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글머리에 : 세계화 시대의 민족예술
Ⅱ. 생명사상이란
Ⅲ. 사람은 왜 춤을 추는가
Ⅳ. 전통춤의 몇 가지 예들
Ⅴ. 신명론 재론
Ⅰ. 글머리에 : 세계화 시대의 민족예술
우리는 지금 이른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고도의 정치정략적 방안으로 '세계화'란 구호를 새삼 내세운 바 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 '세계화'라는 용어이지만, 이를 민족예술의 향방과 어떻게 연관지어 볼 것인가가 민족예술의 절박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 '세계화'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국제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는 다소 조급한 심정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이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아울러 지닌다고 하겠는데, 먼저 부정적인 측면이라면 밑도 끝도 없이 국제간 무한경쟁 속에 국가와 사회와 개인이 휩쓸려 들면서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세계 전체를 장악하고 관통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한편 국가나 사회나 개인 서로간에 협조와 호혜와 평등을 통해서 지구촌의 한 일원으로서 마치 이웃사촌같이 지구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한 방안으로서도 생각해 볼 수 있기에 이를 세계화의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측면을 강화하고 부정적인 측면을 약화 또는 무력화해서 좀더 나은 세계화의 궁극 목적을 이루어 내는 것이 과제가 된다. 그 중심 방향의 큰 틀을 '지역화를 통한 세계화'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를 두고 세계화(Globalization)와 지역화(Localization)의 합성어로 Glocalization이란 말을 새로 만들어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이전에도 많이 회자되던 것으로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언표와 통해 있다. 우리로서는 이 말을 '범지구적 보편성 위에 지역적 특수성으로 개체 삶의 창조력을 계발한다'는 뜻으로 되새겨 본다. 다시 말해 우리의 문화가 지니고 있는 새롭고 독특한 세계적 보편성을 가지고 세계에 진출한다는 것이다. 즉 민족문화가 지닌 한국적 독창성이 세계적 보편성의 새로운 측면으로도 해석될 때 진정한 세계화의 한몫이 되며 국제적 응전의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통 속에서 현대성을 발굴한다는 뜻으로 이야기될 수 있고 거꾸로 오늘날 살고 있는 현대의 삶 속에서 숨겨져 있는 전통적인 것을 캐낸다는 뜻으로 이야기될 수도 있을 터이다.
전통 속의 현대, 현대 속의 전통을 아우르는 핵심사상은 과연 무엇인가. 이를 한국의 전통춤 속에서 감지(感知)해 보려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이러한 전통문화의 핵심사상을 '생명사상'이라고 예측하고, 이를 오늘날 새로운 과학의 세계 위에 놓고 어떻게 그 세계적 보편성을 검증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먼저 다루어 보게 된다. 이와 연관된 논의를 특히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사상적 대안으로 모색되어 온 김지하 시인의 생명론을 근거로 하여 전개해 보려고 한다.
Ⅱ. 생명사상이란
생명사상은 한 마디로 하나의 개체로서 내가 살고, 이웃이 살고, 사회가 살고, 이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우주 삼라만상이 서로 협동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의 생체 유기성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사상은 새로운 과학사상운동으로 번지고 있는 신과학, 생태학, 신우주론, 우주생성론, 우주본체론 등 서구의 선진적인 과학사상과 함께 동양의 유불선(儒佛仙)이라든지 기독교나 여타 다른 종교사상, 그리고 동양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氣)사상, 나아가서는 우리 전통 사회의 민족 사상들, 특히 19세기 중후반 이후 신흥 민족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교리로서 입론해 놓은 한국적 종교 사상들, 이를테면 동학(東學), 증산도(甑山道), 정역(正易) 등 이 모든 것을 한데 아우르는 사상체계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사상 체계는 어느 특정한 종교사상가의 신비체험이나 직관 내용이 단순히 신비하고 불가해한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오늘날 신과학에 입각해서도 과학적으로 증빙되고 있다는 사실을 중요한 근거로 삼고 있다.
신과학, 생태학, 신우주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몇 마디로 요약하긴 극히 어렵지만, 온누리에 퍼져 있는 우주 만물들은 모두가 영성이 있고, 마음이 있고, 무기물조차도 자기 조직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신령함 자체가 아니라 신령함의 생성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작은 개체 속에 엄청난 전체성이 유출된다고 한다. 작은 개체성을 인정함으로써 전체성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더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해서 앞으로 춤을 접근할 때 그 사유의 단초로 삼아 보려고 한다.
김지하 시인은 그의 생명론에서 생명의 3대 특질을 다양성, 관계성, 순환성으로 적요한 바 있다. 다양성은 자기 내면의 개성적인 실현과 관련되고, 관계성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신뢰·신용·호혜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와의 친교성으로 확대되는 것을 뜻한다. 순환성은 원심적 확산과 구심적 수렴으로 자기 회귀하면서 굴러가며 진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원리와 가치는 한국고대사상의 한 상징인 풍류도(風流道)에 이미 실현되어 있다. 풍류도는 화랑도(花郞道)와 맞닿아 있으며, 더욱 거슬러 올라가면 천부경(天符經)에서 그 시원적 물줄기를 만나게 된다. 풍류도의 내용을 가장 적확하게 전해 주는 것으로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난랑비서(鸞郞碑序)의 글이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實乃包含三敎 接化群生"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핵심은 '접화군생'에 있다. 접화군생이란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 무기물, 우주만물, 흙, 물, 바람, 공기, 티끌까지도 마음 깊이 가까이 사귀어 감동, 감화, 교화시키고 진화까지 시켜서 서로 완성되고 해방된다는 뜻이다.
