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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산책]
요한복음 18:1-14
1. 이 기도를 마치신 뒤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시고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셔서 거기에 있는 동산에 들어가셨다. 2. 예수와 제자들이 가끔 거기에 모이곤 했었기 때문에 예수를 잡아줄 유다도 그 곳을 잘 알고 있었다. 3. 그래서 유다는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보낸 경비병들과 함께 한 떼의 군인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무장을 갖추고 등불과 횃불을 들고 있었다.
4. 예수께서는 신상에 닥쳐올 일을 모두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5.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자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를 잡아줄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6. 예수께서 "내가 그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7. 예수께서 다시 "너희는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소." 하고 대답하였다. 8.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고 있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두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9. 예수께서는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10. 이때에 시몬 베드로가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11.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그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고난의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12. 그 때에 군인들과 그 사령관과 유다인의 경비병들이 예수를 붙잡아 결박하여 13.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 안나스는 그 해의 대사제 가야파의 장인이었다. 14. 가야파는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한 사람이 온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 하는 의견을 냈던 자이다.
[노자 30장] 도에 어긋나면 일찍 끝난다.
이도(以道)로 좌인주자(佐人主者)는 불이병강천하(不以兵强天下)하나니 기사호환(其事好還)이니라。사지소처(師之所處)에는 형극생언(荊棘生焉)하고 대군지후(大軍之後)에는 필유흉년(必有凶年)이니라。고(故)로 선자(善者)는 과이이(果而已)요, 불감위취강(不敢以取强)하느니라。과이물긍(果而勿矜)하고, 과이물벌(果而勿伐)하고, 과이물교(果而勿驕)하고, 과이부득이(果而不得已)하고, 과이물강(果而勿强)하느니라。물장즉노(物壯則老)하나니 시위부도(是謂不道)하거니와 부도(不道)면 조이(早已)니라。
좌(佐)/도울 좌, 권하다. 주(主)/주인 주, 임금 병(兵)/군사 병, 군대 호(好)/좋을 호, 마땅하다. 환(還)/돌아올 환 사(師)/스승 사, 군사 형(荊)/가시나무 형, 매 극(棘)/멧대추나무 극, 가시나무 과(果)/열매 과, 이루다, 해내다. 물(勿)/말 물, 말다, 아니다, 없다. 긍(矜)/불쌍히 여길 긍, 자랑하다. 벌(伐)/칠 벌, 공적, 뽐내다. 장(壯)/씩씩할 장, 성하다. 강장(强壯)/노쇠(老衰)
도(道)로서 임금을 돕는 자는 군대를 강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리게끔 하지 않으니 그 일은 마땅히 되갚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군사를 일으켰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생겨나고 큰 군대가 지나간 후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 그런 까닭에 그런고로 잘 보필하는 자는 목적을 겨우 이룰 만큼만 하지 감히 강함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 목적을 이루고 나서 자랑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고 뽐내지 않으며, 목적을 이루고 교만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되 마지못해서 하고, 목적을 이루되 강하게 굴지 않는다. 모든 사물은 장성한즉 늙게 되니 이를 일컬어 도에 어긋난다고 하거니와 도에 어긋나면 일찍 끝나게 된다.
중국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강태공(姜太公, ? - ?, 태공망, 본명 강상)이란 사람이 있다. 은(殷)나라 마지막왕인 폭군 주(紂)왕을 피하여 각처로 은둔생활을 하는 기간에 바늘도 없는 낚시대를 3년간이나 위수에 드리우고 어진 임금이 나타날 때를 기다린 사람이다. 강태공은 나이 72세 되던 해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만나게 된다. 이 운명적인 만남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있다.
