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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아이들
2학기의 지난 중간고사 때, 1학년 도덕 과목의 시험 감독을 하면서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가 어느 문헌에 실려 있는지를 묻는 문제를 만났다. 아이들은 아마 수업 시간에 인간 삶의 원리에 관한 한 부분을 생의 맨 처음으로 배웠을 터이고, 또 교사는 가르친 것을 한 번 더 이르집어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대학 한문학 시간에 그 구절에 대한 견해를 비판적으로 약술해 보라는 문제를 만났어야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서 만난 삶의 원리‘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새삼스럽기 그지없고, 나는 아직 그에 대한 아무런 생각도 갖고 있지 못하니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얼마나 민망한 일인가! 나는 이 시대의 수신(修身)에 대해서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여전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득하고 멀다. 나는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 보려고 한다. 아이들의 고민과 힘겨움에 관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의 것이기도 하다.
가난과 상처받은 영혼, 그리고 혼자 살아가는 삶
몇 해 전에 문학 과목의 수행평가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자서전(自敍傳)을 써 보도록 한 적이 있다. 효순이와 미선이가 미군의 전차에 깔려 죽었던 그해 가을은 일찍 추웠고, 지독한 독감 바이러스가 번졌다. 조퇴를 하거나 보건실을 가고, 교실에 남은 아이들은 마스크를 끼고 엎드린 채 하기 싫은 과제를 수행하였다. 아이들이 자기 삶을 한번쯤이라도 성찰하는 기회를 갖고, 또 교사로서 그들의 내면에 가 닿아보려는 시도는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아이들의 자서전은 간단하고, 또 지루하기 그지없다. 한참을 엎드린 채 쿨룩거리던 한 아이가 몇 자 적은 것을 나는 읽었다. “오래 살진 않았지만, 나의 자서전을 쓰려고 하니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 이하는 대충 얼버무려 두었으므로 눈물 나는 그 아이의 사연을 알 수 없었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물어 본들, 그 아이가 그 아픈 기억들을 말 해 줄 리도 없고, 말한다 한들 눈물 날 것 같은 그 사실을 확인하여 무엇을 어쩌겠는가. 인생의 경험에 비례해서 어떤 슬픔의 양이야 누적되기도 하고 더 쌓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다만, 저렇게 어린 것들에게도 상처는 있는 것이고, 그 내면의 상처들은 금 그어진 대로 남아서 오랫동안 가슴의 아픔이겠거니 생각하였다. 나는 그 아이에게 따뜻한 말 한 마디를 걸어보지 못 한 것이 지금까지 가슴의 못으로 남아 있다.
아이들의 슬픔이나 아픔은 하루아침에 돌발적으로 일어나기 보다는 쌓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 자신에 관한 것, 친구에 관한 것, 부모에 관한 것, 또 그의 가족들에 관한 것들이 겹쳐지고, 가끔 가혹하리만큼 그것들은 중첩되어 있어서 아이들의 삶 전체를 압박하여 오는 경우가 있다. 나쁜 경우의 환경을 얽어보면 대략 이러하다.
어머니는 가정을 버리고 집을 비운지 오래되었다. 아버지는 늦게 술에 취해 들어 와서 바깥에서의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려고 한다. 또 집이 가난한데다가 환경이 되지 않으니 학교 공부는 하기 싫어지고, PC방에 들락거리거나 게임에 몰입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형은 외박하기 일쑤고, 혼자서 동생까지 감당해야 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 학교에 가서는 늘 잠만 잔다. 선생님도 혼내고, 친구들은 또 나를 멀리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정둘 데가 없어서 이런저런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나쁜 것들을 배우고,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많은 시간들을 되돌려 놓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문득 생각해 보니 왜 세상은 이렇게 힘든 것일까, 모든 불행들은 나를 향해서 입 벌리고 있는 것 같다. 눈물이 나려고 한다.
