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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Cover Story] 세계를 뒤흔든 피터 겔브 단장의 '改革 아리아'
2013. 6.15. 뉴욕 이신영 기자
"당신들, 로시니도 음악이라고 생각하나?"
"바그너보다 훨씬 낫다. 어디 한판 붙어볼래!"
1970년 겨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 공연장에서 가장 저렴하게 오페라를 볼 수 있는 2층 패밀리 서클(Family Circle) 구역. 공연이 끝나갈 무렵 시끌벅적해졌다. 로시니 음악을 좋아하는 '로시니파'와 이를 싫어하는 '바그너파' 관객들 사이에 말싸움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열여섯 살의 좌석 안내원이 관객들 사이에 뛰어들었다. "여긴 싸우는 곳이 아니에요. 그만하세요!"
43년 뒤인 지난달 29일 뉴욕 링컨 센터의 메트 오페라 공연장. 지하 무대 뒤편으로 걸어 들어가니 머리가 벗겨진 60대 남성이 "반가워요. 어서들어오세요!"라고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한때 시급 40달러를 받던 좌석 안내원에서 1500명 직원을 거느린 메트의 단장으로 2006년 부임한 피터 겔브(Gelb·60)씨다. 메트는 연간 30여 종의 오페라를 200회 이상 공연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오페라단이다.
"당시 오페라가 워낙 인기라 오페라 가수가 TV토크쇼도 진행했어요. 상상이 안 되시죠? 또 '모차르트파' '바그너파' 등 음악 색깔이 뚜렷한 마니아들은 술을 마시고 공연을 관람하다 다른 파를 모욕하기 일쑤였어요. 덩치 좋은 인근 소방서 직원들이 아르바이트로 오페라단 경비를 볼 정도였다니까요(웃음)?"
좌석 안내원 시절을 회상하는 겔브 단장이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제가 36년 뒤 부임했을 때 오페라는 죽어 있었습니다. 고객의 평균연령은 매년 증가해 65세가 됐고, 관객은 하향 곡선을 그려 6년 연속 매출은 제자리걸음이었죠. 현대 공연 연출의 감각도 잃고 있었고, 과거에 인기 있던 오페라를 재활용하고 있어 정체돼 있었죠. 한마디로 예술적 스테그네이션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는 2006년 부임하자마자 시즌 오프닝 공연을 타임스퀘어 광장 전광판에 길거리 관광객 수천 명을 대상으로 무료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또 전 세계 영화관과 인터넷을 통해 오페라를 싼값에 배급하기 시작했다. '오페라의 대중화'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메트는 세계 64개국 1900개 영화관에 오페라를 생중계하는데, 7년 동안 누적 관객이 1300만명을 돌파했다. (영화관들은 생중계 후 1~2주 정도는 같은 오페라 화면을 상영하며, 아시아 등 20개국은 시차 문제로 녹화 중계한다.) 오페라 전용 극장이라면 300~400달러를 줘야 볼 수 있는 공연을, 단 22달러로 영화관에서 누구든지 생중계로 볼 수 있다. 한국 메가박스에서는 현재 모차르트의 '티토 황제의 자비'를 상영 중이다. 오페라 전용 극장에선 기껏해야 4000명이 볼 수 있는 공연이 지금은 전 세계에서 평균 25만명이 함께 즐기는 공연이 됐다. 2008년 타임지는 겔브 단장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했다.
그는 "메트의 가장 큰 위험은 전혀 위험을 지지 않으려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100년, 200년 된 오랜 조직에선 그 어떤 경우에도 마법의 처방전은 없습니다. 이럴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위험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오페라는 매우 손쉽게 오페라를 만들었어요. 오페라 배우들이 의상만 입고 노래만 잘하면 됐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그건 기존의 '올드' 관객은 만족시키지만 새로운 관객은 만족하지 못했어요. 미래를 위해선 지금 당장 변화를 실천해야 했습니다. 이를테면 메트는 120년 동안 잠자던 거인이었어요. 제가 그 거인을 깨운 거죠(웃음)."
그는 오페라와 무관한 외부 인사들을 영입해 오페라의 내용에도 변화를 불러왔다. 중국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에게 '진시황제',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앤서니 밍겔라 감독에게 '나비 부인' 연출을 맡긴 게 대표적이다. 요즘 경영계의 화두인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오페라에 도입한 것이다.
"외부 인물들은 내가 모르는 시각을 가지고 창의적으로 무대를 연출할 수 있어요. 또 스토리를 매우 잘 전달해 오페라의 단점을 보완해 줍니다."
겔브 단장의 인생 모토는 "항상 '계산된 위험을 지는 것(risk the calculated risk)'"이라고 했다. 위험을 마다하지 않되 면밀히 계산한 뒤 뛰어든다는 의미다.
