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까지 가는 금강산철도와 경원선이 있는데 공사복원이 불가능하고 다만, 경의선 공사복원이 단계적으로 사업합니다.
금강산철도 [金剛山鐵道]
요약 : 금강산의 관광을 목적으로 부설된 한국 최초의 관광전기철도선.
본문 : 경원선의 지선으로 철원에서 갈라져 김화(金化)와 북한강 상류에 있는 금성 ·창도를 지나 내금강에 이른다. 1919년 사설인 금강산전기철도 주식회사에 의하여 착공되었다. 1924년 8월 1일에 철원∼김화 사이를 1차로 개통하였고, 1931년 7월 1일에는 철원∼내금강 사이의 전체 구간이 개통되었다. 길이는 116.6㎞이다. 동력은 화천수력발전소의 전력을 이용하였으며, 이 철도의 부설로 강원도내 지역개발이 촉진되었다.
봄·가을로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서울역에서는 직통 침대차가 운행되기도 하였다. 1942년의 영업실적을 보면 여객 90여만 명, 화물 23만여t의 수송량을 기록하였으며 연 125만 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10월 창도∼내금강 사이의 궤도가 철거되었고, 6·25 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져 철도의 이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경원선 [京元線]
요약 : 서울~원산(元山)을 잇는 철도.
본문 : 길이 223.7km.
서울을 기점으로 철원·안변을 거쳐 원산에 이른다. 총연장 223.7㎞이나, 국토분단 이후 서울 용산에서 신탄리 간 88.8㎞만 운행된다. 1905년 기공하여 1914년 개통되었다. 수도 서울과 동해·서해를 잇는 산업상·군사상 매우 중요한 간선철도이며, 본 철도의 완공으로 한반도의 간선철도가 X자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1896년부터 경원철도부설권을 놓고 프랑스·독일·일본 등 여러 나라가 각축전을 벌였으나, '철도와 광산 경영은 일체 외국인에게 불허한다'는 원칙하에 1899년 국내 철도회사에 맡겨졌다(1899년 6월 17일 한국 정부는 서울~원산 ·경흥(慶興) 간의 철도 부설권을 국내 철도용달회사(鐵道用達會社)에 줌). 당시의 노선은 서울을 기점으로 의정부를 거쳐 양주군 비우점까지 약 40㎞ 구간이었다. 그러나 자금사정의 악화로 중단되자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상 필요성을 느낀 일본이 경의(京義)철도 ·마산포(馬山浦)철도와 경원군용철도 부설권을 요구- 경원철도 부설을 위해 기채(起債)할 경우 일본과 먼저 협의한다'는 조항을 이용하여 부설권을 인수받았다. 1904년 6월 서울-원산 간 철도부설 노선답사를 실시한 뒤 그해 8월에 경원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같은 해 11월 용산(龍山)과 원산에서 기공식을 가졌으며,1910년 통감부 철도관리국에서 총독부 철도국으로 이관되어,1910년과 1911년에 용산과 원산에서 각각 기공식을 가졌으며, 1911년 용산-의정부(31.2㎞) 구간의 개통을 시작으로 1914년 세포-고산(26.1㎞) 구간이 각각 개통되어 9월 16일 전 구간 개통식이 원산에서 거행되었다. 서울을 기점으로 하여 삼방(三防)·세포(洗浦) 부근의 해발 600m 가파른 고지를 넘어 원산에 이르는 이 철도의 완공으로 한반도의 간선철도가 X자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이 철도는 동해안 북부의 풍부한 자원의 개척과 동 ·서 두 지역의 연락을 목적으로 부설한 것이기도 하다. 그뒤 1928년 함경선(원산-상삼봉)이 연결되면서 3~7일 걸리던 서울-회령 간이 약 26시간으로, 서울-청진 간은 약 22시간으로 단축되었다. 운행 초기에는 여객이 적었으나, 주변에 금강산을 비롯한 석왕사·원산해수욕장 등의 관광명소가 많아 철따라 객차를 늘리기도 했다. 또한 1931년에는 금강선(철원-내금강) 개통으로 경원선의 승객수가 늘어나기도 했다. 고산협곡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공정 전반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또한 건설 당시는 한일합병 전후여서 민간인과 의병들의 활동이 활발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한복차림으로 측량했다고 전해진다. 해방 이후 강원도 북부 지방의 개발로 운행이 잠시 활발했으나, 6·25전쟁 이후부터는 원산까지의 운행이 중단되었다. 1982년부터 경원선 복선전철사업이 시작되어 1986년 성북-의정부 간 31.1㎞가 복선전철화, 2007.12월 의정부-동두천간 22.3km 복선전철화, 동두천~소요산 간 2.4㎞를 단선전철화하는 사업으로 지난 2006년 12월 28일 개통됐고 오늘날까지 국토 분단으로 경원선은 용산~신탄리 사이의 89km만 운행되고 있다.
