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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사랑받는 법칙 세 가지
《반야심경》이라는 유명한 불교 경전이 있다. 그 마지막 부분을 보면 "보시사바하"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사바하"는 일을 원만히 성사하거나 성취한다는 말이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나 또한 오랫동안 인간의 모든 행위 가운데 신이 어떤 것을 좋아할지 고민하고 조사한 결과 바로 청소와 감사 그리고 감사다. 신은 인간 행동 가운데 이 세 가지를 손꼽아 좋아하지 않을까? 그는 한결같이 청소하고, 웃고, 감사하는 사람을 응원할 것이다.
무엇보다 신은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 예쁜 사람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모습이 어여쁜 사람이다. 서 있는 모습, 걷는 모습, 앉아 있는 모습 등 행동과 관련한 모든 움직임을 말한다. 단순히 얼굴만 예쁜 것을 일컫지는 않는다.
두 번째는 마음이 예쁜 사람이다. 하지만 누가 마음이 예쁜 사람인지 단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죽음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을 구하려고 뛰어드는 사람 마음은 100번 생각해도 예쁘고 아름답다. 그렇다면 이와 다른 마음은 아무리 실천해도 예쁘지 않을까? 계속 생각해도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세 번째는 주변이 깨끗한 사람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로 언급한 모습이나 마음으로 승부할 수 없는 사람은 이 세 번째 기준으로 신에게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어느 호텔 경영자가 한 이야기다. 그는 운동선수가 호텔에 머무르며 방을 깨끗하게 치워놓고 나가는 날에는 성적이 좋지만 반대로 평소와 달리 방을 정리하지 않고 지저분한 상태로 나가버리면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성적이 좋았던 다음 날 방에 들어가 보니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는 말은 기분이 좋아서 방을 깨끗하게 사용했다고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방을 깨끗하게 치워놓고 나가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신이 돕는다는 해석이 더 정확해 보인다. 호텔 경영자는 대체로 일류 선수일수록 방이 깨끗하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웃음이다. 웃음이란 무엇일까? 긍정, 수락
공명(共鳴), 공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웃는 얼굴이나 웃음소리는 우주와 지구 그리고 신이 이루어낸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표현이다. 익살을 부리고 농담을 나누며 서로 웃는 것도 그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웃을 수 있는 사람은 긍정적이고, 받아들일 줄 알며, 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은 '감사다. 살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기만 해도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일본어 '감사합니다.'의 어원 아리무즈가시(有り難)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사람 힘으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일을 이뤘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던가. 이 표현은 신에게만 사용해온 단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즉 '감사하다' 라는 말은 결국 신을 칭송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자신에게 계속 감사하는 사람을 신이라고 어찌 어여삐 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감사하기만 해도 신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응원 받을 수 있는데 거기에 청소와 웃음(긍정)까지 더한다고 생각해보라.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편이 생길 것이다.
어찌되었든 지금 당장 행복을 불러오는 방법을 찾는다면 아무 생각하지 말고 이 세 가지 법칙을 실천해보기 바란다. 이 세 가지 법칙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언제나 혼자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와 장소를 가릴 필요가 없으며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아도 언제든지 실천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돈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청소든 웃음이든 감사든 이를 실천하는 데는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다. 언제나 무료다. '어째서?'라고 의문할 여유가 있다면 차라리 1분이든 2분이든 조금이 라도 더 빨리 실천해보라. 직접 해보면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운(運)은 행동(動)에서 나온다. 그것이 바로 '운동(運動)'이다. '실천' 이 '결과'를 낳는다. 움직이면 무조건 행복하고 재미있는 현상을 맛 볼 수 있다. 부디 실천해서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겁게 누리기 바란다.
비교 세계를 벗어나라
“키가 2미터인 사람과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인 사람, 발이 30센티미터인 사람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종종 하는 질문이다. 정답은 “비교할 수 없어서 대답할 수 없다”다. 전혀 다른 기준으로 비교하고 경쟁하며 평가하려는 것은 억지다.
자녀를 교육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숫자를 좋아하는 아이, 체육을 잘하는 아이, 바느질에 소질 있는 아이 등등 저마다 개성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 뛰어나다는 사실만으로 그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더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어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교할 수 없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조건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사람은 '항상 비교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 '비교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 하나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나다. 분명히 다른 사람은 없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도 무조건 전체적으로 평가하려고 한다. 자신과 상대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잘못이고 무의미하다.
자신이 꿈꾸는 인격과 사고방식, 삶을 향해 매일 노력하고 이력을 쌓아나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 다시 말해 자신과의 싸움일 뿐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일이 아니다. 나 자신이 정상을 향해 얼마나 달리고 있는가, 그것만이 중요하다. 비교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과 보람을 위해 달릴 뿐이다. 나는 이것을 “자기 등산로”라고 부른다. 비교의 세계에서 최대한 벗어나 자기 등산로에 최대한 다가가는 삶을 추구하면 어떨까?
돈의 흐름을 막는 마음의 찌꺼기 없애기
보통 사람은 원하면 바로 돈이 생긴다고 생각하고 '간절히 원하라'거나 '필사적으로 매달리면 이루어진다.'라고 최면을 거는 경향이 있다. 내가 깨달은 결론은 조금 다르다. 그렇게 원하고 필사적으로 매달리면서 욕심과 집착, 미련을 쌓아가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 그것이 우주의 법칙이다.
그렇다면 이 정신적인 찌꺼기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해답은 바로 청소다. 정신적으로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청소 하는 것이다.
깨끗한 사람에게 돈이 모인다.
마사키 박사는 낚시를 거의 해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유가 생겨 바다에서 낚시하게 되었다. 낚시 용품점에서 낚시 도구를 빌려 바다에 줄을 내렸는데, 불과 반나절 만에 돌돔 80마리를 낚아 올렸다. 그렇게 잡은 돌돔을 들고 낚시 도구를 돌려주러 갔더니 매장 주인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았겠는가. 낚시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도 돌돔은 보통 하루에 한두 마리 잡아야 많이 잡는다. 마사키 박사는 초보인데도 80마리나 잡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장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
“돌돔 녀석들이 선생님께 잡혀서 빛의 나라로 가려고 했던 게 분 명합니다.” 돌돔은 사람들에게 잡히는 일 없이 대부분 바다에서 죽어 그 속에서 사라지는 물고기다. 그런 돌돔이 사람에게 잡혀서 인체 속에 들어간다면 녀석 세포는 인간 세포로 승화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들이 잡힐 사람을 고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사키 박사는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였다. 어쩌면 물고기까지 기쁨의 원천인 고결한 사람의 세포로 바뀌고 싶다고, 승화하고 싶다고 바랐던 게 아닐까. 그 이야기를 듣고 이런 추측이 용솟음쳤다.
'돈은 물질이지만 의식이 있다. 그렇다면 돈 자신의 의지로 공간을 깨끗하게 쓰는 사람, 타인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 품에 모여들려고 하지 않을까?' 어떤 이는 돈을 가장 나쁘게 쓰는 방법이 도박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분수에 넘치게 사치하는 것,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생활이 180도 달라지는 것이 나쁘다. 마지막으로는 돈을 불필요하게 '끌어 모으기만 하는 것'이 나쁘다.
돈에도 마음이 있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을 주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탁발수행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탁발이란 수도승들이 그릇을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이나 돈을 공양 받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왔기에 누군가에게 베풀거나 그들을 도운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를 통해 그들이 다른 이에게 베풀고 도움을 주는 기회를 얻게 하려는 것이 다. 이것이 탁발의 진정한 의미니라.”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 역시 충격 받았다. 어떤 이에게서 똑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길이나 역에서 탁발승과 마주쳤을 때 희사(喜捨), 즉 기부 차원에서 그릇에 5,000원짜리 지폐를 한 장 넣었다고 해보자. 수도승은 짧은 염불을 중얼중얼 외우면서 가볍게 목례하고 방울을 울린다. 그러면 돈을 넣은 사람은 두 손을 모으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예법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희사란 우리 인간을 가난에서 구제하는 지극히 감사한 체계다. 본래 직접 먼 곳에 있는 절까지 가서 기부해야 마땅한데 일부러 수도승들이 찾아와서 기회를 주니 감사하는 인사를 올리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말해 이렇게 추론해볼 수 있다. 돈을 사용할 때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큰 도움을 주면 돈 스스로 의지를 발휘해 그 사람 곁으로 찾아간다. 따라서 그는 돈을 모으게 된다. 그런데 돈이 모여들었다고 해서 무조건 쌓아두기만 하고 쓸 줄 모르면 돈은 자기 처지를 슬퍼한다. 이 세상 많은 사람을 도와야만 돈은 웃으며 그 사람 곁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다.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돈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좀처럼 모이지 않는다.
