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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올렸다가 삭제한 것 같아 다시 보관겸 올려놓습니다.
터
김 명 근
1
“이게 다 내 업이지. 업...”
아직도 한낮의 태양이 따갑기만 한 가을의 제방 길을 걷는 권 노인은 입에서는 긴 한숨과 함께 힘없는 중얼거림이 새어나온다.
지구의 온난화니 뭐니 해서 여름 내내 우기가 지속되었지만 올해의 농사도 여지없이 풍작이다. 그의 논에는 황금빛으로 변해 가는 벼들이 마치 논둑이 터져 나갈 듯이 야무지게 여물어가고 있었다.
권 노인의 논은 냇가 바로 위에 위치하고 있을뿐더러 옥답중의 옥답이라서 그저 씨만 뿌려놓으면 별다른 손길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곡식이 잘 자라주기에, 마을 사람들이 가끔 가뭄이나 홍수에 보리죽을 못 먹는 수난을 당했을 지라도 그는 평생 농사에 흉작 한번을 겪지 않았다. 논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밭도 논 바로 위에 붙어있어서 물 걱정 없이 채소며 잡곡들을 무난히 경작할 수가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꼬.”
논밭을 바라보며 뿌듯해야 할 권 노인의 입에서는 다시 탄식을 흘러나왔다. 마침 콤바인이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려 논으로 나왔던 윗집 최씨가 혼자 중얼대며 내려오는 그를 먼 빛으로 발견하고는“ 아니 형님 뭔 생각을 그리하고 다니시우? 이 가을에 또 뭘 심으려고.” 하며 소리를 질러댄다.
“나무좀 심고 가네.”
“이런, 내년 봄에나 심지 그러세요.”
“뭔 소린가, 아무 때나 심으면 어때서 그래.”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권 노인을 바라보는 정씨의 입에서는 “저 형님이 아무래도 미쳤지. 이 가을에 뭔 나무를 심겠다고...” 하는 혼잣말이 튀어 나왔다. 아닌게 아니라 권 노인이 미쳤다는 소문은 올 봄부터 마을에 떠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노망이 나서 그러려니 했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권 노인은 팔순이 가까운 일흔 여덟의 나이였지만 흔한 노인성 관절염 한번 앓지 않는 다부진 체질을 유지하고 있을뿐더러 불같은 성격에 꼬장꼬장한 말투까지 구사하고 있어서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가 치매를 앓으려니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사람이 변하여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삼만여 평의 적지 않은 농지와 육천여 평의 임야를 갖고 있음에도 틈만 나면 선산주변에 은행이며 대추, 밤 등 과실수를 심는가 하면 논밭을 가리지 않고 두렁에 옥수수나 콩 등 잡곡을 심고 심지어 집 주변 공터에다가도 과실수를 심어대기 시작했다. 농사꾼이 땅만 있으면 어디든 심고 가꾸는 것이 본분이니 그를 탓하랴 만은 이건 도를 넘어선 것이다. 갖고 있는 땅을 가꾸기에도 신물이 날 터인데 조그만 자투리땅만 보이면 여지없이 시기도 가리지 않고 땅을 파 대니 자연히 마을에서는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게 된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남자 구실 못할 그 나이에 바람이 났다는 것이다. 포천 시내에서 호프집을 하는 정 마담인가 뭔가 하는 과부가 그 대상이라고 하는데, 여자의 나이가 또한 막내딸 뻘인 갓 마흔 밖에 안 된다고 했다. 권 노인은 얼마나 그 과부에게 빠져버렸는지 한 달에 서너 번씩 찾아다니며 돈을 물 쓰듯이 써서 재산이 거덜나게 생겼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아들 준태 에게 후처를 얻으라고 달달 들볶는다니 제정신으로 볼 사람이 없었다. 오늘도 권 노인은 아침에 아들과 한바탕 말다툼을 하고 난 뒤 대추나무 묘목을 댓 그루 들고 밭 두렁이 끝나는 공지에 심어놓고 허연 머리털을 날리며 터벅터벅 집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준태는 둘째 애를 끌어안고 함지박 만한 엉덩짝을 척하니 돗자리에 붙이고 마당 가운데에 널브러지게 앉아서 풋콩을 까고 있는 처 리자를 보자 또 다시 화가 치밀었다.
“뭐 하러 그걸 까고 앉았어. 이 병신아.”
그러나 그의 처는 대꾸 없이 못들은 척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하던 일만 계속했다.
“에구 저 화상.”
준태는 자기가 화가 났을 때는 절대 말대꾸를 하지 않는 처의 속성을 알기에 찌르면 찌를수록 거꾸로 화가 더 북받쳐 아침처럼 발길질이라도 할 것 같기에 꾹 참고 대신 대문을 발로 차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가겟집에 가서 빈속에 소주 한 병을 들이키고 오긴 했지만 좀처럼 아침에 아버지와 한바탕 치른 언쟁의 앙금이 가시지를 않았다.
문이 열린 거실에는 유치원에 갔다온 큰 딸애가 그림책을 머리맡에 펴놓은 채 정신 없이 자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얼굴에 파리 떼가 굼실거렸지만, 그는 파리를 쫓아 줄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방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앞에 아버지의 신발이 없어 아침에 나간 뒤에 돌아오지 않았을 줄 짐작은 했지만, 역시 건너 방은 조용했다. 방에는 처가 보아놓은 아침상이 보가 덮인 채 그대로 놓여있다.
‘못된 늙은이... ’
준태는 밥상을 발로 밀어 윗목에 제쳐두고 대자로 벌렁 누워버렸다. 화장대 위쪽에 걸어놓은 가족 사진이며 처가 식구들의 사진이 보여 그는 다시 고개를 반대로 돌려 옆으로 누웠다.
“에이 드런 놈의 세상.”
다시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온다. 텅 빈속이 부글부글 끓으며 역겨웠지만 먹은 것이 없어서 욱하고 서너 번 헛구역질만 나왔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선 자신이 문득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끝에, “못 된 늙은이....” 소리가 다시 튀어나온다. 아무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해도 영 화가 풀리지 않았다.
리자는 남편을 따라 들어가 점심을 먹게끔 국을 데워 내놓고 싶어도 불같은 성격을 알기에 이미 다 따낸 콩 대의 꼬투리를 공연히 뒤적거리며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아침에 뭔 일인지는 몰라도 밥상을 치운 뒤에 남편이 시아버지와 다투는 소리를 들었는데 느닷없이 방문을 차고 들어와서는 그깟 낯짝에 분칠을 해서 무엇 하느냐고, 화장을 하는 그녀에게 시비를 붙어왔다.
“ 저, 얼골이 땡기..지..잖아요.”
서툰 한국말로 대꾸하자 갑자기 “말 똑바로 해 이년아 한국에 온지가 오 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말이 그따위야.” 하고 욕설을 해대더니 발로 엉덩이를 서너 번이나 걷어찼다. 하필이면 꼬리뼈를 정통으로 얻어맞아 어찌나 아픈지 그냥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자, 남편은 더는 손을 대지 못하고 대신 화장대에 놓여져 있던 부부사진을 냅다 집어던져 발로 밟아놓고는 밖으로 나갔었다.
리자는 남편이 나간 한참 뒤에 정신을 수습하고 우는 아이들을 달래서 딸애는 유치원으로 보내고 젖먹이 아들을 들춰 업고 근처 밭 두렁 이를 돌면서 시아버지가 봄부터 심어놓은 콩을 한아름 뽑아왔던 것이다.