2000년 8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후 구체적으로 복원이 논의되었다. 경원선은 북한의 원산시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모스크바는 물론 유럽 여러 나라와 연결된다. 또한 경의선과 연결되면 유럽으로 수출하는 물품이 쉽게 수송되어 운송시간은 1/3로 단축되고 물류비는 20∼30%가 절감된다. 이밖에도 대륙으로 가는 물류 운임수입은 물론 남북간의 이질감을 극복할 수 있다.
경원선 복선전철화 2006년말 부분개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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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동두천 22.3㎞ 구간… 기존 통일호 정거장정차
경원선 복선(複線)전철화 사업 중 의정부(북부역)에서 동두천(동안역)에 이르는 22.3㎞ 구간이 2006년말 부분 개통될 전망이다.< 위치도 > 경기도 제2청은 최근 국무조정실 주한미군대책기획단과 가진 협의를 통해 이 구간의 우선 개통에 합의했다고 6일 밝혔다.
현재 민원이 발생하고 있는 자치단체와 협의가 원만하게 이뤄지면 이르면 2006년 말부터 의정부·양주·동두천 등 경기북부 지역의 대중 교통망이 확충될 전망이다.
제2청은 “덕계·보산역 등 신설되는 역이나 주거지역 일대의 방음벽 등이 2007년 이후 완공되거나 설치될 예정”이라며 “의정부 북부역~주내역~덕정역~동두천역~동안역 등 기존 통일호 열차의 정거장에서만 정차하는 부분 개통이 된다”고 덧붙였다.
경원선 복선전철화 사업은 지난 97년 10월 착공됐으나 예산 지원과 전철 통과지역 자치단체와의 협의 등에서 문제가 발생, 완공 시기가 불투명했었다. 제2청 관계자는 “중앙선 청량리~덕소 복선전철화 공사를 올해 안에 마무리한 뒤, 국고 재원을 경원선 복선전철화 사업에 추가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원선 서울[용산역] ↔ 원산[원산역] 2007.09.18일자료
7km (남북분단으로 현재 용산-신탄리 구간(남측)과 평강-원산 구간(북측)만 운행)
1914년 9월 16일 - 개통 1945년 - 남북분단으로 인한 단축운행 1950년 - 한국전쟁으로 인한 운행중지 1953년 - 운행재개(남측 : 용산-신탄리, 북측 : 평강-원산) 1974년 8월 15일 - 용산-성북 복선전철화 1986년 9월 2일 - 성북-의정부 복선전철화 2006년 12월 15일 - 의정부-소요산 단/복선전철화 (이후 계획 : 남북한 철도 연결, 소요산-연천 단선전철화)
배선 : 복선/단선
열차 운행 : [용산-회기] 중앙선 전철 운행 (덕소 방면) [회기-소요산] 1호선 전철 운행 (인천/천안 방면) [동두천-신탄리] 통근열차(CDC동차) 운행
경원선은 경부선, 호남선, 경의선과 함께 일제시대 한반도 X자 철도망을 구성하는 중요한 간선철도 중 하나였습니다. 1899년에 처음부터 국철로 계획되었고, 원래 한국에서 부설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본으로 부설권이 넘어갔습니다. 당시 터진 러일전쟁 때문이기도 했죠. 1905년 11월 시발역인 용산과 종착역인 원산에서 기공식을 가졌고, 9년에 걸친 공사 끝에 1914년 9월 16일 전구간이 개통됩니다. 중학교 사회 시간이나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 "추가령구조곡"이라는 지형이 나옵니다. 원산 영흥만에서 시작하여 서울쪽으로 뻗어 서해 쪽으로 뻗어나가는 상당히 긴 골짜기 지형인데, 이런 지형은 도로나 철도를 놓기 좋은 지형입니다. 따라서 옛날부터 서울과 원산을 오가는 도로로 쓰였고, 경원선 철도도 이 추가령구조곡을 따라가는 철도가 되었죠. 또한 원산에서 함경선과 연결되는데, 이 함경선 철도는 동해안을 따라 두만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철도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러시아와 연결되는 철도이죠. 또한 철원에서 금강산선과 분기되어 열차를 타고 금강산을 갈 수 있었죠.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분단되자, 경원선도 잘려서 운행됩니다. 현재의 초성리-한탄강역 사이로 38도선이 지나갔죠. 그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중부전선이 북쪽으로 상당히 전진한 상태에서 휴전이 되면서 남측은 신탄리역, 북측은 평강역까지만 열차가 운행됩니다. 이로써 경원선은 간선철도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죠. 신탄리역에는 익숙한 문구 "철마는 달리고 싶다"를 새긴 철도중단점 표지판이 들어서게 됩니다.
