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편전(인정전과 선정전)
우리의 문화재/창덕궁 2011-04-06 17:09:25
편전이란 평상시 임금이 거쳐하던곳이나 정무를 보던곳으로 창덕궁에는 인정전과 선정전이 있습니다.
인정전에 대하여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곳
창덕궁의 중심 건물로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으며,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에도 이곳을 이용하였고 왕세자나 세자빈을 결정하였을 때나 국가의 커다란 경사가 있을 때에도 왕이 인정전으로 나아가 신하들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태종5년인 1405년 창덕궁 건립 때 인정전을 지었고 1592년 선조 때 임진왜란으로 창덕궁이 전소되었으며 1609년 광해군 때 창덕궁이 복구하였는데 순조3년인 1803년12월 화재로 인정전이 탔으며 다음해12월 1년만에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후 1857년 철종 때 인정전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1908년 순종 때 일본사람들에 의해 수리를 한 바 있습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4칸의 2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2층의 높은 기단 위에 세웠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밖으로 뻗친 부재 끝이 날카롭게 표현되어 조선 후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오얏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이것은 한말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던 무늬이며 건물 좌우에는 복도(행각)가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는데 품계석은 왕권 강화와 임금과 신하, 신하와 신하의 상하관계 등 위계질서를 잡기위해 정조임금 때 만들어젔습니다. 건물내부 천장 가운데는 한 단을 높여 구름 사이로 봉황 두 마리를 채색하여 그려 넣었고 뒷면의 높은 기둥 사이에 임금이 앉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에는 해와 달, 5개의 봉우리를 그린 일월오악도 병풍이 있습니다. 인정전은 경복궁의 근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장식을 잘 갖추고 있는 건물이다.
현재 빈청위치에서 찍은 옛날 인정전과 인정문을 잇는 행각까지 한번에 찍은 사진입니다.
이 사진으로 보면 당시의 행각은 인정전과 인정문을 잇는 단순한 비 가림의 의미가 아닌 훌륭한 부속 건축물이었으며 인정전 서편 중앙고등학교에서 휘문고등학교로 이어졌던 능선에는 집이 한 채도 없는 헐벗은 산이었습니다.
인정전의 옛 모습입니다.
용마루에 조선의 상징인 오얏꽃문양(이화문양)이 현재와 같이 5개가 있습니다.
위 사진은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2006년 창덕궁 관리사무소에서 발간한 『창덕궁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의 일부입니다.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건물의 형태는 그대로이나 조정의 모습과 좌측 행각의 모습이 다릅니다.
조정에는 박석이 깔리지 않은데다 품계석 또한 없으며 현재의 행각은 우측 선정전과 이어지는 곳에만 있으나 이 사진에는 좌측에도 행각이 있으며 이 행각은 향실과 이어져 있습니다. 건물 뒤로는 현재 활엽수가 있는 반면 멋진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품계석에 대해
현재 현존하는 품계석은 정조6년(1782)에 설치된것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철거 당했던것을 해방 후 복원한 것입니다.인정전 마당은 여러가지 공식행사가 개최되는 곳으로 만조백관이 질서있게 도열할 수 있도록 표시한것이 품계석입니다.
임금은 남쪽을 향하게 월대위에 앉고 왕의 위치에서 볼 때 좌측 (동쪽)에는 문반이 우측(서쪽)에는 무반이 품계석 옆에 도열했습니다.
품계석의 앞쪽의 3품까지는 정, 종이 구분되었지만 4품부터는 하나의 품계석에 정과 종이 나란히 도열했습니다.
인정전 조례마당에서 월대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 설치되어 있는 석상은 답도라고 합니다.
2단으로 설치되어 있는 답도에는 봉황 새겨져 있고 주위로는 당초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봉황이란 한 마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라하며 한 쌍을 봉황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봉황은 용(龍)과 학(鶴)이 사랑을 나누어 태어났다는 상상의 새이며 외형적인 특징은 뱀의 목과 제비의 턱과 거북의 등과 물고기의 꼬리 모양을 하고 단혈산에 산다고 하는데 단혈산은 태양을 마주하는 길운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봉황은 5종류로 나누기도 하는데 붉은색은 봉(鳳), 자주색은 악작(鸑鷟), 푸른색은 난(鸞), 노란색은 원추, 흰색은 홍곡(鴻鵠)이라고 합니다.
또한 5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하는데 푸른 머리 인(仁), 흰목 의(義), 붉은 등 예(禮), 검은 가슴 지(智), 누른 다리 신(信)을 상징하며 고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어 왕과 왕비에 비유되기도 하며 태평성대를 예고하는 성서로운 새로 여겨집니다.
위 사진은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을 2006년 창덕궁 관리사무소에서 발간한 『창덕궁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으로 인정전 내부의 모습입니다.
현재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인정전 내부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고 어색한 분위기입니다.
보개천장은 같은데 용상의 모습과 용상 뒤 삼절곡병과 일월오악도가 있었던 자리에 귀면이 들어간 병풍과 봉황도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일 것이며 어쩌면 순종이 이왕으로 격화된 후 용상의 모습이 아닐지요?
용상 좌우로 난로를 설치한 모습이 이색적입니다.
<인정전 내부 용상입니다.>
<용상 뒤 일월오봉도입니다.>
<용상 뒤 병풍입니다.>
<인정전 용상 위 보개천장입니다.>
<인정전 내부 전기시설입니다.>
인정전은 경복궁 근정전과 같이 밖에서 볼 때는 2층으로 지어졌으나 실내에서 보면 2층이 아닌 통층구조도 지어졌습니다. 이러한 건축 기술을 철상영조기법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기술은 목재의 부식을 방지하기위해 구조를 노출시키는 기법입니다.