문왕은 키가 훤칠하고 피부가 유난히 검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눈이 약간 근시였다. 이렇게 당당한 그의 외적인 풍채에는 어딘가 지식인의 우울한 기색이 감돌았다. 그에게 어느 날, 꿈속에서 천제가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나 영호진(令狐津)의 나루터에 있는데 천제의 뒤에는 수염과 눈썹이 하얀 노인이 서있었다. 천제는 문왕의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희창아 너에게 훌륭한 스승이자 보필해줄 만한 지혜로운 사람을 보내주겠노라, 그의 이름은 망(望)이니라"
참으로 기이한 꿈이었다. 이 위대한 현인이 자기의 나라 어디엔가 살고 있다고 들은 듯하였다. 그러나 자세히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희창은 시종들을 데리고 이곳저곳 사냥을 다니며 마음속으로 늘 갈구하였다. 어느 날 또 사냥을 가게 되어 태사 편(編)을 시켜서 점을 치게 하였다. 점괘를 보더니 편은 노래하듯 읖조렸다. 전우위양(田于渭陽) 장대득언(將大得焉) 비룡비리(飛龍非彲) 비호비웅(非虎非熊) 조득공후(兆得公侯) 천유여사(天遺汝師). 뜻을 풀면 이렇다. 위수가에 사냥을 나가면 풍성한 수확이 있을 것이라. 용도 아니고 이무기도 아니며, 호랑이도 아니고 곰도 아니라네. 어진 현인을 만나게 될 조짐이니 이는 하늘이 당신에게 내려 주신 훌륭한 스승이라.
문왕은 한없이 기뻐하며 편이 알려 준대로 대대적인 인마(人馬)를 거느리고 위수가로 사냥을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낚시를 하던 노인을 발견하고 한참을 근시인 눈으로 살핀 그는 꿈속에서 보여준 것과 똑같은 상황을 목도하였다. 점지된 현인임을 직감한 왕은 "선친이신 태공께서 자주 나타나 얼마있지 않아 반드시 성인이 나타날 것이며 그로 인하여 주나라가 흥성케 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성인이 아니신지요?" 이렇게 말하고는 그를 수레로 모셔서 칭하길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고 국사로 봉하였다.
강태공은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의 폭군 주(紂)왕을 쳐서 멸망시키고 통일 중국을 성취시키니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개국공신으로 산동성(山東省)에 봉군하고 나라 이름을 제(濟)나라라 하였다. 강태공은 1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저규주
“어떻게 하면 천하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 주(周) 문왕이 태공에게 물었다고 한다. 태공 답하길 “왕자(王者)의 나라는 일반 백성들이 부유합니다, 패자(霸者)의 나라는 관리들만 부유합니다, 겨우 존재하는 나라는 사대부만 부유합니다, 무도(無道)한 나라는 국고만 부유합니다 자고로 위가 새면 아래도 새는 법입니다 (王者之國,使人民富裕。霸者之國,使士人富裕。僅存之國,使大夫富裕。無道之國,國庫富裕,這叫做上溢而下漏).” 그의 말에 따라 행하니 주나라의 국력이 강력해졌다고 한다. 백성들을 위하는 왕도(王道)의 길을 걸음으로써 주나라는 당시의 대국 은나라를 패도(覇道) 정치를 잠재우고 새로운 태평성세를 이루게 된 것이다.
노자할아버지는 “이도(以道)로 좌인주자(佐人主者)는 불이병강천하(不以兵强天下)하나니 기사호환(其事好還)이라”고 일갈한다. 소위 군대로 천하를 움켜쥐려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다.
“도로서 임금을 돕는 자는 군대를 강하게 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리게끔 하지 않으니 그 일은 마땅히 되갚음을 당하기 때문이다. 군사를 일으켰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생겨나고 큰 군대가 지나간 후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 그런 까닭에 잘 보필하는 자는 겨우 목적을 이룰 만큼만 하지 감히 강함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로서 흥하는 자는 결국 칼로서 망하게 된다. 그것이 기사호완(其事好還)의 이치다. 한낱 은나라의 제후성이었던 서기가 주나라로 이름을 바꾸고 은나라에 대항한 것은 천하를 움켜쥐려는 욕심이었다기보다는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대신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당시 은(殷)나라 폭군 주(紂)왕은 달기라는 후궁의 치마폭에 싸여 주지육림을 헤매고 있어 백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진 신하들은 간신배들의 모략에 하나 둘씩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고 탐관오리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 자신들의 영화를 누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은나라의 막강한 군대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고 백성들의 원성을 짓누르는 수단이 될 뿐이었다. 주나라는 이런 백성들의 울분과 원성을 먹고 자라나게 되었고 천명(天命, 백성들의 뜻)에 따라 은나라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전쟁은 어떤 상황에 있어서도 결코 선한 것이 될 수 없다. 군사를 일으켰던 곳에는 언제나가시덤불과 엉겅퀴만 무성하다. 형극(荊棘)의 땅이 되는 것이다. 노자 할아버지는 군대가 지나간 자리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고 말한다. 생산 활동을 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젊은 남자들은 군인으로 징발되고 나이든 남자들도 보급품을 나르는 일꾼으로 끌려간다. 그래서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효과적인 생산을 할 수 없는 조건이 되어버린다. 더군다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그나마 있는 것들도 모두 공출된다. 후방은 전쟁터보다 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땅이 되고 만다.