이 세상 많은 사람을 도와야만 돈은 웃으며 그 사람 곁에 오래도록 머물 수 있다. 자신만을 위한다면 돈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좀처럼 모이지 않는다.
화장실 청소하면 행복해진다.
어느 해엔가 11년 동안 우울증 환자 열두 명이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우울증을 치료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여덟 명은 꼭 치료하고 싶다고 대답했고 나머지 네 명은 치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에겐 그냥 그대로 지내라고 말했다. 우울증을 치료하고 싶다고 말한 여덟 명은 모두 뜻을 이뤘다. 짧게는 1주일, 길게는 3개월에 걸쳐 증세가 완전히 호전됐다. 그 비법은 바로 화장실 청소였다. 내게는 참으로 흥미로운 도전이었기에 그 원리를 곰곰이 생각해 본 끝에 나름대로 추론할 수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게 되면 우울증이 사라지는 것 같다. 반대로 말하면 우울증 환자는 누구보다 자신을 싫어하고 경멸하는 것일 테다. '나 같은 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혹은 '나는 왜 여기에 있지?'리는 부정적인 생각이 우울증 원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무엇이 원인이든 아무래도 좋다. 당장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을 싫어하거나 부정하는 마음을 없애도록 노력해보시라 사람이 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는 '나는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계산적이라도 재미있으면 그만
주방, 세면대와 욕실처럼 물이 있는 곳을 깨끗하게 하면 작은 지갑이나 큰 배낭에 금은보화를 한가득 챙겨온 신들을 소중하게 다루는 일과 마찬가지다. 더 운이 좋으면 우스사마처럼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배낭에 금은보화를 싣고 온 신을 기쁘게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세 군데만 깔끔하게 청소하면 돈 때문에 어렵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위에 계신 그분' 말이다.
10여 년 전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나 역시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 때 거짓말처럼 뜻밖의 수입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액수가 점점 늘어났다.
사람들이 보통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생각하는 곳을 청소하면 욕심, 집착, 조바심을 버리게 된다. 마음이 투명해지면서 마음속에 쌓여 있던 먼지가 사라지고 금은보화가 마구 들어온다는 '그분' 가르침대로 정말 행복한 일이 생긴다. 마지막으로 꼭 해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반년이 지나고 1년이 다 되도록 동전 한 닢 들어오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 아무리 화장실을 청소해도 돈이 생길 리 없다고 불평불만과 투정을 늘어놓을 '예정'이었던 사람은 아무리 청소하고 또 해도 행운이 따르지 않는다. 신은 그 사람이 화장실을 청소하다 몇 달 뒤에 투정을 늘어놓으리라는 사실을 일찍이 내다본다. 화장실을 청소하다 투정이나 불평불만만 늘었다는 사람은 절대 행운을 누릴 수 없으니 각별히 주의하기 바란다.
다른 사람들이 귀찮아하고 싫어하는 일에 소매를 걷어 붙이고 달려 들어보라. 인간이란 존재는 그런 일을 하면 할수록 자신을 좋아하게 되고 자신감이 생긴다.
사용한 화장실은 반들반들 윤나게
1주일에 몇 번으로 정해서 청소하라는 말이 아니다. 횟수는 중요 하지 않다. 다만 자신이 사용한 화장실에 잡티 한 점도 남기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이 깨끗하게 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다. 일주일에 세 번이니 네 번이니 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한 장소가 어디든 반드시 반들반들 윤나게 청소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했더니 생각지 못한 수입이 생기더라는 이야기였다.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일단 어디가 되었든 자신이 들어갔던 화장실은 깨끗하게 해놓고 나오라는 제안으로 이해하면 된다.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려고 내 곁으로 오지 않아도 되는데…. 거듭 말하지만 일주일에 몇 번 청소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화장실을 사용한 뒤 깨끗하게 청소하라는 뜻이니 말이다.
남성인 경우 소변을 본 뒤에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나는 소변기는 청소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화장실 청소는 다른 이들이 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옛말처럼 화장실 청소 역시 가능하면 남들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다. 살짝 문을 닫고 은밀하게 해 보시라.
제2장 웃음은 인생을 즐겁게 만든다.
무슨 일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웃음이 우러난다.
신이 좋아하는 인간의 세 가지 행위는 청소, 웃음, 감사다. 이것이 소와카 법칙이다. 신은 청소를 잘하는 사람, 웃는 얼굴과 웃음소리, 감사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청소와 감사는 일종의 선행이다. 수많은 위인과 선각자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여기에 웃음이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웃음이 긍정을 뜻하기 때문이다. “나는 운이 참 좋아” “나는 정말 복도 많아”라고 행복하게 함성을 지르는 사람 곁에는 정말 그런 사람만 모여든다. '참 닮고 싶은 사람 이야' '정말 행복해 보여' '꼭 한 번 만나서 이야기해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긍정적이고 감사가 넘치고 밝게 말하면 주변에도 즐겁고 행복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모이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기분이 아니라 우주 원리요 법칙 문제라는 말은 사실이다. 신은 힘들고 슬픈 현실 앞에서 괴롭고 슬프다며 울먹이는 사람을 응원하거나 돕지 않는다. “너무 힘든데 어떻게 웃을 수 있나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주의 원리는 오히려 반대다. 불평과 우는소리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현실은 순식간에 변한다.
큰 소리로 웃는 사람은 병에 걸리기 어렵다.
현대의학의 최첨단은 '웃음'이다. 내 강연회에 오는 분 가운데 한 번도 웃지 않는 분이 있다.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는 손해가 크다. 많이 웃어야 자신에게 득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농담이나 익살에 웃는 사람은 초급이다. 재미없어도 웃을 수 있다면 중급이다.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웃고 보는 사람은 최상급이다. 한 사람이 만담 공연장에서 무조건 사람들을 따라 웃은 뒤에 “저, 뭐가 그렇게 웃기죠?”라고 옆 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글쎄요, 저도 그냥 따라 웃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렇게 수준 높은 대화가 또 있을까.
건강의 비결은 마음과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
웃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웃지 않으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으로 호탕하게 웃어보자. 인체는 사실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반응한다. 모든 것이 내가 어떻게 인식하는 가에 달렸다. 육체는 그에 100퍼센트 온전히 반응할 뿐이다.
몸은 인식에 따라 변한다.
내장 온도를 올리는 방법 또 하나는 바로 '웃음'이다. 웃음은 일종의 체조와도 같은 것으로, 웃으면 심장박동수가 올라가면서 혈압이 오르고 호흡량이 늘어나 산소 소비량이 증가한다. 열심히 체조했을 때와 똑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감사의 본질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니 감사하고 저렇게 하니 감사하지 않다고 한다면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면역력은 높이는 눈물의 힘
웃음이 면역력을 높이고 건강을 책임진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눈물'도 면역력을 높인다. 오히려 면역력을 높이는 데는 웃음보다 눈물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도 있다. 물론 후회나 스트레스 때문에 홀리는 눈물은 당연히 몸에 좋지 않다. 감동과 공감의 눈물이야말로 우리 몸에 보약이다.
마두금 연주자가 현을 타며 구슬프게 노래를 부르고, 부인이 어미 낙타 몸을 정성스럽게 쓰다듬는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어미 낙타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새끼들을 위협하던 무서운 표정도, 으르렁거리던 소리도 서서히 잦아들고 겁먹은 듯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새끼 낙타들을 사랑스럽게 품어 안는다. 어미 낙타는 음악으로 마음을 치유하고 모성을 살려 냈다. 사람이 마음을 파고드는 음악을 들으면 눈물을 홀린다는 사실이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동물이 음악을 들으며 우는 장면은 엄청나게 충격적이고 놀라웠다.