이런 논의는 보이는 것만을 규명해 보려고 했던 과학 체계의 미비점을 극복하고,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과학적으로 논의될 수 있다라고 하는 차원, 이를테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드러난 질서와 숨겨진 질서, 이들이 동시에 과학적으로 탐구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학문 체계의 요구이기도 하다. 특히 '비과학적인 것의 과학화'는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접화군생을 사람 사이의 문제로 좁혀 보면 한 사람의 개체적 삶이 사회에서 살아 나가는 데 여러 가지로 닥치는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사이의 연관성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한사람의 개체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을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의 문제이다. 이는 개인이 지닌 무한한 창조적 개성이 계발되고 확산되는 것과 함께 인간해방, 노동해방, 사회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가 동시에 실현되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개인과 집단이 유기적이고 교호적 상호관계를 맺으며 이를 협동적으로 진전시킨다는 것인데, 이 점이 바로 생명사상의 사회적 기초 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집단 속에 깔묻혀 갈 수밖에 없는 오늘의 대중 사회에서 창조적 개인으로서 어떻게 구제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새삼 중요한 문화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온몸으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 몰락하고 세계 저편으로 흘러가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공동체적 삶의 이상향이 뜬구름처럼 흘러가 버리고, 이제는 마르크시즘이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의 접근 방법으로 전락해 가고 있는 것이다. 현실사회주의가 그렇게 된 것은 그 체제가 지니고 있었던 변형된 질곡과 경직성 때문에 개체 삶의 자유로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 것이 주요한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생명사상은 '접화군생'의 해석이 그러하듯이 개체적인 삶과 전체적인 삶 사이의 협화적이고 평화로운 관계를 다시 맺게 하여 인간과 사회가 함께 질적으로 변화해 나간다는 점을 더없이 강조하고 있다.
생명사상이 실현된 구체적인 사회적 장치로서 전통 사회에서 한 예를 잡는다면 두레 조직을 들 수 있다. 농업협동조직인 두레 조직은 계급적 이해를 달리하면서도 두레공론(公論)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개진하는 개방적 의사 소통의 합의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합의는 공동으로 일하는 가운데 실천적으로 재확인되어 한편 수렴되면서 동시에 확산된다. 이처럼 두레조직에서는 사회적 이상성과 개인의 창의력의 발휘가 통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두레 조직이 지닌 생명공동체성을 현실산업 사회에 적용시키는 일이야말로 개인적이고도 사회적 이상을 동시에 오늘날 사회에서 펼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운동의 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 새로운 두레운동은 민초의 직접민주주의 방식으로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 단위의 작은 삶의 소공동체운동으로, 또 민초의 생활문화운동으로, 도농(都農)연계의 '한살림운동'으로, 그리고 지역자치운동으로, 환경생태회복운동으로, 그리고 정치적 화백(和白), 경제적 신시(神市), 문화적 풍류 등 포괄적인 율려(律呂)사회문화예술운동으로 여러 가지 실천의 물줄기를 잡고 있다.
두레조직 속의 공동 일은 일인 동시에 굿놀이 하는 것이고 또한 함께 어울려 노는 것조차 일하는 것이 되는 일놀이, 놀이 일의 복합체이기도 하다.
일하는 것과 노는 것, 이 대립되는 두 항(項)이 얽히면서 교류되고 있는 지점, 그 '성긴 틈'이야말로 생명사상의 논거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생명사상이 실현되는 두레의 현대적 실현이야말로 지구의 종말론에 치닫고 있는 현대사상의 착종현상을 극복하고 또 산업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질곡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사상적 실천대안으로 상정되고 있다. 그것을 미학에서는 받아서 '생명론적 미학'으로 설정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 생명론적 미학의 씨앗을 춤에서 찾아보려는 것이다.
Ⅲ. 사람은 왜 춤을 추는가
생명사상을 논의하는데 과연 춤을 적합한 예증의 것으로 떠올릴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은 사람이 왜 춤을 추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가 답변할 수 있는 내용 속에 이미 숨어 있다. 왜냐하면 죽은 것은 춤추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왜 춤을 추는가.
이 질문은 인간은 왜 사는가라고 느닷없이 묻는 것처럼 당혹스런 바 있지만 춤에 관한 가장 원초적이고 또 궁극적인 물음이다. 살아 있기에 춤춘다. 그 물음에 그 답변이랄까, 허름한 듯도 싶지만 그 언표속엔 그 역(逆)으로서 '춤을 추기에 살아있다'는 뜻이 깊숙이 깔려있다. 그런 만큼 사람 사는 것과 춤추는 것 사이엔 서로 적극적으로 필요하고도 또 충분한 교호조건을 이루고 있다.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제대로' 살아있도록 하는 생명의 자기충일의 욕구 때문에 춤추는 것이다. 춤만큼 살아 있음을 스스로 확인시켜 주는 문화예술 장르가 있겠는가.
우리는 흔히 '새가 노래하고 파도가 춤춘다' 라고 말한다. 그저 지저귈 뿐이고 물결칠 뿐인데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거기에 움직여서 그것을 그렇게 그려내도록 만든 주관적 정서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엔 사물의 모습을 의인태로 보는 관습적 이성이 작용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주객 분리에 따른 일방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물이나 현상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대상 자체의 자기생성활동과 인식 주체의 생성활동을 일치시켜 동시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결치다'와 '춤추다', '지저귀다'와 '노래하다' 사이를 가르고 이동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물결치다'와 '춤추다'는 '움직이다' 라는 공통성이 있지만 그 질적 의미는 전혀 다르다. 단순히 움직이는 그 이상의 어떤 유동적인 기운(氣韻)에 품기우고 감싸여 살아 생동하고 있을 때 우리는 '물결치다'라는 말로는 미흡하여 '춤추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춤추고 노래하는 원천동기인 '살아 있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철학적 인간학 또는 생태학적 인문학의 한 질문이기도 하다.