그는 소니의 자회사인 소니클래식레코드 사(社) 사장 시절 첼리스트 요요마에게 미국 대중음악을 연주하게 해 앨범을 내고, 팝 가수인 샬럿 처치를 클래식 가수로 데뷔시켰다. 영화 타이타닉 음반을 발매해 전 세계에 2600만장을 팔아치우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클래식 전문가와 언론으로부터 "클래식을 죽이는 인간"이란 질타를 받았다. 겔브 단장은 당당했다.
"예술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실수가 뭔지 아십니까? 자신들이 만든 높은 수준의 예술이기 때문에 항상 상류층에게만 소비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접근은 포퓰리스트가 되는 것이었어요. 예술의 품질이 높아도 대중에게 연결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란 것입니다. 저는 지금 전쟁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쟁은 예술을 살리기 위한 전쟁입니다. 물론 우린 팝 음악, 뮤지컬 같은 대형 산업을 앞지를 순 없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오페라의 뛰어난 예술인들의 인생을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피터 겔브 단장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은 타조와 같다"고 말했다.
"타조의 습관이 뭔지 아세요? 모래에 자신의 머리를 푹 집어넣는 겁니다. 다시 말해 숨을 수 없는데 숨으려고 하는 비겁한 동물이 타조입니다."
그는 "오페라의 상품화를 24시간 고민한다"고 했다. "오페라 단장은 좌뇌와 우뇌를 계속 번갈아 가며 일하는 직업이에요. 경영, 예술 감독, 인재 발굴, 기부금 모집, 제작까지 1인 5역을 해야 합니다."
1년 반 동안 직원 설득
―어떻게 오페라를 전 세계 극장과 길거리, 인터넷으로 퍼트릴 아이디어를 얻으셨나요?
"메트는 80년 전부터 라디오를 통해 대중에게 오페라를 들려줬지만, 그건 수익성도 나지 않는 모델이었어요. 제 기본 아이디어는 뉴욕 양키스 같은 야구팀이었어요. 인터넷으로도 야구를 볼 수 있는 스포츠팬들이 굳이 진짜 경기장을 찾아오는 것처럼 '오페라도 못할 게 뭐가 있느냐'는 것이었죠. 오페라 지형을 흔들어야 했어요. 오페라를 모르는 고객이 '이 오페라는 나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 주자는 것이었죠."
소니 클래식 레코드 사장으로 일하던 그는 2004년 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이사회로부터 단장직 제의를 받은 뒤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그의 삼촌은 바이올리니스트였고, 뉴욕타임스 기자이던 그의 아버지는 그를 자주 오페라 공연에 데려가곤 했다. 그가 43년 전 메트 좌석 안내원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음악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메트 단장직은 그에겐 꿈의 직업이었다. 그는 이사회에 "이 오페라단엔 엘리트주의가 팽배해 있다. 사람들의 일상적 삶에 연결돼 있지 않다.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이틀 뒤 5년 계약에 사인했다.
그는 소니 클래식 레코드 사장을 사임한 뒤 2006년 8월 부임하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메트로 출근하며 개혁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그러나 메트의 노조는 저항했다. 당시 로브 마허 코러스 부문 노조위원장은 뉴요커지와 인터뷰에서 "그의 파격적인 제안에 대다수 직원이 반발하며 대화를 거부했다"고 했다.
―120년의 역사를 가진 강성 노조를 어떻게 설득했나요?
"메트엔 1500명의 직원이 있어요. 오전엔 예술 디렉터급 직원, 점심식사는 오페라 배우 등 직원들을 매일 반복적으로 만났죠. 저는 그들에게 '개방하고 실험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그것이 미래를 보장하고, 당신들의 일자리를 책임진다. 손해 볼 것도 없다'라고요. 매일 똑같은 말을 똑같은 톤으로 설명한 끝에 1년 반 만에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2006년 9월 시즌 오픈작인 '나비 부인'을 타임스스퀘어 광장에 틀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죠. '오페라가 깨어났다!'"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이 공연한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한 장면.
겔브 단장 부임 이후 신세대 관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 현대적인 무대 연출, 극적 스토리
등을 적극 무대에 도입하고 있다. / 블룸버그
오페라는 유망한 틈새시장이었다
―아무래도 영화관에서 중계로 보면 오페라극장에서 직접 보는 것과는 다를 텐데요?
"아뇨. 우리 오페라는 수천 마일 떨어진 영화관에서도 기립 박수를 칠 정도예요. 12개의 카메라로 어떤 무대도 생생하게 담는데, 그중에서도 최고의 샷을 뽑아내 위성으로 각 나라에 송출합니다. 진짜 오페라를 보는 착시를 일으키는 거죠. 중간 휴식 시간에 뒷무대에서 쉬는 배우를 인터뷰하는 장면도 보여줍니다. 일부 오페라는 2시간이 넘는 지루한 상영 시간을 100분으로 단축하기도 했습니다."