그런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샛노란 눈물을 떨어뜨린 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거짓말처럼 몸에서 부기가 빠졌다. 그날 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자 온몸이 깨끗해져 있었다.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무슨 짓을 해도 낫지 않았던 아토피가 말끔히 나았다. 그 눈물 한 방울로 몸속에 퍼져 있던 맹독이 응축되어 빠져나와버린 모양이다.
“의료 행위나 약물에 기운을 허비하기 전에 인생관이 자기 몸을 망가뜨릴 수 있다”라고 깨달은 여의사는 약을 처방하기보다 환자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뒤에 치료하기 시작했다. 결국 약값으로 이익을 챙기지는 못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 수입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남편과 맞벌이를 하기에 '수입은 남편에게 맡기고 환자를 치료하는 데 전념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어찌된 일인지 수입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다르게 초진료 수입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병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려주는 유능한 의사라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병원 문이 닳도록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이야말로 신이 응원하기 시작한 전형적인 증거가 아닐까.
제3장 감사의 위대한 힘
신은 겸허한 사람을 응원한다.
30여 년 동안 정신세계와 초능력, 초자연적인 현상을 연구해오면서 나름대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신은 겸허한 사람을 좋아하고 교만한 사람은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굳이 신의 영역까지 거론할 것 없이 인간세계도 마찬가지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 친구가 많고 업계에서 따르는 사람도 많은 이들은 하나같이 성품이 겸허하다. 인간관계나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사람은 성품이 교만해서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과 교만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것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겸손함이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수확이 자기 능력 덕분이 아니라 친구나 지인,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신, 부처, 정령 등) 덕분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본인 능력이나 재능, 노력으로 모든 것을 얻었다고 장담하는 사람을 교만하다고 한다. 잘난 척하거나 우쭐거리는 태도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가 아닌, 기본적으로 자기 업적이나 삶의 방식을 스스로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겸손과 교만을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첫 번째 기준은 '생각' 즉, 마음과 관련한 부분이다. 사람은 으스대지 말아야 하고 다짜고짜 호통 치지 말아야 하며, 함부로 성을 내서는 안 된다.
두 번째 기준은 말이다. 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
세 번째 기준은 행위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화장실을 꾸준히 청소 하면 된다. 생각과 관련해서 으스대지 않고 호통 치지 말고 성내지 않으며, 말과 관련해서 늘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행위에 있어서는 화장실을 청소하며 이 세 가지 분야를 확실하게 정립하면 그제야 대단히 겸손하다고 일컬을 수 있다.
겸손은 곧 실천이다. 또한 겸손은 무한히 감사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겸손은 감사이며 실천이라고 여기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실천적인 생활 방식을 지닌 사람은 신, 부처, 정령을 포함한 모든 이의 사랑을 한 몸에 받기에 곳곳에서 지원과 응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하다고 10만 번이나 거듭해 말한 결과 암이 나았다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방정식대로 기적을 겪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감사하디는 말에 엄청난 위력이 있는 것만큼은 틀림없다고 증명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을 받아들이고 느끼기만 할 뿐이다. 우주 어디에도 행복이라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 따라 강물 따라 흘러가는 사람을 풍류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던가. 풍류가 좋은 사람은 인생의 기쁨을 온전히 느끼며 살아간다.
상대방을 바꾸기 위해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고 그저 그를 수용하고 감싸주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순간부터 상대방을 포함한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3초 만에 가능하다. 과거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데 1초, 현재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데 2초, 미래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데 3초. 이렇게 3초면 코앞에 펼쳐져 있던 고민과 고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한 걸음씩 천천히 밟고 올라가면서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우뚝 버티고 서 있던 장애물과 방벽이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순식간에 소멸한다. '오늘부터 시작하자'라고 마음먹었다 해도 오늘이 바로 '지금'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사흘' 뒤에 시작하자. 사흘 뒤부터 나를 개선해나가면 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변하지 못한다. 진정 변하고 싶다면 '지금 당장'뿐이다.
우리는 감사하고 좋은 것들 속에서 살고 있다. 감사히는 미음은 '겸손'하고 '겸허 '한 마음이다. 주변 사물과 맛있는 음식, 물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요소라고 깨닫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온다. 아침에 일어나면서 아무 이유 없이 “아, 행복해”라고 말해보자. 행복하다고 스무 번 말하는 순간 행복한 현상을 스무 개 찾기 위해 이것도 행복하고 저것도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먼저 입 밖으로 행복하다고 내뱉었기에 행복을 찾아 나서게 된다. 우리는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을 받아들이고 느끼기만 할 뿐이다. 우주 어디에도 행복이라는 이름의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소에 걸어 다닐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느끼면 행복이 하나 들어오고, 눈으로 볼 수 있어 행복하다고 여기면 행복이 하나 더 들어온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대단한 위력을 가져서 최대한 많이 하는 것이 좋다. 애써서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좋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가슴에서 우러나와 감사하라고 하지만 나는 형식적이라도 좋으니 최대한 지주 감사하다고 말하라고 권한다.
복합골절로 전치 3개월을 진단받은 사람이 병원 침상에서 계속해서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한 달 만에 완쾌했다는 이야기, 절대 안정 하지 않으면 상한 척추가 끊어져 하반신이 마비될 수 있다던 사람이 하늘을 우러르며 계속 감사하다고 말했더니 언제 아팠냐는 듯 깨끗하게 나았다는 이야기. 이런 말을 듣고 그녀도 크게 의식하지 않고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감사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감사하고 좋은 것들 속에서 살고 있다. 하다못해 플라스틱 소품 속에 심어놓은 작은 꽃도 가슴 가득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온다. 감사하는 마음은 '겸손'하고 '겸허'한 미음이다. 어떤 물건이 그 자리에 있어서 내가 존재할 수 있고, 맛있는 음식과 물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요소라고 깨닫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 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온다.
감사는 말로 표현해야 한다.
마음으로는 너무 감사한데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면
실천하지 않은 것이다. 감사하다고 느꼈다면 입으로도 표현해야 한다.
제4장 아름다운 욕심쟁이
실천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유머를 듣고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만 표정이 험악하다면 그 사람은 결국 웃지 않은 것이다. 감사도 말로 표현해야 한다. 마음으로는 너무 감사한데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면 실천하지 않은 것이다. 감사하다고 느꼈다면 입으로도 표현해야 한다. 보통 차를 대접받으면 감사하다고 말한다. 고마운데도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다면 그는 차를 대접받고도 언짢아하는 사람이다. 감사하다면 말로 표현하라. 청소, 웃음, 감사를 행동으로 옮기면 제일 먼저 인간관계가 변한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미소가 가득한 멋진 이들과 마주할 것이며, 그들과 평생을 함께하는 벗이 될 수 있다.
“더 이상 꿈과 희망이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꿈과 희망이 가득한 삶'이란 바꿔 말하면 '아직도' '여전히' 이도 저도 부족해서 죽을 때까지 만족할 수 없는 생활이다. 그에 비해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이란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오로지 감사가 넘치는 삶이다. 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인생인가!
아무리 의욕이 넘치고 야심차도 실제로 행동에 옮겨야만 '실천가라고 부를 수 있다. 실천력이 강한 사람은 무슨 일이든 시작하려고만 하면 주변에서 잇따라 지원한다. 그가 비전을 실현하거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분발 하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저 매일 덕(德)을 쌓아왔기 때문에 즉시 지원과 응원이 몰려든다. 자기 혼자 힘으로 하려고 하기보다 도움과 격려를 누리는 일상생활을 추구해나가는 것이 바로 득인 셈이다. 바로 나를 둘러싼 사람, 사물, 상황에 감사히는 것이다. 인생과 일을 판단하며 '내 실력과 노력으로 이루었다.' 라고 생각하는 대신 '많은 이가 지원하고 응원해준 덕분이니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라고 방향을 틀어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것이 인생을 즐겁게 누리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신과 우주는 사심 투성이라도 좋으니 자리를 양보하는 쪽을 원할 것이다. 손익분기점을 따져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100퍼센트 아름답고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도 좋으니 지독하게 계산적이고 욕심 많은 사람이 되라.
