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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서정적 자아와 화해
강 영 환 (시인)
1.
우리 시조단도 7~80년대에 비해 양적 팽창과 더불어 문학적 성과를 이룰 수 있는 질적 향상을 꽤 많이 가져 왔다. 그것은 우리 시조단에 던지는 꾸준한 문제 제기와 이에 따른 시조인의 반성과 각성에 의한 바람직한 변화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학적 성과는 문단 전체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극히 일부분의 시인들에 의해 새로운 돌파구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장르의 패러다임이 결정 되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여기 양적 팽창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시인은 아직도 자신의 테두리 속에서 안이한 태도로 작품을 쓰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타성에 깊이 젖어있는 이들의 각성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각성을 하였다 하여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생산력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조가 자유시 보다 쉽다 생각하는 이들이 너도나도 시조인으로 등단을 하고 행세를 하면서 문단의 패권에만 관심을 갖는 것도 시조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심각한 요인으로 작용되고 있다. 우리 시조단이 안고 있는 가장 큰 폐단은 바로 패거리를 형성하여 시조단의 권력으로 작용하고자 하는 일일 것이다. 뿌리깊이 내려 악취가 만연해 있는 패거리 문단은 공멸을 자초할 뿐이다.
시조는 일정 형식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추구하는 시가문학이다. 딴에는 실험이라는 이름 아래 형식을 파괴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것이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차치하고서라도 시조는 주어진 형식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문학 장르이기에 시조가 지닌 일정 형식을 벗어나면 그것은 시조로 분류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형식의 지배를 원하지 않으면 자유롭게 형식을 벗어날 수 있는 자유시를 쓰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를 논할 때는 우선 형식에 지배를 받는 문학 양식이 첫째 조건이 될 것이다. 그 조건을 충족시키고 난 뒤에야 내용의 문제로 접근하면 될 것이다. 형식도 갖춰지지 않은 시조를 시조에 편입하여 논한다는 자체가 우스꽝스런 일이 될 것이다.
우리 전통 시가인 시조에는 묵은 선입견이 있다. 음풍농월,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선비들이 여가를 즐기는 방식이다. 시조를 생활의 여기餘技 쯤으로 여길 때 선비들이 모여 유유자적하면 자연과 교우와 여가를 보내는 방법으로 시조나 시가가 이용 되었다. 우리 시대 이전에는 음풍농월이 오랫동안 시조가 지닌 미덕으로 생각되어 왔다. 시가가 삶에 여유를 제공해 준다는 풍류미학에 오랫동안 젖어온 선조들의 사고방식에서 높은 가치는 안빈낙도였고 시조는 그 정점에서 화려한 품위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생활을 위한 시조가 아니라 문학예술로서의 시조로 자리매김 되면서 전문성과 예술성을 심화 시켜나가고 있다. 이제 어지간한 예술성을 가지고서는 시조계에서 주목 받기도 어렵고 독자들의 높은 요구를 충족시킬 수도 없다. 자유시와 시조가 구분될 수 없는 한 지향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시조는 운율 속에 녹아 든 의미가 형식을 초월해 버리는 양상이 아름다운 시조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눈 시린 벼랑 끝에
동백꽃이 흔들린다
추락은 저런 거다
그림자도 남김없이
흉터만 홀로 자라서
기약하는 눈초리
「해후」 전문
이 시는 벼랑 끝에 핀 동백꽃이 흔들리면서 지상에 떨어지고 꽃이 떨어진 흉터에서 다시 돋아나는 꽃을 기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금년에 떨어진 꽃은 한 번 헤어지면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는 존재다. 다시 만나는 꽃은 일년을 기다려야 한다. 일 년 후 만나는 꽃은 오늘 헤어진 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간직한 꽃이다. 꽃도 새롭고 꽃을 지켜보는 화자도 새롭다. 일 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은 숱한 변화를 간직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그 사실을 ‘추락’과 ‘기약’으로 연결시키면서 흔들리며 피어 있는 동백이 안고 있는 문제에 인간 존재의 근원을 어렵지 않게 연결시킨다. 사물 안에 숨어 있는 서정을 이끌어내 근원적 세계를 구축하고자하는 시인의 고뇌를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단단하게 사물 속에 이입되는 견고한 서정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 아닐까. 이 시조집을 관통하는 정직한 서정이 가닿은 지점은 숱한 사물들 간 혹은 사람들 사이의 화해 방식에 있다.