거칠게 생각해 보았지만, 아이들이 진정한 ‘나’를 만나기 전에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가정환경이 아닐까 한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원인의 일차작인 것은 이 가난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겪는 가난과의 전쟁 같은 것을 자주 목격한다. 올해만 해도 매달 내는 급식비를 두고 번번이 미룬 아이가 있고, 더러 주위에는 급식을 끊겠다는 아이도 있다. 자격증 원서비, 대학 원서비, 공납금, 이런저런 납부금, 또 그의 휴대폰 사용요금이나 용돈 같은 것 때문에 매일, 매달 고민해야 하니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한번은 동료교사가 말하기를, 2교시에 등교한 학생에게 그 이유를 따져 물었더니 차비가 없어서 두 시간 이상을 걸어왔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깨워주는 사람도 없고, 등굣길을 챙겨주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스스로 해야 한다.
너무 일찍 찾아온 가난은 아이에게 굴레가 된다. 세상과의 대면에서 주눅 드는 원인이 된다. 그 가난이 견고하여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그러한 가난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세상을 구성하는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할당된 고통의 짐이다. 아버지의 부도나 실직, 비정규직 혹은 일용직으로서의 저임금, 이혼이나 죽음, 혹은 부모의 불화 같은 것들은 늘 그 주변에서 맴돈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가다듬어 보면, 아이들의 가난은 그의 것도 아니고, 또 그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못 된다. 경제적 능력은 거의가 그 부모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부모의 가난이 자식을 짓누르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그 가난 때문에 갈등하고, 그 안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부모의 고통을 지고 가는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라는 일본 영화가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였다 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고, 내용이 슬퍼서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젖게 하는 그런 영화다. 그 영화 속의 아이들은 엄마로부터 버림받고 학교에도 가지 않으면서 갇힌 채 겨울을 버티고, 이듬해의 여름까지 스스로들 살아간다. 그 긴 시간을 집주인으로부터 쫒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오직 집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은 그들에게 큰 고통이다. 큰 오빠 ‘아키라’는 동생 셋을 살뜰하게 보살피며 생존을 위한 발버둥을 한다. 가출 소녀 ‘사키’와 편의점의 아르바이트 점원만이 그를 알 뿐 아무도 그들의 비극적인 삶을 모른다. ‘아키라’가 죽은 동생 ‘유키’를 그의 손으로 묻거나, 끼니를 잇기 위해서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 김밥을 구걸하는 장면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나는 영화를 보며 내내 그들의 ‘가난과 아픔과 갇힌 채의 소통부재’에 주목하였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 갖질 않고, 또 그들은 아무에게도 도움을 말하지 못하였다. 철없고 무책임한 엄마가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과잉이어서 문제인 것들이 그들에게는 결핍 그 자체가 되어서 더욱 그러하였다.
아이들의 고립과 단절에 대해서 어떤 교육학자들은 그 원인의 일부가 그들 부모에게 있다고 말한다. 오로지 자식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던 옛날의 어른들과 달리 요즘의 어떤 어른들은 과감하게 아이들을 포기하고 자기 삶을 선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식은 그들의 장식품도 되지 못하는 경우가 아주 가끔 있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엄마는 결국 자기 멋대로 사는 경우라 할 만 하다. 네 아이의 아비가 다 다르다는 것은 그녀의 삶이 어떠한지를 짐작케 한다. 그녀가 돈을 끊은 것과 아이들이 살던 집의 수도와 전기가 끊긴 것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은 공원에서 머리를 감고 빨래를 하며 깜깜한 밤을 맞을 뿐이다.
나는 학교에서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 등장하는 엄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엄마를 둔 아이들을 가끔 만난다. 그러한 엄마를 원망하는 것은 무의미할 지도 모른다. 어찌 그것이 한 여자의 문제라 하겠는가. 자본화된 세상은 그들 영혼의 순수함을 앗아가 버리고, 오로지 그들이 자본의 논리 속에 길들여지도록 강요한다. 자본의 유혹 앞에 무참히 무너진 것을 그의 탓이라고만 말하기엔 너무 가혹하지 않겠는가. 자본 앞에 선 우리들은 모두 허약한 영혼을 가진 사회적 약자가 된다.