시집 온지 오 년이나 되었지만 한국의 지형은 영 낯설기만 했다. 낮은 산으로 둘러쳐진 포천의 작은 농촌마을인 이곳, 이젠 정이 들 때도 되었지만 머나먼 그녀의 고향 마을이 항상 눈앞에 어른거렸다. 리자가 한국으로 시집을 온 것은 물론 지독한 가난 때문이었다.
그녀의 고향은 필리핀의 남부에 있는 민다나오 지방의 한 작은 농촌이었다. 수도인 마닐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참을 가야하는 오지였다. 소작농가의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동생 다섯과 함께 일만 하느라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만 다니고 말았다. 어느 땐가부터 한국에 시집가서 잘살게 되었다는 마을 처녀들의 말을 듣고 자기도 그리하리라 결심을 했지만 먼 타국에서 모르는 남자와 평생을 함께 살 결심을 하기에는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남동생 제프리가 늑막염 수술을 받아야 하는 다급한 처지에 놓이게 되자 그녀 역시 한국 행을 택하게 되었다.
남편 준태는 처음 만날 때부터 몇 년 동안은 지극하게 리자를 아껴주었다. 물론 국제 결혼을 한 다른 이들 같이 다달이 일, 이십 여 만원씩을 꼬박 처가로 보내주었을 뿐더러 이년 전에는 마닐라 부근에 집도 한 채 사서 처가의 가족을 모두 이사 시켰다. 덕분에 그녀의 가족들은 도시의 공장 등에 취직을 해서 넉넉하게 살게 되었다. 리자는 한국으로 시집오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꿈 같은 시간도 막내아들을 낳고 나서부터 차츰 깨지기 시작했다.
권 노인이 집으로 들어서자 어찌 올 때를 아는 지 며느리가 주방에서 점심상을 차리다가 “아버님, 니...이제 드러 오시요.” 하며 맞이하는데, 며느리의 어눌한 말투와 표정도 그러할뿐더러 시답지도 않아 대꾸 없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냉랭한 방안 공기가 그를 맞았다. 권 노인의 처 남양 댁은 대구에 사는 막내 딸 집으로 나들이를 간지가 여러 날이 된 터라 더 집안이 썰렁했다.
주방에서 뛰어 놀던 큰손녀가 빠끔히 문을 열더니 “할아버지” 하고는 반갑다는 듯 방안으로 촐랑대며 뛰어 들어왔다가 차가운 할아버지의 얼굴을 알아챘는지 시무룩히 되어 다시 문을 닫고는 제 어미에게로 뛰어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손녀는 제 어미를 빼다 박아 눈이 동그라니 인형같이 예쁘고 애교가 많아 마을 사람들에게도 귀여움을 받는다. 처음에는 권 노인도 애들을 안아주기도 하고 업어주기도 하며 귀여워했지만 갈수록 보기가 싫어져서 이제는 방에도 들이지 않는다. 아침에 아들과 싸운 것도 손녀문제 때문이었다. 손녀를 시내의 영어 영재 반에 보내자고 아들이 청해왔던 것이다.
“그래, 이제 다섯 살짜리 애를 돈 들여서 영재 반을 보내면 뭐할 거냐?
“아버지, 재 벌써부터 영어로 제 엄마와 대화를 해요. 다른 애들은 이제서 겨우 에이 비시를 배우는데 말 이예요.”
“그건 에미가 영어를 잘하니 일찍부터 귀에 익어서 그런 거지 영재라 그런 거냐?”
“아버지, 우리 동네 필리핀에서 시집온 여자들 많아요. 우리 앞집 인배 네 애들 봐요. 열 살 넘어도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잖아요.”
“일 없다.”
권 노인도 내심 손녀애가 다른 애들보다도 유달리 총명한 것을 알고 있지만 가르치고싶은 생각이 없기에 말을 자르려는데 아들이 엉뚱하게 심사를 긁었다.
“아버지, 제 자식 일이오. 언제까지 아버지한테 일일이 허락을 받아야 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나보고 재산을 물려달란 말이냐?”
“그게 아니고요. 저도 이제 나이가 오십입니다. 이제는 가장 노릇 좀 해야 하잖아요.”
“이런 못된 놈 같으니라고. 애비 죽으면 니 맘대로 하거라.”
“아버지 정말 너무 하십니다. 지금 세상이 어느 세상인줄이나 아시고 그러세요?”
‘그래 안다 이놈아. 나 죽으면 니 멋대로 살라고 하지 않더냐.“
권 노인이나 준태나 결국 승자 없는 싸움인줄 알기에 서로 속만 부글부글 끓인 채 말을 중단해버리고 둘 다 집을 뛰쳐나갔던 것이다.
“에이, 집구석 꼴하고는.”
권 노인은 아침 일을 생각하니 다시금 속에서 불이 붙어 밖으로 나가려는데 며느리가 점심상을 들고 막 들어선다. 상위에는 풋콩을 얹어 새로 지은 밥이며 고구마 순 등 갖가지 나물들이 제법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다.
“어디 갈.. 가시려고요? 저녁 지...인지 드시고 가셔요.”
어눌한 억양이지만 어른을 공경하고 걱정을 하는 얼굴 표정만큼은 역력했다.
“아니다. 놓아두거라.”
권 노인은 그대로 나가려다가 하긴 며느리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싶어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밥상 앞에 주저앉았다.
2
권씨네가 애처부터 필리핀 여자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려던 했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준태는 위로 누이만 셋을 둔 삼대 독자였다. 농촌 마을 총각들이 장가를 들지 못한다고 아우성을 칠 때만해도 당시 오 십대였던 권 노인은 그저 그런 것 따위는 남의 일로만 여겼었다. 부농이라면 부농인데 다가 남들 못지 않게 생긴 아들녀석을 잠시라도 도시로 보내 장사를 시켜 도시사람 만들면 설마하니 박색이라도 여자 하나 얻어들이지 못할까 하는 자신감이 있어서였다. 그는 제 몸보다도 더 아끼던 밭 칠백 평을 팔아서 큰딸이 시집가서 살고 있는 의정부 시장 한구석에 그릇가게를 하나 차려 준태를 내보냈었다.
“왜 이 애비가 땅 팔아서 너를 도시로 보내는지 알겠지?”
“아버지, 저 그냥 농사짓고 싶어요.”
“이런 속없는 놈, 난들 이 힘든 농사 혼자 짓고 싶어서 그러겠느냐?”
“알지만. 제가 어디 장사를 해 봤어야 지요?”
“에구 저걸 사내라고 내가 길렀으니. 봐라, 사내란 그저 부랄 값을 해야 사내란 말이다. 나가서 한번 해보란 말이야. 네 누나도 곁에 있어서 도와줄텐데 그것도 겁이 난단 말이냐?”