Curt Sachs는 그의 책『춤의 세계사』서문에서 춤춘다는 것은 "한 단계 고양된 삶일 뿐( life on a higher level simply)"이라고 말하고 있다. 삶은 삶인데 그저 밋밋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한 단계 드높여진 삶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은 하나의 개체적 삶이 '제대로', '저 나름대로', 더 나아가서 '제 멋대로' 사는 삶이란 뜻이어서 일차적으로는 존재의 자기 정위(定位)이다. 삶이 본래의 제자리를 잡는 것이고 개체의 본연적 자기회복이 바로 춤이란 것이다. 그리고 춤은 존재의 자기향유이고, 자아실현, 자기창출이기도 하다. 그는 그의 책 서문의 첫머리에서 "춤추지 않고서야 어찌 인생을 알리요(Whosoever danceth not, knoweth not the way of life)"라는 옛 잠언을 인용하고 있다. 이 말은 거꾸로 하면 춤추는 사람이어야만, 춤을 추어야만 인생의 맛과 멋, 그리고 의미와 깊이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춤은 그만큼 삶의 끝없는 도정(道程)이고 또 사람 사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
"살아 있기에 춤춘다"라는 말에서 '살아 있음'이란 세 가지 뜻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첫째, 살아있음은 먹고사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적 토대를 기초로 한 존재의 일차적 규정으로서, '생존(生存)'을 뜻한다. 개체보존과 종족 보존이라는 생체적 본능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인간은 춤추어 왔다. 특히 원시시대의 춤은 삶의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다. 살기 위해 춤추었고 춤을 추기에 살 수 있었다.
둘째, 살아있음은 존재의 활동규정으로서 존재의 역동적 활성화, 활력, 활기인 '생활(生活)'을 뜻한다. 여기에서 인간은 자연 본능적 존재를 넘어서 노동가치를 창출함으로써 더욱 인간화된 존재활동이 마침내 추구해마지 않는 진선미성(眞善美聖)의 가치를 실현해 낸다. 그리고 나아가 자유, 민주, 평등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성취해 내고 이에서 역사와 문화의 질을 얻게 된다. 이를 위해 인간은 또 춤을 추어 왔다. 특히 역사변혁의 도도한 물결은 마치 거대한 축전의 현장인 양 역사의 광장에 운집한 이들을 두고 군무를 이루는 춤마당으로 자주 묘사되어 오지 않았던가.
마지막으로 살아있음은 '생명(生命)'이다.
생명은 존재의 가치활동을 본원적으로 가능케 하는 에너지원으로서 생존, 생활 등 살아있음의 여러 의미를 관통하고 있다. 말하자면 생명이란 인간을 포함하여 삼라만상 모두가 세계사적 존재로서 공생, 협동하는 유기적 생체에너지의 전일체(全一體)라고 하겠다. 이러한 세가지의 매 단계마다 춤은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런 만큼 춤이란 삶과 직결되어 있으면서 단순한 생존적 차원만이 아니라 삶의 길이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인 단계로의 무한한 도정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적 삶이 궁극에 도달하고자 했을 때에야 거기서 비로소 열리는 무극대도(無極大道)의 시원(始源)이다. 그러기에 춤은 '활동하는 무(無)'이고 '움직이는 도(道)'인 것이다. 처음과 마지막이 끝내 물고 물리며 돌아가는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무궁한 시간 속에서 춤은 보이지 않는 질서의 드러남이다.
그처럼 춤은 원초 생명의 자기확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명의 자기확인이란, 하나의 존재라는 것이 개체적인 존재자일 뿐 아니라 다른 무엇과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협동적인 존재자임을 스스로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돌덩이 하나에도 그 자체 영성적인 마음이 있어 유동하는 한 생명체로서 인간과 서로 교류하면서 우주진화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는 '가이거 가설'이나 네오 휴매니즘과 연관된다. 이는 앞에서 살핀 대로 풍류도의 접화군생의 현대적 해석과 그대로 통한다. 그러한 신령함의 자기생성활동인 춤이기에 춤추는 것만큼 거룩하고 풍요로운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dance의 어원인 산스크리트어 'Tanha'의 뜻이 또한 그러하다. 원래 dance는 뛰는 춤, 도약의 춤, 환희의 춤만을 지칭했는데 어느새 춤 일반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다. 'Tanha'의 원래 뜻은 '환희용약(歡喜踊躍)' '생명력의 충일'이라고 한다. 공동체적 생명에너지의 충일이자 자기확장인 'Tanha'의 어원 자체가 이미 춤과 생명의 관계를 잘 예시해 주고 있다.
춤은 생명력이 흘러 넘치는 살아 생동하는 것이어서 언제나 죽음이나 죽임의 상황에 대결하는 측면이 있다. 그만큼 적극적이고 쟁투적인 삶이다. 춤은 온갖 반(反) 생명에 대해 대항해 왔다. 우리는 춤출 수 없도록 사회체제를 몰고간 중세(中世)시기에 춤추지 않으면 살수 없는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춤추다가, 죽어서야 춤이 그치는 '죽음의 춤'과 '무도병'의 역설적 사회병리현상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춤출 수 없게끔 만드는 죽음, 죽임의 세력에 대항하는 춤이야말로 춤의 가장 강력한 주제가 될 것이다. 반생명을 척결하고 살아있음에 겨워 신령스러움의 생성활동인 엑스타시를 체험하는 여기에서 우리의 독특한 신명론이 제기될 수 있다고 하겠다. 죽임인 살을 풀어 헤쳐 물리치는 '살풀이' 과정에서의 극점이 바로 '신명'이다.
자연 생태계가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춤추지 않는 바다를 대신하여 춤추고,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 새들을 대신하여 노래하는 신성한 의무를 지닌다.
Ⅳ. 전통춤의 몇 가지 예들
그렇다면 죽임, 죽음에 대결하여 죽어가는 것을 되살리는 생명회복의 춤은 과연 한국전통춤에서 무엇으로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이러한 생명의 춤은 무엇보다 신령함과의 만남과 교류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1. 그러기에 우선 '맞이굿춤'·'터벌임춤'이다.
