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수가 지나간 자리에 다리를..
임 현 주
여름이 되고 기온이 올라가면서 작은 바람도 반갑습니다. 그러나 태풍이 온다는 소식은 염려를 가져다 줍니다. 태풍에 대비할 수는 있지만 태픙을 예방할 수는 없는것 같습니다.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는 나무도 뽑히고 지붕도 날아가고, 많은 피해를 줍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넘어져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다시 나무도 심고 새롭게 지붕도 얹어야 합니다. 태풍은 공기를 청소하는 순기능도 있다고 합니다.
인사-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반갑지 않으신것 같아요. 다시한 번 인사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솔직히 말해 떨립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이제까지 서울에서 살았는데 대구에 처음 와 봅니다.
우리나라에서가장 더운 대구, 공무원선생님들, 많이 긴장했는데 의외로 너무 친절히 맞아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친구얘기
동영상
저는 얼마 전까지 약국을 경영하던 약사이고 현재는 화가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장애인 부서를 섬기는 전도사이기도합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 온 자격은 장애인이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극복 딛고 일어서,,, 감히 공무원 선생님들을 모시고 저의 이야기를 나누게되어 영광입니다. 저를 처음 만난 분들은 저에 대해 몇가지 오해를 하기 쉽습니다. 세상을 강하고 악착같이 살아왔을 것이다 제가 장애는 있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님과 형제들의 도움으로 보호받고 살아왔을 거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장애라는 핸디캡 외에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태풍과 홍수를 만났고 그것은 저에게 아픔도 주었지만 저를 정화시키기도 했고 또 제가 걸어온 길을 통해 다른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되기도 합니다.
사진1
폭풍의 눈
아마 5세정도의 사진인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40세 이 후에 늦둥이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 이미 20세, 12세인 오빠 둘이 있었습니다. 저는 유난히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걸음마를 했다고 합니다. 세 살 때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게 되자 부모님은 운명으로 받아들이시고 저를 보살펴 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안타까워 과잉보호하셨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지면 안된다고 교육하셨습니다. 이러한 어머니의 생각은 저에게도 영향을 미처 제가 비교적 순응하는 사람이 되게 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하루도 빼지않고 저를 업어서 등 하교 시켜주셨지 만 개근상은 탈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에게 피해가 될까봐 소풍을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등상을 탈 기회가 있었으나 조회시간에 제가 단상에 올라가지 못하여 다른 학생이 상을 타곤 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아마 지금같으면 선생님들의 마인드도 많이 달라져서...
저도 너무 어린 시절 장애를 입어서인지 장애로 인해 원망하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하신 분으로 신용, 정직, 성실을 실천하신분인데 오빠들의 잇다른 사업실패로 인한 충격으로 내가 중학교 2학년쯤 뇌 졸증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거의 식물인간 처럼 계셨는데 어머니가 대 소변을 받아내고 돌보시다가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오빠들은 이미 결혼을 하였고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을 물려받았지만 규모없는 경영으로 곧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사진5
고등학교에 진학하게되어 택시를 이용해야했는데 택시비도 만만치 않았지만 당시 아침 일찍 택시를 잡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당시 장애인이 출 퇴근 시간에 택시를 잡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 였습니다. 지금처럼 줄이 없었기 때문에 택시가 오면 먼저 뛰어가 타는사람이 임자였지요. 저는 일찍나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빠질때 재차례가 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짚차가 한 대 내 앞에 서는거예요. 여군 장교가 타고있었는데 저의 학교와 같은 방향이라며 태워주셨습니다. 명절때 작은 선물을 드려도 한사코 받지 않으셨어요.저와 저를 도와준 친구를 1년 이상 태워주시고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고 하셨어요. 저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감사하단 말 한 번 제대로 못했거든요. 이러한 감사가 저에게 간헐적으로 있었습니다.
반면 가족들은 제가 고 3이 되어도 나에게 신경 써주는 사람도 없고 가정형편을 뻔히 아는 내가 부모님께 과외나 학원을 다니겠다고 요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방 하나에서 아버지 누워계시고 어머니는 TV보고계시고 조카들은 저와 놀자고 했습니다.