권 노인은 그렇게 자식놈을 윽박질러 도시로 내 쫓았었다. 그 라고 자식이 도시로 나가기 싫어하는 이유를 모를 리 없다. 힘들게 얻은 아들이 어찌된 일인지 사내답지 못한 내성적 성격이라 학교 다닐 때부터 이제까지 남자 친구들은 물론 여자 친구하나 변변하게 집으로 데려온 적이 없이 그저 마냥 순진하기만 했다. 그래도 제 짝이 있으려니, 젊은 놈이 가게라도 하나 갖고 있으면 능력 있어 보이니 아무리 말 수단이 없다해도 여자하나 안 넘어오겠느냐는 심사로 집안 식구들이 두손들고 말리는 것도 모두 물리치고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준태가 가게를 말아먹고 다시 집으로 들어오는데는 이년이라는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평당 십 만원 씩 팔아서 오천 만원을 들여 내준 가게가 어떻게 해서 이년만에 임대 보증금 천 오백 만원 남기고 다 털어먹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준태는 빈손을 들고 머쓱하니 제 부모 앞에 무릎을 끓었다.
“아버지, 어머니 죄송해요.”
“뭐가 죄송하냐.”
“지도 아버지가 얼마나 아끼는 땅인지 다 알아요.”
“땅은 네가 다시 마련하면 되지 않느냐?”
그 말끝에 옆에 있던 남양 댁이 땅을 처분할 때처럼 속을 질렀다.
“여보. 당신이 내말 안 듣고 판 그 땅. 지금 평당 십 오만 원이요. 두 배가 넘게 올랐단 말이요. 애가 아무리 잘 벌어도 그 땅 다시 못 사요,‘
“이런 싸가지 없는 여편네. 열 배가 오르면 뭔 상관이야. 니 죽고싶나?”
권 노인이 화를 내며 벌떡 내며 손찌검이라도 하려는 듯 일어나자 딸들이 뜯어말리고 처가 밖으로 도망을 치는 등 다시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다.
“아버지. 진정하세요. 어머니도 속 상하시겠지요.”
“니들이 뭘 알아 이놈들아. 그래 왜 가게는 털어먹었냐.”
“처음에는 곧잘 되었는데, 옆에 대형 마트가 들어서고 부터 가게세도 안나오니 어쩌겠어요.”
“그동안 넌 뭐를 했냐?”
“..........”
“장사가 안되면 원인 파악을 하고 발로 뛰고 대책을 세워야지. 아무리 농사꾼이라고 해도 그렇게 앉아서 당하냐 ?”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내가 화가 난 이유나 아니? 그깟 사업하다 망가지는 건 누구나 겪는 거야. 얼른 다른 장사 시작혀.”
“아버지. 장사가 적성이 아닌데 어떻게 해요.”
“참, 잘났다. 이놈아.”
“그러게 제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겠다고 했을 때 보내 주셨어야 지요.”
‘뭐라고? 이제 와서 네 애비 원망을 해? 어이구 내 팔자야.“
권 노인은 자식놈의 입에서 학교 이야기만 나오면 꼼작을 하지 못했다. 그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기가 막힐 뿐이었다. 준태의 고등학교 성적은 비록 농촌 학교지만 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준태 보다도 성적이 좋지 않았던 다른 친구들은, 자식을 나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부모들의 성화로 다 도시의 대학으로 진학했다.
준태만 아버지의 고집스러움 때문에 지역에 있는 전문대를 다녔던 것이다. 권노인은 어차피 농사가 가문의 업이니 하나뿐인 아들에게 대를 물려주고 싶었다. 아니 특별히 출세 못할 바에야 농촌을 지키게 하고 싶었던 것이 그의 진짜 속내였다.
권 노인은 노름질, 연애질로 집안을 말아먹는 일부 청년들과 달리 한눈을 팔지 않고 농사일에만 매달리는 자식놈을 대견스럽게 여기는데 만족해야 했지만,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계속 총각으로 늙어가니 꼴 보기도 그렇고 점점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준태가 장사에 실패하고 돌아온 이후 권 노인은 다시 자식 장가보내기에 거의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여식들을 들볶아대고 동기간이며 주변에 말을 넣어도 어찌된 일인지 혼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예 시골로 시집을 오겠다는 처녀를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다.
때 마침 군청에서 농촌 노총각과 도시처녀 맺어주기 행사를 벌이기에 권 노인은 일 번으로 신청을 해놓고 혹시나 해서 뒤로다 군수며 행사 담당자들을 은밀히 만나, 우리 아들 좀 먼저 선처 좀 해주십 사 ...하고 적지 않은 공도 들였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맞선을 보았다는 스물 아홉의 서울 처자가 몇 번인가 집안을 들락거렸다.
의류회사에서 디자인을 한다는 처자였는데 도시 여자답게 미끈하니 깔끔하게 생겼고 싹싹하기까지 하였다. 당사자인 준태의 입이 귀에까지 걸린 것은 물론 권 노인은 더 뛸 듯이 기뻤다. 그는 처를 시켜 며느리 될 애의 비위를 맞추라고 소도 한 마리 처분하여 싫다고 거절하는 것을 백화점에 데려가 옷도 몇 벌 사주었다. 뿐만 아니라 연탄 보일러도 기름 보일러로 바꾸고 주방도 깨끗하고 편리한 현대식으로 개조했다.
그러나 한 달도 되지 않아 둘의 인연은 끊기고 말았다. 한번도 입지 않았다고 보내온 옷을 받아들고 망연자실해 하는 아들의 모습을 본 권 노인은 어처구니도 없고 화가 나서 식구들이 팔을 잡고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그 즉시 태워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서울처녀는 구청에서 근무하는 지인(知人)의 당부를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준태는 홀딱 반한 여자로부터 실연을 당한 후부터는 일도 잘하지 않고 걸핏하면 장터에 나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권 노인은 생각다 못해 다시 남은 한우 다섯 마리 모두를 처분하여 때마침 불기 시작한 중국교포 처녀와 국제 결혼을 시켰다. 외국인이라 해도 어차피 같은 민족이니 자손을 보아도 한 뿌리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생각 잘했다 싶도록 며느리는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며 집안일 잘 거들고 준태 에게도 잘했다. 썩 미인은 아니었지만 인물도 모나지 않게 둥글둥글 하니 흠 잡을 데가 없었다. 권 노인은 자식놈보다도 더 며느리를 아꼈다. 시장에 나가는 길이면 처가 평생 노래하다시피 하는 물오징어는 제쳐놓아도 며느리가 좋아하는 고등어는 꼭 사다가 매번 밥상에 챙겨주었다. 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까지 소문난 구두쇠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비싼 메이커 옷을 사다가 척척 안겨주었다. 평소 시어터진 무김치 같은 취급을 받으며 사는 남양 댁의 눈이 가자미처럼 돌아갈 지경이었다.
“애야, 이제 손자만 쑥쑥 낳아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네가 원하는 것 뭐든 해주마, 네 친정 식구들도 모두 불러서 같이 살 생각이다.”
밥상 앞에만 앉으면 권 노인은 몇 년간이나 애 소식이 없는 며느리에게 치매 걸린 사람처럼 이 말을 골백번을 더 되풀이하곤 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다 남의 일 인줄만 알았는데, 며느리 역시 위장 결혼을 한 듯 삼 년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가더니 행방 불명이 되고 말았다.
처음에 권 노인은 아들내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혹 일을 심하게 시킨 집안에 문제가 있는지 전전긍긍했는데, 처의 말을 듣고는 그만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며늘아기의 방을 정리하다가 서랍장 밑에 숨겨둔 피임약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준태라고 제정신일 리가 없었다. 처가 가출한 이후로 자그마치 이년동안을 정이 흠뻑 들은 그녀를 찾아서 전국 방방곡곡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에고 이놈아 나가 뒤져라.”