무기력과 소통의 부재
아버지와 살아가거나 혼자서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는 아이들. 그들에게는 엄마의 사랑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대화할 상대가 필요하고, 누군가의 지혜로운 얘기가 또 필요하다. 그러나 함께 사는 부모들도 모두 바쁘긴 마찬가지다. 맞벌이를 하니 밤늦게 오거나, 또 바빠서 아이들은 각자의 깜냥으로 살아가야 한다. 아이들은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그 부모들은 아이로부터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대화는 없고 간신히 ‘나’만 존재할 뿐이다. 소통할 여유가 없고, 서로에게는 존재 그 자체가 부담이 되고 만다. 삶의 가치(價値)는 전도된 채 버티는 것이 그들의 미덕이 된다.
지난 9월 말 쯤에 나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논산훈련소의 소대장이라고 했다. 그는 작년에 내가 담임했던 아이의 이름을 대며 아느냐고 물었다. 우리 반 아이가 입대하여 훈련소에 온 지 일주일 여 되지만 아이가 통 말을 하지 않고, 부모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고, 아무 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다 하여, 결국 학교를 물었더니 말하길래 학교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아이의 부모와 통화하고 싶다고 하여 나는 그의 아버지에게 전화로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아버지는 놀라지도 않고 결국은 그랬구나 하는 식의 말을 했다. 아이가 3학년 졸업을 하고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학교에 재미도 붙이지 못하고 종일 방에서 컴퓨터만 하다가 군엘 갔다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아이의 우울과 의기소침한 성격에 대해서 말하였다. 나는 그런 아이를 군에 왜 보냈느냐고 했더니, 군에 가면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랬노라면서 길게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아버지의 고단한 삶에 대한 얘길 조금 더 듣다, 아이를 데려 오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내 한 해의 자식(연륜 있는 선생님들은 담임 반 아이들을 이렇게 부른다. 그 속에 흉내 내지 못할 사랑이 들어있다)이었던 그 아이에게 나는 정말 따뜻한 말 한 마디를 하지 못하였다. 그냥 내성적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그가 견디었을 긴 시간 동안의 소통의 부재에 대해서 나는 얼마간의 책임을 느낀다. 며칠 전에 전화를 하였더니 아이는 병원에 있다하고, 나는 한번 가겠노라 하였으나 아이의 아버지는 공손하게 사양하였다. 내가 그들 가족의 일상에 끼어드는 것이 싫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나는 교실에서 가끔 무기력한 아이들을 만난다. 아이들의 무기력 앞에서 나는 무능한 교사가 되고 만다. 세상에 태어나서 별 칭찬을 받아보지 못한 채, 스스로에 대한 낙인을 만들면서 아이들은 무기력 그 자체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하고자 하는 것이 없는 상태는 꿈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용기도 없고, 그래서 어떤 일이든 대면하려 하지 않고 회피해 버린다. 적극적인 회피가 편안하다고 생각해 버린 탓이다. 아이들은 컴퓨터 게임 같은 것에 목숨을 건다. 사이버화한 자아가 자라는 동안 타인과의 관계는 단절되고 고립만 심화된다. 친구도 사라지고 신경질만 내면서 자신감은 더 없어지고 자기비하와 열등의식으로 무장하게 된다. 그러니 자기 성찰은 불가능하고, 세상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져간다. 사람을 향한 마음을 닫고, 들리는 말에 귀 기울이지도 않는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내가 들어가는 교실의 문제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젊은 아이들의 현상이라 여겨지고, 또 심각한 것이라 생각한다.
