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남녀 관계의 질서(고전11:2-16절)
고린도 교회는 아주 복잡한 교회입니다. 은사도 많고, 사랑도 많았지만, 항상 파당이 생기고 분열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유가 뭐냐?. 지역 자체가 돈이 많고 우상숭배가 만연한 지역이다 보니 사치와 방탕한 문화가 교회 깊숙이 들어와서 교인들을 현혹하여 신앙상 혼란에 빠졌고, 특별히 두 가지 문제가 심각했는데 하나는 예배드릴 때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였고, 또 하나는 성찬의 문제였습니다.
여자가 예배 때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야 합니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 같은 것을 뒤집어쓴다는 것은 자기보다 높은 분 앞에 나설 때 쓰는데 그것은 그 분에게 순종하고 복종하겠다는 표현입니다.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표시로 탈릿(tallith)이라는 덮개를 씁니다. 팔레스틴, 중동지역의 여인들이 얼굴에 수건을 가리고 있는 것도 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는 여인들은 영향력 는 사람의 고급 정부이거나 아프로디테 신전의 매춘부들이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이런 문화관습속에 살아오던 자들이 기독교에 입문하여 보니 지금까지 자기들이 지켜오던 관습하고는 영 다른 문화를 접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복음은 무엇입니까?. 여성이 남성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입니다(고전11:11-12).그래서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남성들에게 억눌렀던 여성들이 해방되고 여권이 존중되는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당시에 고린도 교회 여성들 가운데는 이러한 변화의 바람,변화의 분위기를 지나치게 편승해서 극단적인 방향까지 나아간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머리에 수건을 벗어버리는 것까지도 괜찮은데 남녀평등을 지나쳐 남성의 리더쉽까지 인정하지 않으므로 교회내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게 된 것이지요. 말하자면 치맛바람이 너무 거세게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 여성의 해방은 필요하지만,극단적인 해방운동은 우리가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이 남성의 리더쉽을 세워준다고 해서 여성이 열등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여성의 사역 자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여기도 보면 여성은 기도하면 안된다,설교하면 안된다...이런 말 없어요. 5절에 보세요“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수건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이라고 한 것을 보면,여성이 얼마든지 기도 할 수 있어요. 예언할 수 있고 설교할 수 있어요. 여선지 드보라,안나, 에스더도 있습니다. 빌립 집사의 딸들도 예언했습니다(행21:9).
여성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서를 지키고 남성의 리더쉽에 대한 존중의 자세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질서와 리더쉽이 존중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고전14:33,40).
우리가 동등하다는 얘기와 역할의 차이까지 무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이에 관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11-12절,11:3). 그래서 특별히 수건에 대한 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여성의 머리는 누구라고 그랬어요?(남성입니다),그런데 남성의 머리는 누구입니까?.그리스도와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하고 남자는 수건을 안 쓰는 것입니다.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안 쓰면 어떻게 되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니까 예배 때 남자의 영광이 나타나겠지요?.예배 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지 남자의 영광이 나타나면 되겠어요?. 물론 안되지요.
그래서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이고 남자는 머리에 수건을 안 쓰는 거다 이 말입니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입니까? 사람은 숨겨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은 십자가에 뒤에, 성경 뒤에 숨어야 하는 거예요.그것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이유입니다.
(2)여성은 여성다움이 있어야 되고, 남성은 남성다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의 상징은 긴 머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자르는지 모르겠어요.여성이 머리가 짧으면 여성다움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5절과 6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지니라”
그러나 남자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14절, 15절“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여자에게 있어서 긴 머리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수건 대신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여성은 여성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특성중 하나가 여성은 긴 머리, 남성은 짧은 머리입니다.물론 옛날 보다는 여성의 머리가 많이 짧아졌지만, 중요한 것이 뭐냐면,그 당시 그 시대의 문화에 맞도록 여성은 여성다움을 추구하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는 말입니다.
(3)세 번째로 중요한 것이 뭐냐면 예배에 있어서 순종적 자세의 중요성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자리에서 순종적인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낸다, 주님만 드러내겠다, 나 자신을 감추겠다, 이런 뜻입니다. 그것이 수건을 통한 신앙고백입니다.
자, 생각해 보세요.“예배를 얼마나 잘 드리느냐”라는 것은 예배가 끝났을 때,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라는 순종이 결단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의 결론이고, 예배의 결과이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라는 결단을 갖고, 순종의 결단을 갖고, 예배의 자리를 떠나 가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수건을 쓰는 것입니다.그런데 수건을 쓰고도 순종을 안하면 소용이 없는 거죠. 중요한 것은 수건을 쓰느냐 안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순종 그 자체의 결단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성들이 자유화되고 해방되면서 너무 극단적인 경향으로 나가서 그와 같은 절제의 선을 넘어갔습니다.
심지어는 예배의 자리에서도 제일 시끄러운 곳이 여성이고, 또 방언 문제가 나오죠, 방언도 그냥 통역을 안 세우고 방언을 하다보니까 예배의 질서가 무너져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은사의 표현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입니다.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질서는 존중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교훈입니다.
1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권세 아래에 있는 표시라는 것은“내가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순종의 표시로 머리에다 표시를 두어라, 수건을 쓰라는 말이죠, 그런데 누구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까? 이 부분이 재미있는데 누구 때문에요? “천사들을 인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성서학자들이 토론을 많이 했는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 예배의 참관자가 있습니다.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이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를 살펴보고 있다는 것입니다.예배를 잘 드리나 못 드리나, 졸고 있지는 않는지, 정말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지, 아닌지, 정말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을 고백하는지..., 천사들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CC카메라처럼 다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 누가 내 예배드리는 태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정말 내가 느낀다면,우리가 정말로 예배를 신중하게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아버지께 참되게(신령과 진정)예배하는 자들을 찾으러 오신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움으로, 질서를 지키고, 순종의 자세로, 오직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