가끔 씩 돈이 떨어지면 집으로 들어오는 자식놈이 하도 답답해서 욕에 욕을 해댔지만 김 노인은 비쩍 마른 아들놈의 얼굴을 보니 측은하기 이를 데 없어 언젠가는 마음을 잡겠거니 돈을 대주곤 했었다.
필리핀 며느리라도 얻자는 말이 나온 것은 중국처녀가 가출한지 오 년이 지나서였다. 권 노인은 어떻게 하든 다시 아들 장가를 드리려고 별의 별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이번에는 재혼이라서 더 성사가 되지를 않았다.
한참 인터넷 채팅이 사회문제가 되던 초기에 권 노인은 혹시나 해서 할부로 컴퓨터를 사서 아들 방에 설치해주고는 차마 속내는 비추지 못하고 “준태야, 요즘은 농사도 인터넷 시대 라더라 구나. 너도 배워야지.” 하며 은근히 컴퓨터로 여자 사귀기를 바랬다. 하지만 마흔이 다 되가는 자식놈은 애들처럼 밤낮으로 오락에 빠져 농사일을 소홀히 함으로 오히려 그의 속을 질러댔다.
이번에는 카드 빛이 사회문제가 되어 빛 이천만원만 갚아주면 시집이라도 가겠다는 여자들이 허다하다는 티브이 뉴스를 보고 발 넓은 둘째 딸애에게, “준태 저러다 미치겠다. 니들 이대로 동생하나 있는 거 내버려 둘 거냐? 어디 빛이 있더라도 참한 처자 있으면 하나 데려 오거라.” 했다가 “아버지 이젠 아버지 마저 미치신 거 아니에요? " 하는 핀잔만 들었다. 권 노인은 그렇게 속을 몰라주는 딸들이 서운하기도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딸 셋은 출가하여 모두 아들만 쑥쑥 낳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명절 때 집에 와도 본척만척 하기에 이르렀다.
“다 내 업보야. 조상의 업보인지도 모르고...”
딸자식들 마저 미워질 때마다 권 노인은 조상 대대로 손 귀한 가문에 자식을 보느라 모질게 여자들을 괴롭힌 결과 벌을 받은 것이 라고 한숨을 쉬곤 했다.
벌써 삼대 째 독자로 대를 이어왔다. 먼 할아버지 대는 고사하고서라도 권 노인의 부친은 그를 얻기 위해 후처까지 들였다. 옛날이니까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우선 권씨 문중은 조상 대대로 사방에 땅이 있는 지방의 세도가였다. 그러나 자손이 번창하지 못하니 차츰 가세가 기울어 갔다. 그래도 땅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만 이제 권 노인은 가문을 지탱해주었고 남들 부러워하며 스스로도 그렇게 자랑스러웠던 터, 그 땅마저 보기가 싫어졌다.
“당신 나를 아예 죽이려 드오?”
권 노인의 처는 필리핀 며느리는 죽어도 못 보겠다는 남편에게 대거리를 해댔다.
“아니 이 여편네가 환장을 했나? 어디서 큰 소리야.”
그러나 남양 댁은 남편의 큰 소리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알기에 더 목소리를 높였다.
“에구. 이 양반아. 아직도 옛날인줄 알아? 나가봐. 이 동네에 필리핀 며느리 본 집안이 벌써 다섯 군데야.” 우리 준태 만큼 그 애들이 못나서 그런 줄 알우?“
“내 살아 생전에 필리핀 소리는 꺼내지도 마.”
“어찌하시려고?”
“...........”
“이봐요, 권 재남씨. 그만 했으면 됐오. 나 하나 이리 병신 만들었으면 됐지. 또 무슨 일 벌이려고 그래.”
처의 뼈있는 말에 권 노인은 그만 기가 꺾이고 말았다. 처가 줄줄이 딸만 셋을 낳고 삼 년 간 애를 갖지 못하자 부친의 성화에 못 이겨 친정에 보내고 다른 여자를 얻으려고 했던 약점이 그에게 있어서였다. 결국 석 달만에 아들을 임신한 사실을 알고 싹싹 빌고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때 남양 댁은 친정에서 눈칫밥을 얻어먹지 않으려고 수원 변두리에 있는 제약 공장으로 허드렛일을 하러 다니다가 허리를 다쳤고, 그 이후로 두 번이나 수술을 받은 끝에 아직까지도 후유증으로 허리를 잘 쓰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어디 과부라도 하나 돈으로 업어 올 테니 더 기다려 보자구.”
“아니, 허리 아픈 년이 두 부자 밥지어 내는 일도 힘든데 농사는 누가 짓소. 농사는 남자만 짓는 줄 아요? 그리고 준태 좀 보구려. 저게 어디 사람 꼴이요? 만일 어디서 과부하나 얻어온다 칩시다. 여기서 농사지을 줄 아쇼? 돈이나 달랑 들고 또 내뺄 거요. 그러면 이젠 자식놈 죽어나가요. 나 원 참,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 눈이나 똑 바로 뜨고 내다보쇼.”
권 노인은 자기 때문에 허리병신이 된 처의 말에 더 반박을 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적이 생각하니 그 말이 하나도 틀리지가 않았다. 우선 농사도 농사려니와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여자가 남자 일은 해도 남자가 여자 일은 하지 못 하는 게 농촌의 가사 실정이고 보니, 그야말로 집안은 피난살이처럼 항상 난장판이었다. 권 노인도 별의 별 짓을 다 하다가 마침내 포기를 하고 일년 농사지은 돈을 털어 다시 중매업자를 통하여 필리핀 여자인 리자를 며느리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리자는 인종이 다른 필리핀 여자라는 것만을 빼고 보면 날마다 업어주고 싶을 만큼 시부모 와 남편의 공경은 물론 농사일에도 부지런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음식이 맞지 않는 등 풍습이 틀려 처음에 시댁과 다소 마찰이 있었을 뿐이었다. 권 노인의 가족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저녁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리자를 보고 저게 사람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권 노인은 그런 며느리에게 애정이 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이듬해 손녀에 이어 이년만에 바로 손자를 낳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큰일이 난 듯 싶었다. 아무리 권씨 문중의 피가 섞였다고 해도 혼혈아가 대를 이어갈 생각을 하니 다시 하늘이 노래지고 의욕이 없어지는가 하면 어떤 때는 살기도 싫어졌다. 죽어서 무얼 알겠느냐고 하지만 저 손자가 조상이며 자기 제사를 지낸다고 생각을 해보니 이젠 죽는 것도 싫어졌다. 마침내 지난 설, 가족들이 다 모여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중대한 발표를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하거라.”
처음에는 그저 노인네가 늙어 망령 끼가 있어서 그런가보다 했던 자식들은 단호하게 말을 끊는 아버지를 보고는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질 뿐 모두가 뭐라 만류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니그들 못미더워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유서로 남길 것이니 그리 알아.”
‘아니 아버지 대체 또 왜 그러세요?“
그래도 제일 넉살이 좋고 아버지 비위를 잘 맞추는 큰딸이 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권 노인은 수저까지 던지듯 상에 내려놓으며 화를 벌컥 냈다.
“니들은 다 불효자식들이야.”
그런 권 노인의 시선은 상에 쭉 둘러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외손자들 틈에 앉아 있는 친손자가 혼혈아니 그는 화가 치밀다 못해 그저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권 노인은 모처럼 고향에 내려온 여식들 내외를 편하게 머물다가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못내 불편한 심사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아버지, 속상하셔도 진지는 드셔요.”