몇 해 전이었다. 아이들의 세계에서 꽤 인기 있는 온라인 게임 ‘리니지’가 출시되어서 아이들이 빠져들던 무렵이었다. 학년이 바뀌고 새로운 반이 편성된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한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어머니를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였으나, 아이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바깥에서 배회하며 잠시 들렀다 외박하는 것을 반복한다고 하였다. 나는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그의 친구들에게 수소문하여 아이를 찾아 나섰다. 말이라도 한 번 붙여보고, 그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였다. 경대 북문에 있는 어느 리니지 전용 PC방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낮 12시 경이었지만, PC방의 실내는 컴컴하고 내가 찾는 우리 반 아이는 몇 개의 의자 위에서 모로 누운 채 잠자고 있었다. PC방 아르바이트생이 나를 말렸다. 이유인즉, 며칠 째, 밤새 뜬눈으로 게임을 하다 조금 전에 잠들었다는 거였다. 나는 치열한 전투 끝에 지쳐 쉬고 있는 한 병사를 만나야 했다. 한참을 기다려서 그 아이를 깨웠다. 같이 앉아서 얘기라도 해 볼 생각으로, 그 근처에 있다는, 그 아이의 엄마가 운영한다는 분식점으로 데려 갔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수였다. 조금 복잡한 그 가게의 구석에서 아이와 앉아서 일이 뜸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 뒤 외출에서 돌아온 그의 아버지가 나에게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아이를 가게 뒷마당으로 데리고 가서는 큰소리로 꾸짖더니 쥐어박고, 끝내 무참하게 두들겼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어떤 말도 못하고 돌아왔다. 내가 끼어들 틈이란 없었다. 그 후, 그 아이는 등교와 결석을 반복하다 졸업을 했다. 졸업 앨범 사진도 함께 찍지 않았다. 디카로 학교 안내실 옆의 담을 배경으로 찍어 주었더니, 앨범 인물 사진에 그 아이의 얼굴은 허연 배경에 처리되어 있다. 나중에 아이들에게 들은 바로, 그 녀석이 게임에 목숨을 건 것은 무슨 무기 같은 것이 있는데, 게임을 하다 그걸 떨어뜨리는 바람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무기가 돈으로 따지면 오십만 원 정도를 한다고 했다. 그 아이는 그것을 다시 손에 넣으려고 3학년이 된 것도 잊은 채 밤잠을 자지 않고 몰두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 녀석은 5년이 더 지난 올해 가을에 수시 2학기 1차 모집에 원서를 내려고 학교를 찾아왔다. 필요한 생활기록부를 떼고 나서 돌아가겠다고 다시 인사를 하러 왔길래 나는 한 때 방황했던 그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다음에 그 아이를 또 만나면 그의 아버지가 아이와 화해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아이들에게는 대화가 필요하고, 그 속에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두려움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억압을 가져와서, 결국 사랑은 그렇게 달아나 버린다고들 한다. 그 모든 것을 어른의 잘못이라고만 하면 가혹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얘기를 해야 한다. 아버지에게, 선생에게, 또 친구에게 자기를 열고, 자기의 고민을 말하고, 또 자기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혼자 살아가겠다는 것만큼 무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혼자 살 꿈을 꾼다는 것은 21세기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불화(不和)와 소통의 부재
아이들은 어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나’만 힘들며, ‘나’만 외롭고, ‘나’만 가지고 그런다는 생각의 배후에는 타인에 대한 이해의 결핍이 전제되어 있다. ‘왜 공부는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는지?, 왜 나의 자유는 유보되어야 하는지?, 왜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는지?, 부모는 왜 나를 못살게만 구는지?, 선생님의 잔소리는 어찌 저렇게 듣기 싫은지?’, 아이들의 생각은 온통 의문 부호로 가득하며 불만의 연속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는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불만이 줄어들거나 옅어지지 않을까 싶다.
