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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山․慶南墨迹100年展”을 보고 황태현 (사)한국문인화협회 부산지회 이사 서예는 단순한 예술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서예에는 인격이 있고, 교육이 있고, 선이 있다. 이것 전체를 아우르는 살아가는 가장 기본이 되는 美를 표현하는 종합적인 예술이다. 그래서 서예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것이 형질을 바탕으로 하는 정감이다. 정감에 관한 미학적 관점이 서(書)에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 한대(漢代)때부터이다. 한대 채옹(蔡邕)의 “무릇 글씨라는 것은 자연에서부터 비롯된다[夫書肇于自然]”는 것과 “글씨라는 것은 한산하게 하여야 한다. 글씨를 쓰려고 할 때에는 먼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한가하게 하고 뜻에 맡기고 성품을 방종하게 한 뒤에 써야한다[書者, 散也. 欲書先散懷抱, 任情恣性, 然後書之.]”라고 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한대(漢代)에서 시작한 서예에 있어서 정감의 표현은 위진 대에 들어오면서 정감과 이상을 결합한 서예가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자 의재필선(意在筆先)이 제출되기 시작하였다.
당대에 들어오면서 ‘중화의 미’와 함께 서정 표현의 본질에 대한 것이 크게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서예가는 손과정(孫過庭), 장회관(張懷瓘), 한유(韓愈) 등이다. 이 중 손과정은 서의 표현에 있어 즐거울 때, 슬플 때 그 형상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왕희지(王羲之) 서를 예를 들었다. “<낙의론>을 쓰면 감정이 풍부해지고, <동방삭화찬>을 쓰면 진기한 미에 감동된다. <황정경>에서는 마음 놓고 허무의 경지에서 희열을 느낄 수 있으며, <태사잠>에서는 종횡으로 달리는 듯한 맛을 얻을 수 있다. <난정서>에 이르러서는 풍류가 있어 세속으로부터 떠나온 기분에 잠길 수 있고, 왕희지 일족의 誡誓 즉 <고서문>으로 부터는 참담한 감정의 유로가 보인다.[寫落毅則情怫鬱 書畵讚則意涉瓌奇 黃庭經則怡懌虛無 太師箴又縱橫爭折 蘭亭興集思逸神超 私門誡誓 情拘志慘](孫過庭 <書譜>)”라고 하여 이른바 즐거울 때 웃음이 나오고, 슬플 때 한탄이 나오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서예의 서정표현에 관한 논술이다.
송대(宋代)에 들어 문인들의 정취 내지는 개인의 서정을 중심으로 서가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사람이 구양수, 소식, 황정견, 미불 등이다.
이렇게 서예미학이 발전해온 과정을 들어 진대(晋代) 서를 상운(尙韻), 당대(唐代)를 서를 상법(尙法), 송대의 서를 상의(尙意)라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서예미학의 기저에는 이를 표현하는 여러 기법들이 동원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 필법이다. 이런 필법에 의해서 형질(形質)이 서고, 이 형질을 바탕으로 작가의 서정이나 철학 등을 표현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를 보면 전서(篆書)에서 예서(隸書)로 자체(字體)가 연변(演變)되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필법과 미적인 기준이 바뀐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 서예가 단순한 의사전달의 기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문자가 가지는 기호로서의 서정성(抒情性)과 문학성(文學性)이 가지는 정감(情感)이 어우러져 발전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간단하게 살펴본 서예미학의 발전과정은 우리 서예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원대(元代) 조맹부(趙孟頫) 서(書)가 여말선초(麗末鮮初)를 풍미했고, 이후 새로운 시도로 차츰 우리 나름의 서예를 형성해 가기 시작하였다.
