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1시간씩 좌선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힘쓰고 일상생활속에서 늘 화두를 챙기려고 노력하지만 쉬운일은 아닌것 같습니다.
뭔가 안좋은 일이 일어날것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체념해 버리는 생활이 오래 계속되었고 좋은 일은 그저 잠시뿐, 행복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인때가 있었습니다.
잠시 지난 날을 되새겨보며 마음공부에 임하는 자세를 가다듬어 보려 합니다.
1.2011.4.11 안녕하십니까?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 50대 후반의 남성입니다.자주 들러서 많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오영태드림
저가 처음으로 '선도회 금수산 영하산방'에 가입인사 올린 글입니다.
방황의 세월이라고 할지 유랑의 세월이라고 할지, 하여튼 헤매고 있을 때 인연이 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2.2011.7.15 거의 백일이
가까와 오고 있습니다.오늘은 '모임활동'과 '회원 플러그인'을 정독하기 위하여 저녁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할것 같습니다.따라가지 못해서인지 7월 모임이 많이 궁금했거든요.끈질기게 내리는 장맛비 속에서도 법사님을 비롯 득로님,무상님,그리고 모든 도반님들의 건강을 빕니다.
까페에 들어와서 이것 저것 눈팅을 하면서도 요로 결석 수술을 받기 위하여 병원에 입원하는 등의 시간을 허비 한 후에 약수역에서 법사님을 모시고 즐거운 모임을 가지기전의 글입니다.
득로 거사님은 정확히 96일이라고 댓글을 달아 주셨지요.
시간을 허비했다고 한 것은 4월~7월 까지 4회의 수련회 참석 기회를 놓쳐 버렸다는 뜻입니다.
마침내 2011년 8월의 2박 3일 영하산방 참선수련회에 겨우1박 2일이나마 참석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결심은 빨라야 한다고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3.아버지의 급사와 청소년 시절
제가 철이 들어 처음으로, 가까운 혈육의 죽음을 맞게 된것은 15세가 되던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젊은 시절 폐질환을 앓은 적이 있으셨지만 다행히 완쾌되어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50세 되던 봄에 갑자기 돌아가신 것입니다.
병명은 심장마비였지만 고혈압에의한 뇌출혈이 아니었나 짐작합니다.
갓 50세가 되자마자 돌아가신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은 한 가정을 송두리째 뒤 흔들었고 사춘기를 보내고있는 어린 저를 방황하게 만들었습니다.
4남2녀의 네번째인 저는 어머님과 형님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졸업할수 있었습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3년상을 치뤘지만, 그때만해도 많이 달라져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사랑방에 1년동안만 빈소를 차려 두었습니다.
학교에 갔다 귀가하면 제일 먼저 아버지의 혼백을 모신 빈소에 가서 술한잔, 담배 한대를 제상에 올리고 절을 하였습니다.그럴때마다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고, 친한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어 겨울 방학에는 형님과 함께 새벽기도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눈길을 헤치고 새벽기도에 나가면 목사님이 기특하다고 칭찬을 해 주셨고,추위에 몸을 떨며 기도에 열중하기도 했습니다.방언기도를 한다는 신도님들이 신기하기도 했고.....
4.군 입대와 불발탄 사고
이렇게 인연이 된 교회는 고등학생때까지 계속 되었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멀어졌다가, 군 입대후에 다시 이어졌으며 군종목사님께 세례도 받게되었습니다.
일반 사병으로 군에 가게되어 군복무를 하던중 1년이 조금지나 상병이 되었을때,당시 새로 시작된 '보병분대장 교육제도'로 인하여 보병분대장에 차출되었습니다.
입대 동기들 대부분이 하사관학교에서 3개월 교육을 받고 하사(분대장)가 되었고,저도 교육 수료후에 분대장이 되어 중화기 중대에 배치를 받았습니다.
