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영토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남방 월주에 닿고 북쪽으로 바다를 건너 고구려 국경까지 남쪽은 왜국에 이른다. 백제는 동, 서 두 곳에 서울을 두고있다." - 구당서, 백제전-
"요서遼西와 진평晉平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 양서 백제전-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침략하여 차지하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 - 송서 백제전-
담로는 담로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을 뿐 삼국사기는 물론 일본서기에도 나옵니다. 광개토왕비문에도 나옵니다. 후한서와 삼국지 등에도 물론 나옵니다. 광개토왕비문만 어디에 나오는지 보시겠습니다. 영락 6년조에 토벌잔국이라고 합니다. 잔국이란 조각국가라는 뜻으로 당시 한반도가 삼한 소국체제였다는 뜻입니다. 이 소국들이 모두 담로입니다. 백제왕이란 본래 목지국 진왕의 호칭이었습니다. 칠지도를 보낸 것도 진왕입니다.
백제의 실체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 보다 훨씬 광활한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는 것이 최근 유적 발견으로 재발견 되는 것 같은데, 백제역사를 축소한 것은 신라가 통일하여 승자 중심 사관에서 역사 왜곡시켰고 일제와 현대 중국이 한국의 고대사를 축소했기 때문이죠.. 국가 차원에서 고대사를 재정립해야 됩니다.
백제가 중국요서를 점령한거 맞기는 맞아요 중국사서에서도 백제는 전성기때 백만대군으로 오나라 월나라 유나라 연나라를 침략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최치원이 당나라의 태사시중(太史侍中)이라는 벼슬아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고구려 백제가 전성했을 때 강병 백만이 남쪽으로 오나라 월나라(상해등지)를 침략하고, 북쪽으로 유주, 연나라(북경쪽), 제나라(산둥반도), 노나라(산동반도)를 쥐고 흔들어 중국의 큰 적이 되었소이다."고 했습니다. 조선 상고사(신채호) 379페이지를 봅시다."의자왕이 이를 좇아 제장에 명하여 변경을 고수하더니 익년에 과연 당(唐)이 30만 대병을 들어 고구려에 쳐들어와 안시성에서 싸워 누차삭 동안 승부가 나지 않고 신라는 13만 대병을 들어 고구려 남방에 들어 그 후방(後方)에 요란(擾亂)을 도모 하거늘, 왕이 계백에 명하여 신라의 뒤를 襲(襲)하여, 성열(省熱)등 7성을 회복하며, 윤충을 보내어 부사달 등 10여성을 점령하고, 선병(船兵)으로 당(唐)의 강남(江南)을 습(襲)하여 월주(越州) 등지를 점령하여 착착 해외의 척지(拓地)를 경영하다."여기서 말하는 "당(唐)의 강남(江南)"은 즉, 양자강 이남 지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백제를 보통 현재 국사책에서는 근초고왕 대에 요서. 산둥. 큐슈 지역으로 진출했다고짤막하게 나옵니다. 그러나, 백제의 대륙 경영이 2~3줄에 그칠 만한 작은 사건이 아니고, 이는 보다 넓게 다루어야 할, 바른 역사찾기의 한 과제입니다.중국의 정사(25사)에서는 백제의 대륙 경영을 전하고 있습니다.가장 충격적인 남제서에 보면,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荷節鉞, 剋攘列酸. 往<姐瑾>等竝蒙光除, 臣庶咸泰. 去庚午年, < >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梨]南監本作[ ].《漢書》[匈奴傳], 其國稱單于曰 ?孤塗單于. <匈奴>謂天爲 ?, 謂子爲孤塗, 單于者, 廣大之貌也. <匈>?猶言<匈奴>單于, ??通.$/ 崩若海蕩. 乘奔追斬, 尸丹野. 由是 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 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爲行安國將軍·<酸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又表曰: [臣所遣行龍 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 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 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 行揚武將軍<陳明>, 在官忘私, 唯公是務, 見危授命, 蹈難弗顧. 今任臣使, 冒涉波險, 盡其至誠. 實宜進爵, 各假行署. 伏願聖朝特賜除正.] 詔可, 竝賜軍號. 