2.
내가 차달숙 시인을 만난 것은 1990년대 초반쯤이었다. 부산시인협회를 결성하던 때 빛남출판사에서 간혹 얼굴을 대할 때가 있었다. 그때는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출판사에 드나든다는 것은 글에 대한 관심이 가지고 있거나 글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거나일 것이다. 그렇게 잠간 만남이 있었지만 그냥 스쳐 지나간 인연쯤으로 끝이 났다. 그러다 간혹 백일장이나 글 공모 심사에서 심사위원으로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산문에 대한 심사를 맡는 것을 보았기에 수필가로 등단하였구나 생각했다. 그러다가 시집을 출간했다며 시집을 건네주기에 시인으로도 등단했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시조 원고 파일을 보내와 해설을 부탁한다고 했을 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문학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 맨 처음 시조문학에 매료되었다고 귀뜀해 주었다. 시집 서문에서 ‘한 그루의 팽나무 같으시던 아버지와 시조창을 즐겨 읊으시던 어머니가 새삼 그립습니다. 삶이 힘들수록 마음을 달래시듯 읊으셨’던 부모님의 영향을 크게 받아 맨처음 시조로 등단했다고 말했다. 시와 수필, 그리고 시조, 왕성한 문단 활동 등 노년에 전방위 문학을 하고 있는 엔터테인먼트 문학인임에 또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불타고 있는 문학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을까?
작품집 전반을 아우르는 정서를 살펴보면 두 여인이 등장한다. 두 여인이란 바로 아내와 어머니다. 두 분 다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문학적 바탕은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어머니야 어찌 됐던 영원한 고향과 같은 의미로 마음에 자리 잡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지극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망각 속으로 떠나보내기 쉽다. 현실에서 고인을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는 건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 고통을 사랑으로 풀어내고 사랑을 예술로 승화 시키면서 시에 대한 열정이 그치지 않는가보다. 그렇다. 사랑의 힘을 느끼는 일은 행복한 순간이 될 것이다.
가슴에 토박이 말 빗장 굳게 닫아걸고
강물 속에 새긴 뜻 풀어 읽는 눈빛이여
기원이 하늘에 닿으면
타는 노을도 꽃이다
동녘에서 몰려오는 어둠을 등에 지고
샐비어 밀밭 가듯 을숙도 가는 길
술 취한 가등 불빛에
수평선이 기운다
「하단에서―낙동강·4」 전문
시는 시 자체일 뿐 다른 그 무엇은 아니라고 말할 때 그 말속에 스며 있는 의미들은 무엇일까. 오든에 의하면 ‘예술은 인생이 아니며 또한 사회의 산파역도 될 수 없다. 시는 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어쩌랴 시는 현실을 반영해 주는 마음 속 거울이기에 시의 이면에 담겨진 내 삶의 무늬를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차달숙 시조에는 현란한 수사가 없다. 미래파 자유시에서 횡행하는 이른 바 비틀어진 문장을 이용해 교묘한 표현을 이끌어 내지도 않는다. 현실 감각을 유지한 채 정직한 표현으로 의미를 드러낸다. 사물들 속에서 자신만의 느낌을 끌어내는데 어쩌면 단단한 서정이 주는 힘을 믿는 것 같다. 시를 여성성이라고 볼 때 서정은 시의 뿌리가 될 것이다. 단단한 서정이 가져다주는 차시인의 시조는 야무지고 속살이 깊다.