이는 상고대 시대의 東盟, 舞天, 迎鼓, 天君 등 제천의식을 신맞이굿이라고도 일컫는 춤이다. 한 해가 시작되는 정초나 농경의 일손을 잠시 놓은 5월이나 시월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國中大會) 사흘 낮밤을 무리지어 음주가무(群聚飮酒歌舞)했다는 옛 기록에서 우리는 도도히 흘러 넘치는 집단 신명의 현장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한 맞이굿은 무당굿춤으로 가서는 맨 첫머리에 신을 모시는 청신(請神)맞이, 또는 부정거리로서, 또 각종 민속놀이나 탈춤, 풍물에서는 길놀이, 고사굿 등으로 잔존해 있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이러한 대목은 초입의 길닦음, 터울림이기도 하고 첫 말문 열음이기도 하다.
특히 탈춤에서는 '벽사( 邪)의 의식춤'이라고 해서 탈춤의 첫머리에 꼭 들어가는 대목이 있다. 서울 경기 일원의 산대놀이나 해서지역의 탈춤에서 상좌춤, 헛목춤, 경남 일원의 오광대나 들놀음에서 오방신장무, 문둥춤이 그러한 성격을 띤다. 벽사 의식이란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예축(豫祝)의 의례'라는 뜻이다. 이렇게 놀이를 놀 판을 정갈히 하여 부정탄 것을 거두어내 말끔히 씻어내는 '판씻음'으로 놀이판을 연다.
그런데 이런 대목을 흔히는 중심부를 이끌어 내는 도입부 정도의 몫으로 보아 왔다.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으로 보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인 '마당'을 매개로하여 거기에 인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연의 문제, 신의 문제, 우주의 문제 등 온갖 문명사적 문제가 동시에 초청되는 첫 대면의 자리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인간의 삶의 자리를 토대로 해서 마을과 자연과 신과 우주와 역사와 사회가 동시에 초청, 결합되는 춤으로, 천지신명에 놀이판을 벌인다는 사실을 고하면서 유동하는 공생 에너지를 교류하고 교감하는 통과의례의 대목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과정이 있지 않고서는 본 행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도 하겠다. 이것은 단순한 주술적인 차원이 아니다. 우주의 생명과 교통하는 그 첫머리가 있지 않고서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 우주와 신의 문제는 근원적으로 풀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은연중에 예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러한 우주적 생명력 위에 중심행사는 품기어 있을 뿐이라는 것이고, 바로 이 맞이굿 춤이야말로 온갖 춤의 생명력을 품고 있는 포태(胞胎), 곧 춤의 씨앗을 기르고 낳게하는 몫을 맡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하여 신, 자연, 우주, 역사가 하나된 우주적 일체성 위에 인간의 삶을 얹어가며 사회적 영성 속에서 인간과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해 가는 것이다. 우주의 생명질서가 교감되는 바로 그 공간이야말로 세속적인 땅이면서 또한 거룩한 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마당은 성속(聖俗)이 넘나드는 '성긴 틈' 이다. 이 점에서 일년내내 속된 것이 범접하지 못하는 교회나 몇몇 절간과는 다른 것이다.
2. 다음은 '죽음맞이 춤'이다.
춤출 수 없는 죽음을, 춤출 수 없게 하는 죽임을 맞이하는 춤이므로 참으로 역설적인 춤이다.
이런 춤의 하나로 봉산탈춤의 목중춤 중 첫머리에 나오는 첫목춤을 들 수 있다. 봉산탈춤의 8목중춤은 8명의 수도승이 차례로 나와 운율조의 재담과 장기자랑의 춤으로 한판 휘젓고 들어가는데, 이들은 염불에 뜻이 없는 팔도강산 한량임을 자처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봉산탈춤의 목중춤은 파계승 놀이이다. 중이되 중이지 않음을 풍자하는 것이다. 파계승 놀이는 민중이 지니고 있는 불교에 대한 태도를 놀이화한 것인데, 이는 타락한 불교에 대한 비판인지 아니면 불교에 대한 원천적인 비판인지, 민중이 불교에 대해서 적대적인가 우호적인가, 그런 것을 곰곰이 따지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목중춤은 오입쟁이 춤으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육체적 활력을 구가하는 춤이다. 이 파계승의 춤은 중세적 질서를 타파하는 '형식도덕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겠지만 정신세계의 고답성보다는 원초적인 육체성을 강조하는 춤이기도 하다.
또 이 첫목중춤은 몸을 땅 위에 엎드린 채 뒹굴기도 한다. 3전3복(三顚三覆)이라 하여 세 번 엎어지고 세 번 뒤집고 하는, 요동치는 몸놀림에서부터 시작하는데 남녀간의 성적 결합을 묘사하는 듯한 그런 형상이기도 하다. 양성의 교합이야말로 생명인 대지와 더불어 교감하는 것이고, 바로 그러한 생명력의 산출,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서 풍농, 풍어를 비는 유감주술(類感呪術)로서 다산성(多産性)을 통한 삶의 풍요로움을 예축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 보려는 것은 첫목춤이 엿보이는 바 멍석말이, 덕석말이로서의 뜻이다. 이 춤은 억울하게 멍석말이로 죽어가는 명다리의 춤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연루에 의해 멍석말이를 당해 죽어가는 과정을 엮어내고, 또 죽고 죽어 죽음으로 가서는 거기서 되살아나오는 그런 과정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처음에는 멍석말이로 죽어가는 몸짓처럼 부르르 떨며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격렬한 근육춤의 동작으로 대지를 뒹굴고 다닌다. 바닥을 기면서, 엎어졌다, 뒤집어 졌다하는 복무와 전무에서부터 시작하여 이윽고 몸을 추스려 근경(近景)을 살피며 3진3퇴(三進三退)하면서 땅을 딛고 일어선 선춤(立舞)으로 이어지고, 나중에는 땅의 세계에서 떨쳐일어나 허공을 가르며 높이 뛰어 오르는 도약의 춤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통렬한 춤사위와 함께 바닥에서 일어서서 드디어 뛰어 오르는 일련의 진행과정을 보아서도 이 춤은 죽음에서 생명을 되찾는 '반생명의 생명화'의 춤인 것이다. 이 춤은 요철 굴곡이 심한 귀신형용의 탈과 더불어 한국 전통 춤에서 달리 견줄데 없이 활달하고 남성적이다. 하늘을 가르고 우주와 노니는 듯 춤폭이 크고 동작선이 장쾌하여 남성적 웅비감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3. 또하나는 '병신춤'이다.