또 몇 해 전이었다. 정말 말을 듣지 않는 아이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를 만났다. 그 아이는 학교에서도 말썽을 부릴 뿐만 아니라, 용돈을 적게 준다며 주차해 둔 아버지의 차를 발로 차서 찌그러뜨리고 바깥으로 배회하는 중이었다. 여름 더운 날, 반팔을 입고 나타난 그 아버지의 팔뚝은 온통 화상 흉터로 가득했다. 영화 속의 조폭 같았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그 아버지는 자기 삶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아이는 결국 전학을 가게 되었지만, 그 아버지가 내게 준 이야기는 가슴이 아프다.
그의 고향은 포항 위의 영덕 근방이라고 했다. 어릴 때, 초등학교 6학년 때이던가, 그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담배를 피웠다고 했다. 그러다 한 날은 해풍이 매서웠던지 담뱃불이 산에 옮겨 붙어 주위의 온 산들이 불길에 다 탔다고 한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덜컹 겁이 나서 집엘 들어가지 못하고 밤을 기다려서 모두 잠든 집에 몰래 숨어들어 그의 아버지가 말려 둔 고추 한 마대를 들고 나왔다고 한다. 이튿날 장에 그걸 내다 팔아서 차비를 마련하고 무작정 버스에 올라 경산 어디에선가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거기 자장면 집에서 서빙을 하기도 하고, 주방 일을 거들기도 하면서 어깨 너머로 요리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군에 가야할 나이가 되어서야 집에 내려갔다고 한다. 그는 모은 돈으로 결혼도 하고, 더 열심히 돈을 모아서 중국집을 차리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만 열을 쏟았다. 나이를 먹고 주방 일을 누구에게 맡겨 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요리사 한 명 아래에 들어가는 돈이 겁나서 아직도 손수 자장면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팔뚝의 그 상처들을 보여주면서, 팔 전체가 화상으로 얼룩져도 괜찮다고 했다. 아이 키우는 것 말고 힘든 것이 없다 하며 나에게 소주를 자꾸 따라 주었다. 그의 팔뚝에 난 흉물스러운 화상은 중국집 주방의 냄비에서 튀어 오른 기름 자국이거나, 타오르는 기름의 불꽃이 할퀴고 간 상흔이었다. 그 팔뚝에 그만한 상처가 나고, 또 아물기를 반복한 세월을 가늠해 보면, 그의 화상 흉터는 어느 누구의 옷에 달려 있는 훈장보다 거룩한 것이었다.
나는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하였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의 세계에 머무르면서 그 아비를 이해하려 들지 않고, 또 아비를 부정하고, 계속 돌아다니면서 사고만 저질렀다. 지극한 사랑이 그 아이의 곁에 있었으나, 아이는 그것을 외면하고 손 내밀지 않았으니 참 안타까웠다. 나는 더 기다려 주지 못하고 그 아이를 전학 보낸 것이 후회가 되었다. 내가 그 아버지의 사랑의 절반이라도 그 아이에게 쏟았더라면 하는 후회를 해 보았다. 더 지혜롭지 못했던 것은 나의 수양이 부족했거니 자책을 해 본다.
나는 아이들에게 대화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친구들과 가족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가 없으면 관계를 맺지 못한다. 관계 맺지 못하는 삶은 바다 위의 섬 같다. 파도가 와서 때리고 갈 뿐, 소통은 불가능하다. 대화 없이 어떻게 복잡한 나를 이해시킬 것이며, 또 어떻게 생각 많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으랴. 대화의 실패, 관계 맺기의 실패에서 우리들의 우울은 시작되고, 그 터널은 끝이 없다. 갈수록 더 깜깜하여질 뿐이다.