그대 앉던 자리에
한낮 햇살 가만 졸고
건드리면 깰세라
숨소리도 적막하다
고요가
가만가만 다가와
내 옆에 앉는다
「아내에게」 전문
위 작품에서도 그런 모습은 바뀌지 않는다. 아내가 앉았던 자리까지 그리워하고, 아내가 떠난 자리에 머무는 그 작은 햇살마저 졸음이 깨어날까 조바심을 하는 지극한 사랑가다. 그러나 지금은 혼자 앉아 있다. 그 옆으로 고요가 다가와 앉는다. 어쩌면 사별은 시인에게 고요가 된 것이다.
추억으로 가고 싶고, 깊은 몸 안에 숨어 있었던 고향이 홀로 시간을 채색해 준다. 고향으로부터 어머니가 비롯된다. 시인의 정서가 끝닿는 곳에는 항상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는 곧 아내의 이미지와도 연결 된다. 고향과 어머니와 아내는 그에게 동일한 이미지로 나타난다.
3.
휠라이트의 도식에 따르면 ‘은유는 상반되는 요소들 사이의 다양한 투쟁 양식이다’는 것이다. 은유로 표현되는 시는 리얼리티가 새롭게 인식된 세계다. 생기 있는 실체라고 불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는 이념적 도구로써 보다는 인간의 한 근원적 사고활동의 표상이요, 엔 프라이의 말처럼 ‘투쟁의 형식’이라는데 그 진의가 놓인다는 점을 새삼스럽지만 단호하게 인식하자는 것이다. 시인이 표출해 낸 이미지들에는 다양한 양식들이 나타난다. 아무렇게나 추출해 낸 그의 은유에는 사물과 사물 사이 거리에 놓인 ‘투쟁 양식’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빈들에 꽉 차는 손짓에/ 창을 여는 풀잎들>(「부처님 손 1」)
<오늘은 저녁노을도/ 곁불처럼 울고 있다> (「뒷모습」)
<눈물에 빈 배가 되어/ 떠나가는 초승달>(「저녁 풍경」)
<저무는 물소리 밖에/ 따라 우는 징검돌> (「징검돌 유감」)
‘손짓’과 ‘창을 여는 풀잎들’은 이질적 요소들이다. 이런 이질적 사물들의 조합은 시적 상상력을 동반한다. 시집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시적 표현에 있어서 이렇게 원시적 삶의 원리를 ‘투쟁의 원리’-곧 장력의 원리이리라. 시의 경우에는 은유적 표현에서 장력이 강하게 작용되는 언어여야 하며 그것은 개별적 시점을 지향해야만 상상력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이때 언어는 필연적으로 의미론적 장력을 지향하며, 그것은 사물의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인간의 근본적 활동이 된다. 차 시인이 ‘빈배’와 ‘초승달’을 연결시키는 구도처럼 ‘상반되는 요소들 사이의 다양한 투쟁의 양식’에 해당된다. 그의 시에서 투쟁 혹은 장력 자체와, 인간으로서의 개별적 시점이라는 명제에 연결된다. 그러기에 한 시인에게 있어서도 시는 똑 같은 시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낯설게 하기와 통하며 시가 지극히 개성화 되어 어려워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차시인의 작품에서는 상반된 요소의 다양한 투쟁 속에서 두 사물의 거리를 비교적 그렇게 멀리 띄우지 않고 가까운 거리에 놓아둔다. 어쩌면 투쟁양식이 아닌 화해의 양식에 가깝다. 이는 독자들 부담을 최소화하게 된다. 그것은 시적 표현을 얻는데 있어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본다. 어렵게 쓰여진 쉬운 시를 지향하는데 있어야 할 자리다.
이 시집에는 유난히 노을에 대한 이미지가 많다. 어쩔 수 없는 노년기 정서가 노출되는 경우라 할 것이다. 시에는 나이를 초월해야 하는데 현재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할 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모습이 아닐까 여겨진다.