이런 일들은 모두 도에서 어긋나 있는 것들이다. 도에 어긋나면 일찍 끝나는 법. 그래서 부도(不道)는 조이(早已)라 했다.
그러니 태평성세를 이루어 천하를 복되게 하는 정치가란 임금을 어떻게 보필해야 할까? 노자 할아버지는 과이이(果而已)요, 불감이취강(不敢以取强)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목적을 겨우 이룰 만큼만 하지 감히 강함을 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가가 쓸데없이 남의 나라를 침공하고 백성을 겁주는 일을 위해 군대를 강성하게 키울리는 없다. 군대란 남의 나라의 침공에 대비할 정도면 된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운명은 군대의 강약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군대와 군대를 움직이는 정치가들이 백성들에게 신뢰를 얻느냐 못 얻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은나라의 강성한 군대가 쓰러져가는 국가의 운명을 지탱해 주지 못한 것은 이미 백성들의 마음이 그들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패도(覇道)의 길은 언제나 왕도(王道)의 길을 이길 수 없다.
노자할아버지는 정치가들을 향해 다섯 가지의 처신을 당부한다. 태평성세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덕목들이다. 훌륭한 정치가들은 과이물긍(果而勿矜)하고, 과이물벌(果而勿伐)하고, 과이물교(果而勿驕)하고, 과이부득이(果而不得已)하고, 과이물강(果而勿强)해야 한단다. 목적을 이루고 나서 자랑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고 뽐내지 않으며, 목적을 이루고 교만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되 마지못해서 하고, 목적을 이루되 강하게 굴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뜻하지 않게 지갑 줍듯이 국회의원 뺏지를 단 사람들이 많다. 16대 국회가 썩었다고, 17대 국회는 보란 듯이 개혁국회의 사명을 다하겠다고 큰소리를 땅땅치며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던 국회의원들의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
개혁은 커녕 자신들이 비판했던 16회 국회보다 더 못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는가? 어느새 목은 뻣뻣이 굳어버려 선거 때 그리도 굽실 거렸던 기억마저 잃어버린 건 아닌지? 가는 곳마다 제 자랑 늘어놓고, 되지도 않는 치적을 뽐내고, 사람들을 우습게보며, 억지 부리고, 스스로 강해져 백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된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아볼 일이다. 나라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은 백성들의 뜻을 저버린 정치가 난무할 때란 사실도 잊지 말기를....
[칼로 망함]
지금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흔히 디데이라고 불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일(6월 6일) 50돌을 앞두고 온통 축제분위기에 젖어 있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TV마다 당시의 기록필름들을 다시 돌리고 신문잡지에서는 그 작전에 참여했던 퇴역군인들의 회고담 등 특집물들을 싣고 있답니다. 중고생들의 답사가 줄을 잇고, 갖가지 기념행사가 기획되고, 각국의 참전자와 정치가들이 속속 몰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의 운명을 가름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독일제국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사상최대의 야심찬 작전이었으며 당시 그 작전을 지휘하였던 아이젠하워에게는 개인적으로 영광의 대로를 열어준(미 대통령 3선) 다시없는 기회였던 것입니다. 이 작전에 연합군은 40개 사단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7천여척의 전함에 태워 프랑스에 상륙시켰으며 그후 6월 16일까지 61만 9천명의 병력과 9만 5천대의 전차, 21만 8천 톤의 장비를 프랑스해안에 상륙시킴으로 유럽복구의 결정적 발판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당시 연합군은 미국, 영국, 카나다군이 주축을 이뤘는데 그로부터 50년이 지난지금 당시의 영광을 되새길 수 있는 나라는 단지 미국만 남았을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미국만이 당시 승전국으로서의 영광과 권위를 자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위는 패전국 독일보다도 훨씬 뒤떨어져있고 유럽동부와 아시아 전선에서 승리자였던 소련은 그 당시의 국가체제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태평양전쟁의 패전국인 일본은 지금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 되어 호시탐탐 그때의 영광을 제현하려는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에 있어서 정의와 관련한 문제로서 전쟁에 대한 3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1)전쟁이 불가피한 어떠한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정의의 한 행위가 될 수는 없다(부정의 전쟁론). 2)초국적인 공정한 제도는 없기에 전쟁은 궁극적인 법률행사일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무력으로라도 법을 지키는 것이 시민의 의무임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정당 전쟁론). 