철도가 끊어진 신탄리-평강 구간은 한국전쟁 때 "철의 삼각지"라고 불렸던 최고의 격전지였습니다. 경원선 철도는 이 철의 삼각지를 관통하는 철도였죠. 이 구간 근처에는 유명한 철원 노동당 당사와 백마고지, 월정리역 등 한국전쟁때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제 2 땅굴이 발견된 것도 이 근처로, 현재는 이곳들을 둘러보는 안보관광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살아남은 남측의 경원선은 서울 북부의 지선 철도가 되어 의정부, 동두천, 연천 부근 시민의 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똑같은 운명을 겪었던 경의선과 달리 경원선은 서울 시내에서 분기하는 철도가 있었습니다. 경춘선과 중앙선이 그것이었죠. 이후 1960년대 능곡-의정부를 잇는 서울교외선(당시 능의선)이 개통되면서 서울역에서 청량리역, 의정부역, 능곡역 등을 거쳐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오는 순환열차도 운행됩니다. (현재 운행되는 서울 야경순환열차와 동일한 노선입니다.)
전철화도 빨랐는데,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당시 종로선) 개통과 함께 청량리 북부에서 종로 지하를 관통하는 1호선과 분기가 이루어집니다. 이때 용산-청량리-성북 구간이 복선화되고, 전차선도 올라가면서 전동차가 다니기 시작합니다. 이때 한가지 실책을 하게 되는데, 1호선과 경원선이 분기되는 부분을 입체적으로 하지 않고 그냥 평면교차로 처리해 버리죠. 이것 때문에 선로 용량이 부족해지면서 원래 경원선 선로인 용산-청량리-성북 방면으로 열차를 많이 추가할 수 없게 되고, 1호선도 수원/천안 방면 열차는 모두 청량리역에서 회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문제는 2005년 12월 16일에 해결이 되는데, 중앙선 복선전철화로 덕소까지 수도권 전철이 투입되면서 용산-청량리-성북으로 운행하던 전동차가 용산-청량리-덕소로 경로가 변경됩니다. 평면교차는 어느정도 해소되죠. (이 구간의 평면교차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시려면 옆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http://blog.naver.com/ianhan/120018278754 )
전철화는 차츰차츰 진행되어 1986년에는 의정부까지 수도권 전철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2006년에는 동두천까지 개통되죠. 일반열차 운행 구간은 점점 줄어들어 현재는 동두천(구 동안역)-신탄리간의 짧은 구간만 운행되고 있습니다. 운행구간이 짧아지면서 상대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한 연천 지역의 주민들은 많이 반발했고, 이에 따른 요금 할인 정책으로 지금은 통근열차를 가장 싼 가격에 탈 수 있는 구간이 되었습니다. (이후 연천까지 단선전철화 되어 수도권 전철이 들어갈 예정입니다)
경원선은 지역 특성상 노선 주변에 군부대가 많습니다. 따라서 아침 열차에는 휴가를 나가는 사병들이 밝은 표정으로 우르르 열차에 오르고, 저녁 열차에는 휴가가 끝나고 복귀하는 사병들이 우울한 표정으로 열차에서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노선 주변에는 군부대로 들어가는 인입선도 많은 편입니다. 특히 주말에는 통근열차가 다니는 일반철도 구간도 이용객이 많은데, 안보관광 뿐만 아니라 고대산(신탄리역), 소요산 등의 잘 알려진 산이 있고, 한탄강 유원지도 있기 때문에 등산객이나 관광객이 많이 찾습니다. (현재 한탄강 유원지는 재개발중이기 때문에 손님이 없음)
특히 경원선은 광복 후 분단되었다 한국전쟁 때 수복한 구간(초성리역-신탄리역 구간)이 있기 때문에 연천역의 급수탑도 유명합니다.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세워진 이 급수탑은 그 역사성을 인정받아 현재 등록문화재 45호로 지정되어 있죠. 경원선은 이후 신탄리 북쪽으로 철도가 더 연장되어 철원까지 운행할 계획이 세워져 있고, 궁극적으로는 원산까지 재연결될 계획도 세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경의선과 동해선보다 중요도면에서 밀리는 관계로 진척이 느린 편이죠. 올해 경의선/동해선 열차 남북연결운행이 성황리에 진행될 동안에도 경원선은 별다른 언급이 되지 않았죠. 경원선은 그렇게 조용하게 다시 연결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 이 포스팅은 한국철도 108주년을 기념하여 철도의 날에 올립니다. > |
경의선 [京義線]
요약 :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복선철도.