'말은 칼이다.'
말은 칼과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강력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도구로서도 매우 중요하지만, 양날을 가지고 있어 사람을 다치게 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엄청난 위력을 가진 말을 새삼 다시 인식해보라는 메시지로 보였다. 이 메시지를 받고 프로이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의사에게는 수술대와 칼 그리고 약, 이 세 가지가 꼭 필요하다. 다만 정신분석 분야에서는 칼이나 수술대나 약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정신분석의 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다. 그에게는 언어 구사와 활용이 전부다.”
말 하나로 눈앞에서 호들갑 떠는 사람을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고, 우울해하는 사람이 단번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할 수도 있다. 말이 10초, 20초라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 마음을 극과 극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껏 우리는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어떤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려고 2~3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생각만 한들 그 사람은 불행해지지 않는다. 생각은 말에 비하면 그만큼 작고 여리다. 생각이 에너지를 발산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영향력에 있어서는 비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상대에게 말을 심하게 퍼부으면 순식간에 상처를 입혀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그 에너지란 생각에 비하면 상상하지 못할 만큼 위력이 있다. 말이란 강력한 에너지 덩어리다.
“저는 오늘 당신과 처음 만났지만 이런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태어나줘서 정말 고마워요 . 오늘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우리는 말의 에너지를 좀 더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에게는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상념과 말과 행위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단연코 말일 것이다. “말이 현상을 낳는다.”라는 말은 뱉은 말이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만일 내가 수백 수천 번 감사하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러면 정말 감사하다고 말할 상황이 생긴다. 우주를 향해 던진 말은 그 말을 다시 한 번 해야 하는 현상을 일으킨다. 말이 상황을 만드는 강력한 에너지가 된다.
자신이 내뱉은 말대로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미움과 원망을 내뱉을 경우 미움과 원망을 호소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결국 감사하다고 많이 말하는 사람은 진심인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감사할 일이 나타나는 속도가 빠르고, 감사하다고 적게 말하는 사람은 현상으로 나타나는 속도가 느리다.
주변에 “감사합니다.” 라고 50만 번, 100만 번씩 말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이 사실을 물어보았다. 역시 그들은 “그 방정식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라고 입을 모으며 감사하다고 많이 말할수록 감사할 일이 나타나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했다.
어떤 이들은 아무리 감사한다고 많이 말해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위험한 발언을 하면 소용없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감사한다고 2만 5,000번 정도 말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이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감사하다는 말이 마음 깊은 곳, 신체 세포 속까지 스민 탓일까, 감사하다고 많이 말하는 사람에게서는 즐겁고 기분 좋으며 예의 바른 말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이제 우주 원리를 확실하게 알았으니 지금 부터 무조건 감사하다고 읊어보는 것이 어떨까?
제5장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마음이 모든 것을 결정 한다.
지금 행복하다면 그곳이 유토피아!
행복에는 파라다이스와 유토피아 두 종류가 있다. 파라다이스란 외형이 천국 같은 조건이나 상황을 충족해 눈으로 보기에도 천국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유토피아는 천국에 있는 것 같은 상황이 아닌 마음으로 천국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파라다이스에는 맛있는 음식과 술이 가득 쌓여 있고 눈앞에 아름다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으며 화려한 요트가 기다리고 있다. 즐겁고 행복해 보이며 자기 생각과 소망, 꿈과 희망이 모두 손 안에 있어 매우 만족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파라다이스에서는 욕구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르고 또 오른다. 다시 말해 완결이 없는 상태다. 인간의 바람과 욕망은 '이 정도면 됐어'라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유토피아는 마음속에 행복을 느끼는 조건과 요소가 이미 이루어진 상태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행복해진다. 어떤 조건을 세우고 그 조건을 충족했을 때 행복해진다면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 있지만, 유토피아에는 설정하는 조건이 없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태를 고스란히 행복하다고 받아들이는 순간 유토피아에 들어갈 수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고 물을 마시면서도 유토피아를 한껏 경험할 수 있다.
행복의 본체는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있다. 명예나 명성을 좇으면서 유토피아, 즉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명예와 명성을 좇지 않는다면 그곳이 바로 유토피아다.
조건을 구비하고 그 조건을 충족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100퍼센트 행복을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 NOW OR NEVER 유토피아는 지금 아니면 영원히 없다.
행복과 불행은 전적으로 자신이 결정한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쫓고 어떤 숫자와 목표를 정하고 거기에 다다르려고 매진해야 하며 그에 실패하면 인간쓰레기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렇게 뭔가를 이뤄도 고뇌와 고통이 싹틀 뿐이다. 손에 넣은 것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어떤 목표를 좇으며 '아직 아니야, 아직 멀었어.' 라고 중얼거리며 사는 것이 즐겁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그런 인생관으로는 진정 행복해질 수 없다.
이 이야기를 듣고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구나.'라고 깨닫는 이가 있는 한편 도무지 공감할 수 없는 이도 있을 것이다. 무조건 숫자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뤄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런 이는 끝내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행복한 데는 어떤 의도도 전제도 필요하지 않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면 그만이다 그 순간 행복이라는 현상이 뿅 하고 눈앞에 나타난다.
현상에는 행복도 불행도 없다.
“이 세상에 불행이나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느끼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처음 이 문장을 봤을 때는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줄곧 이 말이 머릿속을 뱅뱅 맴돌았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자 이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의적'인 20대를 보내고 30대에 들어선 뒤부터 “나는 정말 운이 없어. 되는 일이 없어”라고 한탄을 늘어놓는 사람을 보면 “정말 그럴 까요?”라고 되묻는 버릇이 생겼다.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슬픔과 고통을 행복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말했던 현상이 환상으로 변모해 사라져버릴 수 있다. 슬프고 괴로운 일은 대체로 고민하거나 힘들어할 필요조차 없는 일일지 모른다.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보자. 꼬박 하루 동안 물도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터벅터벅 걷는데 운 좋게 물통을 하나 주웠다. 그 물통 에는 물이 반쯤 들어 있었다. 익히 들어본 얘기지만, 그때 '물이 반이나 남았네.'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물이 반 밖에 없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전혀 다르다. 반이나 남았다고 생각하는 이는 행복 할 테고 반 밖에 없다고 느끼는 이는 불행할 것이다.
사실과 현상은 하나다. 똑같은 현상을 두고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방법에 따라 가치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받아들이는 마음이 현상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아직 마흔인데'라고 생각하는 그룹과 '벌써 마흔이라니'라고 생각하는 그룹을 추적 조사했다. 각 그룹이 1,000명이었는데 최근 그들 가운데 마지막 사람이 세상을 떠나자 조사를 완료했다. 두 그룹 평균 수명을 비교한 결과 무려 10년이나 차이가 난다. 물론 '아직 마흔'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훨씬 오래 살았다.
'마흔'이라는 똑같은 현상을 두고 '벌써 마흔이네' 혹은, 아직 마흔 밖에 되지 않았네.'라고 자기 몸에 이야기한다면 당연히 반대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는가! 벌써 마흔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 뒤로도 벌써 쉰, 벌써 예순이라며 초조해 한다. 그러면 나이를 먹는다는 사실이 육체에 순전히 독으로 작용해 몸을 축낼 수밖에 없다. 반대로 아직 마흔 밖에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정도쯤이야 너끈히 할 수 있으며,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삶을 풀어간다.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 눈앞의 현상이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불행으로 닥칠 수도 있다.
30대 때는 불행이나 비극이라는 현상이 정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고 느끼는 마음이 있을 뿐이라고 추측하기만 했다. 그런데 40대가 되자 확신이 들며 이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불행과 비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행복이라는 현상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현상은 우주적으로, 본질적으로 중립상태다. 그것을 행복으로 끌어올지 불행으로 끌어올지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렸다. 칼 붓 세는 “산 너머 언덕 너머 먼 하늘 밑 행복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네.”라고 노래했지만 아무리 먼 곳을 찾고 또 찾아도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 《파랑새》에서 틸틸과 미틸도 행복이라는 이름의 '파랑새' 는 바로 내 집에 있었다고 우주적인 사실을 이야기한다.