3) 모든 군사행동은 거부되어야 하며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증거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이다(절대 평화론). 대체로 위의 3가지 견해는 1950년 WCC 암스텔담 회의에서 확인된 것인데 아직까지도 통일을 보지 못한 채 공존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출현이래로 어느 한시대도 전쟁이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라 해도 좋을 만큼 어떤 의미에서 전쟁은 당대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해결하려는 인류의 또 다른 노력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전쟁은 정의의 이름으로 수행되지만 전쟁의 대부분은 순리적인 모순의 해결을 외면한 인간의 욕심에 기인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현실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첫번째 입장을 주장하고 기득권자들은 두번째 입장을 말하지만 저는 모든 군사행동을 거부하는 입장이 가장 기독교적이고 민중적이라고 봅니다.
어제 밤늦게 TV에서 특집방송으로 아우슈비츠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 그 내용은 전쟁이라는 기회를 악용하여 히틀러가 어떻게 유대인 말살을 획책하고 실행하는지 그 과정을 소상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필름자료들이 생생하게 나치의 그 잔혹함을 증언하고 있었습니다. 전쟁말기에 가서는 더욱 광적으로 유대인 말살에 열을 올리는데 나치 내부에서 조차 전쟁수행이 우선인지 유대인 박멸이 우선인지 토론해야 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전쟁기간 중 평균 매일 1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해 되었고 보다 효과적인 살해 방법이 고안되었는데 그것의 결정판이 아우슈비츠에 건설된 시체 처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밤 2부가 방영된다하니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이 끝난 뒤(새벽 한시 반에 끝남)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너무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악할 수 가 있었나 하는 회의와 함께 모든 전쟁은 어떠한 경우라도 거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역사가 매우 혼란했던 시대에,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 땅의 운동권 젊은이들 중 무력투쟁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저도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절대 평화론 만이 인류를 전쟁의 공포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절대 절명의 순간에 처한 예수와 그를 보호하려는 제자의 무모한 행동을 본문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예수를 배반한 제자 가리옷 사람 유다가 적대자들의 군대를 데리고 예수를 체포하기 위해 겟세마네로 들이 닥칩니다. 유다의 입맞춤을 신호로 군사들이 예수를 체포하였고 다급해진 제자하나가 검을 꺼내 대제사장의 군사 한사람의 귀를 베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 제자를 꾸짖으시면서 말합니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꽃으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우시게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마태 26:52-53)' 그러면서 자신이 그렇게 끌려가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강조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부정의 전쟁론, 혹은 정당전쟁론의 입장에 서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절대평화론의 입장에 서신게 아닌가 합니다. 유다의 입장을 헤아리는 신학자들 중 유다의 입장을 1)예수님을 자극해서 정당전쟁의 전선으로 복귀시키려는 의도 2)예수의 행태가 젤롯당의 입장과 어긋나 독립전쟁에 짐만 되니 예수를 죽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분노를 촉발시키자는 의도 등으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말고라고 알려진 제사장 시종의 귀를 자른 베드로의 입장을 정당 전쟁론의 한 형태로 우리는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불가피한 경우 정의를 위해서라면 칼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전쟁을 통해서 새 하늘 새 땅은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수 없이 많은 전쟁이 여러 명분으로 자행되어 왔지만 언제 한번 하나님나라가 이루어 진적 있습니까? 그 야말로 대의는 명분이고 실제로는 욕심 채우기가 전쟁의 내용 아니었습니까?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은 바꿔 말하면 칼로 인류가 구원받고 해방되지 못한다는 준엄한 선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세상을 뒤엎을 힘이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힘 있어도 절대 힘자랑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목적달성을 위해 무력사용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아무리 올바르고 좋은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노자 도덕경 30장에 보면 당시 온천하가 부국강병에 몰두하는 것을 비판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도로써 임금을 돕는 자는 군대를 강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반드시 되갚음을 받기 때문이다. 