가족들의 사랑과 관심 속에 학창시절을 보내는 친구들을 볼 때 부럽기도 했지만 저는 복을 받기 보다는 복을 끼치는 사람이 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처음 들어가서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의학교가 다른 학교에 비해 교정이나 시설이 별로 좋지 않았나봅니다.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추첨으로 들어온 친구들은 울고불고 불만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때 생각했습니다. 건물이 좋은 학교가 좋은 학교가 아니고 좋은 학생이 많은 학교가 좋은 학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학교가 좋은 학교가 될 수 있도록 좋은 학생이 되겠습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좋은 곳이 되게하자. 나를 만나는 사람은 복받은 사람이다
그림 6,7
길-대학입학 사진8-
나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악기 연주등을 좋아하여 미술이나 작곡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나의 의식주는 내가 해결해야한다는 생각에 약대를 지원했습니다, 제가 그 당시 약대에 갈 만큼 성적이 좋지는 않았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산점도 주고 학비도 지원하는 등 여러 가지 지원제도가 생겼지만 1979년당시는 장애인에게 입학을 허가하는 학교가 드물었습니다. 주위에 대학입시에 실패하여 자살한 장애인 선배들도 있었고 제가 잘 아는 분도 의대에 합격했으나 불합격처리되어 너무 큰 좌절로인해 아직도 그 인생이 회복되지 않은채로 살고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이화여자대학은 장애인입학을 허용하였습니다. 때 마침 아버지를 신임하시던 친구분이 저의 ‘약학대 합격’ 소식을 듣고 4년동안 되는 장학금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저의 아버지에대해 잠깐 말씀을 드리면 제가 타어나기 전에 철도국에 오래 다니시다가 서울로 올라와 자수성가하셨는데요. 청렴 결백하신 분이었습니다. 어린기억에...,,, 친한 친구도 나와 같이 합격하여 4년동안 시간표를 동일하게 짜고 무거운 가방을 들어줬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게 한 큰 힘이 되어 감사와 함께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갚아야 된다는 부담으로 남아 있습니다.
장학금은 등록금의 반 정도 되었는데 이 때부터 저는 나머지 학비와 교통비 뿐 아니라 가정의 경제도 꾸려나가기 위해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열심히 부업을 했습니다. 과외지도, 뜨게질, 봉투접기. 제본...그러나 비참하지는 않았고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깊이 생각하며 세 가지 삶의 원칙을 세웠습니다.
1.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자 --- 사진9,10,11
2. 최선을 다하자
3. 나누는 삶을 살자
홍수-사진12
서울에 근접한 경기도 성남 산동네에 약국을 하면서 현실적으로 오빠들이 계속 어려움가운데 있기에 돈을 벌어서 오빠들 작은 가게라도 차려주고 어머니께 잘 해드리려 했으나 어머니는 기다려주지 않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제대로 치료도 못 받으시고 돌아가신 것도 안타깝고 이제는 진정 나를 위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빠들도 사업의 실패가 이어지자 두 오빠의 가정이 환란을 당하면서 두 분 다 사고와 질병으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두 오빠에게 다섯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내가 이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때까지 어린아이처럼 살던 제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야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성숙하지 못한 내가 사춘기에 접어든 조카들을 돌보기에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나 한 몸 열심히 살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족 관계속의 상처와 어려움은 누구에게 말 할 수도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개성이 강한 아이들은 서로 다투기 일쑤고 가장 가까이 있는 내가 분노의 대상이 되곤 했지만 저는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자라는 생각에 아이들에게 함부로 할 수도 없었습니다. 나마저 버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버리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고통이 지속되었습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다른 모양으로 있지만 그것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합니다.
극심한 심리적 고통 속에서도 미성숙한 내가 의지하거나 나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내가 약국의 약사라는 것 때문에 아무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림-아사셀양1, 무제 --그 당시 마음, 설명
사랑의 가족들사진 16,17
나에게 사랑을 줄 가족이 없다는 외로움, 내편이 되어 줄 사람이 없다는 소외감등 심리적 고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었고 환란 당하는 가정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내가 이러한 관심을 갖게되자 약국에는 이혼, 사별등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고 그들과 교제하며 서로 위안이 되었습니다.