행복과 불행은 달걀 구조
최근 몇 년 동안 행복과 불행의 구조를 다시 한 번 생각하다가 내린 결론이 있다. “행복과 불행은 달걀과 같은 구조를 이룬다. 삶은 달걀이 아닌 날달걀이다.” 예를 들어 '맛있다. 라는 개념 전에 반드시 필요한 단계는 '공복'이다. 공복이라는 현상이 없으면 맛있다고 느끼는 현상 역시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목마르다. 라는 현상이 없으면 '갈증이 사라져서 행복하다'라는 현상도 있을 수 없다.
좀 더 생각해보면 배가 빌수록 맛있다고 느끼는 정도가 커진다. 반대로 배가 부를수록 맛있다고 느끼는 정도가 줄어든다. '양'이 연동한다는 뜻이다. 우주 구조에 따르면 맛있다는 행복을 느끼려면 불행을 맛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공복 현상과 맛있다고 느끼는 현상은 따로 존재할까?
'공복'과 '맛있다'는 1+1=2'가 아니라 '1/2+1/2=1'이라는 형태가 아닐까? 두 개념이 서로를 통해 하나가 되기에 독립된 현상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둘은 한 세트와 같다. '공복'은 '맛있다. 라는 행복의 전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계절도 마찬가지다. 무더운 여름철에는 더 더워지면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기온이 올라간다. 그 뒤에 가을이 찾아와 서늘한 바람이 불면 얼마나 행복한가! 여름이 더우면 더울수록 선선한 가을은 행복 그 자체다. 한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옴짝달싹못할 것 같다. 차디찬 북풍이 몰아치는 날이면 치아까지 덜덜 떨린다. 그런 뒤에 봄바람이 훈훈하게 불어오면 얼마나 따스하고 행복한지…….
여름이 더우면 더울수록 시원한 가을이 행복하고,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따스한 봄바람이 행복한 것처럼 여름과 가을이 한 세트, 겨울과 봄이 한 세트다. 우주는 이처럼 사계절로 행복과 불행의 구조를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 앞에 제시해왔다. “무더운 여름을 겪은 뒤에 가을의 행복을 느껴보세요, 추운 겨울을 지내고 봄의 행복을 만끽하세요.”라고 말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어려움을 겪지 않은 사람에게 손발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고 외친들 진심으로 감사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제대로 맛본 뒤라면 손발이 자유로운 것, 평소와 똑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기쁨과 행복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발목을 다친 일이 결코 불행은 아닐 것이다. 발목을 삐면 한 달 정도는 자유롭게 지낼 수 없다. 불편함을 느끼면 느낄수록 평소처럼 걸어 다닐 수 있는 보통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 느끼게 된다. 불행하다고 여겼던 상처나 골절이 사실은 평소처럼 지낼 수 있다는 기쁨과 행복의 전제 현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발목을 삔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다. 라고 생각하면 사람에 따라서는 부상이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어느 학자에게서 벼의 생육에 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맛있는 벼가 되는 데 꼭 필요한 조건 몇 가지가 있습니다. 적당한 햇볕, 적당한 기온, 적당한 땅속 수분, 적당한 탄산가스 농도 그리고 적당한 바람이죠." 바람이라는 말에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라면 벼가 자라는 데 '적'이 아닐까? 무럭무럭 자라던 벼가 태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힘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자주 봐서 바람이라면 벼에게 적대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바람이 '같은 편'도 아니고 필수조건이라니.
사람은 불행이라고 여기는 현상 덕분에 발전하고 성장해간다. 앞서 말했듯 우주에는 행복도 불행도 존재하지 않는다. 빨간 안경을 쓰고 보면 빨갛게 보이고 파란 안경을 쓰면 온통 파랗게 보인다. 지금까지 불행이라 여기던 것을 행복의 전제 현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비교 대상이 있어야 개념이 생긴다.
몇 년 전 어느 유명 디자이너가 신문기사로 쓴 글이다. 무언가를 만들 때 형태로서의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색상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내면에서 색상을 여러 가지로 해석해서 다양한 디자인으로 표현해왔는데 최근 몇 년 동안은 모노톤, 즉 흰색과 검은 색에 깊게 관심을 가졌다. 그러던 차에 흰색은 단순한 흰색이 아니고 검은색 역시 단순한 검은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흰색보다 더 하안 색이 있고 검은색보다 더 검은 색이 있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흰색보다 더 흰 색은 검은색 속에 있는 흰색이고, 검은색보다 더 검은 색은 흰색 속에 있는 검은색이다. 비교되는 검은색이 검으면 검을수록 그 속에 존재하는 흰색이 더 강하게 빛난다. 마찬가지로 흰색이 더할수록 그 안에 있는 검은색이 더 검게 빛난다.
흰색을 행복, 검은색을 불행이라고 가정해보자. 행복 속에 있는 불행은 더더욱 불행의 강도가 커지고, 불행 속의 행복은 더욱 행복의 크기가 커진다. 우리는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을 항상 행복인지 불행인지, 행운인지 불운인지 나누는 데 익숙하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행복이니 행운이니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한 대로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사용하는 단어다. 반대로 불행이나 불운이라는 말은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회사가 부도나서 자신의 평화와 행복이 깨졌을 때 사용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1년 365일 30도를 웃도는 무더운 나라가 있다고 해보자. 29도도 아니고 31도도 아니고 늘 30도에 습도가 50퍼센트인 나라. 그 나라 사람들이 “오늘 정말 덥네요."라거나 “오늘은 조금 선선하네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대답은 당연히 아니다. 아무도 덥거나 춥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개념이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대비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만 두 가지 개념이 존재할 수 있다. '생각대로 되는 것'이 행복이고 행운이라고 느낀다면 그에 반대하는 것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는 개념이다 질병이나 사고와는 다른 개념이다. 그렇다면 불행이나 불운을 평화와 행복을 빼앗는 것(질병이나 사고)'이라고 할 때 역시 그에 반대하는 개념은 평화와 행복이다. 우리는 네 가지 개념 속에 살고 있다.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일반적인 행복이나 행운 :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
2. 1에 반대하는 개념 :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
3. 일반적인 불행이나 불운 : 평화롭지 않고 평온하지 않은 것
4. 3에 반대하는 개념 : 평화롭고 평온한 것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1과2, 3과 4는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전혀 다른 두 개념, 두 가치관인데도 1의 정반대에 있는 개념 혹은 현상이 3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불행이나 불운에 반대하는 개념은 3에 반대하는 개념인 4, 즉 평화롭고 평온한 것이다.
우리는 행복의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
물고기가 드넓은 바다 속을 헤엄치고 있다. 이 물고기는 태어나 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다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물고기는 소망했다.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바다를 꼭 한 번 봤으면.' 싶었다. 해안가에서 한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물고기 생각을 알아차린 그는 낚싯바늘이 달린 줄을 물고기 앞에 늘어뜨렸다. 물고기는 '이 먹이를 물면 분명히 바다를 볼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낚싯바늘을 꽉 물었다. 낚시꾼이 낚싯줄을 끌어올리자 드디어 물고기는 난생처음 바다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토록 소망하던 바다를 보았는데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물고기는 낚시꾼에게 애원했다.
“이제 바다가 얼마나 넓고 거대한지 잘 알았어요.
더 이상 바다를 보지 않아도 되니 제발 바다로 돌려보내주세요.” 낚시꾼은 물고기를 바다로 보내줬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물고기는 우리 자신이고, 바다는 행복이다. 우리는 바다라는 이름의 행복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다. 행복은 본래 바람과 소망, 생각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은 채 아무 보람도 없이 무사태평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바다를 보고 싶다고 소망한 물고기에게 낚싯줄을 내려준 것은 신이다. 바다를 빠져나와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지만 바다를 떠나니 호흡하지 못해 고통스럽다. 사고나 질병을 겪으며 고통 받는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행복의 본질인 바다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행복의 바다에 있으면서도 “행복 하고 싶어” “바다를 보고 싶어”라고 울부짖는다. 신은 친절하게 우리 소원을 들어준다. 그러나 바다 밖에 나온 물고기는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평화롭고 평온하며 고요하고 찬찬히 흐르는 일상이야말로 행복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란다. 행복의 바다' 바다의 행복…….