군사를 일으켰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솟아나고 큰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師之所處엔 荊棘生焉이요 大軍之後에 必有凶年이라].' 이쪽에서 군대를 강하게 하여 쓸어 넘기면 저쪽은 더 강하게 해가지고 넘어오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농사지을 사람이 없으니 가시밭이 생기고 흉년도 들꺼고요. '모든 사물은 강장해지면 노쇠해지니 도에 어긋나고 도에 어긋나면 일찍 끝난다[物壯즉老하나니 是謂不道하거니와 不道는 早已니라].' 군대를 강하게 해서 누구를 침략하려 한다면 그것은 도에 어긋난 것이고 또 일찍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독일과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지만 결국은 일찍 망하지 않았습니까? 태평양 전쟁 때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습격했을 때 미국은 무방비 상태였지만 곧 군사력을 길러 일본을 굴복시켰습니다. 노자는 군사를 일으킬 때는 부득이할 경우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목적을 이루되 마지못해 하라[果而不得已)] 것이죠.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목적으로 일으켰던 그 막강한 일본의 군대가 방어를 목적으로 한 미국군대에게 졌단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전후 미국은 계속 군수산업을 발달시키면서 부국강병을 맹렬히 추구합니다. 50년대 중반에 후루시쵸프가 평화공존을 제의하자 케네디가 이에 호응하여 바야흐로 냉전체제의 종식이 기대되던 찰나에 케네디는 암살되고 맙니다. 그것이 미 군산복합체와 주전론자들의 소행이 뻔한데도 미국의 정치가 그것을 밝히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뒤를 이은 존슨 정권은 베트남 통킹만에서 전쟁을 도발하였지만 엄청난 인명피해와 물자의 낭비에도 불구하고 패배하고 맙니다. 패배한 전쟁 뒤에는 미국안의 반전운동도 한몫을 했습니다.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을 수 없었던 미국이 이들의 반대운동에서 전쟁을 포기할 명분을 찾았다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각성한 민중의 힘이 커져나감으로써 전쟁은 억제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권세를 모두 없이할 힘을 가지고 계셨지만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왜일까요. 힘으로 흥하는 자는 힘으로 망하기에 질적으로 다른 세계,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고 자유와 봉사의 권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을 버리고 희생하는 사랑의 실천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전쟁에 이겼다고 환호성을 지르고 축제를 벌이는 그런 태도와 방식으로는 절대 새 하늘 새 땅이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방어하는 전쟁에 승리했을 때 자기 식구가 죽었을 때처럼 상대편을 애도할 수 있어야 비로소 새 지평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지구 한쪽에는 전쟁과 그로인한 끔찍한 살육과 파괴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남북 예멘이 분리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 권력자들의 다툼에서 비롯된 비극적인 전쟁입니다. 마치 우리의 6.25전쟁을 보는 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아프리카의 르완다에서는 16년째 내전이 계속되고 있으며 최근 한 달 새 20여만 명이 무차별 살육되는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요즘 한반도에는 핵 위기의 악령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선택의 폭은 자꾸만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적 위기 정치적 불안까지 겹친 북한으로써는 서방과 협상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인 핵문제를 놓칠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난국을 타개할 만한 보장 없이 핵문제는 해결될 수 없고 한, 미, 일, 러시아까지 가세해서 일방적 펀치를 날리는 것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만 고조시킬 따름입니다. 어느 때보다도 전쟁의 위기가 높아진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어떤 이유, 어떤 경우라도 전쟁은 절대 안 되며, 전쟁으로는 모순이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에 어긋나는 것이요, 멸망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동족을 공격하기 위해 자꾸만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우리의 미래를 우려해야 하고 그 길이 도에서 벗어난 것임을 깨우쳐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의 길은 주님처럼 자신을 내어주는 데 있음을 가르쳐 전쟁이 아닌 화해와 양보의 길을 가도록 우리 모두 기도하고 작은 실천이라도 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