이는 제대로 춤출 수 없는 신체장애의 춤이다. 한국민중은 모여 놀다가 신명이 극점에서 오르면 놀던 사람중 한두 사람은 꼭 병신춤 같은 것을 춘다. 추는 사람도 구경꾼도 이를 보고 더욱 흥겨움에 젖어든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밀양 백중놀이 중의 '병세이굿'을 들 수 있다. 밀양의 병세이굿은 본래 밀양지역 양반 세도가의 자제가 병신임을 흉내낸데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결코 신체장애자를 흉내내어 모멸하기 위해 추는 춤이 아니다. 밀양의 병세이굿에는 히줄래기, 떨떨이, 배불뚝이, 절름발이, 곰배팔이, 중풍쟁이, 난쟁이, 문둥이, 꼬부랑할미 등 다양한 병신춤이 나오는데 이들은 관중의 신명을 부추기고 또한 압도한다.
병신춤은 춤출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춤출 수 있는 데로 나아가는 춤이기에 육체해방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바로 이런 육체해방의 춤을 통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육체해방의 감흥을 감염시켜 숨어있어 잠재화된 신명을 스스로 돋구어 내게 한다. 그것은 또한 불구자가 불구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자기폭로의 춤이다. 배냇병신이든 사회적 불구이든 자기 몸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가 비정상임을 허물잡는 자기 비판, 사회 비판의 춤이다. 병신춤은 제대로 춤출 수 없는 춤이기에 제대로 춤출 수 있는 정상의 몸, 정상의 사회가 될 때까지 추어져야 될 가이없는 해방기운을 담지하고 있다. 불구화된 것을 불구로써 척결하는 인간해방, 사회해방의 역동적인 신명의 춤인 것이다. 옭죄인 몸이 풀려나가 정상의 몸짓을 되찾게하고 이윽고 매인데 없이 활기차게 뛰는 춤으로 엮어진 병신춤의 구성방식이 이를 잘 말해 준다. 그리고 탈춤의 많은 부분은 병신춤으로 되어 있다. 탈춤에 나오는 문둥이, 곱새, 봉사, 어딩이 등 민중적 전형 뿐 아니라 대부분의 양반 탈들도 선택적 왜곡이 심하다. 언챙이이거나 손님탈, 삐뚜르미 등이어서 한번 붙어 겨루어 볼만한 만만한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탈춤에는 사회적 장애나 비정상을 척결하려는 민중적 염원이 누대를 통해 적층되어 있다. 탈춤은 단순한 의미의 계급갈등을 넘어선, 생명회복을 위한 문화적 전복이다.
또 이 춤은 그늘진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원한 맺힌 어둠의 춤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춤은 그늘진 곳에서 밝은 곳으로 옮겨가는 신명의 춤이다. 어디라 풀길 없이 맺힌 원한과 절절한 비통함의 속 그늘을 남김없이 끌어내 능청스럽게, 또 청승맞게, 그러면서 구성지고 푸지게도 웃겨주는 해학의 춤이다. 보는 이는 웃다 웃다 보면 마침내 왠지 눈물도 어릴 법할 것이다. 바로 그러한 그늘진 속에서의 신명이야말로 그늘을 밝음으로 전화시키는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신명일 뿐만 아니라 숨어 그늘진 끝에 밖으로 차단된 신명에 불을 지르는, 집단 공유의 민중적 신명이다. 그리하여 이윽고 누구나 더불어 춤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춤은 사람과 사람이 화해하고 친교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춤이다.
4. '살풀이춤'도 마찬가지다.
살(煞)을 푼다는 것은 액땜이고, 액을 풀어헤쳐 탈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을 내장하고 있다. 오늘날 추어지고 있는 살풀이춤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본래의 살풀이춤은 삶을 옭죄고 못살게 구는 '살'을 꼭 짚어낸 후 거기에 대결하고 쟁투하면서 그것을 퇴치시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살풀이춤은 죽임인 살을 되죽이면서 획득하는 되살림의 춤이다. 못살게구는 적의 정체를 밝히고 이와 싸워 물리치는 역동적인 신명의 춤인 것이다. 그러므로 살풀이 과정에서 신명은 반생명적인 살의 정체를 밝혀 전투적인 현실인식을 수행한 것이어서 단순한 흥풀이이거나 정서의 소비적인 해소일 수는 없다. 그것은 쟁투적인 현실주의의 치열함을 이미 동반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살풀이의 신명은 부당한 현실조건에 대한 싸움의 정신의 산물이며, 싸움의 정신이 투철할수록 신명은 고조되고, 살이 끼면 낄수록, 응어리가 깊으면 깊을수록 신명은 자기화된다. 그리고 살이 공동의 적일 때 신명은 공유의 것이 된다. 특히 일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세계와 자아가 만나는 일차적인 통로인 육체노동적 사고의 직접성을 매개로 한 것이어서 신명속의 민중적 현실주의는 생명 사실에 깊이 뿌리를 둔 한결 직접적이고 생생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역신을 물리치는 처용의 힘은 무엇이었는가. 역신이 아내를 범접한 현장을 목격하면서 죽음과 같은 심적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생겨났는지 잘 알아차린 처용은 춤으로써, 노래로써 대결하여 역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바로 거기에 동원된 춤과 노래야말로, 역신을 감화시킨, 공격적 유화(宥和)의 위력적인 가무가 아닐 수 없다. 나중 처용화상을 내걸어 온갖 잡귀, 잡액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위력적인 존재로까지 나아간 처용의 춤이야말로 살풀이 춤의 한 전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전투적 현실인식을 통한 싸움의 춤이며 나아가 후덕한 마음 씀씀이 속의 화해와 나눔의 춤이다.