아들 함께 아버지가
강둑을 걷고 있다
저녁놀이 후광처럼
실루엣을 보낸다
젊은이
팔에 의지해
먼 길 가는 지팡이
―「슬하」 전문
저녁놀이 후광처럼 실루엣을 그려주는 강둑길을 아버지를 부축한 젊은이가 함께 가고 있다. 이는 숭고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다. 아들과 함께 걷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는 작품이다. 외롭고 쓸쓸한 노년에 꿈꿀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환상이다.
주름골 깊어서는 넉넉한 게 좋아진다
감정에 홈을 파던 사유도 느슨해져
몸 따로 놀아나지만 헐거운 옷이 좋다
느직하게 내려오는 산그늘이 보기 좋고
탈 없이 지나가는 날들에게 손 흔드네
빨리에 몸 뺏기지 않고 새아침을 만나리
「여유로움에 관하여」 전문
차달숙 시인은 작품들 속에서는 이렇게 여유를 갖고 있는 작품이 많다. 그러나 그의 현실적 삶에 있어서는 여유보다는 열정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새부산시인협회 사무국장직을 수행하면서 부산 시단에 엄청난 활기와 에너지를 불어넣고 있다.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노익장임에도 불구하고 체면이나 선입견 같은 것에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자신의 일을 거침없이 밀고 나간다. 그 정도로 시인의 생활은 활기차고 도전적이며 뜻 깊은 일이다. 도전하는 삶은 아름답다. 더구나 은퇴할 시점에 다시금 쉽지 않은 도전은 이웃의 부러움을 넘어 시기와 질투를 유발 시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무차별적인 도전 보다는 균형감각을 살린 여유를 간직하고 이웃을 살피며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다짐해 보는 것도 좋을 것같다. 시는 ‘미래에 있을 법한 일을 느낌으로 적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바쁘게 살아 온 지난 날들에 대한 반성과 함께 새로운 다짐을 스스로에 던지고 있다. 이젠 깊어질 대로 깊어진 차시인의 황혼녘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기대해 본다.
격랑이 휩쓸고 간 외딴마을 너와집
두리기둥 옹이마다 기침소리 들린다
매미도
푸른 한나절을
숨죽여 듣다 간다
「두리기둥―폐가에서」 전문
이 시에는 여유를 넘어 관조를 만날 수 있다. ‘외딴집’, ‘너와집’, ‘두리기둥’, ‘옹이’, ‘기침소리’, ‘매미’, ‘한 나절’, ‘숨죽여 듣다 가’는 제재들이 지극히 객관적인 진술로 나열되어 있다. 욕심을 떨어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관조가 되는 일은 구도자들에게는 당연한 귀결이다. 시인을 구도자로 분류할 때 시가 닿아야 할 궁극의 세계는 관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는 차 시인의 시조가 당도해야 할 곳은 우선 관조가 아닌 생활이어야 할 것 같다. 좀 더 치열하게 시조의 영역을 넓히고 세계를 깊이 있게 천착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초월 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건 쉽지 않다. 모든 일을 겪어본 이후에 초월을 만나야 한다. 이제 첫 시조 작품집으로써 도달해야 할 세계는 서정이라는 출발점이다. 그에게 남은 건 서정을 바탕으로 그 위에 자신만의 가치관을 세워 집 한 채 견고하게 짓는 일이다. 그의 서정이 닿는 곳마다 통과의례처럼 군림하는 두 여인으로부터 벗어남, 혹은 고향 의식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있는 작품 세계가 그것이다. 어쩌면 낡은 서정일 수 있는 사물들 간의 화해를 넘어 현실 세계에서 자주 만나고 부딪히는 투쟁 양식의 서정에 몰입해 보는 것도 행복한 시 쓰기에 한 걸음 다가서는 일이 아닐까 한다.
첫 시조집 출간을 축하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