인정문은
1985년 1월8일 보물 제813호로 지정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으로 효종·현종·숙종·영조 정조 순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으며 인정문은 조선 영조 20년(1744) 불탄 것을 이듬해 복구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옛 인정문의 모습입니다.
행각의 모습과 창문이 있는 점이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바깥쪽의 모습인데 편액이 걸려 있지 않습니다.
인정문 안쪽의 모습입니다.
일본 궁내청에서 보유하고 있는 엣사진과 현재 사진을 비교하면 많이 다릅니다.
출입하는 문을 앞으로 당기고 대분형태보다는 일반 출입문 처럼 바꾼 형태입니다.
용마루에 오얏꽃문양이 3개가 있음은 오늘날과 동일합니다.
숙장문은
진선문을 지나면 장방형의 마당을 따라 마주보이는 것이 숙장문입니다.
이 숙장문 역시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이 문 이름을 지어 올린것을 성종이 낙점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숙장문과 진선문 사이 남쪽 행각에는 내병조, 호위청, 상서원등을 볼 수 있고 우측에는 정청이 있는데 이는 인정문 뜰과 조정마당에서 공식적인 궁중의식이 많이 치러졌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성종 때인 1475년8월 궁안의 29개의 문에 이름을 붙였는데 대부분 없어지고 광범문, 숭범문, 단봉문과 숙장문 등이 현존하고 있는데 본 숙장문의 이름도 당시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진선문은
진선이란 "임금님께 바른 말을 올리다"라는 뜻입니다.
돈화문을 들어서 광장을 지나 금천교를 건너 정전 마당으로 출입하는 문으로 진선문을 지나면 삼도가 있는데 가운데 높은 길은 임금님이 다니는 길이며 양 옆은 신하들이 다니는 길입니다.
숙장문과 마주보고 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진선문에는 태종과 영조 때 북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들이 와서 치면 왕이 직접 해결해준다는 신문고 혹은 등문고가 있었다고 합니다.
향실은
궁에서 쓰는 향과 제사에 쓰이는 축문 등을 보관 하던 곳입니다.
숭범문은
인정전의 서측 문으로 궐내각사와 연결됩니다.
성종 때인 1475년8월 궁안의 29개의 문에 이름을 붙였는데 대부분 없어지고 광범문, 숭범문, 단봉문과 숙장문 등이 현존하고 있는데 본 숭범문과 광범문의 이름도 당시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광범문은
인정전의 동측 문으로 궐내각사 터와 선정전으로 연결됩니다.
상서원은
"상서로운 기물을 맡은 관서"라는 뜻입니다.
임금님의 옥새와 마패 등을 관리하던 곳으로 왕명의 출납을 담당했던 승정원의 하나의 부서였습니다. 마패는 구리로 만들었고 앞면에는 등급을 나타내기위해 말 한마리부터 다섯마리까지 새겼으며 뒤에는 상서원이라 새겼다고 합니다.
정청은
정무를 보는 관청이라는 뜻으로 인사업무를 처리하던 이조와 병조에 속한 사무용 건물입니다.
호위청은
1623년(인조 1) 궁중을 수호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습니다.
이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고 있던 반정 군사력을 정규병력으로 공인하는 과정에서 는데 정조 때 왕실을 침범하는 일이 벌어져 정조가 병력을 축소 운영하다가 이후 호위청은 몇 번의 폐지와 복구 설치가 거듭되다가 1894년(고종 31) 군제개편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선정전에 대하여
선정전은 1985년1월8일 보물 제814호로 지정
선정이란"청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라는 뜻으로 임금의 공식적인 집무실로 이곳에서 임금과 정치를 농하는 신하는 3품벼슬인 당상관 이상이었습니다.
이곳은 임금님의 집무실이지만 왕비가 가끔 이용하기도 했고 성종 때는 왕비가 노인들에게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고 누에를 치기도 하였으며 지금의 선정전은 1647년인 인조2년에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 인경궁이라는 궁궐을 짓다가 인조반정으로 중단되었는데 인경궁의 광정전 건물을 헐어 이곳에 옮겨 지은 것입니다.
건물 안쪽은 탁 트여 있으며 바닥에는 붉은 색의 양탄자를 깔았고 천장에서 멋진 단청을 하였으며 선정의 기와는 청색기와로 오늘날 대통령의 집무실이 청색기와를 입힌 청와대는 아마도 선정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집니다.
선정전의 청기와를 입히라고 지시한 임금은 연산군으로 당시 사찰에도 청기와를 입힌 곳이 있는데 임금의 집무실도 청기와이어야 한다고 지시하여 공사를 하던준 인조반정으로 물거품이 되었고 이후 광해군 때 청기와에 대한 기록이 나오기도 합니다.
빈청은
빈청의 원래 명칭은 비궁청이었습니다.
빈청은 3정승,비변사 그리고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료들이 정기적으로 회의를 하거나 국가에 긴급한 일이 생기면 대책을 논의하던 곳이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빈청은 본래 온돌방으로 만들어 져 있었는데 땔감이 부족했던 시절 겨울이면 대감들이 일찍 퇴궐하지않고 대궐에 남아 하찮은 일로 임금에게 알현하자 하니 당시 임금은 머리를 써 온돌을 마루로 바꾸어 겨울이면 추워 오래 있을 수 없도록 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러한 빈청은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때 차고로 사용하여 어차고하고 불리었습니다.
그런데 2010년 비어있던 빈청을 문화재보호재단에서 까페를 차려 영업을 하고 있는데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훼손한다는 생각을 하면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