무속춤에서 보여지는 살풀이춤도 살의 정체를 밝히어 액을 물리치는 춤이어서, 자신의 문제를 딴데 의탁해서 떠넘기는 비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살풀이의 '풀이'라는 것은 단순한 기분풀이거나 정서해소가 아니라 어려운 삶의 과제를 풀어내 '물리치는 것'으로 해석함직 하다. 생명을 저해하고 있는 죽임의 세력인 살을 물리치는 살풀이춤이야말로 대립하고 있는 것 사이의 다툼을 상보적인 관계로 재정립시키면서 죽음조차도 불러 풀어 먹이는 지극한 생명공경의 춤이다.
5. 그리고 또 노동행위와 더불어 있는 '일춤'을 들 수 있다.
일춤은 힘겨운 노동의 고역스러움을 덜어내고 노동의 효율성과 노동가치를 드높이는 육체적 사고의 춤이다. 육체자체가 세계와 자아가 만나는 일차적 통로이므로 일춤의 육체적 사고란 어느 무엇보다 직접적이고 생생한 사유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육체적인 것에 영성이 활동하고 있고,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이 아니기에 육체의 일이란 그것이 꼭 춤이 아닐지라도 육체안에 터져 확장되어 나오는 영험한 시간성을 내뿜고 있는 신령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신나게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한다고 보지 않고 놀고 있다고 보게 된다. 춤추고 있다고 보게된다. 일과 놀이와 춤의 무분별한 일치, 이것이 일춤이며 이때 일의 생산성과 생명력은 자기의 것인 동시에 우주운행 에너지와 서로 교류하는 것이 된다. 특히 두레조직 속의 일춤의 신명은 공동체성과 영험성, 일상의 사회적 성화(聖化) 등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일춤의 신명이란 일을 일답게 하고 사람의 사람됨을 부추기는 원초적인 생명이다. 그러기에 생산적 출산적 정취(情趣)로서의 신명은 단순히 연행쟝르만의 예술체험도 아니고 예술행위자의 것만도 아니다.
6. 또하나는 '칼춤'이다.
한국전통춤에는 여러 가지 칼춤이 있다. 황랑창무에서부터 궁중의 검기무(劍器舞), 그리고 상여 앞에서 길잡이 노릇으로 추는 휘쟁이의 춤이라든지 기생방에서의 검무, 무당춤의 칼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들고자 하는 것은 수운(水雲) 최제우 신사(崔濟愚神師)가 추었다고 하는 '검결(劍訣)'이다. 1860년 4월 5일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운신사가 득도한 후, 불온사상포지자로 몰려 이듬 해 겨울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의 隱寂庵에서 피신 생활을 하게된다. 그 곳에서 피신과 변혁의 울울한 심사 속에 달빛을 받아 칼노래 칼춤을 스스로 짓고 이를 수련하게 된 것이다. 검결은 나중 동학교도가 자기 심신수련의 한 방편으로 추었다고 한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낮은 구릉에 올라 상차림을 하고서는 주문을 외고 약물을 먹고 심신이 그윽해 지면 이윽고 목검을 잡고 칼춤을 추는 것이다. 한번 뛰어 허공에 오르면 한참 후에야 지상에 내려왔다고 하는데,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농민군 훈련방식이나 모의 전투의 한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칼춤은 동학사상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 있는 춤이다. 이 춤은 목숨을 수호하면서 또 잃을 수도 있는 춤이다. 수운신사는 혹세무민죄로 몰려 대구 장대에서 처형당했는데 그 때 "요상한 칼노래를 부르고 칼춤을 추어 사람을 현혹시키고 국정을 모반했다"라는 죄목이 덮씌워졌다고 한다. 동학을 내세우고 혁신사상을 포지한 자로서 죽임에 이르게된 죄목의 확증이 바로 칼노래 칼춤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칼춤 한 번 잘못 추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만큼 칼춤이야 말로 잘못 추다가는, 아니 제대로 추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춤이라는 점에서 죽음과 삶이 서로 맞물려 교차하고 있는 역설적인 생명 교차의 춤이다.
그리고 그 칼춤의 내용은 오늘날 춤으로서는 남아 있지 않고 가사만 남아 있어 내용을 어림짐작해 볼 수 있다. 검결은 "우주변혁의 때가 드디어 도래하여 대장부로서 나서서 칼춤으로 우주만물을 뒤덮으니 어느 누군들 당할 자가 있겠는가"라고 노래하는, 장쾌한 변혁기운을 담고 있는 자기 결단의 노래와 춤이자 우주개혁의 노래와 춤이다. 바로 그 웅지야말로 사회개혁과 우주개벽을 꿈꾸어왔던 수운신사의 집약된 삶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7. 다음은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4)가 추었다고 하는 무애무(無 舞)이다.
지금은 궁중춤으로만 남아있고 본래 원효대사가 추었던 무애무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그 춤의 내용을 어렴풋하게 짐작해 볼 수 있어 이 춤은 떨거지 병신춤이 아닌가 한다. 이 춤은 원효대사가 요석공주의 청을 들어 파계행을 벌인 후 스스로 소성거사(소성거사), 복성거사(卜姓居士)로 낮추어 칭하면서 거리 광대들의 춤과 노래를 배워 호리병박을 들고 그것을 흉내내면서 거기에 고답적인 불교교리를 담았다고 한다. 그 춤과 노래가 바로 무애가무인데, 그 간단한 가락과 재담에 수많은 사람들이 어렵지 않게 같이 부르고 춤을 더불어 춤으로써 저 멀리 있던 불교의 세계가 자기 몸 안에, 일상생활 속에, 어쩌면 가장 미천한 인생들의 보잘 것 없는 삶 속에도 있음을 깨닫게 하였다고 한다. 말 저 너머의 것을 살아있는 몸짓으로 이야기하면서 원효는 떨거지 행각을 벌이면서 무애무라는 떨거지 병신춤을 일반민중과 더불어 춤으로써 불교의 민중화를 꾀하였고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다르지 않다는 진속일여(眞俗一如)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 떨거지 광대로서 무애가무행을 통해 바닥의 것이 거룩하다는 민중생명사상을 몸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속그늘에 깔묻혀 찌들고 쩔은 바닥의 삶 속에 영성적인 것이 있고 거룩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춤과 노래로써 천명했던 것이다.