생각대로 무언가를 이루어 나가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바다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행복해지고 싶다고 바라는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갈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 낚시꾼은 물고기 앞에 낚싯줄을 늘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강물이 흐르는 대로 배를 띄울 뿐
시속 10킬로미터로 흐르는 강에 배를 띄운다면 사람은 노를 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보트에 타서 그대로 흘러가게 두라고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유속이 시속 10킬로미터일 때 상류를 향해 시속 10킬로미터로 노를 저으면 밖에서는 보트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저 사람은 도대체 언제까지 같은 곳만 맴돌 셈이야?' 하지만 정작 노를 젓는 사람은 땀을 비 오듯 쏟으며 한탄한다.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는데 어째서 인생이 바뀌지 않지?”
그가 흐름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노를 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하류 으로 노를 젓는 사람은 어떨까? 양옆 언덕에서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많은데도 보트가 나아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줄 여유조차 없다. 미소도 주고받을 수 없다. 저만치 앞에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기다리는데 그렇게 서둘러 내달릴 필요가 있을까? 나이아가라 폭포는 곧 인간 육체의 죽음을 말한다. 자신은 열심히 하고 있다고 믿지만 어쩌면 죽음을 항해 서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삶을 음미하면서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에 배를 띄워두기만 하면 된다. 노를 젓지 않으면 주변 풍경을 즐기고 불어오는 바람도 느끼면서 천천히 떠내려간다. 이 얼마나 풍요롭고 넉넉한 선택인가. 바꿀 수 없는 흐름을 바꾸려고 이리저리 노력하는 대신 그저 맡겨보는 건 어떨까? 몸을 맡긴다는 것 은 바로 그런 일이다.
몸을 맡긴 사람을 둘러싼 공기는 따스하다. 살아가는 방식도 유연해서 주변 사람들이 “이것 좀 해줘” “저것 좀 해줘" 하며 자주 부탁 한다. 많은 이가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다. 사람들 부탁을 들어주며 여러 상황에 부딪히고 좋은사람들과도 만난다.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수록 우주는 서서히 무언가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편안한 장소를 제공해주고 어떤 이는 늘 웃는 얼굴로 대하는 등 사람들에게 일종의 방향성을 느낀다. 그저 아무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이 내미는 손을 잡아주기만 하면 된다. 신기하게도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아등바등 사는 것보다 바람이 부는 대로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노동량은 훨씬 많다. 하지만 좋고 싫고를 가르지 않으며 마음을 평안하게 하면 고민하거나 힘겨워하거나 헤매지 않는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건강 하게 살 수 있게 된다.
제6장 인간관계 영혼을 갈고 닦는 숫돌이다.
나와 타인은 단 0.1% 차이
유전자로 보면 인간은 어느 한 사람도 같을 수 없다. 그런 특징 때문에 범죄자를 검거할 때 지문이나 유전자를 검사한다. 그렇다면 옆 사람과 내 유전자는 몇 퍼센트나 같을까? 이렇게 질문하면 70퍼센트나 80퍼센트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은데, 정확한 답은 99.9퍼센트다. 옆 사람과 당신은 무려 99.9퍼센트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 다른 것은 불과 0.1퍼센트뿐이다. 그 0.1퍼센트로 얼굴이 달라지고 성격이 달라지고 체형이 달라진다.
구성이나 구조가 비슷한 사물끼리는 한쪽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진동하면 가까이 있는 다른 사물에 99.9퍼센트 일치한다는 것은 구성과 구조가 똑같다고 해도 무방하다. 다시 말해 큰 소리로 웃는 사람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행복해진다는 뜻이다.
강연회에 100명이 모인 가운데 90명 정도가 큰 소리로 웃으면 몸이 안 좋은 사람이나 기분이 언짢은 나머지 열 명도 따라서 웃고 건강해져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웃을 수 있는 환경이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열악하다. 전철이나 카페처럼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는 마음껏 소리 내어 웃을 수 없다. 특히 깊은 밤, 가족이 모두 곤히 잠들어 있는데 큰 소리로 웃기는 어렵다. 때문에 웃을 일이 생기면 무조건 많이 웃어야 한다. 참가비까지 내면서 참석한 강연회라면 모두 즐겁게 웃는데 혼자만 얼굴을 찡그리고 있지 말고 실컷 웃어보라. 그 공간을 울리는 좋은 파동, 밝은 파동을 받아 자신도 건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간혹 이상한 경우가 있다. 가족 가운데 아픈 사람이 있는데 그가 입으로는 “기쁘다” “즐겁다” “행복하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연신 읊는데도 전혀 차도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병마와 무리하게 사투를 벌이기보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밝은 표정을 지으면 서서히 차도를 보이기 마련인데, 그럴 기미는 전혀 없고 오히려 악화되었다.
반대로 아픈 사람이 “괴로워” “힘들어 고통스러워”라고 투덜거리다가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이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긍정적으로 위로하다보면 생각이 바뀌어 상태가 점점 호전되는 경우도 있다.
타인이라고 해도 99.9퍼센트 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다. 특히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이 부모나 자식이라면 관계가 더욱 가까울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따라, 내가 얼마나 밝고 긍정적으로 행동하느냐에 따라 옆에 있는 사람의 세포는 변한다.
잘 생각해보면 가족이든 타인이든 유전자의 눈으로 보면 거의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싶다 거나 “이렇게 살아가세요. “소원이니 제발 행복하세요.”라고 애원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이미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내 이야기를 듣고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도 행복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도 모두 본인 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누군가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본래 어떤 방향성이 없다. 내가 행복하기에 그 행복을 음미하며 살아갈 뿐이다.
인생을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내 몸도 즐겁고 편안해진다. 투정과 불만만 토해내는 사람 곁에 있으면 세포까지 약해진다. 이렇듯 옆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는 서로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존재다
상대가 아니라 나를 바꿔라
저라면 아버지를 어떻게 할지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정말 고민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뿐입니다. 아버지를 어떻게 해보려는 건 무리예요. 사람이 사람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상대를 바꿀 수는 없지만 내가 나를 바꿀 수는 있습니다.”
앞에 있는 사람이 어둡고 슬픈 이야기만 한다거나 성격이 난폭하더라도, 가족 가운데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더라도, 일일이 대응하면서 따지거나 화내지 말고 밝게 웃으며 온화하게 “행복해” '정말 기뻐” “사랑해” “아주 좋아” “감사해” “난 행운아야”라고 말해보라 이렇게 담담하게 웃으며 초연하고 묵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영향력이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아무리 우울하고 부정적인 사람이 있어도 바로 내가 그들을 밝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명심하라.
가까운 사람은 모두 자신을 연마하는 숫돌
부부라는 이름으로 '공동생활'을 시작할 때 두 사람은 음식을 먹었을 때 달거나 맵다고 느끼는 식성부터 전혀 다르다. 25도에도 덥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춥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물론 쾌적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사소한 상황 하나하나까지 맞춰가는 것이 결혼 이후 생활이다.
혼자 지낼 때는 자신이 달거나 맵다고 느끼는 감각이 전혀 문제 되지 않았고, 덥거나 춥다는 느낌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공동으로 생활하려면 그런 개인 감각을 조금씩 수정하면서 상대방에게 다가가야 한다. 숫돌이 생김으로써 나라는 인격은 여지없이 연마되어간다. 제멋대로고 자기중심적인 성격을 조금씩 고치면서 연하고 부드러워진다.
결혼 할 생각이 없다거나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혼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느낀 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결혼에 골인했다'라는 표현이 오히려 정반대가 아닐까 하는 겁니다. 결혼은 인격을 연마하는 '출발점' 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얻었다는 말은 숫돌을 하나 얻었다는 뜻입니다 양가 부모님과 함께 생활한다면 한꺼번에 숫돌을 세 개 얻은 셈이죠. 아이가 한 명 생기면 역시 숫돌이 또 하나 생긴 겁니다. 다시 말해 결혼은 내가 상대방의 숫돌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쪽이 칼이고 어느 쪽이 숫돌이냐를 나누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연마하고 가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결혼하지 않는 사람은 신께서 '결혼하지 않아도 좋다'라고 허락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일수록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늘려가는 것 같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신이 '네 인격은 그것으로 충분하니 결혼 생활에 사용 할 기운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고 허락한 것이 분명합니다.