본문 : 길이 518.5km이다. 1896년 7월 3일 프랑스의 피브릴사(社)의 그리유가 경의철도 부설권을 얻었으나, 자금조달 관계로 공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특허기간을 넘겨 1899년 6월 30일 부설권이 소멸되었다. 이에 한국 정부는 7월 8일 대한철도회사에 경의선의 부설권을 특허하였으나, 자금·기술의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1903년 2월 16일 러시아 정부에서 경의철도 부설권을 한국 정부에 요구한 바 있었고,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같은 해 2월 21일 일본인에 의해 서울∼의주 간 군용철도 부설을 위한 임시 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府)가 설치되었으며, 이를 한국주재 일본군사령관 예하에 전속시킴으로써 군사적인 목적을 그대로 드러냈다.
1906년 4월 3일 용산∼신의주 간 철도가 완전 개통되었고, 같은 해 9월 1일 관리권이 군용철도에서 통감부 철도관리국으로 이관되었다. 1908년 4월 1일 부산∼신의주 간 직통 급행열차인 융희호(隆熙號)가 운행되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중·일 전쟁을 계기로 복선화가 진행되었다.
경부선과 함께 한반도의 주요 종관철도(縱貫鐵道)로서 수많은 지선이 연결되어 운수 교통량은 전국 철도 중에서 가장 많아 교통상 대동맥을 이루었다. 1945년 서울∼개성 간 74.8㎞ 구간으로 단축운행되다가, 1951년 6월 12일 운영이 중단되었다. 2000년 8월 남북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린 후 경의선 복원사업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후, 2003년 6월 14일 연결식이 군사분계선(MDL)에서 열렸다.
경의선은 북한 내 여객의 60%, 화물수송의 90%를 담당하고 있어 복원이 완료되면 남북교류가 활발해지고 북한의 사회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남한은 중국으로 가는 물류비를 크게 줄일 수 있으며, 중국·러시아·유럽의 철도와 연결되면 그 기대효과는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는 경의선 복선전철화(용산-성산-문산) 사업중이라서 1단계는 2007년(문산-성산)에 개통하고, 2간계는 지하화로 성산-용산구간등 개통된다. 현재 일반통근열차를 운행중인데 복선전철화 개통하면 저상홈은 고상홈으로 변경, 일반통근열차은 통근형 대형 전동차로 변경할지도 모른다.
경의선
서울[서울역] ↔ 신의주[신의주역]
총 연장 : 518.5km
- 경의선(서울-개성) : 72.8km
- 평부선(개성-평양) : 241.7km
- 평의선(평양-신의주) : 204km
개통 : 1906년 4월 3일
남북분단으로 인한 단축운행 : 1945년
한국전쟁으로 인한 운행중지 : 1951년 6월 12일
운행재개 : 1953년 (남측 : 서울-문산, 북측 : 개성-신의주)
문산-임진강 구간 복원 : 2001년 9월 30일
임진강-도라산 구간 복원 : 2002년 4월 11일
도라산-군사분계선 구간 복원 : 2002년 12월 31일
도라산역 출입국관리사무소(CIQ) 준공 : 2006년 3월 15일
(이후 계획 : 남북한 철도 연결, 용산-문산간 복선전철화)
배선 : 단선/복선
열차 운행 :
서울-도라산 통근열차(CDC동차) 운행
서울-행신 KTX 운행
용산선
용산역 ↔ 가좌역
개통 : 1906년 4월 3일
폐선(효창-가좌) : 2005년 12월 27일
(이후 계획 : 용산선 복선전철 지하화)
배선 : 단선
서울과 신의주를 연결하는 철도인 경의선은 2006년으로 100주년을 맞게 되었습니다. 또한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경의선 연결이 발표되면서 남북관계의 개선을 상징하는 철도가 되기도 했죠.