8. 그리고 심신수련하는 화랑도의 춤을 들수 있는데 일컬어 '풍류(風流)의 춤'이라 할 만하다.
유불선이 총합된 현묘지도(玄妙之道)인 풍류는 '접화군생'의 뜻 그대로 삼라만상과 더불어 자연대로 노닐어 심신을 맑게하는 것인 동시에 생명의 정기를 섭취하는 '한밝사상'의 춤이다. 이는 정대(正大)하고 (??) 밝음이자 신성하며 ( ) 살림이자 치유인 ( ) 홍익사상(弘益思想)의 총체이기도 하다.
9. 그리고 소복 입은 여인네들이 달밤에 동글게 나선형(螺旋形)을 그리며 추는 '강강술래'가 있다. *여기서 `ㅏ'자는 아래 하에서 윗 대가리를 없앴다는 뜻을 품고 있다. `아래중의 아래'라는 뜻일 터이다. 자기낮춤의 지극함이다.
여인, 밤, 달빛, 흰옷, 물가, 원진(圓進), 회귀곡선 등 온갖 여성적인 것의 생생력(生生力)을 품고 도는 강강술래는 달을 지상에 옮겨놓은 모사(模寫)의 춤으로서 생명질서의 근원으로 회귀하고 거기서 다시 풀려 나오는 우주운행의 춤이다. 미로행진인 죽음의 춤인 동시에 이를 뚫고 나오는 재생의 춤인 강강술래는 동그라미를 그리는 부분에서의 흥겨운 신바람과 동그라미를 풀어버리는 부분에서의 비감이 교차되고 있어 바카스적인 앙분과 파토스적인 슬픔이 복합된 한국춤의 한 원형이라 할 만하다.
10. 그리고 궁중춤의 대표격으로 '춘앵전(春鶯 )'을 들 수 있다.
이 춤은 조선조 순조 27년에 당시 대리섭정을 하던 孝明世子가 그의 모후(母后)인 純元肅皇后 보령(寶齡) 40을 경축하기 위해 진연(進宴)에 예제(睿製)한 춤이다. 이 때 집사 악사로는 金昌河였다. '춘앵전'이란 이름의 노래와 춤은 이미 당나라 태종때에 악사 채 량 그리고 당 고종때의 악사 白明達에 의해 음곡화된 바 있고, 일본에서는 궁중악인 아악(雅樂) 중의 하나로 유입되기도 했다. 한국의 '춘앵전'은 이들과 어떤 교섭관계를 맺은 것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대체로 보아 주제적 발상은 동일하다고 하더라도 향악정재(鄕樂呈才)로서의 독자성은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고 하겠다. 춘앵전은 이 춤에 제(題)한 단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봄날 우짖는 새소리에 유감하여 화사한 정경을 그려내는 진귀한 웃음의 춤이다. 특히 20박때 꽃앞에 섰는 태도인 '화전태(花前態)'가 그러한 춤사위를 대표한다. '화전태'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이를 보여 곱게 웃는 미롱(媚弄)인 것이다.
사방 여섯자의 화문석 위에서 조그맣게 나고 들며 추는 이 춤은 가장 작은 그릇으로 가장 큰 것을 담아내는 무한생명의 우주질서를 그려내는 춤이다.
그리고 제각기 생긴 대로 마구잡이로 추는 보릿대춤, 도굿대춤의 타고나 어쩌지 못할 신명이 있는가하면,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줄타기 춤, 작두타기의 목숨을 내건 전문예인의 '사로잡는' 신명의 춤도 있다.
강신무(降神巫)이든 세습무(世襲巫)이든 한국의 무당춤은 '사로잡고', '사로잡힌' 신명의 춤이다. 무당굿은 노래와 춤을 통해 신을 모시고 놀리고 보내드린다. 모신 신은 인간과 더불어 동사(同事)함으로써 신인합작으로 신명을 현현케 하는 데 이를 인간인 무당이 수행한다. 때로는 신지핀 일반사람이 '무감'을 써서 대리체험을 하기도 한다. 인간과 신 사이를 소통할 수 있게 하는 매개 통로가 춤과 노래로 되어 있는 종교의 예는 흔치 않다. 거꾸로, 한국의 무당굿의 춤과 노래에는 종교의 핵심적인 교리가 담지되어 있다. 이런 배경이 한국적 신명의 독특함을 부추겼음직하다. 그리고 여기서 현현되는 신명은 천상이나 지하, 또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부르면 이내 다가오는 지상의 세계로, 내 몸안으로, 또 내 몸밖으로, 내려오고 솟아오르고 나고 들고 지피는 전방위적인 것이다. 가히 생명교감의 무소불위(無所不爲)함을 알 수 있다.
우리 전통춤의 여러 갈래들과 종목들을 모두다 한 가지 생명사상으로 포섭하여 다루기엔 그것들의 성격이 다양한 만큼 무리한 측면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생명기운을 포지하지 않은 춤이란 없다고도 해서 과언은 아닐 것이다.
춤출 수 없게 하는 죽음의 춤조차 생명회복을 위한 하나의 적극적인 역설이지 않겠는가.
한국 전통춤의 백미라고 하는 '승무(僧舞)'의 숨은 기운도 생명운행의 기운이 아닐까 한다. 생사고락의 온갖 세속 번뇌를 한개 별빛에 모두우는 법열(法悅)의 이 승무는 두고 살펴보고 헤아려 보아야 할 심오한 춤이다.
Ⅴ. 신명론 재론
한국춤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는 생명사상은 새로운 민족예술의 한 방향타로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미학적 과제는 신명론이다.