게으름, 또 다른 무기력과 그것의 변주
우리에게 늘 무거운 짐이 되는 가난 너머의 무기력과는 또 다른, 게으름이 있다. 아이들의 게으름은 무기력과 조금 다르다. 무기력은 자기 소외에서 비롯되지만, 게으름은 적극적인 편안함의 추구이며, 타인의 부러움에 대한 모방이며, 힘든 것에 대한 회피라 할 만하다. 무기력에는 무기력에 이르기까지의 상처가 개입되지만, 게으름은 자기 습관적인 일상의 반복이 단조롭게 틈입할 뿐이다. 무기력은 그 자체로서 모색을 내포하지만 게으름은 편하고자 하는 욕망이 적극화 되어 나타난다. 무기력하면 그의 삶 일부가 공허해질 수 있지만, 게으르면 삶 전체가 별 볼일 없이 지루함을 관통해 간다.
학급에서 지각한 아이들에게 가끔 묻는다. 지각한 이유가 뭐냐고. 그 중 십중팔구는 ‘늦잠을 자서’라고 말한다. 늦잠 잔 것이 어찌 지각한 것의 이유가 되는가! 어쩌다 한두 번의 늦잠은 실수일 수 있지만, 매일매일 늦잠 자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이 지각한 이유를 말할 때, ‘제가 게을러서’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스스로 자기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각하려 하지 않는데, 그 잠 때문에’라고 자기를 변명하고 있지나 않은지 한번 쯤 생각해 볼 일이다. 게으른 아이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자기를 게으르다고 생각하지 않는 대신에 갖가지의 핑계가 그 뒤에 줄선다. ‘피곤해서, 지겨워서, 관심이 없어서, 몰라서, 어쩌다, 모르고’ 등등의 핑계성의 수식들이 그것이다. 이 모든 수식적 언사의 공통된 속성은 ‘게으름’이다. 그 게으름을 아이들은 그렇게 에둘러서 다르게 말할 뿐이다. 게으름이라 말하기에 과하다면, 자기에 대한 관심의 부족이라 해 두고 싶다. 그러나 자기에 대한 관심의 부족도 다시 생각해 보면 의식적 게으름의 동류가 아니겠는가.
무기력하면 자기만 고립되지만 게으르면 그가 관계 맺는 타인을 침해하게 된다. 내가 게으름 속에서 편안해지는 동안에도 어머니의 식탁 준비는 계속되고 있고, 내가 버린 휴지 한 장에도 누군가의 노동이 필요해진다. 주번이면서 모르고 집에 가버리면, 다른 주번 혼자서 교실을 감당해야 한다. 급식 당번이 피곤해서 식판 가져오는 것을 외면해 버리면, 학급의 점심시간은 지체되고 아이들은 투덜거린다. 게으른 동안 나와 약속한 누군가는 기다려야 하고,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는 지쳐가야 한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나의 게으름 때문에 누군가는 더욱 힘들어지게 된다.
게으름은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편하고 싶어 하는 심리의 이면에 그 모든 게으름이 도사리고 있다. 세상사는 이유를 누구에게 물어 보면 편안하게 살기 위하여 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어머니는 차를 몰고, 아이들은 여기저기 학원을 전전한다.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러한 부지런함이 보다 게을러질 수 있는 편안함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생각해 보면, 세상은 참으로 서글퍼지기도 하고, 벅차지 않는가. 우리는 보다 큰 것을 꿈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게으름이 나에 관한 것이어서 그것은 이기적이니 말이다.
큰 꿈은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들 한다. 어느 주교는 묘비명을 이렇게 썼다고 한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의 한계가 없을 때 /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 그래서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 // 그러나 아아,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 자리에 누워, / 나는 문득 깨닫는다 / 만약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 그것을 보고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 또한 그것에 용기를 내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을 /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까지도 변화되었을는지(웨스터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있는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묘비명)
주교의 묘비명은 수신(修身)의 원리를 밝혀놓은 것 같기도 하고, 그가 관계 맺다 놓고 간 세상의 게으름에 대한 항변 같기도 하다. 나는 나의 수신(修身)과, 또 나의 게으름에 대하여 물어본다. 내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자로서 게으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편안함만을 추구하지는 않은지, 또 아이들은 나의 약은 행동과 사려 깊지 못한 말들을 학습해가고 있지는 않는지, 나의 게으름 속에 아이들의 게으름이 함께 숨 쉬고 있다면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아이들이 그들의 불만을 의문부호화 하는 것처럼 내가 교사하는 근본적인 이유도 물음이 꼬리를 물어야 할 것 같다. 성찰(省察)이 없으면 무엇이 변하겠는가. 나의 변화는 내 몫이다.