이 해에 '위노'가 기병 수십만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가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보내어 '노'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를 깨뜨렸다. '건무'이년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길 신은 옛부터 봉함을 받아 대대로 조정의 영화를 입고, 절과 부인 분에 넘치는 것을 받아 오랑캐를 물리치었습니다. '저근'등이 가서 광택을 입고, 신은 두루 평안합니다. 경오년에 가서 '험윤'이 깨닫지 못하고, 병사를 내어 깊이 쳐들어 오니, 신이 '사법명'등 군사로 토벌하고, 야간에 번개같이 엄습하니 '흉'의 이장이 두려워 하고 무너저 바다로 쓸어버렸다. 달아나는 것을 베어 죽은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말미암아 그 예기를 꺽으니, 흉폭함을 잡았다. 이제 나라가 조용해지니 실로 '명'등의 다스림이니, 그 공훈을 생각하여 칭찬함이 마땅하다. 이제 '사법명'을 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삼고, '찬수류'는 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삼고, '해례곤'은 행무위장군 불중후, '목간나'는 전의 무공이 있고 또한 대방을 빼앗으니 행광위장군 면중왕으로 삼으소서. 업드려 원하니 하늘의 은혜로 청을 들어 주옵소소 하였다. 또 표에 말하길, 신이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 장사인 신 '모유',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 사마인 신 '왕무', 겸 참군이고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인 신 '장색',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어 사사로움을 버리고, 오직 공무에만 힘쓰며, 위급함에 명을 받들어 어려움을 물리치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스니다. 이제 신이 사신으로 보내어, 험한 물결을 무릅쓰고 나아가니 정성이 지극합니다. 실로 작위를 내림이 마땅하니 각각 베풀어 주십시오. 업드려 올바른 제수가 있기를 원하옵니다 하니 조서를 내려 옳다 하고 군호를 내리었다. 이는 백제가 북위와의 전쟁(삼국사기 기록 : “동성왕 10년(488년) 위가 군사를 보내어 우리를 치다가 우리에게 패하였다.” [東城王十年, 魏兵來伐, 爲我所敗])에서 승리한 후, 공이 있는 장수들에게 왕 작위를 수여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남제는 31년 존속했는데, 백제 동성왕과 재위기간이 같습니다. 그야말로 고 임승국교수님께서 말씀하신바와 같이 초미니소국입니다. 남제가 백제의 속국이었던 만큼, 백제에 우호적인 기사를 서술하였고, 아쉽게도 일부 기록은 중국 사가들이 뜯어냈습니다.백제의 대륙 존재를 다루는 사서가 비단 남제서에 한하는 것도 아닙니다.송서 백제전 中'百濟國, 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 其後高驪略有遼東, 百濟略有遼西. 百濟所治, 謂之晉平郡晉平縣.'백제국은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리에 함께 있었으며, 그 후 고려는 대략 요동에 있었으며, 백제는 대략 요서에 있었고,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불렀다. 조선상고사 中"근구수가 기원 375년에 즉위하여 재위하여 재위 10년 동안에 고구려에 대하여는 겨우 1차 평양의 침입만 있었으나 바다를 건너 지나대륙을 경략하여, 선비 모용씨(鮮卑 慕容氏)의 연(燕)과 부씨( 氏)의 진(秦)을 정벌, 금 요서.산동.강소.절강(今 遼西.山東.江蘇.浙江) 등지를 경략하여 광대한 토지를 장만하였다." 남제서 상에서는 대륙 동해안을 7등분하여- 광양태수 -조선태수-대방태수-광릉태수-청하태수-낙랑태수-성양태수 자리를 만들어, 목간나 장군, 찬수류 장군 등에게 7등분된 영토를 나누어 통치하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알 수 없다고 한 지명이 359개입니다. 구 당서 상의6대방(帶方)10군(郡) 역시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신당서에서 "수도에서 동쪽으로 6천리 영, 빈, 해의 남쪽에 위치하며 서쪽 경계는 월주이고 남쪽으로 왜가 있다" 고 기록한 것을 보면 6대방 10군이 대륙 일대에 잔재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가 경영한 해외 식민지로 알려진 22담로와 같이 우리가 밝혀내야 할 우리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