약국에 찾아오는 다른 환자들은 이 분들 때문에 오기가 어렵다는 얘기가 들려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육신의 약을 구하는 사람들은 우리 약국 말고도 옆의 약국이 있으니 내가 포기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어렵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주말에는 의사 한 분과 간호사, 불우청소년으로 구성된 합주단과 함께 매 주 무의촌, 장애인 시설등으로 진료봉사를 나갔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불행한 사람인가’등의 질문과 함께 나 자신을 비롯한 인간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도움을 주고 싶어 전인치유를 연구하는 대학원 ‘치유선교학과’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림18,
힘이되는 제도들
그런데 내가 긍정적으로 살고 최선을 다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도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90년도에 운전면허증을 받고 차를 구입해서 손수운전을 하지만 주차 문제 때문에 곤란을 겪곤 했습니다. 약국 앞에 차를 세워놓았으나 어느 날 부터 그어진 노란 선으로 인해 매일 주, 정차 위반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사실 그 곳은 사람도 차도 별로 다니지 않는 산 꼭데기였으며 약국 앞에 아니면 대안이 없었습니다. 예),,,, 해법이 없어 좌절과 분노와 비굴함도 느끼고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사자가 사정해도 되지않고 싸워도 법이 막고있으니 방법이 없다고했습니다. 어느 경찰은 ‘나오지 말고 집에서하는 직업으로 바꾸라고 ’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정말 격세지감을 느낌니다. 주정차 위반 과태료를 많이 냈는데도 .....
수 년 후 어느 날 구청장님이 오셨습니다. 얘기를 하자 ‘행정의 낭비다’하시며 방법을 강구할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놓아진 장애인주차구역 표지판으로 인해 더 이상 나약하거나 투쟁적인 장애인이 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매일 약국에 나가는 것이 두렵고 우울하고 쓸데 없는 곳에 에너지를 쏟았는데 이제는 맘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 에너지를 생산적으로 ....
또한 장애인 활동 보조인 제도는 내가 진정한 자립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조카들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실제 내가 그들에게 보호자이고 도움을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내가 장애인이므로 자기들이 나를 돌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심적인 부담이 관계를 어렵게 만들어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교제가 어렵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비장애인 친구는 점점 멀어지고 활동범위가 좁아지게 됩니다. 국가에서 지원하는 활동보조 도우미의 지원으로 중증장애인들이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자존심 상하거나 미안하지 않고 기본적인 생활을 하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됩니다.
도로, 장애인 화장실, 에레베이터 설치등 장애인 시설의 확충, 이동차량지원등은 중증장애인들이 세상으로 나와 빛을 받고 진정한 한 명의 인간으로 자아실현을 할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게되면 봉사자의 마인드에 따라 달라진다--제도가 필수
저는 2008년도 복지제도의 전반적인 것을 알고 장애인을 좀 더 잘 섬기고자 대학원‘복지선교학과’에서 공부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복지는 사회적 약자들의 결핍을 지원하고 더 나아가 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자아실현을 지원하는 복지제도로 발전하고 있는것 같아 고무적이다. 사회복지지원을 통해 인간의 욕구와 안정과 소속감, 존중, 자아실현을 하는것을 돕고 싶어 나의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다리가 되어 조금 쉽게 건너갈 수 있게 된다.
인생2막-개인전 사진
이제 조카들도 모두 성인이되어 결혼도 했고 독립을 하였습니다.
20여년 약국을 운영하며 나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여 건강도 많이 나빠졌습니다.
변화하는 약국환경 의약분업으로 병원이 없는지역에서는 경영이 어렵게 되었다. 행동의 제한이 불가피해지자 심리적으로도 위축될 위기에서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2004년도에 약국을 그만두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도매상에 근무하며 취미로 그림을 시작하였습니다.