큰딸이 다시 수저를 챙겨주었으나 권 노인은 그대로 건너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마음이나 가라앉히려고 티브이를 켜니 하필이면 외국인 며느리들의 설 맞이 노래자랑이 방송되고 있었다. 중국에 일본, 필리핀은 물론이고 베트남 몽골, 미국, 프랑스, 소련 며느리들까지 모두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인종 전시장처럼 보였다.
“저런 때려죽일 놈들.“
순간 화가 치민 권 노인의 입에서는 버럭 쌍소리가 튀어 나왔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식구들이 불안하여 모두 숟가락을 놓고 있는데 다시 권 노인이 역정을 내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정치하는 이놈들. 힘없는 농사꾼들이 밥인 게야. 이 좁은 땅덩어리에 이 잡종 저 잡종 다 심어놓고. 참 후손 농사 잘 진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놈들....”
그리고는 이내 방문을 활짝 열어젖뜨리고 붉그락, 푸르락 한 얼굴로 나와서는, 신발도 신는 둥, 마는 둥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가족들은 열려있는 방문으로 티브이의 프로그램을 보고서야 비로소 역정을 내는 이유를 알고는 모두가 우울하게 점심을 먹었다.
“너희들 어쩌면 좋겠니? 저러다 아버지 정말 곧 돌아가시겠다.”
상을 물리고 난 뒤 큰딸을 위시하여 사 남매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했으나 뾰족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집을 나온 권 노인은 평소 친하게 지내는 박 노인을 불러내어 택시에 태우고 시내에 있는 호프집으로 달려갔다.
“어머 아빠. 오늘 같은 날 집에서 보내시지 어쩐 일로 여기를 나오셨어요?”
늘씬하니 포동포동한 정 마담은 마치 전쟁터에서 죽었다던 제 남편이 다친 데 하나 없이 말짱하게 살아서 돌아온 듯 권 노인을 반가이 맞았다. 그리고는 두 노인이 자리에 앉자마자 권 노인의 곁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새콤한 살 냄새를 물씬하게 풍겼다.
“오늘 같은 날 내가 널 챙겨주지 않으면 누가 챙겨주겠냐?”
권 노인은 마트에 들러서 사온 선물용 화장품세트를 건네면서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박 노인은 한두 번 보아온 것은 아니지만, 찰떡 같이 붙어있는 두 사람을 영 못 마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박 노인의 그런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아이들처럼 남세스럽게 희희덕대고 있었다
“그래도 아빠밖에 없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그랬냐? 나한테도 우리 딸내미 밖에 없구나. 아무래도 고향에도 가지 못하고 장사하고 있을 것 같아 친구하고 온 거다.”
그제야 정 마담은 박 노인에게 눈길을 건네며“ 여전히 건강하시지요?” 하고 묻는데 그 또한 박 노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권 노인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눈치 빠른 마담이 그를 모를 리 없다.
“아빠도 육십대처럼 보여요. 어쩌면 두분 그리도 정정하세요? "
그 한마디에 금새 마음이 풀리며 입이 귀에 걸리는 박 노인이었다.
"술은 뭐로 하시겠어요?”
“알아서 주게나.”
평소 장터에서 만날 때는 소주한잔 사주기도 꺼려하는 친구가 언제 저리 배포가 커졌는가 싶어 박 노인은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권 노인은 한술 더 떴다.
“오늘도 우리 친구들하고 마실 거죠?”
“그럼, 술과 여자는 같이 있어야 하는 거지.”
“역시 우리 아빠 멋있어. 조금만 기다려요. 친구들 오라고 할게요”
전화를 걸으러 자리에서 일어서는 마담의 가슴 푹 패인 티 너머로 터질 듯이 출렁거리는 젖무덤이 눈앞으로 덤벼드는 듯 해서 박 노인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입안에서는 침이 고였다.
사실 그녀를 먼저 안 것은 박 노인이었다. 아무리 늙었어도 춘몽은 꾸는 법, 애처 박 노인은 마담을 마음에 두고 혼자 오기 쑥스러워 권 노인과 함께 왕래를 시작한 것인데, 그놈의 돈이 원수인지라 술값 아끼지 않고 펑펑 쓰며 선물공세를 하는 친구에게 그만 마담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전화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마담 나이쯤 되어 보이는 여자들 둘이 양주병을 들고 두 노인들 앞에 나타났다. 그녀들은 처음 본 여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척하니 노인들 옆에 몸을 바짝 기대고 앉아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술이 취하자 박 노인은 해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농사이야기를 꺼냈다. AFT인가 뭔가 하는 것 때문에 농사가 힘들어질 것이라느니, 그래서 막내아들이 반대 집회 때마다 농성 장을 따라다닌다느니... 그런데 권 노인은 그가 심각하게 하는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여자들과 노닥거리기만 했다.
“이 사람아. 땅이 많다고 자네도 비켜가지 못하네.”
보다못한 박 노인이 볼멘 소리를 내자 그제야,
“이 친구야. 뭘 그리 걱정을 하나, 자네 아들같이 똑똑한 사람들이 정부청사 앞에 가서 드러누우면 어련히 잘 먹여 살릴까.” 하고는 다시 술만 마셨다.
“이 친구가 정말 세상 돌아가는 것하고 담쌓고 살려나.”
“이봐. 아직도 내말 모르겠나? 우리 민족이 어떤 민족인데 그깟 농산물 몇 개 개방한다고 쓰러지겠어. 문제는 민족이 없어져서 문제지.. 이놈의 나라... 농사꾼들이 데모하면 돈 몇 푼 쥐어주고 입 막고, 장가 못 든다고 아우성치니 못사는 나라 여자들 사들이게 해서 안기고... 에이 이 친구가 정말..”
갑자기 얼굴이 벌게지는 권 노인 앞에 박 노인은 그만 다음 말을 끊고 말았다. 나이 팔순이 가까워지면 세상을 너그럽게 보는 후덕함도 생기련만 권 노인은 갈수록 심술만 더럭더럭 붙는지 나라 돌아가는 이야기만 나오면 나이답지 않게 쌍소리를 해대는데, 듣기가 민망하기 그지없을 뿐더러 정작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의 침 튀기는 열변이 하도 논리 정연하여 말대꾸 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반박하지도 못하고 듣고만 있는 사람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젠 ‘동해물과 백두산’이도 바꿔야 되, 일본 해와 장백산으로. 뿐만이 아냐, 대한 사람 대한으로? 아니지 어디 대한 사람 몇 명이나 남겠어.”
“어이, 거... 친구도 참....이젠 그만하게.”
그러나 한번 시작한 권 노인의 열변은 그칠 줄 몰랐다.
“봐, 배운 지식인이라는 놈들도 그래. 평화의 땜인가 뭔가 건설할 때는 서울이 물바다에 잠긴다고 엉터리 자료 들고 나와서 정권 앞잡이 노릇하며 애들 코 묻은 돈까지 털어 정부에 받치게 하더니, 뭐? 이 인종 저 인종 피가 섞인 다중 민족이 더 발전을 한다고?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에라, 이 썩을 놈들아.”
“에구. 내가 말 잘못 꺼냈네. 잘못했어 이제 그만하게.”