결혼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고 자기 기운과 여력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시기 바랍니다.”
아이에게 화내지 않고 마음을 차분하게 추스르고 소리 지르지 않도록 인격을 연마해 나가야 한다. 겉으로 보면 부모가 아이를 기르고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에 소리 지르지 않고 화내지 않는다.'라고 자신을 통제하면서 부모 자신의 인격을 높이는 것이다.
육아하며 부모 자신이 '어떤 경우에도 화내거나 소리 지르지 않고는 얼굴로 이야기 '하기로 마음먹고 인격을 형성하다보면 인성이 훌륭한 부모에 걸맞은 아이로 자랄 것이다. 아이를 바뀌나가고 잘 키우려는 의식이 강하다면, 자신이 곧 정의이고 자기 생각에 따라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를 위한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인성을 향상할 수 없다.
결혼과 육아가 숫돌과 숫돌의 관계라고 깨닫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대응하게 될 것이다. 가족이나 가정생활이 숫돌관계라고 인지했다면 그다음에는 다른 영역에서도 숫돌 관계를 성립하려고 해야 한다. 숫돌 관계는 크게 나누어 세 분야에서 존재할 수 있다. 하나는 가족과 가정이다. 앞서 말했듯 부부와 아이들 함께 살아가 가족은 모두 숫돌 관계를 맺는다.
엄격함은 폭력을 가르친다.
한 어머니가 상담하러 왔다. “각각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인 사내아이가 둘 있습니다. 두 아이는 사이가 너무 좋지 않아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치고 박고 싸웁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에게 소리 지르지 말고 화내지 말라고 하시지만, 제가 소리 지르고 화내서 두 녀석을 갈라놓지 않으면 싸움이 끝나지 않아요.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평온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두 아드님 싸움에 어머님이 큰소리를 내면서 그만하라고 관여하고 계시군요." 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두 녀석을 말릴 수 없어요.” “고함치고 화내면서 '이게 무슨 짓이야' '그만두지 못해?' 하는 식으로 두 아이를 설득해오셨죠?”
"네."
이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큰소리를 내고 폭력적으로 행동하고 말하며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을 배워 왔다. 두 아이 역시 어머니가 가르친 방법대로 살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가 그 밖에 다른 해결책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형이나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는 것이다. 부모가 싸움에 끼어들어 고함치고 화내는 한 아이들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이 11일이니 이번 달 중순인 15일부터 시작해야지'라든가 '지금이 12월이니 새해인 1월 1일부터 시작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5일 뒤에 시작하자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5일 뒤에 시작하지 못한다. 1월 1일부터 시작하자고 결심한 사람들 가운데 그날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늘부터 시작하자'라고 마음먹었다 해도 오늘이 바로 '지금'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이란 '지금 당장'이라고 단단히 다짐하지 않는 한 실천하기 어려운 습성을 지니고 있다. '사흘 뒤에 시작하자. 사흘 뒤부터 나를 개선해나가면 돼'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변하지 못한다. 진정 변하고 싶다면 지금뿐이다.
심리학이나 종교론을 들먹이는 것이 아니다. 곧 태어 날 손주들이 진정 사랑스럽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자기 행동을 고쳐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손주들이 가여워질 것이다. “옳게 이야기하는데 아이가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럴 때는 언성을 조금 높여도 편찮겠죠? 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 것보다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더 문제다. 이런 억지스런 이론은 결국 폭력적인 아이를 길러질 뿐이다.
사람은 좋아하는 것에 움직인다.
옳은 이야기라고 해서 상대가 무조건 수긍하고 따라주지는 않는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부모를 신뢰하고 좋아하면 말을 잘 듣겠지만, 무시하고 싫어하면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 부모를 싫어하게 될까? 감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다짜고짜 화내거나 고함치기 때문이다.
'어른'이라는 말의 어원은 '소리 없다'라는 의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함부로 큰소리 내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어른' 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형용사 '어른스럽다'도 이 말에서 파생했다. '어른' '어른스럽다' '소리 없다'가 모두 같은 어원에서 비롯한 말이다.
영어에 '젠틀맨(Gentleman)'이라는 말이 있다. '젠틀(Gentle)'이라는 말 역시 '조용한' '상냥한'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신사는 조용하고 언성을 높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이를 제대로 잘 키우려면 큰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다. 때려서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사고방식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이유가 정당해도 때려야 한다는 논리는 절대 성립할 수 없다. 아이에게 손대는 순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뜻대로 하기 위해서는 때려도 좋다는 방법을 가르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절대 화내거나 고함치거나 손찌검해서는 안 된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이야기해야 한다. 아이가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아이와 부모 관계에서는 이야기하는 대로 무조건 들어야 하는 게 아니라 웃는 얼굴로 조용히 이야기해야 한다는 방법론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무턱대고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부터 절대 화내거나 소리치지 않고 “이렇게 해주면 정말 기쁘겠는데”라는 식으로 접근해보라. “엄마가 없을 때 비가 오면 빨래를 좀 들여놓아줄래? 그러면 엄마는 정말 기쁠 거야”라고 말해보라. 처음에는 아이가 망설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엄마가 무조건 화부터 내고 소리를 질러왔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런 부모에게 공명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소통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비에 젖은 빨래를 조용히 걷고 묵묵히 다림질을 하자. 그렇게 다섯 번, 여섯 번 하다 보면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아이가 '엄마가 변했네.'라고 생각하면서 호의를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다시 한 번 부탁해보라. 분명 아이도 달라져서 엄마 뜻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이는 부모를 치유하기 위해서 엄마를 직접 골라 태어난다고 한다. 엄마에게 뭐든 해주고 싶어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부디 아이가 당신을 존경 할 수 있도록 평온하고 웃는 얼굴로 살아가기 바란다.
비교 세계를 벗어나라
마찬가지로 사람은 저마다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있어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교할 수 없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조건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사람은 '항상 비교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 '비교의 세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 하나는 타인과 비교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나다. 분명히 다른 사람은 없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도 무조건 전체적으로 평가하려고 한다. 자신과 상대를 비교한다는 자체가 잘못이고 무의미하다.
자신이 꿈꾸는 인격과 사고방식, 삶을 위해 매일 노력하고 이력을 쌓아나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 다시 말해 자신과의 싸움일 뿐 다른 사람과 비교할 일이 아니다. 나 자신이 정상을 향해 얼마나 달리고 있는가, 그것만이 중요하다. 비교가 아니라 자신의 즐거움과 보람을 위해 달릴 뿐이다. 나는 이것을 “자기 등산로”라고 부른다. 비교의 세계에서 최대한 벗어나 자기 등산로에 최대한 다가가는 삶을 추구하면 어떨까?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아이'로 키워라
비교의 세계와 관련해서 좋은 아이와 나쁜 아이에 대해 더 이야기 해볼까 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자주 저지르는 과오 가운데 자기 아이와 남의 아이를 비교해 “이 부분이 뒤떨어진다. 라거나 “되먹지 못하다”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행동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경고했다.
부모가 아이를 교육할 때 주의해야 할 다른 한 가지는 좋은 아이, 나쁜 아이라는 표현이다. 좋은 아이란 일반적인 의미로 보면 선생님 말을 잘 듣는 아이(선생님이 말하는 대로 하는 아이), 부모 말을 잘 듣는 아이(부모가 말하는 대로 하는 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나쁜 아이는 선생님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선생님이 말하는 대로 하지 않는 아이), 부모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 (부모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않는 아이)다.