19세기에 들어 청의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에 영향을 받은 추사 김정희에 의해서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으로 대표되는 학문적 기반과 높은 인격을 바탕으로 새로운 서가 형성되어 우리 서예의 길을 열었다. 이렇게 서예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묵적을 남긴 분들의 서를 조선후기 정치가이자 문장가인 정원용(鄭元容)은 ‘논제필가서법(論諸筆家書法)’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석봉 한호(石峯 韓濩, 1543~1605)의 글씨는 여름비가 바야흐로 흠뻑 내리는데 늙은 농부가 소를 꾸짖으며 가는 듯하며[韓石峯書 如夏雨方洽 老農叱牛], 서무수(徐懋修, 1716~?)의 글씨는 반쯤 갠 봄날 은일자(隱逸者)가 채소밭을 가꾸는 듯하다[徐懋修書 如春陰半晴 幽人治圃]. 백하 윤순(白下 尹淳, 1680~1741)의 글씨는 가을달이 창에 비치는 때 근심에 서린 사람이 비단을 짜는 듯[尹白下書 如秋月當窓 愁客織綿]하며,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1705~1777)의 글씨는 겨울눈이 쏟아져 내리는데 사냥꾼이 말을 타고 치달리는 듯하다[李元嶠書 如冬雪暴下 獵騎疾馳](유흥준 저 <조선시대 화론연구> p45.)”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서에 대한 평들이 서예의 품격을 높이는 동시에 서예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예를 포함한 문화 예술은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시대, 그 지역의 특징을 반영하면서 발전한다. 마찬가지로 부산․경남의 서예도 다르지 않다. 특히 부산 경남은 해양을 끼고 있기 때문에 해양 문화가 발전하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내륙지방으로는 유림과 함께 서예도 발전하였다.
부산․경남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혁혁한 작품을 남긴 서화가들이 누구이며, 어떤 작품을 남겼는지를 기록 정리하는 작업은 지역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전시가 (사)부산서예비엔날레(이사장 박후상) 주최로 “부산경남묵적100년전(1908~2008)”이 11월 3일부터 9일까지 부산시청 전시실에서 열렸다. 이러한 전시는 우리 지역 서화가들의 업적을 기록 정리하는 1차적 의의 외에도 다른 중요한 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선인들의 영혼과의 만남이다. 고전이 중요한 것은 고전을 통해서 선인들과 만날 수 있는 것과 같이 이런 전시작품을 통해서 선인들의 영혼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시를 기획한 (사)부산서예비엔날레 오후규(철학박사) 전시감독은 “우리 부산경남지역은 예로부터 유명서예가를 많이 배출한 본 고장이고, 이는 바로 예부터 부산경남 지역에서 유명 인사가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의 인적사항은 물론 그 소중한 묵적을 한 자리에 모아 정리하지 못 하였는바, 이는 바로 오늘에 살고 있는 책임 있는 서예가의 못남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더 늦기 전에 우리 지역 작고작가를 찾고 그 묵적을 한 곳에 전시하는 기회를 가졌다( <부산경남묵적100년전> 작품집 p7).”라고 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행사야 말로 후대 서화가들이 해야 할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자랑스럽게도 이런 중요한 행사를 다른 지역에 우선하여 기획됐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서예를 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에 출품된 작가들이 이 지역 작고작가 전부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왕 주최 측에서 노력하여 어렵게 찾아낸 자료와 작품을 통해서 우리지역을 넘어 침체된 서예계에 활력을 넣어야 할 것이다.
전시된 작품의 작가를 보면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훌륭한 서화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롭게 조명된 훌륭한 서화가들도 있다. 먼저 많이 알려진 작가로는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州), 매산 황영두(梅汕 黃永斗), 동초 황견룡(東樵 黃見龍), 추연 권용현(秋淵 權龍鉉), 운여 금광업(雲如 金廣業), 청남 오제봉(菁南 吳濟峯), 석불 정기호(石佛 鄭基浩), 유당 정현복(惟堂 鄭鉉輻), 먼구름 한형석(韓亨錫), 운전 허민(芸田 許珉), 벽강 김호(碧岡 金灝), 동계 박명찬(東溪 朴明讚), 묵해 김용옥(墨海 金容玉), 시암 배길기(是菴 裵吉基), 우석 김봉근(于石 金鳳根) 등이고, 새롭게 조명된 서예가는 창번 박해철(滄樊 朴海徹), 경산 묵희(敬山 墨熙), 난곡 박시표(蘭谷 朴蓍杓) 등이며, 스님으로는 구하(九河), 환경(幻鏡), 동산(東山), 이청담(李靑潭), 최범술(崔凡述) 경봉(鏡峰), 월하(月下) 등이다.
이번 전시회에 특징 있는 몇 분을 살펴보면 먼저 창번(滄樊) 박해철(朴海徹·1868~1934)은 1892년(고종 29년) 과거에서 장원 급제한 문사인데 그의 글과 그림이 이번 전시에 나왔다. 구한말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문과에서 고종의 낙점을 받았던 창번이다. 매화 그림 1점과 한문 서예 8점이 출품됐는데 전시장 입구에 길게 전시된 서예 작품은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명작이었다. 창번은 고종 29년~순종 3년 승정원 기주관, 홍문관 시독, 황실교리 등 문관으로 일하다가 1910년 나라가 일본에 통치권을 빼앗기자 낙향해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했다.