경의선은 일제시대 경부선과 연결, 중국으로 연결하여 한반도와 중국의 수탈을 목적으로 건설된 철도입니다. 한반도를 대각선으로 종단하여 부산과 신의주를 연결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이어졌습니다. 경부선이 복선화되면서 같이 복선화되었고, 한반도의 중요한 철도가 되었죠.
1945년 광복과 함께 한반도가 둘로 나뉘고, 경의선은 경원선, 동해북부선, 금강산선과 함께 잘려나가는 비운을 겪게 됩니다. 38도선을 경계로 잘려나간 경의선은 남측구간은 서울-개성간 단축운행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경의선은 군사적 수송에 주력하게 됩니다. 1.4 후퇴때 기관사 한준기씨가 운전하던 화차 25량을 단 증기기관차가 1950년 12월 31일 장단역에 도착, 미군측에 의해 기관차가 부서지고 이 이후 남북간의 열차 운행은 완전히 단절됩니다. 휴전과 함께 개성-문산간의 경의선 철도는 완전히 버려졌고, 특히 남측의 경의선은 56km 정도밖에 남지 않아 간선의 기능을 완전히 잃게 됩니다. 따라서 선로를 하나 걷어내어 복선철도가 단선철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임진강을 건너는 철교는 도로교로 개수되었고, 휴전협정 직후 남한을 선택한 13000명의 전쟁포로들이 이 임진강 철교를 건너면서 "자유 만세"를 외쳤고, 그 이후 이 철교는 "자유의 다리"로 불리게 됩니다. 70년대 자유의 다리 남쪽에 실향민을 위한 임진각이 건설되고, 자유의 다리 앞에는 증기기관차와 함께 경의선의 철도중단점 표석이 들어섭니다. 익숙한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문구를 새기고 있었죠.
이후 남한의 경의선은 서울-문산간을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하면서 서울 북서쪽 고양과 파주의 시민의 발 역할을 하게 됩니다. 70년대 도로교통의 발달로 70~80년대에는 이용객이 줄기 시작했으나, 90년대 일산신도시가 건설되면서 다시 이용객이 늘게 됩니다. 일산신도시 건설 직후 일산주민들은 교통에 큰 불편을 겪었는데, 일산선 전철 개통이 늦어지면서 일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자유로는 그야말로 교통지옥이었죠. 일산 주민들은 일산 북쪽을 지나가는 경의선 철도로 눈을 돌렸고, 경의선 철도는 이용객이 늘기 시작합니다. 일산 북쪽의 파주, 문산지역도 발전을 시작하고, 고양시 행신지구 등의 신도시 건설로 경의선 철도의 이용객은 계속 늘어납니다. 서울 북서부의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자 경의선 복선전철화 계획이 세워지게 되고, 현재 2007년 1차로 문산-성산 구간이 개통되고, 2009년에는 나머지 구간이 개통될 예정입니다. 경의선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 경의선은 가좌역에서 지하로 들어가 용산선 구간을 운행, 용산에서 종착하게 됩니다. 이때문에 용산선은 현재 폐선된 상태이고, 2009년 지하 구간으로 재개통하게 됩니다.
한국전쟁 이후 버려졌던 문산 이북 구간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함께 다시 빛을 보게 됩니다. 남북간 철도/도로 재연결 사업이 진행되면서 임진각 바로 옆인 임진강까지 철도가 복원되고, 이어서 군사분계선 바로 앞의 도라산역까지 복원되고 출입국 사무소가 설치됩니다. 지금은 도라산역에 하루 3회 열차가 들어가고, 도라산역과 연계된 안보관광도 시행되고 있습니다. 경의선 철도가 다시 연결되면 북한을 통해 중국과 철도가 직결되고 육로로 수송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반도이면서 반도가 아니게 되어 모든 수출입 화물을 배와 비행기에 의존해왔던 남한 입장에서는 상당히 유리한 일이죠.
