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 김씨(金寧 金氏)시조(始祖)김시흥(金時興)은 경순대왕(敬順大王)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9세손(世孫)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出生)하여 고려(高麗)인종(仁宗)때 묘청(妙淸)의 난(難)을 평정(評定)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封)해졌으며,명종(明宗)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亂)을 토평(討平)하는데 공(功)을 세워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封)해졌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이 본관(本貫)을 김녕(金寧)으로 하여 오다가 고려말(高麗末)에 지명(地名)이 김해(金海)로 개칭(改稱)되자 김해(金海)로 본관(本貫)을 하게 되었다.그러나 수로왕(首露王)계통(系統)의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혼돈(混沌)되므로 김해김씨(金海金氏)를 선김(先金)으로,김녕김씨(金寧金氏)는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후손(後孫)들이 구분(區分)을 확실(確實)히 하지 못하자1865년(고종2년)에 김녕(金寧)으로 확정(確定)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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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녕 김씨(金寧 金氏)본관(本貫)연혁(沿革)
본관(本貫)소재지(所在地) :경상남도(慶尙南道)김해(金海)
김녕(金寧)은 경상남도(慶尙南道)김해(金海)의 옛 지명(地名)으로 낙동강(洛東江)하구(河口)남서(南西)쪽에 위치(位置)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文化)중심지(中心地)로 발전(發展)해 오다가532년(신라 법흥왕19)신라(新羅)에 병합(倂合)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757년(경덕왕16)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23)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금주(金州)등으로 불렸으며, 1270년(원종11)방어사(防禦使)김훤이 인접(隣接)지역(地域)인 밀성(密城)의 난(亂)을 평정(評定)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昇格)되었다가 금주목(金州牧)김해부(金海府)로 개칭(改稱)되었다.조선(朝鮮)태종(太宗)이 다시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가 세조(世祖)때 진(鎭)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32)지방제도(地方制度)개정(改定)으로 김해군(金海郡)이 되었다. 1931년 김해면(金海面)이 김해읍(金海邑)으로 승격(昇格)되었고1981년 김해군(金海郡)의 김해읍(金海邑)이 김해시(金海市)로 승격(昇格)하여 분리(分離)되었으며1995년에는 김해군(金海郡)이 김해시(金海市)로 통합(統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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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김녕 김씨(金寧 金氏)인물(人物)
김시흥(金時興)의 증손자(曾孫子)김중원(金重源)이 고려(高麗)시대(時代)에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형부시랑(形部侍郞)을 지내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특(特)히 그는 고려(高麗)가 망(亡)하자 개탄(慨歎)하여 단식(斷食)을 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공양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김광저(金光儲:김중원의 손자)는 무록산(武鹿山)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절의(節義)를 지켰는데,태종(太宗)이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거절(拒絶)하였다.
한편 김광저(金光儲)의 아들 김순(金順)도 고려(高麗)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歷任)하였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호(號)를 퇴휴당(退休堂)이라 하고 충북 옥천의 백지리(忠北 沃川郡 伊院面 白池里)에 정자(亭子)를 짓고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으며,분성군(盆城君)김정갑(金挺甲)의 아들 김질(金秩)은 태조(太祖)가 등극전의 정의(情)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任命)되었으나 응(應)하지 않고 아산 도고산에 은둔(隱遁)한 후(後)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자호(自號)를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김관(金觀)의 아들 김문기(金文起)는1399년(정종1년) 2월16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忠北 沃川郡 伊院面 白池里)에서 출생(出生)하여 세종(世宗)때 식년문과에 급제(及第)하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任命)되어"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編纂)했으며,계유정난(癸酉靖難)때 공조판서(工曹判書)및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조선신록에 의거 저술함)로 사육신(死六臣)의 총체적(總體的)책임(責任)을 맡고 내외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등(等)과 더불어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도모(圖謀)했다가1456년(세조2년) 6월8일 사육신(死六臣)의 한사람으로 함께 순절(殉節)했다.
거창과 양지현감(陽知縣監)을 거쳐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歷任)한 김현석(金玄錫)도 아버지인 김문기(金文起)를 따라 순절(殉節)하였고,김문기(金文起)의 손자(孫子)김충주(金忠柱)와 증손(曾孫)김현남(金玄南), 5세손(世孫)김약전(金約前)등이 모두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빛내어"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한편 김준(金遵)은 천문학(天文學),지리학(地理學)와 실학(實學)에 능통(能通)한 인물(人物)로 단종(端宗)이 죽임을 당(當)하자3년간(年間)복상(服喪)을 한 후(後)벼슬을 버리고 전남(全南)고흥(高興)으로 내려가 학문(學文)에만 전념(專念)했다.
그 밖의 인물(人物)로는 판서(判書)김복룡(金福龍)의 아들 김응수(金應壽)가 형제들과 더불어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전공(戰功)을 세우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랐으며,담양부사(潭陽府使)김언공(金彦恭)은 권율(權慄)의 영천(永川)전투(戰鬪)와 이순신(李舜臣)장군(將軍)의 노량대첩(露粱大捷)에서 중추적(中樞的)인 역할(役割)을 하여 명성(名聲)을 떨쳤다.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팔공산(八空山)전투(戰鬪)에서 공(功)을 세운 김유부(金有富)와 그의 아들 김기남(金起南),김난생(金蘭生)형제(兄弟)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殉節)하여 김준걸(金俊傑:선조(先祖)때의 공신(功臣)),김득성(金得誠),김영길(金永吉:선전관(宣傳官)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순절(殉節))부자(父子)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김진행(金鎭行)은 효행(孝行)으로 정표(旌表)를 받아 충(忠)과 효(孝)의 전통(傳統)을 이어왔다.
1675년(肅宗元年(숙종원년))에肅宗大王(숙종대왕)께서旌閭(정려)의王命(왕명)과忠節(충절)의諡號(시호)을 내리시고,不祧廟(부조묘)에 모시라는 어전이 내리섰다,不祧廟은公(공)의出生地(출생지)인 충북 진천군 덕산면 옥동에 하사하시었으나,그 후 세월이 흐름에따라祠宇(사우)의 퇴락으로 관허를 얻어1888년에선 전북 임실군 운암면 냉천리로 옮겨 모셨으나 훗날雲岩江(운암강)저수지을 설치하여 육로가 불통 되어 교통의 불편으로1959년3월에大宗會(대종회)의結議(결의)로써 논산군 은진면 방축리 한곡촌에 선충사를 세워 옮겨 모시었다.
묘:경기도 양주군 남면 망우리 아계산李朝忠臣墓域內癸좌에 봉안 되었으나,서울 특별시도시계획구역으로 만부득이 선충사 동쪽에 위치한名山 本陽山(명산 본양산)서쪽 자좌에 옮겨 모심.
상석,신도비,장군석,동자석유.
배:정경부인 밀양朴씨묘합봉.父(부):判伊崇元(판이숭원).
※宣祖 大王(선조 대왕)의傳敎(전교)
1.초상을 그려 후세에 전하라.
2.관작을1계급씩 높여 주라.
3.그 부모처자의 계급을1계급씩 높여 주고 친자가 없으면 생질女壻(여서)에게1계급씩 높여주고,長適孫(장적손)의 받은祿(록)을 거둘수 없으며,죄을 범하여도 용서하라.
첫댓글 유익한정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