경남 고성 출신인 경산(敬山) 묵희(墨熙·1878~?)는 일명 구절산인(九節山人)으로 불렸던 한말 독립투사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초서에 일가를 이뤘고 작품을 많이 남긴 서예가이기도 하다.
경남 진주성 내 창렬사 편액 및 많은 사찰에 글씨를 쓴 이가 성파(星波) 하동주(河東洲·1879~?)이다. 경남 충무가 고향인 그는 진주에서 활동했으며 일생을 오로지 추사체 전수에 힘을 바쳐 강직하면서도 기괴가 감도는 서체를 터득했다는 평을 받았다.
경남 사천 태생인 매산(梅汕) 황영두(黃永斗, 1881~1957)는 고종 황제 때 궁정화가였다. 일필휘지로 매화를 잘 그려내 매선(梅仙)으로 칭송받았다.
부산 서예에 많은 영향을 준 청남 오제봉 작품이 출품되었다. 오제봉은 올해 탄신 10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다. 11월 27일 문화회관에서 “제19회 청남서예대상 전국휘호대회” 시상식 겸 기념행사가 그것이다. 시상식과 함께 이날 발표된 내용은 “태산 거령이시던 청남 선생님(김상훈)”, “20세기를 부산을 빛낸 인물 오제봉(김무조)”, “서예의 참 스승 청남 선생님(김숙자)”, “청남 오제봉 선생을 기리며(김종문)”, “벼루에 먹물이 남으면(이진두)”, “청남 선생의 예술혼을 기리며(정운재)”, “청남 선생을 회상하며(한경자)”, “청남 오제봉 선생의 생애와 서예 소고(박철수)”이다.
독립운동가 먼구름 한형석 같은 서예가도 있다. 안진경으로 일가를 이룬 난곡 박시표(蘭谷 朴蓍杓), ‘고향의 봄’의 이원수(李元壽) 시인 작품도 있으며, 또 서화교육을 위해 노력하신 선비유학자, 민초들의 가슴을 보듬은 성직자, 은둔선비, 문인, 음악인 등이 포함된 52명의 유작 100여점이 전시되었다.
이런 작고작가들의 우수한 작품을 보면서 몇 가지 느낌이 있었다. 먼저 제일 중요한 것이 이러한 전시를 통해 선인들의 예술정신, 학문, 인품, 국가관 등을 본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런 행사는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어가는 어려움이 있지만 기왕 시작한 일이므로 이번 기회에 조명하지 못한 서예가들을 찾는 작업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이유는 기획의도에서 밝혔듯이 “과거와 현대 서예의 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하며 나아가 서예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예술행정은 공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전시행사를 통해 서예가 진정 아름답고 숭고한 예술이라는 것을 계속적으로 홍보하고 인식해 나갈 때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네 편, 내편으로 편 가르기 하는 등 편협적인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보다 훨씬 더 침체할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으로 서예교육에 관한 인식전환이다. 이러한 것은 교육정책과 관련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은 국민들의 인식이 바뀐다면 어려운 문제도 아닐 것이다. 이날 행사장에 참여하여 축사 하시는 지체 높은 분들마다 거론하시는 말씀이 서예의 중요성, 나아가 서예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예인구는 점차 줄어들고 또 고령화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서예 본질적인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서예는 글씨 잘 쓰는 작업도 중요하겠지만 글씨로써 정감을 표현하여 감상자가 사유(思惟)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훌륭한 작품이 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국보 제 83호 반가사유상’이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관자(觀者)로 하여금 무엇인가 사유하게 하는 그 힘에 있다고 본다.(오후규 <해담의 서예만평> 월간서예 2008년 10월호 p149 참조). 관자가 작품을 보고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보고 또 보고 싶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 관자가 작품을 보고 고개를 돌린다면 이 작품은 실패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고흐와 같이 사후에 더 많은 예술성과 아울러 대중성을 확보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튼 작품이 관자의 발목을 잡아두는 작품, 감상자가 사유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앞서 밝혔듯이 서예가들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이를 놓치지 말고 각자 노력해야 서예(書藝)가 살아날 것이다. 이런 제요소들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유묵전의 효과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도록을 넘기면서 감상에 빠졌다. (이 글은 2008년 11월에 작성 완료하여, 월간 '서예문인화' 2008년 12월호에 게재되었다. 게재 당시 원고매수 제약이 있어 내용을 줄였는데, 이후 다시 원 상태로 보완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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