부모 말대로 하지 않는 아이, 부모가 하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아이가 부모에게는 불만일지 모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들은 안심하고 세상을 떠날 수 있다. 나쁜 아이는 자기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좋은 아이는 어떨까. 부모가 하라는 대로 무조건 복종해왔는데 어느 날 그런 부모가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갈까? 부모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도 있는 문제다. 다시 말해 부모가 마음 편히 눈 감을 수 있는 쪽은 나쁜 아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나쁜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거나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을 위협하거나 폭력적으로 대하고 사회에 폐를 끼치는 아이라도 상관없다는 말이 아니라 고 이해하기 바란다. 언젠가 이런 상담을 한 적이 있다. 스무 살 대학생 딸에게 어머니가 300~400만 원짜리 기모노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더니, 딸은 그럴 돈이 있으면 미국 유학하는 데 보탤 테니 현금으로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평범하고 상식적으로 키우려고 했는데 저렇게 이상하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라고 한탄했다. 그녀와 함께 온 친구 역시 같은 이야기를 했다. 대학교 4학년인 자녀가 “졸업하면 취직하지 않고 세계 각국을 돌며 여행할까 해요. 반년 정도 혼자 여행하면서 그곳에서 돈도 벌고 싶고요 라고 말했다고 했다. 어머니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취직해서 지냈으면 좋겠는데 왜 저렇게 되어버렸는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 생각을 바꿀 수 있을까요?”라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어머니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불효막심한 지식들이 아니라 오히려 정말 훌륭한 아이들입니다. 멋지게 잘 자랐어요.”
교육 전문가는 아니지만 교육의 본질은 모두 똑같은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과 생활 지침을 결정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다. 남들과 똑같이 취직하고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삶은 많은 사회인 가운데 한 사람인 부모가 볼 때는 안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의 가치관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오히려 기모노는 필요 없으니 유학비용으로 보태달라거나 남들처럼 졸업하자마자 취직하는 대신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고 자기 생각을 똑부러지게 이야기할 줄 아는 아이로 자랐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대학교 4학년인 자녀는 “여행 경비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제 결정대로 하게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정말 멋진 아이다. 나는 감탄을 연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아드님을 두고 왜 당당히 '우리 아들을 이렇게 멋지게 키웠어요.'라고 말하지 못하십니까?” 상담 뒤에 들은 이야기인데, 집으로 돌아간 뒤에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더니 이렇게 말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그렇게 생각을 바꾸기란 쉽지 않을 테니 아무것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지금 이대로 계세요. 남들처럼 착하고 능력 있는 아이가 되어달라고 잔소리하고 걱정해도 괜찮아요. 저는 나름의 가치관과 생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마세요.” 정말 멋진 자녀를 두셨다고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류 문화와 문명에 기여한 사람, 발명과 발견을 한 사람, 문학이나 예술, 스포츠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은 대부분 나쁜 아이였다. 에디슨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 가지 않고 매일 창고에 들어 박혀 기계를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는 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부딪친 뒤에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 위대한 발명을 했다. 이렇게 '상식적이지 않은 아이는 '균일하고 균등한 인간을 만들기 위한(우수하지만 집단에서 돌출 하지 않는 몰 개성한 인간을 만드는 교육제도 아래서는 환영받을 수 없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부국강병이라는 슬로건 아래 중공업과 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수준 높은 생산 공장을 만들려고 우수하고 고학력인 인재를 최대한 많이 배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그런 면에서는 크게 성공했지만 개인의 개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자기 생각을 스스로 확립할 줄 아는 아이로 키우는 교육에는 실패했다. 그런 시대를 살아온 부모는 몰 개성한 인간이 옳고 무리에서 튀는 아이는 잘못되었다는 신념이 생겼을 수밖에 없다. 나쁜 아이는 현재 문화와 문명에 개선할 부분을 찾으며 늘 분석하고 자기 의견을 제안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좋은 아이는 우수한 대학을 나와 일류 기업이나 관공서에 들어가서 그 사회 속에서 융숭하게 대접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리라. 그래서 좋은 아이가 현재 사회 체계나 도구를 비판하거나 개선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반면 나쁜 아이는 좀 더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문화나 문명을 창출해내는 주역으로 우뚝 설 수 있다. 인류 문화와 문명은 소위 나쁜 아이가 만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교육의 본질은 평균적이고 일반적인 아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아 이를 육성하는 데 있다.
천재 부모들의 특별한 공통점
천재들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다가, 다츠무라 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지구교향곡 제1번에 출연한 식물학자 고 (故) 노자와 시게오 박사 말이 떠올랐다. 노자와 박사는 지극히 평범한 토마토 씨앗 단 한 알로 유전자를 조작하거나 특수 사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수경 재배해 열매가 1만 3,000개 열리는 토마토 나무를 키워낸 인물이다.
토마토를 키우는 사람 말에 따르면 보통 땅에서 자란 토마토는 씨앗 한 알로 열매를 25개 정도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열매 크기가 조금 작다고 해도 최대치가 50~60개이니 노자와 박사가 키운 토마토와 차이가 크다.
노자와 박사는 씨앗 한 알로 그토록 많은 열매를 수확한 데 특별한 비법이 없다고 했다. 씨앗이 다르지도 않고 기술적으로 아무 비밀도 없으며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말했다. 단지 생장을 시작 하는 초기 단계에 토마토에게 물과 영양분은 풍요하게 준비되어 있으니 얼마든지 번성하라고 말해주고, 키우는 동안 토마토와 소통하고 토마토를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토마토는 성장 초기에 영양분이 충분하지 않으면 '이런 기세로 자라다가는 큰일 나겠는걸? 조금 참고 이 정도에서 그만 자라야겠어.' 라고 판단해 성장을 멈춘다. 하지만 물과 영양분을 듬뿍 주면 안심 하고 쑥쑥 자란다. 마음으로 소통하고 격려하면서 키우고, 마음 놓고 쑥쑥 자라도 괜찮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토록 어마어마한 토마토 나무가 태어났다.
사람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토마토를 사람으로 바꾸어보자. 유소년 시절에 애정을 듬뿍 받으며 가지고 있는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는 안심하고 천천히 자기 능력을 펼 칠 수 있다. 천재를 키운 부모들은 멋진 기능성을 가진 아이에게 “어차피 대단한 재능은 없잖니” “다른 아이에게 지면 안 돼” “열심히 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어해”와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관심하지도 않다. 그들은 아이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부족한 부분이나 실패까지 모두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이 되어도 아이 자체로 멋지고 훌륭하고 소중하다고 전한다. 무언가를 이루거나 착한 아이일 때만 인정하는 '조건부 승인'이나 애정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자라도 소중하고 사랑한다는 '무조건적인 승인과 애정을 쏟아 부어 아이 안에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자신감이 자라도록 한다.
자신이 결코 부정당하지 않는 곳, 어떤 모습이라도 인정받고 사랑 받을 수 있는 곳을 가진 아이는 자신을 책망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데 기운을 낭비하지 않는다. 부모 앞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안심하고 꺼내 보일 수 있다. 자기 기운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정말 중요하다. 자신을 거부하고 탓하는 데 기운을 낭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감사한가!
그렇다면 천재들은 어디에 기운을 쏟을까.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 즐거워하는 일,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일에 기운을 사용해왔다. 에디슨, 라이트 형제, 후쿠자와 유키치, 테츠카 오사무, 미소라 히바리도 그랬다. 천재의 부모는 아이가 무아지경에 빠져서 하는 일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 어른의 가치관이나 잣대로 판단해 하는 일을 가로막거나 자기 멋대로 관철하려고 하지 않았다.
성장 초기 토마토에게 얼마든지 자라도 좋다고 말해주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열매를 무수히 맺는 것처럼 “넌 너 자체로 정말 훌륭해. 네가 좋아하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얼마든지 추구하면서 살아가렴.” 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천부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매우 즐겁고 가슴 설레는 일' '무아지경에 빠져들 수 있는 일'이야말로 천부적인 재능과 이어진다. 흙을 좋아하는 아이는 도예가가 될 재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고, 종일 곤충을 찾아다니는 아이는 훌륭한 곤충학자가 될지도 모른다. 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아이는 위대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 아이가 몰입하는 순간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천재의 부모는 아이가 멋진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지도 않고, 태어날 때부터 멋지고 훌륭한 아이라고 전제했다. 이 역시 노자와 박사가 토마토 씨앗 한 개에는 어마어마하게 자라날 수 있는 생장의 힘이 있다고 한 말과 일맥상통 한다.
아이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 능력을 어른들이 믿어주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특히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모나 교사가 아이를 진심으로 믿고 그 믿음을 전달 해주면 아이 재능의 문은 활짝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