그쯤 되니, 입에 거품이 나올 듯 점점 격해지는 권 노인을 진정시키느라고 박 노인은 빌다시피 해야했다.
“자네, 아직도 넓적다리에 수류탄 파편 박고 살지? 그래, 난리 통에 육 사단에 속해서 압록강까지 진격하면서 제일 많이 들어온 소리가 뭔가? 국가와 민족과 가족들을 위해서 목숨 바치자는 말이 아니겠어? 그 국가를 이루는 민족이 누구냐 이거야. 남과 북도 통일을 못했는데 잡종 통일이라니, 아, 아닐세. 자넨 해당이 없지. 내가 먼저 솔선수범 했으니....”
권 노인은 마치 친구에게조차 면목이 없다는 듯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그 독한 양주잔을 그대로 목구멍에 부어넣었다. 박 노인도 공연히 이야기를 꺼냈는가 싶어 같이 양주를 거듭 받아 마셨다.
그 날 여자들 시간 비를 포함하여 술값 사십여 만원을 허허대며 치르고 나온 권 노인의 속은 쓰리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다.
권 노인이 박 노인의 부고를 통보 받은 것은 그로부터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사월 초순이었다. 노부인의 말에 의하면, 저녁 잘 드시고 편히 잠드시는 것을 보았는데 아침에 깨워보니 이미 황천길로 갔다는 것이다. 천수를 다하고 편히 세상 떴으니 호상(好喪) 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물론 자손들까지 별로 슬퍼하지 않는 것을 보니, 권 노인도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는 심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경로당에서 내리 죽치며 화투판이나 장기판으로 백 원, 이백 원짜리 내기나 하는 여느 또래들과 달리 보통학교라도 다니며 배운 게 있다고 같이 어울리며 이런저런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던 죽마고우가 죽었으니, 그 허전함은 말로 표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포크레인으로 파헤친, 꽁꽁 언 땅속에 허무하게 묻혀져 가는 친구의 마지막을 보고 산을 내려오는 권 노인의 눈은 진한 눈물로 짓무르고 있었다.
“다 부질없는 인생살이야. 그래도 듬직한 아들놈들 술잔 받고 손자 놈들에게 둘러 쌓여 세상 떠나니 부럽네 이 사람아. 자넨 할 일을 다한 게야.”
그렇게 친구를 떠나보내고 난 뒤, 권 노인은 그나마 가끔 다니던 경로당에도 통 나가지를 않고 겨우내 방구석에서 잠만 잤다.
봄이 되면서부터는 차츰 얼굴이 노래지면서 기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긴 나이가 팔순 되가는 노인네가 농사일로 평생을 험하게 몸뚱이를 굴렸으니 여기저기 성한 곳이 있겠는가 만은 그나마 문밖출입을 하지 않자 공연히 아픈 곳만 늘어갔다.
보다못한 처가 아무리 나가 다니라고 들들 볶아대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누워있기만 했다. 친구들이 걱정이 되어 찾아와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가 자손문제도 문제려니와 친구가 죽은 데 대해 충격을 받았는가보다고 했다.
그렇기도 하려니와 사실 권 노인이 자리에 눕게 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는 박 노인이 세상을 뜬 뒤로 걱정이 되어 남 모르게 의료원을 찾았던 것이다. 종합 검진을 마친 의사가 고혈압과 당뇨기가 있으니 절대 몸을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된다고 진단을 내리며 몸 사리지 않고 무리하면 언제 변을 당할지 모른다고 단단히 겁을 주었다. 권 노인은 그 말을 듣고 나니 더 사는 게 허무하게 느껴져 문밖 출입도 싫어지게 된 것이다.
하는 수없이 그의 늙은 처가 허리를 움켜쥔 채 아들 내외와 함께 하우스 수리며 모판 준비를 모두 대신 해야만 했다. 방에서 끙끙대며 앓는 소리를 자주 하는 아버지를 대하는 준태는 차츰 걱정이 앞서기는 했지만, 병원도 마다하시며 역정만 내니 달리 어쩌는 방법도 없었다.
그러던 권 노인이 어느 날 벌떡 일어나더니 느닷없이 아들에게 차를 몰고 시내를 나가자고 했다. 평소와 달리 말끔하게 차려입고 예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재촉하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더럭 겁이 나는 준태였다.
“무엇 하러 가시게요.”
“가보면 안다.”
권 노인은 시장까지 나가는 동안 아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장에 도착한 그는 미리 부탁을 해놓은 듯 종묘 상에 들러 은행이며 대추 등. 몇 가지 묘목다발을 받아 들더니 다시 돌아가자고 했다.
“아니, 느닷없이 묘목은 무엇하시게요.”
묘목을 받아 차에 실으며 준태는 아버지에게 물었지만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권 노인은 집이 가까운 마을에 이르자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범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듣거라.”
“예 아버지.”
“지난 설에 네 큰누나한테 이야기 들었다. 아무리 네가 싫고 어려워도 작은 처를 숨겨서라도 아들은 보아야 한다. 만일에 내가 죽을 때까지 그리 되지 않는다면 나를 화장시키고 농사를 모두 처분한 뒤 도시로 떠나거라.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제껏 아버지는 농사를 버리지 않겠다며 평생 시골에서 고생만 하셨잖아요.”
“농사는 자기 나라 땅에 자기 나라 사람이 짓는 것이다. 조선 땅에는 조선 땅에 맞는 곡식이 있는 법이다. 나무 한 그루도 조선 나무가 있는 것이고.... 사람인들 아니 그러겠느냐? 왜놈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조선의 기를 끊으려 산마다 쇠말뚝을 박고 창씨 개명을 했던 것도 나라의 근간을 없애려고 했던 거다. 못 배운 이 애비의 말이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대를 이어 가족과 터를 지키는 것이 내 할 일이라고 평생을 한길만 걸었다.
그리고 권 노인은 한참을 쉬었다가 중얼거리듯 힘없이 말끝을 맺었다.
“나도 이젠 지쳤다.”
3.
점심상을 물리고 난 뒤, 권 노인은 다시 밖으로 나와 선산으로 향했다. 대낮부터 술에 골아 떨어져 자고있는 아들의 코고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도 했지만 못내 보기에 안쓰러워서였다.
자식놈이 무엇인지. 막상 미워 야단을 치고 나면 마음은 아프니 이 또한 핏줄의 인연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아서가 아니겠는가 싶었다. 물론 아침결에 손녀의 영재교육 문제로 심사가 뒤틀려 한바탕 하긴 했지만, 사실 어제부터 다른 일로 역정이 나있던 뒤끝의 화풀이를 겸한 것이라 적이 자식놈에게 미안스럽기도 한 구석이 있었다.
어제 권 노인은 읍내로 나가 정 마담을 만났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반갑게 맞는 마담을 앞에 놓고 권 노인은 한동안 술만 들이켰다.
“아니 아빠. 무슨 걱정 있으세요?”
“아, 아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말씀하세요. 아빠. 혹시 제가 빌린 돈 때문에 그러시는 거 아니 예요?”
“아, 아니다.”
동네 사람들 소문처럼 권 노인은 지난해부터 그동안 몇 차례에 걸쳐 그녀에게 이천 삼백 만원이나 되는 큰돈을 무이자로 빌려주었다. 한번은 주인이 전세금을 올려주지 않으면 나가라고 한다며 찔끔거려서 천만 원을 건네줬고 그 이후로 모친이 쓰러져서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등등 다급한 소리를 해서 이리저리 돈을 빌려주게 되었다.