2007년도 잠실 종합운동장 내에 서울시에서 제공하고 서울 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장애인 창작스튜디오’가있습니다. 현재 14명의 작가들이 새로운 희망을 꿈꾸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2008년도에 입주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개인전도하였고 지난 일 년은 장애인 미술협회에서 운영하는 사회적 기업 작가로 활동했다. 저는 기초도 없고 그림을 몇 십년 하신 분들에 비해 경력은 짧지만 그 그림들은 내 삶속에, 내 마음 속에 수 십년 간 있던 그림들입니다. 그 그림들은 내가 생각하고 계획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려야만 하는 숙제 같은 그림입니다. 그래서인지 전시를 할 때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희망을 발견하고 기뻐하십니다. 아마 그림을 통해 저와 공감하고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그림을 통해서도 사람을 치유하고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열심히 하고자 합니다. 올해 10월에는 카자흐스탄의 장애인들에게 희망과 도전을 주고자 문화예술위원회 기금을 받아 몇몇 분들과 함께 전시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또한 몇 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립한 장애인들의 친목모임이면서 더 어려운 장애인에게 약간의 장학금수여하는 친목모임인 겨자씨 모임을 맡고있고, 장애여성들이 서로 힘주고 격려하며 비젼을 제시하고 지원하는 장애여성 네트워크, 중증장애인 선교단체인 밀알선교단, 교회의 장애인부서 상담과 교육담당 전도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사진-명함--직함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 경력은 고난과 그로부터 얻은 노하우 사람을 치유하는것입니다
인생그래프를 그린다면 객관적으로는 예전에 비해 많은 것을 잃었지만 주관적으로는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할 수 있습니다..
내가 요즘 자주 사용하는 농담이 있습니다. “저요? 공무원 보다 좋은 장애인, 경찰 보다 더 무서운 장애인입니다 !” 이 말은 지난 세대의 장애인들이 겪었던 차별과 무시와 냉대 등에 비해서 요즘 많이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중증 장애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 더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약자나 소외계층에 대한 인식과 제도가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앞으로 실질적인 지원정책들이 더욱 발전하리라 봅니다.
‘장애도 하나의 개성이다’라는 책을 읽고 저도 공감하였습니다. 하지만 장애가 개성이기 위해서는 인식과 제도가 뒷받침되어야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 저와 제 주위의 많은 장애인들이 비굴하거나 투쟁하지 않고, 튀거나 스타가되지 않아도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행복한 세상을 꿈꿉니다.
공무원이사회를바꿀수있는집단
봉사자가 가져야 할 바람직한 태도
하나 만남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긴다.
어떤 도움을 주겠다는 의무감에 급급하기 보다는 만남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사귄다는 자세로 먼저 손을 잡아 주며 반가움을 표하고 “어떻게 도와 드려야 할지 저는 잘 모릅니다.”라며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고, “주저말고 좀 가르쳐 주세요”라며 겸손하게 상대의 도움을 청한 후에 까다롭지 않은 어조로 상대의 상태, 몸의 기능에 따른 도움 요령을 물어 둔다. 또한 상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동작과 하지 못하는 동작을 알아둔다.
둘 서로 알아가기
처음으로 장애인을 대하는 사람들은 주춤거리거나 자꾸 쳐다보아서는 안된다.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을까 하여 장애에 대해 묻는 것을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하지 말고 신상에 대해 너무 오랜 시간 화제로 삼지 않는다면, 이는 적절한 도움을 주기 위한 필요한 절차이기도 하다. 먼저 자신의 직업과 나이, 가족 사항이나 취미 등을 서로 이야기 나누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서로를 알 수 있도록 하며 유우머는 첫 대면의 어색함과 도움을 받는 장애인의 위축함을 누그러뜨릴 것이다.
셋 배려하되 할 수 없는 부분만 도와준다
장애인을 도울 때 장애인이 할 수 없는 부분만 도와주어야 하며, 혼자할 수도 있는데 음식먹여 주거나 붙잡아 주는 등 일방적으로 도와서는 안된다. 넓은 장소, 1층, 출입문이나 화장실 등과 가까운 곳에 앉는 등 가능한 장애인 편의시설을 미리 염두에 두고 배려할 필요가 있다.
넷 장애인과의 대화시 주의점
대화 시 장애인의 눈 높이를 고려하여 같은 높이에서 마주보고 얘기하도록 한다. 마주앉을 의자가 없어 봉사자가 쪼그리고 앉아 얘기를 나눈다면 부담스러워 할 것이다. 서서 얘기하게 될 때는 시선이 힘들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둔다. 언어 장애인과의 대화시 알아듣지 못했을 경우에는 인내심을 갖고 이해할 때까지 몇 번이고 되묻는다. 언어 장애인은 반복해서 되묻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는다. 알아들은 척하거나 불편하다고 말을 시키지 않으면 섭섭해 할 것이다. 도저히 알아듣지 못할 경우에는 이쪽에서 상대의 의사를 알아맞히도록 한다.