다가서는 아이들
나는 아이들에 대하여 부정적인 말만 하였지만, 교실에는 정말 착한 아이들이 많다. 아직 가공하지 않은 원석(原石)들이 교실에는 흩어져 있다. 그들은 반짝이는 보석이 되고도 남을 만 한 아이들이다. 아이 같지 않은 한 녀석이 학급 카페의 모둠일기 게시판에 올린 글이 있었다.
난 어려서 부터 가족의 화목을 모르고 살아왔다. 내가 다섯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난 아버지에 손에 맡겨졌다. 내가 여섯 살 때 중간 누나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구미에서 공장을 다니며 야간학교에서 기숙사에서 지냈다. 내가 일곱 살 때 큰누나는 가출을 했다. 내가 열 살 때 아버지가 재혼을 하셨다. 내가 열한 살 때 막내누나도 집을 뛰쳐나갔다. 내가 열다섯 살 때 아버지는 다시 이혼하셨다. 그리고는 아버지마저 내 곁을 떠나 대한민국 어딘가에 계신다. 시골에 가면 왠지 가족의 정을, 가족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거 같다. 서로 아껴주고, 걱정해주고, 사랑해주고. 낳아 주신 어머니는 항상 날 위해 무엇이든 해주시고 싶어 하신다. 아마도 어릴 때 못해 주신 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시골에만 다녀오면 왠지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할 거 같고, 실망시켜 드리지 않고, 싶고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다.
나무의 줄기가 굵어지는 이유는 세포분열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계절에 따라 세포분열의 속도가 다르므로 또 나무의 단면에는 나이테가 생긴다. 동심원모양의 테는 성장 속도의 차이를 나타낸다. 나는 이 녀석의 성장 과정에 각인되었을 상처 깊은 테를 들여다본다. 그에게도 성장의 테가 있다면 어떤 빛깔이어야 옳겠는가. 상처뿐인 그의 성장에서 그는 어떻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려는 마음을 길어 올렸을까. 나는 이 아이의 글을 보고 잠들지 못하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눈물 나는 사연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 녀석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끔 우리가 눈물 흘리는 것이 감정의 사치일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 아이가 더 성숙하여 가지게 될 연륜(年輪)의 무늬와 결을 상상해 본다. 그는 젊어서 수많은 아픔들을 다 이겨 냈으니 또 얼마만큼 지혜로워져서, 어떤 보석이 되어 있을지 상상해 본다.
아이들은 수업하다 내가 먼저 지치면 ‘선생님, 힘드시죠?’ 라고 위로하기도 하고, 물 한 잔을 내밀기도 한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 몇 번을 우는 아이들도 있다. 아스팔트 위에서 다리가 부러진 채 뒹구는 강아지를 안고 동물병원을 찾아 헤매는 아이들도 있다. 군에 있으면서도 잊지 않고,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편지지 위의 수많은 하트로 그려서 보내오는 것을 보기도 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런 때에, 나는 그들이 그들에게 점점 다가서고 있다고 느낀다.