“그럼 왜 그래요?”
“사실은...”
권 노인은 아무리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도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지 않는 것을 다시 술을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애야.”
“왜요? 아빠. 얼른 말씀해 보세요.”
“오해말고 들어라. 우리 아들 준태 있지?”
“예, 몇 번 봐서 알아요.”
“그 애 어떠냐?”
“무슨 말씀이신 지.”
무언가 심상치 않은 권 노인의 기색을 알아차린 듯, 정 마담은 정색을 하고 바짝 다가앉았다. 그러니 오히려 더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권 노인이었다.
“그래, 이왕 꺼낸 말이니 단 도입 적으로 말을 하겠다. 너도 알다시피 그 애가 삼대 독자인데 아들이 없다.”
“필리핀 며느리 얻어서 손자 보셨잖아요.”
“에구..... 애야.”
권 노인은 테이블위로 정 마담의 손을 꼭 잡고 애원하듯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노망들었다고 하지말고 내 말 잘 생각해보거라. 어차피 네가 혼자 산다니 우리 아들놈하고 좀 어떻게 잘 해보면 안되겠니? 그저 손...”
손자 하나만 낳아주면... 하는 말을 차마 권 노인은 꺼낼 수가 없었다. 그저 “네가 그리만 해준다면 고맙고 보답은 꼭 하마...” 로 말끝을 맺었지만 이것이 사람이 할 소린가 하는 자괴감으로 권 노인은 다시 소주 한잔을 단숨에 마셔야 했다.
정 마담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그 짧은 시간이 권 노인에게 있어서는 몇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애 간장이 다 타는데,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툭 말을 던졌다.
“아빠. 에이.. 아빠한테는 미안한데. 저 혼자 몸 아니 예요.”
“그게 뭔 소리냐?”
“술장사라는 게 원래 그래요. 남편 있다면 안되니까. 저도 그냥 혼자라고 했어요. 저, 애들도 둘이나 있고 애 아빠도 의정부에서 살아요. 신랑이 회사 다니다가 잘려서 어쩔 수없이 이 장사하는 거예요.”
그래도 그동안의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무언가 희답(喜答)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기대가 무너지자 암담할뿐더러, 제가 알아서할 일을 아비가 나서게끔 하는 자식놈이 원망스러운가하면, 빌려준 돈 생각으로 권 노인의 속은 쓰리기만 한데 마담의 뻔뻔스런 다음 말이 더 그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
“미안해요. 아빠. 빌린 돈은 버는 대로 차츰 갚을게요.”
추석을 며칠 앞둔 절기이다보니 팔뚝이 시릴 만큼 저녁 바람이 써늘했다. 낮은 햇살을 받는 억새꽃은 은빛을 더하고 무심히 보아온 패랭이며, 이름도 모를 들풀의 씨앗들이 툭툭 권 노인의 발길에 채인다. 그 풀밭사이를 때까치를 등에 업은 방아깨비가 기척에 놀라서 무거운 날개 짖을 하며 힘겹게 도망 다닌다. ‘하찮은 잡풀부터 미물에 이르기까지 씨를 퍼트리기 위해서 저리도 제 소명을 다하는 것을...’
문득 재잘거리는 소리에 눈을 들어보니 밤을 양쪽 주머니에 밤을 가득 채워 넣은 열 살 내외의 사내애들이 무리 지어 산길을 내려온다. 아이들의 입 언저리는 밤을 까먹은 듯 모두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다. 문득 그의 눈이 시려온다. 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개구쟁이 노릇을 해서 귀찮아했던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권 노인은 이제 아이들만 보면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모두가 내 손들처럼 귀엽게 보이기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제법 도시화된 이 지역만 해도 벌써 국제 결혼을 한 가정이 열 집에 서너 집은 된다. 젊은이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려 하고 여자들은 아이를 낳으려 하지 않으니 차츰 일도 외국 남자, 아이 낳는 일도 외국여자의 몫이 될 것이고, 결국은 혼혈에 혼혈이 섞여 이대쯤 후손이 내려가면 저런 아이들을 구경하기도 힘들어지겠지...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세이건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묘역에 오르니 숨이 가쁘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이제 나도 기력이 다 쇠했는가 보다.....’ 아닌게 아니라 요즈음 들어 권 노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어쩌면 박 노인처럼 내일 아침에 깨어나지 못하고 황천길로 떠날지도 모른다며 마음을 다잡고 잠을 청한다. 가끔은 이 해괴한 세상이 싫어 욱하는 어느 순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끔찍한 생각도 가져보는 그였다.
마음이 심란해질 때마다 찾아오는 선산(先山)은 권 노인이 봄부터 이제껏 줄을 맞춰 반듯하게 심어놓은 과일 나무 묘목들이 부쩍 자라서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성곽처럼 보였다. 권 노인의 부모 산소는 맨 아래 위치해 있다. 그 아래 자신이 묻힐 것이고 또 아래 아들놈이 묻힐 것이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이제 더 이상 선산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 같았다.
까마득한 조상 때부터 부모님, 그리고 자신과 아들까지 나무의 뿌리처럼 하나로 이어주는 그 무엇. 죽어도 죽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알지 못할 영생과 같은 의미... 왜 조상들이 대를 잇기를 바랬고 농촌에 살기를 고집하였는지를 더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이제 그 소명을 끊게 되는 자신이 스스로 원망스럽고 조상들 앞에 죄스러워져 공연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권 노인은 모친의 산소를 등에 받치고 길게 누웠다.
재남아, 재남아... 문득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권 노인의 모친은 자식을 낳지 못하여 쫒겨 난 본처를 대신하여 논 열세 마지기를 가난한 친정에 마련해주고 종가 댁 소실로 들어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권 노인 하나만을 달랑 나아 놓고는 시름시름 병을 앓다가 권 노인이 다섯 살 되던 어느 해 초여름, 아카시아 향기가 그윽한 밤에 고사리 같은 아이의 손을 잡고 몇 차례 기침을 하더니 이내 조용히 눈을 감고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삼십이 넘은 나이에 얻은 귀한 아들이라고 세상 뜨시는 날까지 낫질한번 시키지 않으며 품에 안고 키운 아버지...
“어흐흑..”
갑자기 권 노인의 입에서는 비명 같은 울부짓음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남기기 위해서 이제껏 살아온 것인지 깊은 절망감이 저 속 깊은 곳으로부터 받쳐 올랐다. 그저 부모님과 조상들에게 효자 노릇하고 가정 단단히 지키며 자손들 키우고 논과 밭에 나가 씨를 뿌리고 거두는 농부로서 묵묵하게 살아온 것 밖에는, 그리고 그 외에 더 바란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왜 말년에 이런 업보를 받아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죄인인 게야 죽어서도 죄인인 거야...’
가을걷이며 명절 준비를 위해 막내 딸네서 얼마 머물지 못하고 오후에 올라온 남양 댁은 어수선한 집안 분위기에 어림짐작한바 있어 아들내외를 앉혀놓고 자초지종을 들고나니 기가 막혔다.
그렇지 않아도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몇몇 마을 사람들에게서 정 마담의 소문을 확인하고 화가 머리까지 올라있는 상태였다. ‘이놈의 영감탱이 들어오기만 해봐라. 오늘은 아주 끝장을 낼 테니까.’ 그러나 날이 어두워지도록 영감이 돌아오지 않자, 동네 사람들 창피하게 집안에서 다투는 것보다는 아예 밖에서 결딴을 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영감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마침 들에서 돌아오는 최씨가 형님을 보았다며 간 곳을 일러주었다.