다섯 장애인과의 이동시 주의점
장애인과 함께 이동하기 위해서는 지갑, 빨대, 장애인용 숟가락, 휴대용 소변용기, 안전 벨트, 화장품 등 여성용품, 방석, 끈 휠체어 햇볕 가리개, 빗, 화장지, 손수건 등 개인에 따라 챙겨야 할 것들이 있다. 지갑은 가급적 본인이 손에 들도록 하고 장애인 쪽에서 먼저 요구하기 쑥스러운 사항이 있으니 점검해 줄 필요가 있다. 이동할 장소나 건물의 특징도 알아두어 계단이나 경사로 상태, 화장실 상태 등에 대해 파악해 둔다.
여섯 장애인에 대한 좌석 배정시 유의점
여러 장애인들이 함께 참석하는 모임이나 행사장의 경우 장애인에 대한 좌석 배정은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장애인끼리만 앉게 하는 것은 신속하고 개별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점에서도 불편하다. 참석자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배정한다.
일곱 장애인들의 용모에 대해 배려함으로 친밀감 조성
장애인들의 옷매무새, 양말 착용 여부, 머리 손질, 신발 청결, 지퍼와 단추의 마무리, 화장 상태, 의상 선택 등에 대해 배려함으로 친밀감을 조성하고 휠체어나 차에 옮겨 탈 때 옷매무시가 흐트러지거나 머리가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다. 빗을 미리 준비하면 좋을 것이다. 치마인 경우 단정하게 보이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목이 넓게 파인 원피스류의 옷을 입었을 경우 속옷 어깨끈이 드러나지 않도록 관심을 갖는다.
여덟 장애인의 옷 입는 방식에 대해서
옷을 입는 방식은 개인의 습관과 장애 특성에 따라 다르다. 편 마비 장애인은 마비 부분부터 입는 것이 순서이다. 손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장애인은 단추나 지퍼 잠금에 어려움이 있다. 의상선택의 경우 장애인이 편리한 옷을 입도록 봉사자가 선택해 주기보다는 스스로가 하도록 한다.
아홉 화장을 도와주는 일은 각별한 친화감을 준다.
화장은 민감하고 까다로운 일이다. 화장을 도와주는 일은 각별한 친화감을 줄 것이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화장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보다 세련되고 센스있는 화장이 요구된다. 양손을 쓰지 못하는 장애인은 눈썹 그리기나 립스틱 바르는데 어려움이 있다.
열 장애인의 양말신기와 신발 착용
양말 신기와 신발은 의상 갖추기의 일부분으로 빠뜨릴 수 없는 요소이다. 걷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신발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신발을 신지 않았다면 이는 맨발의 느낌을 줄 것이다. 신발 착용을 도울 때는 끈을 어떤 모양으로, 어느 쪽으로 묶어야 할지 상대의 취향을 미리 물어 보아야 한다. 스타킹이 흘러내리거나 양말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한다.
열하나 약 복용에 대해서
약을 복용하는 장애인이 많이 있으므로 정기적으로 복용하는 약의 시간과 수량을 알아두고, 구급 약품은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두고 의무실 위치를 확인한다.
열둘 장애인의 식사를 먹여주는 경우
식사를 먹여주는 경우 장애인이 이것저것 달라고 요청하기 쉽지 않으니 매번 본인의 뜻을 물어본다. 또한 함께 식사를 하지 않고 장애인만 먹여준다면 미안해할 것이다. 자신은 먹지 않고 먹여 주기만 하면 자연히 속도가 빨라져 대화를 나눌 여유를 놓치게 된다. 교대로 음식을 들도록 한다.
손을 사용할 수 있는 장애인의 경우는 스스로 먹을 수 있도록 하고 장애인이 음식을 흘리는 것은 부주의해서가 아니다. 당연하게 여기고 휴지나 냅킨을 미리 준비해 둔다.
열셋 음료수를 먹을 때 손을 쓰지 못하는 사람은 보통 빨대를 사용한다. 어떤 장애인은 커피나 음료수도 빨대로 마신다. 빨대를 사용하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열넷 용변 도움이 필요한 경우
용변 능력이나 자세 등에 따른 도움 요령은 개인마다 다르므로 사전에 충분히 문의하고 지시에 따른다. 화장실의 경우 변기까지 휠체어가 접근할 수 없는 구조가 있다. 바닥이 미끄러움으로 휠체어 장애인이나 보행이 불편한 장애인이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변기에 옮길 때 허리를 잡고, 체중이 무거운 사지 마비 장애인의 경우는 2인이 돕도록 한다.