끝에
나는 어린 한 때 팽이치기를 하며 겨울을 보내기도 했다. 깎은 나무의 뾰족한 모서리에다 아버지가 쇠구슬을 박으면 팽이는 완성된다. 나는 그 팽이를 아직 언 땅 위에 돌리면서 긴 겨울을 보냈다. 나는 채를 들고 쉴 새 없이 팽이를 때렸다. 아버지가 만든 팽이는 훌륭했지만 자전(自轉)하는 힘은 없었다. 누군가 때려주어야만 돌아갔다. 팽이가 스스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공상을 했던 적이 있다. 내 안의 게으름이 그러한 공상을 낳았다. 나는 교실에서 팽이채를 든 아이처럼 회초리를 들기도 하고, 모진 말로 아이들을 나무라기도 한다. 내가 그러고 있으니 아이들은 팽이가 된다. 아이들은 의지와 무관하게 팽이채를 쥔 교사를 만나게 된다. 쓰러져 있는 아이들, 팽이채를 든 교사. 교실은 언 땅보다 더 추워질 때가 있다.
내가 아이들에게 늘 돌아가는 팽이를 열망하는 것은 아니다. 쉬어야 하고, 가끔은 쓰러져서 뒹굴 수 있는 것이 팽이의 속성이 아닌가. 나는 가끔 ‘기다려주어야 한다’는 말을 떠올리면서 성급한 나를 원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돌아가는 팽이, 팽이채 든 자를 비웃는 팽이, 그런 것을 꿈꾼다. 나의 오래된 꿈은 이루어질 지도 모른다. 내가 변하고, 아이들이 변한다면.
나는 대학 다닐 때 사북 탄광에 가서 수직 갱도를 내려가 학비를 벌어 온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 같이 농사꾼의 자식이거나, 도시 일용직 노동자의 아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 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의 친구들도 있었다. 지금 그들을 만나면 그 때의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이야기 나누곤 한다.
나는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거나 세상과의 문을 닫고 불화(不和)의 길로 치닫지 않길 바란다. 가난을 한 때의 것이라고 말하면 배부른 자의 감상이라 할지 모르지만, 정작 우리 아이들은 자기 능력을 한 번도 세상 속으로 펼쳐 본 적이 없는, 가능성 그 자체이다. 아이들이 좀 더 당당해져서 세상과 부딪히고 또 깨지면서 자기를 단련하기도 하고, 또 그 속에서 성취하는 것이 있으리라 나는 확신한다. 가난을 넘어, 상처를 넘어, 무기력을 넘어, 게으름을 넘어, 불화를 넘어 그들이 또 다른 세상의 나에게로 다가가길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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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교지의 '정체성' 특집에 실으려고 초한 것입니다.
엉성합니다.
아이들의 이야기와 저의 이야기를 조금 하고싶어서 ...
첫댓글 글을 읽으니 가슴이 아프네요. 아이들의 삶이 무척 고단하게 느껴집니다. 어른못지 않은 어두운 우물을 아이들도 저마다 가슴에 가지고 있겠지요. 그 우물은 얼마나 깊고 외로울까 생각하니 아득해집니다.
학교현장에서 만났던 아이들을 다시 봅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아름다웠던 아이들-. 그 때의 아픔을 다시 만납니다. 무기력한 아이들의 에너지로 나마저 무기력해지던 순간의 슬픔-. 그 무기력함의 근원이 바로 우리들이기에 절망했던 날들.... 샘의 글을 읽으며 자세를 바로 잡아 봅니다. 교지 작업하느라 바쁘시겠네요. 은행잎이 거리를 덮고 있는 아름다운 일요일입니다. 틈나면 놀러오세요~
오후에 직지사에 갔더니 은행잎이 바람에 쓸려다녔습니다. 산그림자 아래는 초겨울 같았습니다. 하는 일도 없으면서 늘 그렇습니다. 가은에 정말 한번 꼭 가고 싶어요. 선생님도 보고 싶구요. 연수 때의 선생님들도 무지 바쁜가 봐요. 박계해 선생님, 감기 조심하고 그러세요. <물푸레>님은 시인이라 하던데, 시 쓰는 것도 좀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모두가 고단한 것을 공감해 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