
곳곳에 피어나던 꽃
마당에, 뒤뜰에, 외양간에, 부엌에, 뒷간에, 지붕에, 안방에, 바람벽에,
그 집 빼곡이 채우고,
읍내 가는 먼지 많은 길로 나섰다가
차마 다리 건너지 못하고 강둑 서성이다 시들었었다
그 다리,
꽃잎은 강물에 실려 마을을 돌아, 폐교를 돌아
손금 위로 흘러드는데
밤마다 건너는 교각만 남은 다리
수시로 헛딛어 무릎팍 깨지는 교각만 남은 다리
강물 뚝! 뚝! 흘리며 돌아오는 새벽 그 건너엔
꽃들이 주인인 집 한 채 있고
그 집 뒤란, 오래된 그 항아리 노란 알 하나 여전히 품고 있다
* 달빛 세탁소 - 최을원
서민 아파트촌 행복세탁소 주인 박씨는
모두 잠든 깊은 밤 공터에서 세탁을 한다
큰 함박지에 달빛 가득 채우고
펴놓았던 햇살 한 바가지 풀어 힘 있게 문지르면
술술 풀려나가는 검은 먼지들
호주머니에선, 녹슨 못 떨어지기도 하고
닭발이 뛰쳐나와 진창에 찍고 온 사연 조아리기도 하고
꼼장어 한 마리 달빛 속 유영하기도 한다
소형 트럭이 도시의 비탈길 쏟아놓는가 하면
때로는, 트로트 메들리가 박씨 어깨 흔들기도 한다
헹구어 널자 뚝! 뚝! 떨어지는 푸른 달빛들
위에 박씨 하얀 별빛 한 줌씩 아낌없이 뿌려준다
고개 무거운 밤이 깊으면
생활의 헤진 구석 실밥 가지건하게 기워지고
허물어진 바짓단 빳밧한 풀 매겨지고
다림질 따라 반듯한 포장도로가 생겨난다
그 끝 멀리서 찬물에 머리 감은 아침이 천천히 온다
박씨 오토바이는 오늘도 아파트촌을 신나게 달리고
세탁물 받은 주민들,
알싸한 그 냄새의 정체 아무도 모르지만
향기에 취한 비둘기 떼 모두 그 세탁소로 모여들고 있다
* 을숙도에서의 일박(一泊) - 최을원
새 떼 간다
섬 하나 떠메고 새 떼 간다
지쳐 날개 접으면 집이 되고 섬이 되는 곳
갈대 숲 서걱서걱 지나면
누구나 날개 돋아나는 곳
새처럼 말하기 위하여
새처럼 잠들기 위하여 찾아온 을숙도
나는 부리에 물로 온 저녁 하나를 떨군다
시동을 끄자 마음이 먼저 뚝방을 내려간다
노을이 펄럭이며 먼 산을 넘어가고
가슴에 따뜻한 강물이 돌아들면
기억 속에선 새 떼들 일제히 날아오르고
새 떼들 속에 빈집 하나 보인다
남몰래 곤한 잠 깔던 곳
때론, 너무 젖어 군불 때줘야 하는 집
깊은 밤의 한 귀퉁이에 불을 피우고
젖은 침상을 내다 말린다
어둠이 주위에 둘러서고
갈대들이 수런수런 모여들어 손을 쪼이다 가면
나는 잘 마른 모포에 길게 눕는다
침상 밑으론 밤새 몇 개의 도시가 지나가고
내 빈 집엔 새 떼들의 방언 가득 차 있다
* 최을원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2년 [시현실]
2002년 < 문학 사상 > 하반기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졸업
2002년 [시현실]
2002년 < 문학 사상 > 하반기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