남양 댁은 몸보다 앞서는 마음을 주제하지 못하고 부리나케 선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밭둑을 지날 때부터 다시 허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산길로 접어들 때쯤에는 눈물이 찔끔 날만큼 지끈거려 점점 걸음이 느려진다. 그럴수록 영감에 대해 화가 더 치밀었다.
‘평생 정이란 눈곱만치도 없는 작자가 곳간 열쇠도 혼자 틀어쥐고 마누라 알기를 애 낳는 씨받이쯤으로 취급하며 애들이 다 커도 남세스럽게 이놈저놈하며 체면을 구기지를 않나, 이젠 그 나이에 돈 싸들고 다니며 젊은 과부까지 넘보지를 않나, 잘 사는 아들놈에게 첩을 얻으라고 하지를 않나. 이 미친 늙은이, 차라리 내 혼자 살제...’
남양 댁은 생각할수록 약이 올라 턱까지 차 오르는 숨을 참으며 묘역이 보이는 데까지 씩씩거리며 올라갔지만 그 미운 영감은 보이지가 않는다. 이상하다 싶어 몇 걸음 더 오르자 맨 끝 시부모님 산소 앞에 뭔가 허연 게 보였다. 분명 영감이었다. 그는 옆으로 쓰러진 채 손에는 무슨 농약 병 같은걸 쥐고 있었다. 순간 심장이 덜컹거리며 숨이 멈출 듯 겁이 났다. 근래 들어 부쩍 이놈의 세상 살면 무엇하냐고 한탄을 하는 소리를 종종 들었던 터였다.
“에고 준태 아버지. 준태 아버지. 돌아가시면 안 돼요.” 남양 댁은 허리 아픈 것도 잊고 영감을 부르며 허겁지겁 기는 걸음으로 바삐 묘역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짧은 시간 많은 것들이 남양 댁의 머릿속을 스쳐가기 시작했다.
남양 댁은 아들을 낳고 나서야 처음으로 신랑이 직접 사준 양장 한 벌을 얻어 입었다. 그 날 시장의 한 중국집에 데려가 짜장면을 사주며 몹시 미안해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권 노인은 부모의 허락 없이는 절대 뒤로라도 눈 속이는 일을 하지 않는 지극한 효자였다. 비록 처가 몸살이 나도 부엌일은 나서지 않는 성격이지만 농사일이 뜸한 겨울이면 해마다 쌀 몇 가마니를 내어 두어 달씩 친정에 가서 쉬고 오라고 등을 떠미는 속 깊은 남편이었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이후에는 땅만 있으면 된다며 처가는 물론 어머니 일가인 이종 사촌들의 뒤도 많이 거두었다. 땅 부자로서 주위의 많은 유혹이 있었지만 평생 주색이나 도박에 빠진 일도 없고 남들과 송사를 벌이는 일도 없이 그저 소처럼 땅만 갈아왔다.
이제 다 늙어 노망이 들었기로서니 미워할 일이 무엇인가 싶어 오히려 마음이 돌려지는 남양 댁이었다. 오히려 허리 병을 얻었다고 평생 애꿎게 남편을 미워하고 바득바득 우겨서 필리핀 며느리를 들이게 한 자신이 후회스럽게 느껴졌다.
“에고, 준태 아버지.”
눈물 범벅이 된 채 산소 앞에 다다르자, 남양 댁은 영감부터 흔들어보았다. 다행이 먼 발치에서 농약 병으로 알았던 병은 소주병이었지만, 권 노인은 마치 죽은 듯이 기척을 모르고 누워있어 여전히 남양 댁은 가슴을 조렸다. 불과 보름만에 마주하는 영감의 옆얼굴이 부쩍 수척해져 있어서 마치 딴 사람을 보는 듯 했다. 한참을 흔들어대자 권 노인은 “끄응” 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가늘게 눈을 뜨고는 처를 알아본 듯, “ 이 여편네가...” 하다가는 다시 힘없이 푹 고꾸라진다.
“이놈의 늙은이가 웬 낮술이우.”
남양 댁은 영감이 역정이라도 내고 일어서라고 생전 처음으로 막말을 해도 영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팔을 잡아 반쯤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산소에 등을 기댄 권 노인은 손으로 조상들의 묘소를 가리키며 “ 할멈, 머지않아 우리도 이리로 쉬러올 거야. 근데 준태 다음부터는 어느 놈이 술 한잔 부어주러 올지 모르겠어.” 한다.
“참, 죽으면 그만이지, 별걸 다 걱정이우.”
그러나 남양 댁은 그 말을 권 노인의 귀에는 들릴 듯 말 듯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그만 내려갑시다.”
남양 댁은 끙끙거리며 일어서지 못하는 영감을 어깨로 부축하며 자리를 뜬다. 예전 같지 않게 부쩍 가볍게 어깨에 실리는 무게에 다시금 가슴이 찡해져 온다.
“할멈, 읍내에서 호프집 하는 그 여편네 남편 있다네.”
“그럼 영감 좋아서 앵기는 지 알았소?”
“니, 정말 맞아죽고 싶나?”
“늙어도 성깔은 여전하구려.”
“이런 속알지 하곤, 손자 하나 안아보려고 한 거지.”
“또 손자...”
타령... 하려다가 남양 댁은 입을 다물고 만다. 그렇게 나마 끈을 놓지 않고 있어야만 저 노인네가 몇 년이라도 더 살 것만 같아서였다. 어느새 동쪽 하늘에는 추석을 며칠 앞둔 둥근 달이 떠올랐다. 달빛을 받아 고고한 모습으로 묘역을 감싸고 있는 선산을 뒤로하고 평생 지켜온 논밭을 걸어내려 오는 내내, 권 노인의 중얼거림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준태 저놈, 세상이 뭐라던 첩이라도 얻게 할거여. 정히 안되면 대리모라도 구해야지. 오천 만원이면 된다는구먼...“
끝
창작의 배경
어느 작가인들 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글을 쓰고 싶지 않겠는가. 또한 인간의 심오한 내면적 갈등을 철학적으로 표출하고 싶지 않겠는가.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고 싶지가 않겠는가. 그러나 무명으로 남을망정 불륜은 불륜이고 모순은 모순이고 불의는 불의라는 분명한 사실을 왜곡시키면 서까지 문인의 길을 걷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의 창작 신념이다.
아무리 국제화 시대이니 혼혈이 더 우수하다느니 하며 국가에서 이국간 결혼을 홍보를 하고 외국 신부들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아도 나는 냉정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여 이 문제를 사회문제로 부각시키고 싶었다.
오죽하면 말도 통하지 않고 살빛도 틀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자고 밥상을 마주하겠는가. 한국에 한국 여자들이 부족해서라면 이해 할만도 하지만 그 배경에는
정치적인 이슈가 깔려있기에 비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내에서 결혼을 하지 못하기에 결국은 외국에서 여자를 사올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여자들을 세워놓고 고르고 하룻밤 자고 데려오는 일. 그것이 사랑일까.
돈을 주고 사오는 일, 즉 현대판 노예제도 인 것이다. 참고로 이 작품에 대한 계평을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