신명은 '우주 생명력과 교합된 상태로 확대된 자아'이다. 말하자면 우주 생명이 인간내부에 지펴들어 자기안에 우주가 확대되어 나오는 영성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명은 앞의 샤마니즘적 전통에서 언급했듯 신이나고 들고 오르고 내리고 지펴 바람나는 접신체험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주질서가 나고드는 내유신령 외유기화(內有神靈 外有氣化)의 동학주문과도 통한다. 자신이 한울님의 담지자임을 스스로 깨닫는 이마다 신명의 주체자이므로, 신명은 연행 예술가에게만, 농촌 정서 체험자에게만 다가오는 것이 아닌 만인 보편의 것이다.
예술가란 말하자면 일반인의 은폐된 신명을 불러 일으키는 신명의 대행자이다. 각자마다 내재된 신명을 은폐시키도록 몰고간 삶의 액을 제거하는 사제의 역할을 맡아하는 것이다. 오늘 어떠한 노래와 춤, 시와 음악, 그림과 예술이 있어 잠자는 신명을 불러 일으킬 것인가,이것이 당면한 민족예술의 근원적 과제이다.
'신맞이춤'으로서 인간과 자연과 우주와 역사가 동시에 초청되어 공생에너지를 교감하는 생명 포태의 신명이 있는가 하면, 화랑도의 가무처럼 접화군생하여 미적인 것과 생태도덕적인 것이 합일된 풍류의 본원적 신명이 있다. 그리고 병신춤에서 보이는 그늘진 신명이라든지 살풀이 춤에서 보이듯 전투적 현실인식을 통한 역동적이고 역설적인 신명 또한 있는 것이어서 신명은 단순한 한풀이나 소비적 정서가 아니다. 생긴대로 마구잡이로 추는 자생적 천성적 신명이 있는가 하면, 전문예인의 별것 아닌 듯 천진난만한 고졸(古拙)의 '사로잡는' 신명도 있다. 멍석말이 춤으로써 반생명적 상황을 추체험하는 죽음맞이의 웅혼한 신명이라든가, 동학의 검결처럼 사회개혁과 우주 개벽의 신명, 원효대사의 무애가무처럼 진속일여의 신명 등 전(全)문명사적 전복을 꿈꾸는 신명을 두고 볼때 오늘날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신명은 우주론적 신비주의거나 공상주의도 아니고 몽상주의, 몽환주의의 것은 더욱 아니다.
일춤의 신명은 말할 것도 없고 두레 공동체를 통해 일하는 것이 영성적인 굿인 경우 신명은 육체성·노동성과 더불어 공동체성·자발성·감염성·전파성을 두루 지닌 해방기운이 담지되어 있다. 오늘날의 두레굿춤이 사람사는 곳 곳곳마다 추어질 때 신명론은 '지금 여기' 있는데서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두레굿 춤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생활 속 실천의례라 할 것이다.
특히 상고대 종교사상이 19세기에 이르러 재창조되었다고 하는 신흥 민족 종교사상과 춤과의 관계는 각별한 바 있다. 우주 개벽 기운을 품고 있는 동학과 검결이 그러하고, 해원상생(解寃相生), 천지공사(天地公事), 율려(律呂)의 증산도와 풍물굿, 우주적 정기를 부르는 정역과 영가무도(詠歌舞蹈) 등이 좋은 예이다. 뿐만 아니라 일찌기 일심(一心), 이변비중(離邊非中), 진속일여의 원효대사와 무애가무는 창조적 한국사상의 거침없는 실천행이었던 것이다.
'활동하는 무', '움직이는 도', '텅 빈 자유'인 춤은 창조적 진화를 부추겨 마지 않는 경건한 실천행이다. 이는 사람 마음 가운데 한울님을 모시는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과, 시천주(侍天主)의 '하나됨', '하나임', '한울님'의 실천의례이기에 모방하며 존경하는 사(事)와 존경하며 동무하는 동사(同事)의 이중교호로써 춤의 주체인 신명의 활동상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신령스런 빛을 모신 아름다움이 생성된다. 이는 한국예술의 아름다움은 '생활과 종교와 예술이 비분리된 민예(民藝)적인 것'임을 언급한 又玄 高裕燮(1905-44)의 견해를 재음미케 한다.
신명은 일과 놀이, 그리고 창작과 향수의 전일적 통일체로서 모든 생명을 포태하는 출산적 정취(mood)가 고조된 민중적 미의식의 모체이다. 한국전통춤의 형식원리이자 유형적 특징인 '맺고 풂', '어르고 닮', '덩실덩실'과 '너훌너훌', 발디딤새로서의 비정비팔(比丁比八), 춤동작선으로서 3진3퇴, 3전3복, 사방치기, 연풍대 그리고 춤 리듬의 내재 원리로서의 3분박(分拍), 대삼소삼(大三小三) 등은 그것이 바로 우주 생명기운의 운행원리이자 영성적인 것이 빚어내는 역동적 균형으로서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무궁한 시공간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명은 이러한 형식원리뿐만 아니라 예술창조 과정에서 영감이라든지 구상력, 열정, 환상, 표현 동기 등을 감싸 돌고 있는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크고 작은 살림살이에 무한한 창조적 계기를 부여하는 우주적 생명체험이다. 어둠과 빛의 세계, 신산고초의 '한(恨)'과 신성하고 고결한 환희, 그리고 미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 등의 결합처럼 대립하는 것 사이의 이중교호적 얽힘이야말로 한국 미 또는 한국적 미의식의 가장 핵심적인 특질이 아닐 수 없다. '흰그늘', '시김새'라는 독특한 용어는 동이족(東夷族) 문화의 독특한 특성이 밝고 화사한 신명에 있음을 잘 일깨워 주고 있다. 그러므로 춤과 생명미학의 핵심과제는 역시 신명론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예술문화와 삶 전반에 걸쳐 숨어 있는 신명의 과학적 드러냄은 민족미학 나아가 동아시아 미학 그리고 민족적 삶의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