제대가 얼마남지 않았던 어느 날 부대전체(사단급 훈련)가 훈련중이었고, 저는 중대원15명을 인솔하여 작업장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월동작업을 나간 그 지역에서(사격장이기도 함) 다른 중대가 포사격 훈련을 했고,세발의 로켓트 포탄중 한발이 불발되었는데 그 중대는 제대로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은채(상급부대 폭발물 처리반에 보고만 한상태) 철수를 했고, 하필이면 근처를 지나다가 이를 발견한 저희 중대 고참병이 그 불발탄을 중대 복귀후에 중대본부에 반납하기 위하여 가지고 다니다가 부주의로 폭발하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사고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저는 무사했지만 중대원중 5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사고로 인솔책임자였던 저는 구속되었고, 사단 군사재판에서 지휘책임에 대한 유죄 판결로 집행유예선고를 받게되었습니다.
2개월이 조금 넘는 사단감방 생활중에 저는 헌병대에 비치되어 있던 성경을 읽게되었고 성경 신.구약을 주마간산격으로 독파하며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남한산성(군대형무소)에 가지않게 해 주시면 제대한 후에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하면서...
매일 아침 기상한후,정좌를 할때(일과중에는 양반 자세로 앉아야만 됨)옆에 와 계시는 주님의 환상을 보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재판을 받은 후에 자대로 원대복귀하여 남은 복무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제대를 할수 있었습니다.
5.제대후 새벽 기도중...
제대후 직장을 알아보고 있던 어느날 새벽!
일찍 잠이 깬 저는 집 근처에 있는 교회로 가게 되었고,
교회 뒷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던중에,
목사님이 서 계신 곳에서 주먹만한 불덩어리가 날아와서 저의 이마에 정통으로 때리는 순간,
저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한참 후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얼굴은 온통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있었고
저는 멍한 상태로 그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 후 시골에서 직장을 다니던 저는 신앙생활은 커녕 청춘을 탕진하는 무의미 한 생활의 연속이었고,
지인의 소개로 서울에 있는 무역회사에 근무를 하게되어 30대 후반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하던 그해 연말에,학수고대하던 아들이 태어났으나 큰기쁨은 곧 큰슬픔으로 바뀌었습니다.
선천성 심장기형으로 태어난 아기는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었고,
대학병원의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워낙 어린탓에 깨어나지 못하여,
태어난지 열흘 만에 하늘나라로 보내고 말았습니다.
몰염치 하게도 그동안의 나태한 신앙생활을 반성조차 하지 않은 채,
'아들을 살려달라'고 염치없이 하나님께 매달렸고 어느교회 부흥회에 참석하기도 하였습니다.
기도를 드리던중 '보자기에 쌓여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아기의 환상'을 보며 저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왜 저를 치시지 않고 아기를 데려 가십니까? "하면서...
6.동작동 국립현충원
저는 제대하기전 현충일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첫 참배를 하게 되었고,
30수년이 흐르는 동안 현충일에는 현충원에 있으려고 노력했고 지나간 현충일에도 다녀왔습니다.
먼저 간 동료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으로 남은 가족들과 하루를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이제는 부모님들은 많이 돌아가시고 동료들의 형제들이나 조카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7.건강 문제와 퇴직
결혼초에는 카톨릭 신자인 아내와 명동성당엘 나가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하지 못하는데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고,
어려운 일이 있을때만 하나님을 찾는 엉터리신자였습니다.
90년도 중반에 지인의 소개로 경기도 용인에 있는 골프장 경리부서 책임자로 근무하게 되었고,
부서의 특성상 잦은 대외적인 각종 접대로 인하여 10년이 채 못되는 근무기간 동안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선천성 고혈압 환자였던 저는 각 종 성인병은 다 얻었고 경영권분쟁의 회오리속에서 중풍으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입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업주의 작고로 인한 상속인들의 지분싸움이 시작되었고,
끝내는 '형제의 난'이라 불리는 10년여의 지루한 싸움이 되어 회사가 풍전등화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모시던 분이 중과부적으로 경영권을 상실했고,
그결과 저를 비롯한 많은 직원들이 해고를 당하고 회사를 떠나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 된 것입니다.