필요시에 휴대용 소, 대변기를 준비한다. 휴대용 소변기를 사용하기 전에 휠체어 앞쪽으로 무릎을 끌어 당겨 앉힌다. 소변 통에 소변이 넘치지 않도록 기울기에 주의한다.
봉사자가 화장실에 다녀오기 위해 떨어져야 할 경우, 장애인을 통로에 두지 말고 통행이 드문 곳이나 화장실 입구 근처에 벽을 뒤로하여 휠체어를 붙여 준다.
열다섯 중증 장애인의 목욕을 돕기
중증 장애인의 목욕을 돕기 위해서는 특히 혈압이나 체온 유지가 용이치 않은 사람,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때에는 함부로 찬물로 목욕시키지 말고 전문가의 사전 허락이 필요하다. 벽에 손잡이가 없는 경우 바닥이 미끄럽기에 봉사자가 먼저 욕조에 들어가서 돕도록하고 목욕용 의자를 사용하면 편리하다. 봉사자는 가급적 낮은 자세를 취하거나 욕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장애인을 이동시키도록 한다. 바닥 물기를 닦고 수건 등을 깔아 놓는 것이 안전하다.
열여섯 장애인의 호칭
장애인과 대화할 경우는 장애인은 예전에 이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무능력한 존재로 취급되었을 때가 있었기에 호칭에 대해 여러면에서 민감한 반응을 갖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불구자라는 말보다 장애인, 지체 장애인(예전에는 병신, 절뚝발이)으로, 지적장애인(바보, 천치)으로, 청각장애인(귀머거리, 벙어리)으로, 시각장애인(장님, 봉사)으로, 척추 장애인(곱사)으로 각각 호칭하여야 한다.
열일곱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경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경우 타이어의 공기 압력, 손잡이 덮개의 마모 상태, 주요 나사의 조임 상태, 청결 상태 등을 점검해 주고 혼자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을 때는 봉사자가 앞에서 진로을 열어준다. 가능한 드나들기 편리한 넓은 테이블과 통로 옆에 좌석을 선정하고 테이블의 다리 옆에 휠체어를 붙여준다. 계단을 오르내리도록 도울 때는 둘이서 맞잡고 돕는다. 휠체어를 뒤에서 잡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얘기를 하지 말고, 휠체어 장애인은 따로 두고 봉사자가 뒤쪽에 앉게 되면 봉사자와 대화 나누기가 힘들고 급히 이동할 경우 어려워진다.
열여덟 시각장애인에 대한 예의
시각장애인에 대한 예의는 보이는 사람쪽에서 먼저 말을 걸고 악수를 청한다. 길모퉁이에서 맹인이 멈춰서서 생각에 잠겨있는 것은 방향을 잃었을 경우가 많다. 방향이나 장소를 알려줄 때는 좌, 우, 전, 후라든지, 몇 발자국, 몇 미터 되는 곳이라도 정확하게 알려준다.
안내할 때는 지팡이를 반대편에 서서 팔을 내주며, 그 사람보다 반보정도 앞장서서 걸어야 한다. 지팡이는 맹인의 눈이기 때문에 그것을 짚은 손을 잡는다든지, 당긴다든지, 미는 것은 절대 금하여야 한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에서는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확실히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때에는 먼저 식탁 위에 놓은 식기 등의 위치와 내용을 작은 목소리로 확실히 설명해줘야 한다. 그 위치는 시계바늘이 도는 방향으로 말하는 것이 좋다. 사람에 따라서는 손으로 만져서 확인을 시켜주는 것도 필요하다.
열아홉 지적장애장애인
지적장애장애인은 절제가 안되므로 음식을 지나치게 권해서는 안된다. 음료수를 먹여주는 경우도 먹이는 양을 조절하기 힘들다. 투명한 컵을 사용하면 도와주는 사람이 눈으로 양을 확인할 수 있다. 지능이 낮다고 나이도 어린 것이 아니니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스물 청각장애인
청각장애인과 대화시 정면에서 몸 동작을 섞으면서 하되 상대방이 입모양을 볼 수 있도록 입을 크게 움직이고 수화를 모으면 필기법을 이용하여 글씨를 쓰며 대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