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공약 같은 포도 세일 >/돌, 이종섭
요즘 아내는 더위를 먹었는지라 식욕이 없다면서 종종 밥은 안 먹고 짜증만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 떨어진 식욕이라는 것이 밥에 한정된 것일 뿐 포도에 관한 식욕은 아직도 가히 수준급인데, 이를테면 드라마 한 편 보는데 포도 2kg 한 박스 가지고도 조금 서운한 편이다.
하기사 내가 요즘 돈을 못 벌어서 몹시 궁핍하다고는 하지만 용돈 아껴 쓰면 포도 한 상자도 못 사먹을 형편은 아니다. 그러나 비싸다는 핑계로 너무 조금씩 사다보니 쩨쩨하다고 핀잔듣기 일수인데, 사실 특별한 종자의 포도도 아닌 것을 가지고 2kg에 2~3만원씩 하는 것을 보면 서민의 입장에서 비싸다는 생각을 아주 지울 수는 없을 것 같다.
하긴 유령 같은 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몇 억만 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해도 값 싼 미국 쇠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먹고 말겠다면서, 1kg 당 7~8만원씩 하는 한우라는 이름의 고기를 사서 먹는 것이 대한민국의 서민 중의 서민들이고 보면, 포도 2kg에 2~3만원이 비싸다는 나는 서민 축에도 끼지 못하는 쪼그라진 신세라 더욱 서글프기 짝이 없다.
그런데 며칠 전 퇴근하면서 문에 꽂혀있는 x마트의 광고지를 들여다보니, “포도, 대 방출! 꿀포도 5kg 한 상자에 7,000원!”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있었다.
“옳커니, 마누라 입맛 좀 짭짤하게 돋워주지...!”
다음 날 퇴근하자마자 집에서 편도 6km, 왕복 12km 거리만큼 떨어진 곳까지 고물차를 몰고 달려가 매장을 둘러보는데 이게 웬일인가? 아무리 둘러봐도 내 눈엔 2kg짜리 한 상자에 2~3만원하는 포도밖에 눈에 띄질 않았다. 그래서 안내직원에게 염치불구하고 속삭이듯 물었다.
“5kg 한 상자에 7,000원한다는 포도는 어디에 있나요?”
“아, 그거요? 세일품인데, 세일은 내일부터 합니다.”
듣고 보니 조금 허탈하기는 했지만, 기름 값 3~4천원 들이고 찾아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고 오늘 아내가 먹을 포도 2kg/2만원짜리 한 상자를 덜렁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더욱 실 컷 먹여주지 뭐...”
그리고 다음 날 똑같은 차를 타고 똑같은 장소에 가서 똑같이 둘러보았으나 마찬가지로 원하는 값싼 포도는 없었다.
“5kg 한 상자에 7,000원한다는 포도는 어디에 있나요?”
“아, 그거요? 농산품 세일은 내일부터입니다. 오늘은 공산품만 세일하거든요.”
나는 또다시 아내가 드라마를 보며 맛있게 먹을 포도 2kg/2만원짜리 한 상자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똑같은 차를 타고 똑같은 장소에 가서 똑같이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날도 찾는 포도는 없고 2kg/2만원짜리 포도 밖에 없었다.
“5kg 한 상자에 7,000원한다는 포도는 어디에 있나요?”
“아, 그거요? 하루 200박스 한정판매합니다. 아침 일찍 오셔야 해요. 초장에 동이 나거든요.”
가만히 생각하니 속은 것만 같아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 매장에 들르는 인원이 최소 2만명부터 10만명 정도라는데 그래, 200박스를 한정판매 한다니 이건 코끼리 비스킷 보다도 너무 적은 것이 분명한데 이런 상술은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또 매일 비싸게 사가는 포도 값은 그렇다 치더라도 자동차 기름 값이 도대체 얼마인가?
“하루 3천원씩만 따져도 3일간 9천원... 내일 한 번 더 오면 기름 값만 총 1만 2천원... 빌어먹을...”
생각할수록 약이 올랐지만 서민도 못되는 주제에 어쪄랴? 하는 수 없이 그 비싼 포도 한 상자를 또다시 사가지고 돌아왔고 아내는 계속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며 맛있게도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내일은 꼭 살 수 있을 거야. 아, 내일은 아예 서너 상자 쯤 사 두지 뭐.”
다음 날 또다시 x마트를 찾아갔다. 노는 날이라 매점 안내원의 말에 따라 아침 일찍 마트 문 열 시간에 맞춰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았으나 그날도 5kg 한 상자에 7,000원한다는 값 싼 포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보슈~, 5kg 한 상자에 7,000원한다는 포도는 도대체 어디에다 숨겨 놓고 파는 거요? 이렇게 일찍 왔는데 말요.”
“아, 그 포도요. 어제 날짜로 농산물 세일은 끝났습니다. 저 2kg/2만원짜리 포도만 팔고 있습니다. 금방 도착한 거라 아주 싱싱합니다.”
“아~흑~, 세상에...”
더럽고 치사해서 이제는 5kg 한 상자에 7,000원한다는 포도도, 2kg/2만원짜리 포도 사지 않고 빈손으로 투덜거리듯 덜덜거리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오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후덕지근한 기분에 비를 맞으니 씻은 듯이 상쾌하다. 온 몸이 촉촉이 젖어들자 하늘에 대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오호라, 자연의 소나기... 그래, 자연의 물로 오염된 인간들 냄새, 포도 거품들을 모두 씻어 내거라! 하나도 남김없이 말끔히 씻어 내거라!”
이때 낯모르는 옆 동 아주머니 두 분이 받쳐 든 우산 속에서 수근 대며 지나간다.
“쯧쯧... 사람이 돌아버리면 비를 맞아도 감기에 안 걸린다는군.
“대낮에 술 취한 건 아니겠지? 안됐어, 정말... 쯧쯧...”
하지만 나는 못 들은 체 집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이번엔 아내가 말을 건다.
“주책없이 비 맞으며 어딜 쏘다니는 거여? 눈치를 보니 포도밭에 갔다 왔나본데, 포도는 어쩌구?”
“포도가 너무 비싸더군.”
“당신은 꼭 정치인 같이 말씀하시는군. 포도가 비싼 것이 아니라 돈이 없는 거지. 말은 삐뚤게 나와도 입은 바로 뉘어야 하는 거 아니우, 영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