8.사주 공부와 선도회 가입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6~7년간을 각종 소송으로 시달리던중,
'운명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되어 사주명리학에 입문 하여,
이곳 저곳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답답한 마음은 여전히 풀 길이 없었고......
각종 참고 자료를 찾아 책방을 젖전하다가,
2011년 4월에 '삼수불이(삶과 수행은 둘이 아니네)' 라는 책을 만나게 되어 선도회에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그 해 8월 중순,
저는 제천에 있는 영하산방에서 열렸던 하계수련회에 1박2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의 새로운 경험은 아래와 같이 신선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8월15일이른 아침!영하산방 발코니에서
청연거사님이 손가락으로 보름달을 가리켰습니다.
영하산방에서 바라본 가은산에는 두개의 큰 바위가
여명에 번쩍이고 있었고 7월보름달이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앞계곡에서는 물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간간 닭 우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선을 말씀하시는 거사님의 의도를 헤아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초심자인 저는 그저 어리벙벙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작하는날은 사정상 불참하고 이튿날부터 수련회에 참여하게 되어
다른 도반님들의 환대를 받으며 바로 스케줄에 따르게 되었는데,
법사님께서 "척수성"화두를 참구하라고 하셔서 난생 처음으로 좌선,입실을 하며 한참 화두에 몰두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저에게는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이었습니다.
1박2일의 모든시간들이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뭐라고 표현할수없는 벅찬 감정에 휩싸이게 하였습니다.
빗속의 장어구이파티,온갖 약재가 가미된 법사님표닭요리,
추담,청연 두거사님의 카레솜씨!
용담폭포에서의 한잔의 커피,영하산방의무공해 복숭아맛은 두고두고 잊지못할
또 다른기쁨으로 가슴에 간직하고...
9.마무리
대부분의 50대 후반의 시골출신들이 그러하듯이,
저도 어린시절에는 전통적인 유교사상이 몸에 배인 권위적인 아버지,
할머니,어머니는 열심히 절에 다니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읜 중학생때 신앙에 눈 뜬 탓에,
짧지 않는 기간 교회에 다니기도 했지만 형편이 나쁠때만 매달리는 기복적인 신앙생활,
이기적인 삶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군대생활중 불의의 사고를 당한후에,
어려움을 벗어 나려고 했던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겼다는 죄의식과 늘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온 지난 날을 반성하고 남은 여생이나마 내 삶의 주인이 되어'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나날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하자고 굳게 다짐해 봅니다.
첫댓글
위에서 부터 몇 번째가
우리 금수산 영하산방 모임에 벽운 거사님 돌 일까요?^^
잘 읽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밑에서 세번째 가장 작은돌이 저일것 같습니다만...
아무거나 하겠습니다.ㅋㅋㅋ
ㅋㅋ 아~ 그러신가 봅니다!
위 아래로 중심 잘 잡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ㅋㅋㅋㅋ
하면, 여기서도 찾아 보시죠~!ㅋㅋㅋ
득로거사님
정말 자료가 선적이십니다.
득로거사님이 계시기에
영하산방이 무미건조하지 않습니다.
캐나다 밴쿠버에 스탠리 공원에 가면
자갈돌을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모습으로 쌓아놓고
사진 찍은 것 팔던데요. 벽운 거사님, 훌륭하십니다.
건강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과찬이십니다
벽운 거사님...잘 읽어보았습니다. ^^
성곡거사님!잘 지내시는지요?
이러다 얼굴 잊어먹을것 같습니다.
꾸밈없는 글
삶의 스토리 전개의 구성이 한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큰 광장에 모인 자음모음들이 수없이 모여 든 것 같아도
질서정연한 그 느낌
벽운거사님 잘 읽었습니다. _()_
좋게 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것이 법사님과 여러 도반님들 덕분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선객 한분 한분의 출현은
우주의 기운이라 생각 됩니다.
벽운거사님 글 속에
필연적인 禪氣가 듬뿍 담겼네요..
찡한 감동입니다.
대자님!
저 지금 하염없이 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