―영화관 입장에서 대중이 잘 모르는 오페라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도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놀랐지요(웃음). 극장은 새 콘텐츠에 목말라 있었어요. 오페라는 극장 콘텐츠를 보강하는 획기적 대안이었던 겁니다. 지금은 영화관에서 오페라는 물론이고 뮤지컬·팝뮤직·클래식 공연도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가장 표가 많이 팔리는 게 오페라이고, 그중에서도 메트가 1등이에요. 올해에만 270만장의 티켓을 팔았습니다. 관객 중 40%는 오페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관객이에요. 오페라는 정말 탁월한 틈새시장이었던 거예요. 사람들은 죽는 시장이라 여겼지만요(웃음). 수입은 극장과 저희가 5대5로 나누는데, 현재 매년 1000만달러 이상의 순익을 거두고 있어요. 결국 2011년엔 2004년 이후 처음으로 오페라단이 70만달러의 흑자를 냈습니다."
그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보기 때문에 단원들이 스스로 품질을 끌어올리려고 하는 효과도 있다고 덧붙였다.
"생중계가 있는 날 단원들은 가장 뛰어난 실력을 발휘합니다. 저희 오페라 카르멘은 극장 생중계로 최대 40만명을 끌어모았는데, 이는 기존 공연장 최대 수용 인원의 100배입니다. 올림픽이 왜 대회 때마다 신기록이 경신되는지 아세요? 위대한 운동선수는 많은 관객으로부터 받는 긴장을 퍼포먼스로 전환시키거든요. 오페라 배우도 그렇더라고요."
―극장에서 싸게 오페라를 보면 정작 공연장 관객은 줄지 않나요?
"실제 관객이 감소한 것은 뉴욕과 보스턴 지역의 일부 관객뿐이었어요. 오히려 75%였던 공연장의 오페라 좌석 점유율이 지금은 평균 80%까지 올랐고, 평균 연령대도 62세에서 57세로 낮아졌습니다."
▲ 지난 2009년 9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이 타임스스퀘어 광장 대형 TV 화면으로 시즌
오프닝 작품인 오페라 토스카(Tosca)를 생중계했다. / AFP
기성 관객·신세대 관객을 다 잡아라
그가 늘 고민하는 문제는 새로운 관객을 유치하되 올드 관객들을 어떻게 잃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건 뉴욕타임스가 가진 문제이기도 하고, 아마 조선일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두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양동 작전을 폈다.
"고령의 올드 관객들은 오페라의 연기보다 음악에 몰두합니다. 그래서 몇 년간 메트 오페라를 이끈 음악감독 제임스 레바인에게 평생 고용을 보장했어요. 또 세계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오페라 가수들인 안나 네트렙코, 내털리 드세이에겐 반드시 1년에 2~3차례는 공연하도록 했어요."
그는 젊은 관객들을 위해서는 레퍼토리를 수시로 교체하는 전략을 폈다.
"지난 20년 동안은 히트작을 재탕 삼탕 우려먹고 있었는데, 우선 그걸 그만뒀어요. 지금은 연간 27~28개의 오페라 중에서 그동안 해보지 않은 새로운 오페라를 7~8개는 제작합니다."
그가 부임한 뒤 가장 히트를 친 상위 5개 오페라 중 4개는 당시 처음으로 시도한 트라비아타, 카르멘, 나비부인, 리골레토이다.
"신세대 관객은 현대적인 무대 연출, 연기력, 극적 스토리를 좋아해요. 예컨대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의 무대는 1960년대의 휘황찬란한 라스베이거스를 묘사했어요."
기존 제품을 재포장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오페라 밖의 영역에서 인재를 영입하는 것이다. 뮤지컬 라이언 킹 연출가에게 오페라 마술피리를 맡긴 게 한 가지 예이다.
"외부 인사들은 관객이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오페라를 끌고 가기 때문에 관객에게 설렘을 안겨줍니다."
그는 티켓값도 관객의 주머니 사정에 따라 차별화하는 전략을 폈다. 이른바 '러시 티켓' 제도이다. 매일 공연 당일에 125~420달러짜리 티켓 200개를 15~20달러에 파는데, 금방 매진된다.
―예술인들을 다루는 나만의 원칙이 있다면.
"정직성입니다. 또 예술인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겁니다. 제가 한때 피아니스트 호로비츠의 매니저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워낙 괴팍해 콘서트를 자주 취소하곤 했어요. 그런데 제가 매니저할 땐 콘서트를 취소한 일이 없었어요. 그는 다이어트에 무지 집착했는데, 항상 도버 해협에서만 잡히는 넙치를 먹을 정도였어요. 그는 또 매끼 음식을 정해진 양만큼만 먹을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