50여년간 끊어져 있었던 경의선 철도... 개통 100주년을 맞아 올해는 통일의 꿈을 실은 열차가 다시 한번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달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동해선 [東海線]
요약 : 함경남도 안변(安邊)과 강원도 양양(襄陽)을 잇는 철도.
본문 : 총 길이는 192.6㎞이고, 1937년 개통되었다. 남북 분단 이후 운행이 중단된 뒤 50년이 넘도록 남과 북을 가로지르는 비무장지대(DMZ)와 군사분계선(MDL)에 막혀 운행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다 2000년 열린 제1차 남북 장관급 회담과 2002년 제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 합의에 따라 남북한이 동시에 서쪽의 경의선과 함께 복원하기로 하였다. 이 합의에서 동해선은 두 단계로 나누어 복원하되 남한의 저진(猪津:강원도 고성군)과 북한의 온정리(溫井里)까지 27.5㎞ 구간을 먼저 연결하고, 나머지 구간은 1단계 사업이 완료된 뒤 설계와 공개 입찰을 통한 시공사 선정 등을 거쳐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를 위해 2003년 6월 14일 남북한 연결공사 구간 가운데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500m(남측 100m) 구간에 임시 철로를 놓음으로써 남북간 왕래의 활성화와 수송일 단축은 물론 물류비까지 절감할 수 있는 실마리를 마련하였다. 나머지 1단계 구간은 같은 해말까지 완료되며, 2단계까지 전 구간이 연결되면 경의선 연결과 함께 한반도종단철도(TKR)를 완성해 한국과 중국 동북3성, 중국·일본 간 물동량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게 됨으로써 동북아 물류중심지로 부상하게 될 것으로 남북 양측은 보고 있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검색(금강산철도,경원선,경의선,동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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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지 바퀴가 달린 차체가 자체추진력 또는
기관차의 추진력에 의해 2개의 평행한 철제 선로 위를 운행하는 지상 교통수단.
개요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철도는 그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고 캐나다, 러시아 연방, 아프리카를 위시한 세계 도처에서는 대규모 철도건설사업이 계속해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일부 선진국가에서는 철도건설사업이 둔화되면서 기존설비를 개선·향상시키는 데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즉 철도수송의 고속화와 여객수송의 쾌적함을 실현하기 위한 기술, 안전성을 갖춘 첨단 신호·교통 통제체제와 새로운 동력원, 대규모 특수 화물차를 개발했다. 또한 여러 선진국에서 철도는 다른 교통수단과 열띤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20세기 중엽까지 서유럽과 미국·영국·아일랜드 등의 선진국에서는 수익성이 없는 지선(支線)의 운영을 중단했다. 그러나 러시아 연방, 중국,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의 국가에서는 새로운 선로들이 계속해서 건설되었다. 러시아 연방의 경우 시베리아 대륙횡단철도가 복선궤도로 건설되었으며, 1970년까지 철도의 대부분이 전화(電化)되었다. 이무렵 러시아 연방은 총 13만 9,511km에 달하는 철도망을 확보하여 세계 최대의 단선궤도 철도체제를 갖추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규격이 통일되지 못한 궤간(軌間)으로 인해 발생되는 문제들을 해결하여 철도수송에 있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철도는 표준궤의 선로를 여러 개 건설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노선은 포트피리-캘굴리를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이다. 500km에 걸쳐 널러버 평원을 곧게 가로지르는 이 노선은 세계 최장의 직선철도이다.
1900~30년에 철도 기술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에 이루어진 몇 가지 기술적 진보는 이후 철도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기술적 성과는 첫째, 실용적이고 안전한 디젤 기관차의 등장, 둘째, 열차수송관리에 최고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중앙화된 완벽한 교통통제체제의 개발, 셋째, 유지비 절감에 기여한 연속용접 철도의 이용이었다. 이밖의 기술적 진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여러 국가의 철도수송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0년이 채 못되는 기간 동안
미국에서는 증기 기관차 대신 디젤 기관차로 완전히 대체되었으며, 디젤 기관차의 뛰어난 효율성으로 인해 미국의 철도수송사업은 지속적으로 민간 주도로 운영되었다. 1950, 1960년대 철도수송 분야에서 두드러진 경향은 많은 국가에서 실시된 간선철도의 전화작업이었다. 철도의 전화에는 막대한 자본이 소요되지만 일본이나 러시아 연방의 일부 지역, 서유럽, 영국과 같이 교통이 극도로 밀집되어 있는 국가에서는 수익성이 보장된다는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